【교회와신앙】박무종 / 편집부국장
아무것도 없는 흰 캔버스에 하나하나, 한번 두번 붓칠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 그림이다. 물론 물감이나 먹을 붓거나 뿌리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백지상태에서 더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림은 하나하나 더하면서 완성한다. 그래서 그림은 덧셈이다.
반면 사진은 뺄셈이다. 카메라 앞에 펼쳐진 광경은 온갖 것들로 가득하다. 그 모든 것들을 다 담는다면 아무것도 담지 못한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진가는 그 많은 것들 중에 담고 싶은 것만 담는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담고 싶은 것만 담는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뎃셈과 뺄셈의 차이다.
유치원 아이들이 그린 그림에는 온갖 색이 들어있다. 빨강 노랑 파랑 삼원색은 물론 주황 분홍 연두 보라 검정... 그래서 아이들 그림 대부분은 ‘무당집’(?)이 된다. 아이들만 그런가? 엘리베이터나 현관문에 붙여놓은 광고지에는 수십 개 가게의 음식점 이름과 메뉴 그리고 전화번호가 있다. 색깔은 대부분 원색이다. 빨강 노랑 파랑... 저마다 자기 가게 이름을 눈에 띄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저마다 원색이니 정작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럴 땐 차라리 무채색을 쓰면 주목은 받을 수 있을 텐데.
피카소나 몬드리안처럼 원색을 사용하는 화가도 있지만, 화가들 대부분은 즐겨 쓰는 색이 있다. 렘브란트의 그림엔 짙은 갈색이 주를 이룬다. 갈색 계열의 미묘한 차이를 통해 명작을 만든다. 화면 전체를 어두운 갈색으로 하고 일부분만 강렬한 빛이 비치게 함으로써 강조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렘브란트만 그렇겠나. 화가들의 그림은 색의 통일성이 있다. 색깔만 그런가? 화폭에 담는 것도 다 담지 않는다. 다 담을 수 없다. 그려야 할 것만 그리고, 표현하고 싶은 것만 표현한다.
인간은 탐욕 속성이 있고 속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런 속성을 곳곳에 남겨 놓았다. 대표적인 몇 곳만 찾아보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2)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 16:17~20)
율법서가 기록한 대표적인 탐욕들, 영적 탐욕・성적 탐욕・물질적 탐욕이다. 탐욕은 신약에서도 이어진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1~4)
성경은 여전히 진행형인 우리들의 욕심과 탐욕을 경고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런 우리에게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사람, 그가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다.
놀랍게도 동양화는 여백의 미가 있다.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꽉 찬 채움’이다. 그 채움에 작가의 생각과 사상이 숨어 있다. 감상하는 이는 자기 생각과 사상으로 여백을 채우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숨은 것을 찾아낸다. 오직 여백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사진은 뺄셈이다. 수백 수천 장을 찍었다고 다 가질 수는 없다. 가져서도 안 된다. 버릴 것은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 많이 버릴수록 좋은 사진이 남을 확률이 높다. 남은 것도 때로는 크로핑(cropping)한다. 크로핑이란 자기가 원하는 프레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 곧 가장자리는 잘라내는 것을 말한다. 크로핑에 따라 사진의 느낌이 달라지고 메시지까지 바뀌기도 한다. 가로로 자르기도 하고 세로로 자르기도 한다. 때로는 가로와 세로 모두 자른다. 어떻게 자르느냐에 따라 사진의 느낌이 달라진다. 안정감이나 긴장감을 강조할 수도 있고 광활함이나 폐쇄성을 보여줄 수도 있다. 잘라냄으로써 비례와 균형과 조화를 살릴 수도 있고 심지어 조작도 가능하다.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이 들수록 버리기 힘들다. 자꾸 쌓아놓는다. 나도 그 부류에 속하는 편이다. 언젠가는 입겠지, 언젠가는 보겠지, 언젠가는 쓰겠지 하며... 옷장을 정리할 때 1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 우리들이다. 정리의 달인들이 하는 정리의 기본은 ‘버리기’라고 한다.
