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신앙】 박무종 편집부국장
 

투우 그러면 투우장과 투우사 그리고 성난 소가 떠오른다. 특히 투우사의 손에 들린 붉은 천을 빼고는 투우를 생각할 수 없다. 동물 학대 문제가 대두되면서 스페인에서도 투우 보기는 어렵다. 왜 붉은 천일까? 흥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도 우리 인간처럼 붉은색을 보면 흥분할까? 동물과 인간은 색 감정이 같을까?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 소는 붉은색을 보지 못한다. 포유류 중에 인간처럼 색을 볼 줄 아는 것은 원숭이뿐이란다. 그럼 왜? 투우장에 나오기 전까지 소를 24시간 빛이 차단된 곳에 가두어 둔다. 경기가 시작되면 소는 밖으로 나온다.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밝은 곳에 나온 소는 흥분하기 마련, 군중들 소리까지 들리니 더 흥분할 수밖에 없다. 투우사가 흔드는 천을 적으로 여기고 달려드는 것이다. 붉은 깃발이든 푸른 깃발이든 상관이 없다. 그럼 굳이 붉은 천일까? 인간 때문이다.

색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떤 색보다 붉은색은 눈에 띄고 흥분하게 만들기 쉽다. 곤충의 상당 수가 자외선 색깔을 볼 수 있어 꽃을 잘 찾는다. 꽃들이 저마다 화려한 색을 드러내는 까닭도, 벌 나비들이 자기를 보고 날아들어 수정시켜 주어야 번식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니 놀랍다. 색은 곤충에게도 힘이 있다.

그렇더라도 색은 인간에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축구에서 심한 반칙을 하면 노란 카드로 경고한다. 아주 심한 반칙에는 레드카드로 아예 퇴장시킨다. 노란색은 경고, 빨간색은 퇴장을 상징한다. 그렇다고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요즘 우리나라 주유소는 색깔로 구분된다. 빨강, 노랑, 파랑, 그린. 왜 이런 원색을 쓸까? 달리는 차 안에서도 운전자가 쉽고도 빨리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회사마다 특정한 색을 쓰는 것은 잘 띄게도 하면서도, 자기 회사 브랜드를 색으로 알리려는 홍보 전략도 깔려 있다. 인간은 색의 영향을 받기에 색채심리·색채치료·색채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한다.

어두운색은 짧은 시간에도 길게 느끼게 한다. 카페나 레스토랑은 좀 어둡다. 아늑한 분위기도 연출하지만 고객이 너무 오래 앉아 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객이 적은 곳은 좀 어둡게, 많은 곳은 밝게 하면 좋다. 밝은 색, 특히 흰 공간에서는 쉽게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실이나 교실 벽은 흰색 계열이다. 가정집 벽지도 대부분 밝은색이다. 공장 내부의 색에 따라 사고율과 작업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산업 색채심리학의 기본이다. 색은 힘이 있다.

하나님이 어찌 그걸 모르시겠는가. 모세에게 성막 제작을 명하시면서 색깔을 언급하신다(출 25장).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 실로 만들라 하신다. 성막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히브리서가 잘 보여준다. 그래서 성막을 통해 예수님을 발견하고 만나며, 성막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성막의 휘장 색인 청색, 자색, 홍색 실을 설명하면서 청색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하고, 자색은 왕이신 예수님을 뜻하며, 홍색은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보여준다고 한다. 대학생 때 읽은 M.R. 디한의 <성막>이란 책에서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난해하던 성막을 이토록 은혜롭게 풀어주다니 감동 그 자체였다. 역시 하나님은 성막의 휘장 하나를 통해서도 이토록 놀라운 말씀을 주시는구나!

시간이 많이 지났다. 문제도 보인다. 신학의 영향이리라. 좀 지나친 상징 해석 같다. 이런 식의 해석이 은혜로울 수는 있으나, 신학적 근거가 확실한 지는 모르겠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거나 설교할 때 설교자는 할 수 있는 한 본문에서, 한 단락에서 많은 것을 캐내려는 경향이 있다. 과유불급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싶어 하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크기로 치면 성막은 당시 어떤 신전보다 작다. 이집트의 룩소르, 잉카제국과 마야문명의 신전을 보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구라트는 어떤가? 비교 불가이다. 성전은 규모보다 의미, 화려함보다 목적이다. 광야 시절, 출애굽기가 기록되던 시대는 천연염료만 있었다. 당시엔 청색 염료를 만드는 것이 가장 힘들고 귀하고 비쌌다. 그렇다면 청색 자색 홍색실로 짜라고 하신 이유가 뭘까? 하나님의 집을 가장 귀하고 최고의 것으로 만들라는 것은 아닐까. 규모보다 의미다.

