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종 / 편집부국장
 

원탁이 있는 중국음식점에서 귀빈은 출입구에서 가장 먼 안쪽에 앉도록 하는 것이 예의다.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 이곳이 높은 곳이고 또 안전한 곳이다. 공직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군대는 철저하다. 군사령관(4성)이 참석하면 배석하는 군단장(3성)은 사령관의 오른쪽, 사단장(2성)은 사령관의 왼쪽이다. 부사단장(1성)은 마땅히 군단장의 오른쪽에 앉게 된다. 만약 같은 계급이 동석하면? 누가 먼저 진급했느냐를 따진다. 곧 최고위급이 앉고 그의 우측과 좌측을 번갈아 가며 앉는 것이 원칙이다. 행정병으로 복무한 나는 사단 기밀실 관리도 했기에 그날 회의 참석자가 누구인지, 항상 계급과 진급 일을 따져 이 원칙대로 명패를 테이블 위에 놓아야 했다. 배치는 권력이다.

배치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우리나라 불교 사찰의 기본 배치는 고구려는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백제는 일답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신라는 단탑식(單塔式) 그리고 통일신라는 쌍탑식(雙塔式)이다. 발상지 인도와 전래국 중국의 영향이다.

조선 궁궐은 성리학과 음양오행이 기본이다. 성리학은 질서와 위계가 중요하다. 궁궐 답사에서 이걸 모르면 관광이 되고 만다.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었기에 위계를 지켜야 했다. 궁궐 중 경복궁을 제일 먼저 지었다. 자금성은 5문3조(5門3朝)이고 경복궁은 3문3조(3門3朝)이다. 광화문·흥례문·근정문을 지나 근정전이 있는 3문이다. 자금성의 천안문은 홍예가 5문이고 경복궁의 광화문은 3문이다. 태화전은 정면 11칸인데 근정전은 5칸이다. 월대(月臺)도 황제국은 3단 우리는 2단이다. 저들은 9999칸, 조선은 999칸, 민가는 99칸을 넘지 못했다. 황제국은 만세삼창, 제후국은 천세삼창이다. 존칭도 폐하 전하 저하(邸下) 합하(閤下) 각하 그리고 귀하 순이다. 철저한 위계 배치다.

작년 말 궁궐을 공부하며 외우느라 힘들었던 것이 殿堂閤閣齋軒樓亭(전당합각재헌루정)이다. 궁궐은 물론 우리나라 고건축 건물의 위계질서이다. 가장 높은 건물을 전(殿, 큰 집)이라 했다. 경복궁을 보자.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이다. 모두 왕이나 왕비와 관련된 건물들이다. 사찰에서는 대웅전, 대적광전, 극락전, 미륵전 등등이다. 전은 가장 높고 귀한 분이 계시는 큰 집이라는 뜻이다. 이런 문화적 배경 가운데 성경을 번역하면서 거룩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 하여 ‘성전’(聖殿)이라 했다. 전 다음은 당(堂)이다. 경복궁에서 당은 세자의 침전인 자선당, 합(閤)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곤녕합과 제수합, 각(閣)은 물시계가 설치되었던 흠경각과 지금의 동십자각, 재(齋)는 왕의 서재인 집옥재, 헌(軒)은 창덕궁의 관물헌, 루(樓)는 경복궁의 경회루 그리고 정(亭)은 향원정이다. 건물 이름만 들어도 건물의 위상과 규모, 용도와 의미까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고(古)건축이다. 

한양도성은 성리학과 음양오행 사상으로 배치한 계획 도시다
한양도성은 성리학과 음양오행 사상으로 배치한 계획 도시다

수선전도(首善全圖)에도 있지만 계획도시 한양도성 배치도 그렇다. 유교는 5상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핵심인데 이것을 4 대문 이름에 담았다.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門), 남대문은 숭례문(崇門) 그리고 북대문은 소지문(소문)인데 나중에 같은 뜻의 숙청문(肅淸門) 또는 숙정문(肅靖門)으로 고쳤다. 그리고 한 가운데 보신각(普閣)을 배치했다. 인이 흥하고 의가 돈독하며, 예를 숭상하고 지(혜)를 드러내지 않으며, 믿음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다. 이렇게 배치는 권력이자 시대의 철학과 가치다.