설교자는 공감한다. 설교를 준비할 때 짧은 원고 늘이기는 쉽다. 조금만 내용을 더하거나 살을 붙이면 된다. 문제는 긴 원고 줄이기다. 생각보다 어렵다. 아까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버리라고 배웠지만, 배운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설교 줄이기다. 아깝기 때문이다. 이 문장 이 내용은 꼭 이 설교에서 하고 싶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버린다는 것, 정말 어렵다.
대부분의 목회자가 책 욕심이 많듯이 나도 그랬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라떼’는 신학교 정문 앞에 ‘책 장사’들이 상주하다시피 했다. 주석을 비롯한 전집류들, 빠듯한 생활비에 일시불로 사기란 언감생심이다. 다달이 일정액을 지불하는 계약서를 쓰고는, 교육전도사 사례를 받은 다음 주에 월부 책값을 지불하는 것이 신학생 대부분의 현실이었다. 선배는 가지고 있다는데, 동기는 구매했다는 데 나만 빠질 수 있나 하면서 샀던 전집류들이 수두룩하다.
2023년 말로 교회 목회를 마치고 작년 봄부터 인터넷 신문사 기자가 되었다. 교회 사택에서 이사해야 했다. 누구나 그렇듯 목회할 때는 목양실에도 책장이 있었고 사택에도 책장이 있었다. 하필 그 몇 년 전부터 교회가 있던 곳이 재개발 지역에 포함되면서, 예배당을 허물고 새 예배당이 들어설 때까지 임시예배당으로 옮겨야 했다. 전체 공간이 절대적으로 좁아졌다. 물론 목양실도 절반 이상 좁아졌다. 목양실에서 덜 중요한(?) 책들로 결정된 것들은 박스에 담아 원로장로님의 농장에 있는 축사로 옮겼다. 1년이나 길어도 2년이면 되겠거니 했는데 예상보다 긴 4년여를 임시예배당에서 지내다, 예배당 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에 목회를 마무리했다.
당연히 목양실 책장도 비워야 했다. 정리하면서 챙길 책들은 박스에 넣고 나머지는 우선순위를 정했다. 가까운 목사들이 1순위, 신학교 제자들이 2순위, 교회 안에서 책을 좋아하는 교인들이 3순위가 됐다. 얼마 후 책들은 새 주인을 찾아 길을 떠났다. 이제 축사에 쌓여있을 책들 차례다. 후배 목사 둘과 함께 박스를 정리하기로 했다. 뽀얗게 먼지 쌓인 박스를 하나씩 열었다. 여름과 겨울의 우기 건기를 4번이나 겪은 책들 치고는 괜찮은 상태였다. 다행이다. 그 동안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문제는 버릴 책과 챙길 책을 결정하는 일이다. 이미 이사하게 될 집의 평수가 결정되었고 서재 크기도 나와 있다. 사택의 책들도 있으니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다 챙기기는 절대 불가능하다. 버릴까 말까 고민하면서 차마 버릴 수 없는 책들만 챙겨야 했다. 3박스 반만 챙겨야 했다. 나머지 100여 박스는 쓰레기와 함께 미리 연락해 둔 2.5톤 트럭에 실었다. 얼마를 주겠느냐 하니 그러면 안 가지고 가겠단다. 세상에! 지식이, 전공 서적이, 그것도 신학 서적이 폐지 취급도 못 받다니!! 떠나는 트럭의 뒷모습이 어찌 그리 야속하던지...
그날 밤 피곤했던지 평소보다 빠른 9시쯤 잠이 들었다. 생각지도 않게 밤중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살짝 넘었다. 좀처럼 그런 일이 없었는데 이상하다. 몸은 피곤해서 잠들었는데 마음은 아파서 잘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밥을 굶다시피 사 모은 책들이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어떻게 사 모은 책들인데, 무게로도 쳐주지 않고 쓰레기로 취급당하다니... 아파도 너무 아팠던 모양이다.