모세에게 성막 건축을 명하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나?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이다. 성막의 핵심은 하나님의 처소이다. 당신이 택하신 백성과 함께 지내고 싶으시다는 것이다. 이걸 예수님이 확증해 주셨다. 성육신이고 임마누엘이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들 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단들이 여전히 그러고 있다. 하지만 천국은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셨다.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그럼 하나님이 가슴에 계실까? 심장에 계실까? 아니면 머리 안에 계실까? 이건 교회학교 아동부 아이들이 던지는 수준도 못 된다. 너희 안(in) 개념보다 가운데(among) 개념이다. 우리들 ‘관계성’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치는 관계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

에번스(G. Evans)가 쓴 《컬러 인문학》에는 색이 얼마나 다양한 의미가 있는지 잘 보여준다. 노란색, 붉은색, 푸른색, 보라색 등등이 갖는 의미 말이다.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와 사회에 따라,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달리 받아들인다. 그때는 노란색이 A라는 의미였는데 지금은 B라는 의미로 바뀐다. 여기서 붉은색은 C인데 저기서 붉은색은 D이다. 더욱이 반전되기도 한다. 당장 우리 정치권을 보자. 어느 정당은 과거에는 푸른색을 쓰더니 지금은 붉은색이다.

자주(보라)색은 처음엔 왕족의 색이었다. 염료를 만드는데 값이 무척 비쌌기 때문이다. 경제 사정이 조금 좋아지면서 점차 귀족과 부자들도 보라색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여전히 자주(보라)색 옷은 비쌌다. 자주색 그러면 루디아가 떠오른다(행 16:14). 그녀의 출신지 두아디라는 당시 직조와 자주색 염색 기술로 유명했다.

자주 옷감은 뿔 고둥에 속한 조개에서 뽑아낸 자주색 염료로 염색한 옷감이다. 자주 염료를 추출하자면 1g 생산에 뿔고동 12,000마리가 필요하다.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다음에야 엄두나 내겠나. 자주 염료 추출법은 주전 4,000년 경에 발견된 것으로 추정되고, 주전 1,600년의 페니키아 문서에도 있다. 주전 48년 이집트를 방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보라색에 둘러싸인 클레오파트라에 유혹되고 로마로 돌아와 보라색은 왕족에게만 허용한다고 선포했다. 주후 300년경 중국으로 건너간 보라색은 우주의 조화를 상징하게 되었고, 일반인이 보라색 옷을 입은 것은 합성 염료가 발명된 1856년 후이다. 옷의 민주화다. 아니 색의 민주화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지만 미인은 보라를 입는다. 보라색을 소화하는 사람이 미인이다. 대학생이었을 때 서울 시내버스가 청색에서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교수님이 ‘어떻게 버스에 보라색을 쓸 수 있느냐’며 쓴소리하던 기억이 있다. 반면 전남 신안군은 2021년 8월 안좌면 반월도와 박지도에 ‘퍼플섬’을 조성했다. 퍼플섬의 주요 명소인 ‘퍼플교’에는 2022년 33만여 명이 방문했다. 이는 전라남도 주요 관광지 평균 입장객 수 11만여 명의 3배 수치다. 점점 더 힘이 강해지는 색의 시대다.

중국 황제는 노란색을 입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중국 선수들 유니폼이 여전히 붉거나 노란색인 것은 오성홍기 영향이겠지만, 혹시 지금도 황제국임을 은근히 드러내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조선에서 왕들은 노란색을 입을 수 없어 붉은 곤룡포를 입었다. 반면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은 노란 어의를 입었다.

색(色)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글자와 결합한 경향이 있다. 성리학이 지배했던 조선시대에는 만상을 음양오행으로 이해하면서 남자는 양, 여자는 음으로 규정했다. 물론 이 양과 음은 우열의 개념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남존여비 사상과 주자학이나 성리학은 단어에 스며들었다. 주색잡기라 하여 색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색은 일상 용어에 스며있다. 기색, 생색, 본색, 특색, 정색, 재색 그리고 여색까지. 색을 떠나서 살 수 없을 정도다.

무지개는 몇 가지 색일까?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이다. 하지만 이건 지금 우리 생각이다. 인간의 눈은 100개 이상의 색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데, 믿기 어렵지만 색은 207가지란다. 옛날 유럽에서 무지개는 5색(빨강 노랑 초록 파랑 보라)이었다. 영어권에서는 남색이 빠진 6가지 색으로, 네덜란드에서는 남색과 보라가 빠진 5가지 색으로, 멕시코와 독일도 5색, 이슬람권에서는 4가지 색으로 표현한다. 심지어 아프리카에서는 부족에 따라 두세 가지 또는 서른 가지 색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동아시아권에서는 5가지 색으로 생각했다. 음양오행설의 영향으로 추정한다. 우리도 그 문화권이었다. 오방색(청백적흑황), 오색찬란, 오색영롱이다. 이렇게 무지개색은 색을 바라보는 문화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일곱 색깔 무지개는 뉴턴이 7가지 색으로 규정하면서 굳어졌다고 한다. 왜 뉴턴은 7색으로 보았을까? 서양 기독교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기독교에서 7은 완전수이다. 1주일은 7일, 행성도 7개인 수금화목토천해, 음계도 도레미파솔라시 7음계이다.