하회(河回)마을은 물돌이동이다. 이곳에서 산태극(山太極)과 수태극(水太極)이 만나 낙동강 물이 마을을 휘감고 흐른다. 그래서 마을 중앙이 높다. 이곳에 어른들이 터를 잡고 양진당과 충효당을 지었다. 당(堂)이라는 집 이름만으로도 위상이 드러난다. 이 두 집을 중심으로 나머지 집들이 배치되었다. 전통적인 배산임수가 아니다. 동서남북 어디서나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이 집을 향해 대문을 배치했다. 전형적인 성리학적 배치다.

이제 예루살렘의 배치를 보자. 그 유명한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에서 신약시대 유대적 배경의 권위자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독자에게 당시의 예루살렘을 깊이 있고도 소상하게 안내한다. 산등성이에 있던 예루살렘(약 760m)이라 살기 좋은 상부 도시는 정치 종교 사회적 상류층들이 거주하고, 지저분하고 살기 힘든 하부도시는 서민과 빈민들이 살았다. 상부 도시에 있는 성전 구역에는 다윗의 망대가 있고 로마가 세운 안토니아 요새도 있다.

닉 페이지의 《가장 길었던 한 주》는 고난주간을 아주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안토니아 요새는 로마 치하 예루살렘의 치안 유지라는 명목으로 성전 구역 북서쪽 모서리에 세운 시설이다. 이곳에 대제사장의 옷을 보관하다가 유대 절기가 되면 잠시 대여(?)해 주었다. 이곳은 예루살렘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3대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은 순례객들로 붐비고 소요 사태 우려로 로마 군대에 갑호 비상령이 발령된다. 평소 지중 해변 가이사랴 관저에 있던 총독은 유대인 절기가 다가오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

예루살렘 입성이라면 예수님이다. 총독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서쪽 지중 해변에서 동진하는 반면, 예수님은 동쪽 베다니 마을에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 서진하신다. 동진하는 로마군과 서진하는 예수님 행렬은 마주 보고 행진하는 것이다. 곧 예수님의 입성은 맞불 행진인 셈이다. 로마의 행진은 절기마다 진행된 반면 예수님의 행진은 유일회적 사건이다. 로마 군대는 말을 타고 독수리 형상의 깃발을 들고 한껏 위세를 떨친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드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신다. 로마 군대는 잘 훈련된 말을 타고 전신갑주에 최첨단 무기를 갖춘 채 행진하는 반면,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탄 완전 비무장이다. 극과 극의 행렬이자 극과 극의 충돌이다.

다시 경복궁이다. 혈맥이 흐르는 곳, 지맥이 흐르는 곳에 근정전을 배치하고 그 뒤쪽 우측으로 강녕전과 교태전을 세웠다. 비보(裨補) 풍수를 통해 나쁜 기운을 막고 부족한 것은 채웠다.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다. 바람은 가두고 물은 얻는 곳, 음양오행에서 길지(吉地)요 명당으로 여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배산임수이다. 농경 사회였고 음양오행 풍수지리 영향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이런 배치가 별것 아닐 수 있지만 당시엔 중요했다.

반면 성경 시대 이스라엘 동네는 대부분 산등성이다. 적의 침략을 막아내기 쉽고, 우기의 흙탕물 홍수로부터도 안전하여 집이 무너질 염려도 없었다. 그래서 아브라함 같은 족장들이 다닌 길도 대부분 중앙산악지대이다. 구약의 중요 도시인 예루살렘, 헤브론, 세겜, 벧엘 등은 모두 산등성이에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드러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성막도 배치는 중요하다. 뜰과 성소와 지성소의 3 지역으로 구분된다. 특히 성소의 성물 배치는 엄격하다. 우측 벽 앞에 진설병상, 맞은 편 벽 앞에 등잔대, 지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 앞에 향단, 그리고 지성소 안에 언약궤, 그 안에 십계명을 기록한 돌비와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배치된다. 모세의 배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출 25~27장). 히브리서는 성막이 예수님의 모형임을 잘 보여준다. 배치가 달라지면 성막의 의미도 달라진다.

