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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신앙】박무종 편집부국장 

손흥민 선수는 골을 넣고 손으로 카메라 포즈를 하는 일명 ‘찰칵’ 셀러브레이션을 한다. 그 순간을 기억하고 담고 싶다는 이유일 터이다. 정우영 선수 역시 골을 넣은 후 손목시계를 찬 듯 왼쪽 손목을 주시한다. 역시 그 순간을 간직하고 싶다는 뜻이리라. 두 선수뿐일까. 누구나 오래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사진은 시간이다.

고대인들은 해와 달이 뜨고 지며, 계절이 반복되는 주기적인 천체의 운동을 관찰함으로써 시간을 발견했다. 시간을 우주와 관련지은 것은 과학자들이다. 뉴턴은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을 믿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절대 시간 개념은 무너졌다. 스티븐 호킹은 <시간의 역사>에서 “오늘날 시간과 공간은 동역학적인 양(量)으로 간주 된다. 각각의 개별입자나 행성들은 그것이 움직이는 위치나 방법에 따라 각기 고유한 시간척도를 갖는다”고 했다. 이제 시간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말이다.

자취방에 책이라곤 교과서와 참고서가 전부이다시피 했다. 다행이랄까? 본가의 선반에는 <삼국지>, <죄와 벌>, <돈키호테> 같은 책들도 있었다. 그 중에는 우리나라 책들도 있었는데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박계형 님이 쓴 장편소설도 꽂혀있었다. 윤희와 성호의 만남이 사랑으로 이어지고, 결혼과 자녀 출생에 따른 행복이 가득하다. 시샘하듯 찾아온 자궁암, 윤희가 투병하며 지나온 길을 회상하는 자전적 이야기로 소설은 전개된다. 죽음을 두 달 앞둔 바닷가 별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서른두 살 아내와 떠나보내야 하는 남편의 슬프디슬픈 사랑 이야기이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사춘기였던 소년은 한참이나 가슴 아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윤희와 성호에게 '머무르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듯 우리 모두 그런 순간들이 있다.

헬라어로 시간을 뜻하는 단어는 크로노스(Κρόνος) 카이로스(Καιρός)이다. 크로노스는 일반적 시간, 산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누구나 맞이하고 보내는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특별한 시간이다. 그(녀)를 만난 바로 그 시간, 춘향과 몽룡과 만났던 광한루의 바로 그 시간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뜨겁게 만난 얍복 강변 야곱의 그날 밤 그 시간,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소릴 듣고 쓰러졌던 다메섹 근처에서의 바울이 겪었던 그날 그 시간은 모두 특별한 시간이다. 결정적 시간이다. 우리는 크로노스 속에서 카이로스를 만난다.

사진은 크로노스이기도 하고 카이로스이기도 하다. 언제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있고 그 시간이라야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있다. ‘노란 띠’는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아마추어는 언제나 찍을 수 있는 사진,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찍는다. 그야말로 ‘나 여기 다녀왔다’면 그만인 크로노스 사진이다. 우리들 스마트폰에는 이런 사진들로 가득하다. 카톡으로 주고받는 사진 대부분은 크로노스 사진이다.

프로는 그럴 수 없다. 때를 기다리는 사진, 몇 날 며칠이고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진이다. 그래서 making이 있고 waiting이 있다. making 사진은 사진일 수는 있어도 작품은 아니다. waiting 사진은 크로노스 속에서 카이로스를 기다리며 찍는 작품이다. 몇 번을 찾아가도 쉽지 않다. 내가 만나야 할 때를 기다린다. 날씨만 따진다 해도 맑은 순간을 기다리고 또 흐린 순간을 기다린다. 안개 낀 순간을 기다리고 ‘빛 내림’이 있는 순간을 기다린다. 며칠 만에 그 순간을 만날 수도 있고 몇 달 만에, 아니 몇 년 만에 만날 수도 있다. 어쩌면 평생 그런 카이로스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기다린다. 그때를 기다린다. 카이로스를 기다린다. 그게 사진이다.

인물 사진 특히 초상화 사진은 어떨까? 사진 한 장으로 그(녀)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다면 최고이다. 그(녀)의 기질, 그(녀)의 ‘그(녀)다움’을 숨김없이 남김없이 담아내는 사진, 자연스러우면서도 깊이가 있고 내면까지도 담아낼 수 있는 사진 말이다. 유서프 카쉬(Yousuf Karsh)는 20세기 초상화 사진의 전설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유명 정치인들, 사회운동가, 학자, 작가, 연예인과 운동선수까지 그의 렌즈 앞에 앉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중에 널리 알려진 윈스턴 처칠을 촬영할 때이다. 아무리 바라고 요구했지만 처칠은 카쉬가 담으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도무지 방법이 없다. 처칠이 물고 있던 시가를 잽싸게 낚아챌 수밖에. 예상대로 처칠은 불같이 화를 냈고 그 순간을 놓칠 카쉬가 아니었다. 사진은 시간이다.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1874 ~ 1965)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1874 ~ 1965)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 1908~2004)은 사진에서 시간을 말할 때면 절대 빠질 수 없는 사진작가다. 이제 막 물웅덩이를 뛰어넘고 있는 한 남자를 포착한 <생 라자르 역 뒤에서>는 찰나의 순간(결정적 순간, The Decisive Moment)을 보여주는 사진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공중에 떠 있는 남자와 물에 비친 그의 그림자는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그런 그의 모습과 일치하는 배경 속 담벼락에 붙은 포스터 속 댄서들의 동작을 포착했다. 어떻게 포착할 수 있었을까. 브레송은 비가 온 다음 날이면 물웅덩이를 건너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 곧바로 물웅덩이가 있는 생 라자르 역 뒤로 갔다. 꼬박 하루 동안 사람이 지나칠 때마다 셔터를 누르며 찍고 또 찍었다. 자신이 원하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브레송이 한 말이다. “생각은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니라 찍기 전이나 후에 해야 한다.”, “나에게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포착하는 세심한 눈으로부터 오는 자발적인 충동이다.”