은퇴하는 목사는 대부분 이런 과정을 겪을 게다. 무엇을 버릴까? 욕심, 탐욕, 이기심, 시기, 질투, 미움, 다툼, 거짓, 왜곡, 중상모략, 음모, 협작, 협박, 비난... 버릴 것이 이다지도 많은데 잘 못 버린다. 버렸다가 다시 건져 올리기도 한다. 어제까지 버렸는데 오늘 다시 집어 든다. 아니 오늘까지는 버렸는데 내일 다시 집어 들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구약 성경에 있는 말씀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하나님은 버리시는 분이다. 우리를 버리는 분이 아니라 회개한 우리 죄를 버리는 분이다. 버리되 발로 밟고 깊은 바다에 던져버리는데, 버린 것을 다시 집어 드시는 분이 아니다. 용서한 것은 깨끗하게 잊어버리는 분이다. 잊어주시는 분, 잊어버리기로 작정하신 분이다. 우리 죄를 버려주시는 분, 우리 허물을 덮어주시는 분, 그래서 하나님의 버리기는 우리에게 은혜다.
그렇다. 사진은 뺄셈의 예술이다. 필요한 것만 담는다. 더 담고 싶어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도 잘 못 버린다. 공수래공수거라 했거늘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가지고 가려나? 사진은 뺄셈이다. 할 수 있으면 적게 담아야 좋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화면은 깔끔한 것이 좋다. 만약 화가가 이곳을 그린다면 이 부분을 그려 넣을까 말까만 생각해도 괜찮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래도 다 담고 싶을 땐 이렇게 생각하자. 한 장만 찍고 그만두지 않을 거잖아. 한 컷에 다 담지 말고 나누어 담으면 되잖아.
며칠 전 TV 채널을 돌리니 <말죽거리 잔혹사>란 영화가 방영 중이다. 오래전 보았지만 한 번 더 보기로 한다. 현수가 전학한 학교에 적응하느라 ‘일진’ 빌런들과 자꾸 부딪힌다. 쪽수부터 밀리는 현수, 늘어나는 억울함에 쌓여가는 분노를 누르면서 와신상담 주먹과 발차기 실력을 키운다. 현수 역을 맡은 권상우 씨가 몸만들기, 특히 이소룡의 절권도 쌍절봉을 연마하는 장면은 영화의 압권이다. 당시 영화를 본 남학생들 상당수가 쌍절봉을 사서 연습할 정도였으니까. 드디어 결전의 날이 오고 학교 일진들을 옥상으로 부른다. 결과는? 갈고 닦은 쌍절봉으로 여덟 명을 ‘개박살’ 내버린다.
카메라는 대형 사고를 치고 피투성이가 된 채 운동장을 걸어 나오는 현수를 비춘다. 그의 뒷배경으로 본관 건물과 맨 위에 유신 정부가 정해놓았을 표어가 보인다. “유 신 교 육 의 심 화”.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큰 글씨로 한 글자 한 글자 떨어진 채 붙어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때는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보인다. 화면 프레임이 묘하다. 아니 절묘하다. 유신교육의 심화란 글자가 보이다가 프레임이 이동하면서 마지막 한 글자, ‘화’자가 화면에서 사라진다. 그러니까 보이는 것은 ‘유 신 교 육 의 심’까지다. 분명 유하 감독의 의중이 담겼으리라.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 한국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며, 유신만이 살길이라 주장하고 가르쳤지만, 우리는 바로 그게 ‘의심’된다! 그런 메시지가 아닐까? 궁금해서 ‘말죽거리...’를 검색창에 입력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게 크로핑의 힘, 잘라내기의 힘이다.
사진은 뺄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