뜰 성소 지성소의 3등분 속에 성물이 배치된 광야의 성막
뜰 성소 지성소의 3등분 속에 성물이 배치된 광야의 성막

성막에 이어 성전이 세워진다.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 순이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고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진 후 헤롯은 확장 개축한다.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 사이에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3D가 에스겔 성전이다(겔 40~42장). 다른 성전은 한계가 있으나 에스겔 성전은 완벽하다. 특히 헤롯 성전과 에스겔 성전은 대조적이다. 헤롯 성전은 배제와 차별이다.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유대인의 뜰, 제사장의 뜰로 갈라버린다. 1등급인 제사장부터, 2등급 레위인, 그 다음 이스라엘 사람, 개종자, 해방 노예, 결함 있는 사제들, 성전 노예, 사생자, 고환에 상처받은 자, 성기 없는 자, 그리고 마지막 11등급인 혼혈아까지 엄격하고도 철저한 차별 등급에 따른 배치다.

에스겔 성전 평면도(출처=대한성서공회)
에스겔 성전 평면도(출처=대한성서공회)

반면 에스겔 성전은 그저 바깥뜰, 안뜰, 성전 뜰이다. 차별 없이 누구나 환영하는 성전이다. 에스겔 성전은 없는 것이 많다. 진설병 상, 금 등잔대, 분향 단이 없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요 빛이시며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없다. 예수님이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버리셨기 때문이다(엡 2:14).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요 14:13~14). 언약궤가 없다. 예수님이 말씀이고(요 1:1),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면 우리 생명이 회복되며(요 14:6), 예수님이 만나가 되시기 때문이다(요 6:48). 물두멍이 없다. 예수님의 보혈로 다 씻겼기 때문이다(히 9장). 새 성전은 완전한 성전이요 완전 새로운 배치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천국에는 중심에 하나님 보좌가 있고 그 주위에 4 생물과 24 장로가 있고 어린양은 4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있다(계 4:6). 물리적 공간 개념으로만 이해하기엔 무리겠지만 천국에도 분명 질서로서의 배치가 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스데반도 순교 직전 그런 자리에 계신 예수님을 목도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 7:55~56)

《백경》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이 쓴 단편소설 중에 《필경사 바틀비》가 있다. 필경사는 자신의 의견이나 개성은 없이 그저 주어진 것을 글자 그대로 베끼는 사람이다. 소설에는 바틀비가 근무하는 맨해튼 사무실의 공간 배치가 묘사된다. 책상과 의자가 어디에 놓여있는지 설명한다. 직급이 높을수록 이른바 좋은 자리다. 출입문에서 멀고 안쪽이라 직원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이다. 철저한 직위 중심이다. 신입사원 바틀비는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 누구에게나 보이는 자리, 창밖으로는 바로 몇 미터 떨어진 옆 건물 벽체만 보일 뿐이다. 이런 바틀비가 사장인 변호사의 지시에 번번이 하는 말이 있다. “I would prepare not to”. 못하겠습니다 안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정해진 자리는 선택할 수 없더라도 업무만큼은 내가 결정하겠다는 수동적 저항 선포다. 그 시대에 멜빌은 어떻게 이런 소설(1853년)을 쓸 수 있었을까.

사진=네이버 블로그
사진=네이버 블로그

국회의사당 대회의장 정당의 의원 배치는 어떤가. 초선에 가까울수록 앞쪽이고 다선일수록 뒤쪽이다. 물을 것도 없이 최고위원과 당 대표는 맨 뒤쪽이다. 은행 창구에는 일반 직원이, 뒤쪽에 중간 간부, 지점장은 아예 저 안쪽에 있다.