예수님은 어떤 색을 좋아하시고 어떤 색깔 옷을 입으셨을까? 성화에는 푸른 옷, 붉은 천을 어깨에 걸치고 지팡이를 든 모습이다. 성모는 언제나 푸른 옷이다. 하지만 이건 화가들의 상상력일 뿐, 붉은 옷과 푸른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없었다.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유대인으로 사셨던 예수님은 유대인의 옷을 입으셨을 것이다. 그저 평범한 세마포, 평민들이 입던 옷이다.

교회력 색깔은 교황 인노센트(Innocent) 3세(1198~1216) 때 시작되었다. 흰색은 축제(Feasts), 빨간색은 순교(martyrs), 검은색은 고난, 초록색은 희망을 뜻했다. 1570년 피우스(Pius) 5세 때 교회력의 공식 색깔이 정해졌다. 보라색(Violet)은 참회(사순절기)와 준비(대림절기), 흰색은 축제(성탄절, 부활절), 빨간색은 성령(성령강림절)과 보혈(종려주일, 성목요일, 성금요일), 검은색은 죽음(성금요일, 성토요일)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 밖의 보통 절기에는 희망을 상징하는 초록색을 사용한다.  김성대 《예수는 테너일까 베이스일까 》

그럼 사순절기와 대림절기는 왜 보라색일까? 예수님께 채찍을 가하기 전후 로마 군인들은 희롱하며 억지로 왕의 색인 보라색(자주색) 망토를 입혔다.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요 19:2~3)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요 19:5)

아무리 빛과 색이 있다 해도 우리 눈이 볼 수 없다면 사진은 존재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러니 볼 수 있는 눈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그저 고맙고 감사하다. 듣지 못해도 음악은 베토벤이 나올 수 있고, 보지 못해도 찬송시를 쓴 화니 크로스비가 있지만 사진은 누가 뭐라 해도 보아야 한다.

사진은 색이다. 그림도 색으로 표현하지만 사진도 색으로 표현한다. 사진을 찍어 보면 눈으로 본 색과 다른 색감으로 찍히는 경우가 있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자주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사진은 실제 찍는 사람이 눈으로 보는 색과 다르다. 왜 그럴까? 카메라는 주광인 태양 빛을 기준으로 한다. 그런데 태양 빛을 제외한 주변의 다른 빛은 우리 눈에 별 영향을 주지 않지만, 카메라는 피사체가 반사한 태양 빛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빛까지 모두 받아들여 저장하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 눈에 보이는 색은 그 물체나 대상 자체의 색이 아니라 그것이 빛을 받아 반사한 색이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가 카메라의 화이트밸런스(WB, White Balance)이다. 색 보정이 필요하다. 화이트발란스를 잘 맞추어야 한다. 색이 조금만 달라도 사진의 느낌은 달라진다. 사람의 얼굴색이 조금만 달라도 금방 알아본다. 해쓱하다, 건강하다, 구릿빛이다, 우유 빛이다.

색에도 온도가 있다. 이것을 색온도(K값)라고 한다. 디지털 카메라는 K값 조절이 가능하다. 내 Nikon D4는 2,500K에서 10,000K까지, 내 스마트폰은 2,300K에서 10,000K까지 수동 조절이 가능하다. 색온도를 높이면 붉은색이 강조되고 낮추면 푸른색이 강조된다. 보통 석양을 찍을 때는 K값을 높여서 찍는다. 노을이 실제보다 더 붉게 찍힌다. 푸른 바다를 강조하려면 K값을 낮추면 된다. 실제보다 푸를 것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일몰이나 석양 사진 중에 불타오르는 듯한 것들이 많다. K값 덕을 본 것이다. 

천재 건축가라는 별명을 얻은 가우디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성당은 색이 빛을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도 잘 보여준다.
천재 건축가라는 별명을 얻은 가우디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성당은 색이 빛을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도 잘 보여준다.

디지털 사진은 모니터에 띄워놓고 색 보정을 한다. 어떤 색을 더 강조할까? 명도를 조정하고 채도나 색상을 조정하기도 한다. 모니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당연히 색에 따라 사진이 짓는 표정과 메시지가 바뀔 수 있다.

컬러사진이 대세가 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흑백사진을 고집하는 사진가가 있다. 흑백이 갖는 깊이와 맛이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디지털 사진은 컬러로 찍고 흑백으로 전환하기도 쉽다. 게다가 흑백 같은 흑백 아닌 흑백 사진, 모노 사진도 있다. 블루 계열, 세피아 계열, 브라운 계열 등등이다. 그렇다면 음식, 과자, 상품 광고, 쇼핑몰을 흑백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매출 감소는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흑백과 컬러, 어느 사진이 더 좋을까? 답은 없다. 사진의 성격이나 취향,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사진은 색이다.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