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신앙】박무종 / 편집부국장
 

중학생 때 다니던 학교는 전교생이 유도를 했다. 일본 학교와 자매학교였던 터라 자연스럽게 유도를 택한 모양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은 유도를 배웠다. 유도복을 입고 유도장에서 땀을 흘렸다.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유도장에서 뒹구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유도복만 아니라 교복도 상의 왼쪽엔 이름을 달고 오른쪽엔 유도 마크를 달았다. 5~6cm 정도의 흰색 정사각형이라 검은 교복에 멀리서도 아주 잘 보인다. 일정 시간이 지나 심사를 한 후 흰색 마크를 떼고 노란색 마크를 달고 3학년 정도 되면 대부분 파란색을 단다. 유도를 잘 하는 학생 몇은 갈색을 달기도 했다. 등하굣길에 ‘그게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노란색일 때는 좀 창피하더니 파란색을 달았을 땐 창피가 조금 가셨다. 하지만 갈색은 끝내 달지 못했다.

사진=Getty Images
사진=Getty Images

가끔 도복을 입고 승합차에 오르내리는 아이들을 본다. 태권도나 유도 같은 도장에 다니는 아이들이다. 요즘은 도복도 참 예쁜 디자인이 많고 허리에 두른 띠 색깔도 화려하다. 간혹 동네 공터에서나 놀이터에서 자기들끼리 마주 보고 앞지르기나 발차기 자세를 하기도 한다. 귀엽다.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들 허리에 노란띠 파란 띠는 있어도 검은 띠는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분명하다. 유단자는 도장 밖에서 함부로 도복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는 34년째이다. 목사님! 하고 뒤에서 부르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누가 나를 찾는지 뒤돌아본다. 목사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한다. 때론 먼저 신분을 밝히기도 한다. 작년 4월부터 <교회와신앙>에서 기자로 지내고 있으니 1년이 다가온다. 사실은 기자가 아니라 기자 흉내 내기를 시작했다. 기자로선 풋내기 중에 풋내기다. 기자라는 말을 꺼내기도 민망하다. 그저 기자 흉내 내는 목사다. 누군가 기자냐고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말하지 못한다.

기자는 글도 쓸 줄 알고 사진도 찍을 줄 안다. 아니 알아야 한다. 레거시 미디어에 속하는 유명한 일간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면 ‘역시 기자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 기사에 가장 잘 어울리는 듯한 장면을 실었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같은 단과대학에 사진학과가 있어서 사진학과 학생들 몇 몇의 얼굴 정도는 알고 지냈다. 졸업 후 어느 날 텔레비전 화면에 아무개 기자라는 자막과 함께 내가 알고 있던 사진학과 출신 학생이 보였다. ‘기자는 사진도 잘 찍을 줄 알아야 하나보다’ 하고 지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각은 더 분명해졌다. 기자의 시선, 기자의 감각 그리고 기자의 안목으로 찍는 사진이 증명한다. 치열한 역사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들, 열 마디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 사진 한 장이 담고 있는 함축되고 응축된 메시지는 분위기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기자도 못 되고 사진가도 아닌 목사가 ‘사진 이야기’를 하겠다니 얼마나 우스운가.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 목사 중에는 사진가도 있다. 기독사진가협회도 있다. 사진가협회 정식 회원이기도 하고 공모전에서 수상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정식 회원도 아니고 당선 경력도 없다. 출품 한번 한 적 없으니 당연하다. 태권도 유도식으로 말하면 흰 띠는 벗어난 듯하지만 노란 띠이다. 아니 노란띠가 확실한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사진에 대해 아는 척은 한다. 다만 전공자가 있거나 사진가협회 회원이 있는 자리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할 수 없다. 아는 깊이가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진 이야기를 하려 한다. 하고 싶다. 그래서 용기를 짜냈다. 전문가가 아니기에 전문가들이 하지 않는(?) 사진 이야기를 하고 싶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은 지는 꽤나 되었다. 십수 년이 지났으니. 놀라지 말라. 말 그대로 취미로 찍었을 뿐이다. 대형서점의 사진 코너에는 사진 관련 책들이 가득하다. 인터넷엔 사진 관련 유튜브 동영상들이 넘쳐난다. 기초적인 것부터 수준 있는 동영상까지. 대부분 사진을 전공한 전문가들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사진 이야기를 하겠다니...

국가대표만 공을 차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조기 축구회 회원도 축구공을 차면 축구하는 거다. 잔디 구장에서만 공을 차라는 법이 있나? 골목에서도 동네 공터에서도 심지어 모래사장에서도 공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축구다. 규칙도 까다롭지 않다. 아주 기본적인 것만 지키면 그만이다. 그저 어울리며 땀 흘리면 되는 거니까.

그러니 이제부터 늘어놓을 사진 이야기가 이론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따지지 마시라. 사진을 모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핀잔도 마시라. 노란 띠 파란 띠 소년들은 동네 골목에서도 폼을 잡지 않던가. 국가대표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니 이렇게 빠져나갈 구멍부터 찾아놓고 시작하련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의 말도 있다. 족장들의 말이 있고 모세의 말이 있다. 다윗 왕의 말이 있고 솔로몬의 말이 있다.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의 말이 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은 물론이거니와 바울의 말, 베드로의 말도 있고 디모데의 말도 있다. 그뿐 아니라 이름 모를 엑스트라들의 말도 있다. 물론 무게감으로 치면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성경은 엑스트라들의 말조차 무시하지 않는다. 외면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어떠셨나? 어린아이는 숫자에도 넣어주지 않고 인격체로도 여기지 않았던 시대에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눅 18:16) 하셨다. 나귀 타고 입성하던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을 향해 바리새인들이 저들을 책망하라고 하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저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35~40). 율법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바리새인 같은 종교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소리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다 하신 예수님이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이 외친 소리에 가던 길 멈추고 데려오라 하시고 고쳐주셨던 예수님이다. 우리 모두 그 시각 장애인의 이름을 모른다. 그저 시각 장애인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말과 행동을 성경에 기록하여 남겨놓게 하셨다. 제사장이나 서기관 같은 율법 전문가들의 말만 아니라 평민들과 장애인들, 나병환자의 말도 남겨놓으셨다. 심지어 사탄의 말도 성경에 나오지 않던가.

전문가만 말하라는 법은 없다. ‘어쩌다 벤저스’도 있고 ‘골 때리는 그녀들’도 있지 않은가? 나처럼 노란 띠 수준인 사람들을 위한 책도 한 권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흰 띠를 막 벗어나 노란 띠가 된 사람, 어쩌다 기자가 된 목사의 사진 이야기이다. 겁도 없이 일단 시작한다. 연재할 주제 중 몇 가지만 적어 본다.

사진은 현장이다

사진은 프레임이다

사진은 섬김이다

사진은 배경이다

사진은 빛이다

사진은 기다림이다

사진은 은혜다

사진은 신비다

사진은 역사다

사진은 시선이다

사진은 민주화다

사진은 집중이다

사진은 몰카다

사진은 진실이다

사진은 힘이다

사진은 배치다

사진은 문화다

....

 

물론 이 순서대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되든 안 되든 매주 한 번씩 연재할 생각이다. 흑백 텔레비전 시절 일간 신문에 실리던 텔레비전 프로그램 순서 맨 아래쪽에, “본 프로그램은 방송국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던 문장이 떠오른다. 매주 한 번이라는 약속이 잘 지켜질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시작부터 또 변명할 생각부터 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지킬 것이다.

'방송국 사정'이 없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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