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에 촬영된 영도다리(출처=문화일보)
1938년에 촬영된 영도다리(출처=문화일보)

 

공기화 / 부산교육대학교 명예교수ㆍ부산 땅끝교회 은퇴장로

주일이면 아내와 함께 영도다리를 건너서 북항 쪽으로 100m 정도 거리에 있는 땅끝교회로 간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영도에 살았던 친구의 집에 가거나 태종대에 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서 그런지 친숙하다.

영도다리는 1933년에 개통된 구포다리보다 1년 늦게 개통되었다. 1932년에 자갈치와 영도 사이에 다리 공사가 시작되어 1934년 11월에 개통되었다. 구포다리가 태풍으로 끊어진 통에 영도다리가 부산에 남아 있는 대교 중 가장 오래된 다리가 되었다.

영도 영선동에 살던 주민들이 추렴하여 용미산이었던 롯데백화점에서 봉래동 바닷가인 우리은행 쪽에 나루터를 두어 거룻배 2척을 운항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에는 4척으로 늘어났는데, 1908년 사립 옥성학교가 설립되자 나룻배의 수익을 학교 유지비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일본인 전관거류지와 가까이 있었던 영도에 공장이 많이 서고 일본인이 많이 이주하여 인구가 늘어나자, 남포동 자갈치시장에서 영도 대교동으로 운항하는 동력선을 일본인이 운행하였다. 이 나룻배를 통통배라고 하였다.

영도다리의 가설 계획이 발표되자 수산업계와 해운업계가 가장 거세게 반발했다. 나룻배를 운항하던 도선업계는 다리가 놓아지는 날부터 운항을 중지해야 하므로 이 다리에 대해 반대했던 것은 자명했다. 해운업계는 큰 배일 경우 다리 아래로 지나가지 못하므로 오륙도 앞바다를 거쳐 영도 남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니 시간이 1시간 이상 더 걸리고 다리 건설로 뭍과 영도 사이의 폭이 좁아지므로 물살이 빨라져 선박의 운항이 어렵게 된다며 다리의 가설을 반대하였다.

사실 일제는 영도에 군수공장 등을 지어 군사전략기지로 삼으려는 계획이 있었으므로 부산부는 연륙교連陸橋에서 다리의 한 칸을 들어 큰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하는 도개교跳開橋를 제안하였다. 이리하여 1934년 11월 23일, 비바람이 부는데도 불구하고 영도와 자갈치 연안에 6만의 사람이 새로 생긴 명물인 다리를 구경하기 위하여 운집하였다. 당시 부산부의 인구는 15만 명이었는데 구경꾼은 동래, 김해, 양산, 멀리 함안 등에서 왔다고 한다. 다리의 명칭은 부산도진교釜山渡津橋였는데 후에 영도대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다리의 개통 시에 부산부윤 쓰치야 덴사쿠가 테이프를 끊었다. 부산우체국에서는 개통일부터 3일간 ‘부산도진교 준공기념’이라는 스템프를 우편물에 찍어 명물 다리의 건설을 기념하였다.

영도다리 옆의 피란민 동상(출처=국릭민속박물관, 사진=중앙일보)
영도다리 옆의 피란민 동상(출처=국릭민속박물관, 사진=중앙일보)

6.25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 내려온 피란민들은 “부산에 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라고 약속하였다. 가족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여 이 다리를 ‘만남의 다리’라고 하였다. 진주에서 태어나 한때 영도에서 거주했던 현인이 흥남부두 피란민 철수작전에서 헤어진 피란민들의 애환을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를 불러 국민을 울리고 국민애창곡이 되었다. 지금도 영도다리를 건너 영도경찰서 입구에 현인의 동상이 있어 그 곁에서 앉아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영도다리 건너기 전 자갈치에는 일본식 건물인 점집이 많았다. 피란 왔던 사람들이 남북에 헤어진 가족들의 행방을, 전장에 나간 아들이나 남편의 생사를 알기 위하여 이곳을 찾아 애타게 물었던 곳이었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의 도심지가 가까운 영도에 피란민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하였다. 다리에 상수도의 배수도관을 상판에 고정하려고 1966년 8월 31일에 마지막으로 다리를 도개하고서 9월 1일부터 다리를 들지 않았다. 피란민들의 만남의 다리, 다리 상판이 들려지는 모습을 보기 위한 관광객과 졸업여행 왔던 학생들의 감탄하는 모습은 기억 속의 다리가 되었다. 2003년 11월에 영도다리 끝자락에 앉아서 노래하는 1.2m 현인 동상과 노래비가 세워지자 새로운 명물이 되었다. 2006년 11월 2일에 이 다리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게 되었다.

현재의 영도대교(다리) 도개 모습(사진=국가유산청)
현재의 영도대교(다리) 도개 모습(사진=국가유산청)

인구와 자동차가 급증하여 영도다리를 적어도 6차선 도로로 확장하려고 했다. 롯데가 초고층 건물을 건설하려 하자 주민들은 도개식 영도다리 건설을 요구하였다. 롯데는 2011년부터 영도다리를 해체하여 복원 확장 공사를 시작하여 2013년 11월 27일에 완공하여 개통하였다. 2015년 9월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15분간 도개하여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다리와 관련하여 감격으로 남아 있는 추억이 있다. 60년 이전에 경남고등학교는 연례행사로 3학년 가을소풍을 배를 타고 한산도에 갔다. 그날은 3학년 학생들이 대학입시에 찌든 심신을 식히려 여객선인 세길호에 승선했다. 학생을 태운 배는 영도다리를 지나 통영의 통제영과 한산도의 제승당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설명을 듣고, 공의 영정과 검을 바라보며 조국에 대한 충혼을 새롭게 배우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낭만적이었다. 가을 노을에 잠긴 가덕도, 진해의 대통령 별장을 바라보며 앞으로 우리의 꿈을 그려보았다.

가수 김상국은 「쾌지나칭칭나네」를 부르다가 신이 나면 ‘영도다리 하루에 두 번씩 끄떡끄떡…’이라고 끼워 넣어 불렀다. 밤에도 영도다리를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현인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네” 가사와 같은 광경은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아쉽다.

공기화 장로 / 서울대를 졸업하고 부산교육대학교 체육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한 명예교수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거의 인생 전부를 보낸 토박이이기에, 남다른 애정으로 부산과 관련한 글을 즐겨 쓰면서 부산문인협회와 한국장로문인협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