'생 라자르 역 뒤에서' (1932)
'생 라자르 역 뒤에서' (1932)

레츠(Retz) 추기경의 회고록에 나오는 말도 있다. “이 세상에 결정적 순간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정적 순간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난한 기다림과 끈기로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가진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리라.

몇 년 전 입춘 때였다. 교수들의 새 학기 준비 모임이 있은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녀 생각이 났다. 혹시나 하여 공원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몇 컷을 담았다. 입춘에 만난 그녀들이라니. 반가움에 지인들에게도 보냈다. ‘따뜻한 남쪽 나라’란 제목을 달아주고서. 봄소식 대신 이런 문자가 찾아왔다.

“헐~~ 절기는 태클을 걸 수가 없구만. 남쪽에 살고 싶네”

“아직 겨울인 것 같은데~ ㅎㅎㅎ”

“자연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숨길 수가 없네요~˄˄”

다음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두툼하게 입고는 카메라에 접사렌즈를 장착하고 다시 찾았다.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는 그녀들, 렌즈로 다가가기 전 코를 들이민다. 아, 그윽하다. 은은하다. 고고하다. 그래, 이게 매화 향이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영상으로 표현할 때는 음소거를 하고 슬로우모션을 보여준다. 청중이나 관람객을 초집중하게 하려는 기법이다. 성경에도 이런 장면이 있다. 대표적으로 창세기 22장, 모리아 땅 아브라함의 이삭 헌제(獻祭) 장면을 꼽겠다. 같이 확인해 보자.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9~12)

아브라함의 동작에 집중해 보자. ‘이른지라’, ‘쌓고’, ‘벌여놓고’, ‘결박하여’, ‘놓고’, ‘내밀어', '잡고’, ‘잡으려 하니...’ 완전 슬로우모션이다. 초고속 촬영에 초저속 상영이다. 복잡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죽여야 하지만 죽일 수 없고, 죽일 수 없지만 죽여야 하는 아브라함이다. 그래서 뜸을 들인다. 마치 ‘침대 축구’하듯이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다. 갈망하며 무언가를 기다린다. 모든 동작 중에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라는 동작이 아무리 보아도 가장 느리다. 라르고(largo)도 아닌 라르기시모(Larghissimo, 아주아주 느리게)이다. 아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이다. 창세기 저자도 아브라함의 심정을 꿰뚫고 있었을 게다. 아니 그걸 독자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그래서 나는 이 단락이 너무너무 좋다.

'이삭의 희생'(1603, 104X135cm), 카라바조(Caravaggio, 1573-1610)
'이삭의 희생'(1603, 104X135cm), 카라바조(Caravaggio, 1573-1610)

아브라함의 동작이 그토록 많은 데 비해 하나님의 동작은 하나도 없다. 아브라함은 주저하고 주저하면서도, 망설이고 망설이면서도 끝내 순종한다.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을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창 22:2)보다 당신이 우선순위임을 확인하신 순간! 지체 없이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도 아닌 프레스티시모(Prestissimo, 아주 아주 빠르게)이다. 0.1초라도 지체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초긴박함으로 부르신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외마디 소리는 수식어가 없다. “엄마야!”다. “우리 엄마야!”도 아닌, 그냥 “엄마야!”다. ‘우리’란 말을 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는 순간의 하나님이 그러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부르신 것은 혹시라도 한 번만 부르면 음성을 못 듣고 죽일까 봐 그랬다 하지 않는가. 믿거나 말거나.

‘여호와 이레’(יְהוָה יִרְאֶה),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다. 아브라함이 드려야 할 제물을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레’의 히브리어 기본형은 ‘야레’, ‘보다’란 뜻이다.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는 뜻보다는 여호와께서 ‘지켜보셨다’는 뜻이 더 적절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삶을 지켜보셨다. 언제부터?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래서《새한글성경》은 이렇게 번역했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지어 불렀다. ‘여호와의 산에서 보이실 거야’라고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말한다.”(창 22:14)

우리를 주목하고 주시하시는 하나님. 순간순간 끊임없이 지켜보신다. 그분은 순간을 포착하신다.