우리나라 도시계획도 그동안 주거지구, 상업지구, 업무지구 같은 지역과 지구로 구획하여 계획하고 건설했다. 이제 이것이 꼭 옳은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지나치게 획일적이고 분리성 강요일 수 있다는 평가일 것이다. 인간의 삶을 자로 긋고 선으로 자르듯 나눌 수 있느냐는 뜻이다. 도면이나 모형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도 실제 생활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철학자 들뢰즈(G. Deleuze, 1925~1995)는 가타리와 함께 쓴 《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Rhizome)이란 용어를 제시했다. ‘땅속줄기’란 뜻인데 연근이나 고구마, 감자처럼 뿌리줄기 형태의 식물을 떠올릴 수 있다. 땅속에서 그물망처럼 뻗어가며 자라기에 어디까지 뿌리인지, 몸통인지, 줄기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다양체, 곧 고원(plateau)이 연결되어 하나의 리좀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리좀적 도시는 암스테르담과 베네치아 같은 곳이다. 암스테르담은 운하와 자전거로, 차로가 이리저리 얽혀있고, 베네치아는 천여 개 섬이 수백 개 운하와 수백 개 다리로 연결되면서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미로 같은 도시이다. 그곳만일까? 우리나라에도 신도시나 계획도시가 아닌, 오랜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도시들 대부분 리좀 도시들이다. 우리 삶이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배치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잘못된 배치를 뒤집으셨다. 모두 높은 자리로 배치받기 원하는 세상에서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를 보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바리새인이 아니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11~14)

바리새인은 ‘따로’ 기도함으로 자신을 세리와 분리 배치시켰다. 같은 공간에 있는 세리와 ‘같지 아니하다’며 차별한다. 바리새인은 성전에서의 기도조차도 분리요 배제요 우월감에 매몰되어 있다. 반면 세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며 죄인임을 고백할 뿐이다. 둘 중 누가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 가까이에서 기도했을까? 바리새인일 것이다. 세리는 유대인의 뜰에도 출입 불가였으니 말이다. 지성소는 무엇인가? 지극히(支) 거룩한(聖) 곳,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곳이다. 분명 바리새인이 더 가까운 곳에서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더 가까운가? 세리다. 성경으로 확인해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 18:14)

작년 말에 발행된 『새한글성경』은 이렇게 번역했다.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의롭다고 인정받고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저 바리새인’이고 ‘이 세리’이다. 누가 예수님과 가까운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잘 알 것이다(눅 21:1~4). 부자들이 헌금하고 과부도 헌금한다. 이때도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과부를 두고는 ‘이’ 가난한 과부라 하시고 부자들은 ‘저들’이라고 하신다. 누가 더 하나님과 가까울까?

배치는 중요하다. 과거에만 그랬을까? 종이신문 1면을 어떻게 배치할까? 웹 사이트 초기 화면을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까? 배치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지고 눈길도 달라진다. 정치면 top 뉴스, top이라도 main top이 있고 sub top이 있다. 성당이나 예배당도 배치를 무시할 수 없다. 설교대와 집례대 그리고 성찬상을 어디에 배치하느냐, 찬양대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의미와 강조점이 달라진다.

사진은 배치다. 단체 사진을 찍는다면, 키 큰 사람이 양옆으로 키 작은 사람이 가운데 서도록 하는 것이 좋다. 옆에서 감싸고 가운데로 모아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서 가족사진을 찍어 보았을 것이다. 사진가가 가족들이 설 자리와 앉을 자리를 배치해 준다. 웨딩 촬영할 때도 신랑 신부의 자세와 위치를 잡아준다. 이것 역시 배치다. 손과 팔의 위치, 마주 잡을지 포갤지, 오른손과 왼손을 겹칠 때 어느 쪽을 안쪽에 둘지 모두 배치다. 음양오행에선 오른손은 양이고 왼손은 음이다. 세배할 때 남자는 오른손 위에 왼손을 올리고, 여자는 그 반대다. 물론 장례식장 조문이라면 남자는 왼손 위에 오른손이고 여자는 그 반대다.

구도와 배치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구도 속에서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다. 카메라의 뷰 파인더 속에서 어디에 무엇을 어떻게 두느냐가 중요하다. 근경에 무엇을 놓고 중경과 원경에 무엇을 놓을까? 근경에도 무엇인가를 놓고 초점을 맞춘 주피사체를 중경에 두면 훨씬 입체감이 살아난다. 특히 사람이나 자동차 같은 움직이는 피사체를 배치하면 사진에 생동감이 생긴다. 좌측과 가운데 그리고 우측에 무엇을 배치할지, 아니면 위와 아래에 어떻게 배치 배정하느냐에 따라 사진은 달라진다.

사진은 배치다.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