사진은 시간이다. 순간을 포착한다. 셔터를 누르는 바로 그 순간, 누를 때 걸리는 시간이 0.1초라면 그것까지 계산하며 누른다. 날아가는 새나 스포츠 경기 장면같이 빠르게 움직이는 피사체를 추적 촬영하는 데는 1초에 여러 장 찍을 수 있는 연사(連寫) 기능을 활용하면 된다. 디카는 연사 기능이 있어 1초에 몇 장도 찍을 수 있다. 이를테면 내게 있는 Nikon D4는 최대 11장인데, 2020년에 출시된 D6는 14장까지도 가능하다. 그중 가장 적확한 순간을 담은 장면을 선택할 폭이 넓어졌다.

반면 장노출 사진은 삼각대에 카메라를 장착하고 찍어야 한다. 카메라를 삼각대에 장착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과 적절한 조리개 개방 시간이 야간 촬영의 기본이다. 밤하늘의 별을 찍으려면 몇 시간이나 조리개를 개방한다. 밤중에 달리는 자동차 불빛의 궤적을 찍을 때도 몇 초에서 몇 분을 개방한다. 매년 부산 광안대교 일대에서 펼쳐지는 불꽃축제가 있다. 몇 년 전 지인의 안내로 가장 잘 보이는 건물 옥상에 미리 자리를 잡고 세팅했다. 불꽃이 위로 치솟는다. 저 하늘에서 화려한 춤을 추며 아래로 쏟아진다. 조리개 개방 시간 조절은 유선 셔터 릴리스를 잡은 엄지손가락이 맡는다. 개방 시간에 따라 불꽃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담긴다. 사진은 시간이다.

야경 촬영지로 경주 안압지를 빼놓을 수 없다. 입수구(入水口)의 형태와 기능의 기발함은 논외로 하자. 사실은 안압지가 아니라 ‘동궁과 월지’이다. 월지(月池)는 신라 문무왕 때 임해전 앞에 만든 연못이고 동궁(東宮)은 신라 태자의 별궁이다. 태자는 정궁(법궁)의 동쪽 궁궐에서 살았기에 동궁이고, 태자를 동궁마마라고 하는 이유도 동궁에 살기 때문이다. 935년 신라가 무너지자 월성(月城)은 궁궐 기능을 상실했다. 경주는 고려왕조의 지방 도시로 전락하고 행정의 중심은 월성에서 동북 2km 정도 떨어진 읍성으로 이동했다.

실제 조선조 성종 때에 만든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나 17세기 경주 지역 지리서인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안압지(雁鴨池)라고 적혀 있다. 雁鴨池(기러기 雁, 오리 鴨, 연못 池),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연못이란 뜻이다. 674년 문무왕 때 신라 왕궁에 연못이 만들어졌다. 서쪽과 남쪽은 직선으로, 북쪽과 동쪽은 곡선이다.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다. 음양오행의 조화로도 볼 수 있다. 연못 안에는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을 생각하며 3개의 섬을 만들고, 월지의 동쪽과 북쪽에는 산봉우리도 12개나 만들었다. 신선이 산다는 중국 무산의 12봉우리를 본떴다고 한다. 나무와 꽃을 심었고 각종 새와 동물까지 길렀다. 하지만 신라가 무너진 후 폐허처럼 변한 연못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자, 이를 본 사람들이 안압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 안압지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토기 파편에서 ‘月池’를 확인했다. 정궁이 있던 반월성(半月城) 동쪽에 있는 연못이기도 하고, 밤이면 달이 비치기 때문이다. 마침내 동궁과 월지는 2011년 7월, 몇백 년 만에 자기 이름을 되찾았다.

사진=expedia.co.kr
사진=expedia.co.kr

요즘 이곳은 야경 명소가 되었다. 일몰이 시작되기 전이면 관광객들이 몰린다. 뷰 포인트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때를 기다리는 사진가들이 있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임해전의 지붕과 축대가 보이고 월지 수면 위에 있는 야간 조명이 켜진 상태, 여기저기서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지나면 조명 비친 곳만 보이고 임해전의 지붕 선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도 나 같은 노란 띠나 아마추어는 연신 셔터를 누르지만 사진가는 벌써 삼각대를 접었다. 촬영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사진은 시간이다.

하나님도 때를 기다리신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히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때가 차매’, ‘때가 찬 시점이 왔을 때’(새한글성경)이다. 왜 하필 그때였을까? 로마가 지중해 지역 패권을 차지하면서 닦아 놓은 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도로가 거미줄처럼 형성됐을 때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으로 유럽과 인도까지 막힘없이 다닐 수 있을 때이다. 헬라어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제국의 통용어가 되어 말이 통하고 글이 통하게 되었을 때이다. 영적 도덕적으로 혼란은 극에 달하고 로마의 압제로 메시아 대망 사상이 절정에 달했을 때이다. 바로 카이로스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그 길을 따라 헬라어로 복음을 전했고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했다.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라고. 

부활하신 예수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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