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신앙】박무종 편집부국장
“아래에서 비례와 조화와 균형이 가장 잘 이루어진 것은 어느 것인가?” 중학교 미술 시험 시간에 한두 번은 접했을 문항이다. 비례 조화 균형은 그리스 예술이 추구했던 철학이다. 인체가 가장 아름답다고 믿었던 그리스인들, 인체 중에서도 여성보다 남성의 신체를 이상적이라 여겼다.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 로마에서 만나는 조각상들은 한결같이 비례 균형 조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화강암 조각 위주로 대하던 우리에게 대리석 조각은 상상 이상이다. 신라인들은 돌을 진흙 다루듯 했다고 배웠기에, 대리석의 강도를 떠올리지 못하면 유럽에서 만나는 조각 작품들 앞에서 기가 죽는다.
아름다움이란 단어를 살펴보자. 영어권에서는 beauty, 당당함이다. 귀족들의 세계요 신분제 사회였던 영국에서 귀족들의 당당함이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일본어로는 카와이와 키레이가 있다. ‘카와이’(かわいい)는 ‘귀엽다’, ‘예쁘다’란 뜻이고, ‘키레이’(きれい)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키레이는 원래 ‘깨끗함’이란 뜻이었다고 한다. 섬나라에서 청결은 건강뿐만 아니라 생명과 직결이었다. 깨끗한 것이 아름다움이다. 한자로는 아름다울 美이다. 양 양(羊) 자와 불 화(火)의 합성으로 보거나, 양 양 자와 큰 대(大)의 합성으로 본다. 불 화이든 큰 대이든 불 위에 놓인 양이고 큰 양이다. 기왕이면 몸집이 큰 양을 불에 익혀 먹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우리말 ‘아름다움’의 유래는 무엇일까. 여러 설이 있지만 ‘아름(抱)’의 명사에 ‘답다’가 붙어서 형용사가 되었다는 설이다. 꽃이나 나무 같은 것을 품에 ‘안음’에서 유래한 ‘아름(혹은 아름드리, armful)’의 뜻이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한 아름 가득 안는 것이 좋다. 곡식 한 아름, 과일 한 아름이다. 먹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던 시대, 무엇이든 한 아름 품고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살펴보니 어원에 담긴 아름다움은 심미성이 아니라 모두 실용성이다. 얼마나 쓸만한가가 아름다움의 핵심이다. 있을 곳에 있어야 아름답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아름답다.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위한 자리에 있었고, 친일매국노들은 친일적인 자리에 있었다. 누가 아름다운가?
헬라 사상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그리스인들은 비례 조화 균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건축과 조각작품이 증명한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언덕 위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루브르박물관의 여러 조각상. 특히 밀로의 비너스상, 저 비례를 보면서 인체의 황금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가. 남성 조각상은 나신 상인 반면 여성 조각상은 십중팔구 옷을 걸치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남성 신체에서 찾은 결과다. 로마가 지배하면서 그리스문화를 물려받는다. 여기에 기능성을 더한다. 그리스 건축이 외부 공간인 건물 바깥에 무게를 두었다면, 로마 건축은 건축물의 기능을 중시하며 건물 안에서 활동하는 실용성을 추구했다. 심미적 기능과 실용적 기능이 만나 꽃핀 것이 로마 건축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나 신을 모시는 것으로 끝이다. 건물 밖에서 신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신전의 기능을 다하는 듯하다. 델피 신전, 올림푸스 산 신전들, 심지어 소아시아 지방에 세워졌던 신전들도 그렇다. 반면 로마 건축을 대표하는 콜로세움과 판테온을 보라. 최적의 구성, 기능적이다. 특히 콜로세움은 코린트식, 이오니아식, 도리아식 기둥을 세우고, 조각상까지 세워 외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리스 건축 영향이다. 동시에 아치를 통해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하면서 짧은 시간에 수만 명이 출입할 수 있도록, 날씨에 따라 차양을 쳤다 걷었다 할 수 있게 했다. 이게 로마 건축이다. 게다가 신분에 따라 구별된 좌석 배치를 함으로써 신분제 사회임을 강조하고, 로마 시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구경거리로 돌리려는 황제 권력의 3S 정책까지 담았다.
놀랍게도 히브리인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합목적성이다. 존재 목적에 어울리는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히브리어 ‘야페’(יָפֶה)는 주로 외형적인 아름다움(삼상 16:12; 삼하 13:1; 왕상 1:3), ‘토브’(טוֹב)는 내면적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보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 10, 12, 18, 21, 25) 할 때가 토브이다.
하나님의 집인 성막을 보자. 안뜰이 있고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는 3등분 구도다. 안뜰에서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고 성소로 들어간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1년에 딱 하루 ‘욤 키푸르’, 속죄일에 지성소까지 들어간다. 말할 것도 없이 성막의 키 포인트는 지성소이다. 그러니 성막은 구속사적 구도다.
그림에서 구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미술 시간에 배운다. 수평 구도, 수직 구도, 대각선 구도, 사선 구도, 원구도, 삼각구도, 역삼각형 구도 등등. 조금 더하면 중앙 구도, 대칭구도, 곡선 구도, 호선 구도, 길잡이선(leading line) 구도, 지그재그 구도, 방사형 구도, 프레임 인 프레임 구도 등등 수없이 많다. 이 구도는 사진에도 통한다. 특히 사진 구도에는 3분할 구도, 4분할 구도가 대표적이다.
사진은 구도다. 구도를 어떻게 잡을까? 비례와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 그리스인들로부터 배운 지혜이다. 황금분할(1:1.618) 역시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비율이다. 서양인의 인체 비례, 미는 주관성이 강한지라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평가 기준이 다르지만, 보편성도 무시할 수 없다. 황금분할을 사진에서는 3분할 구도와 4분할 구도로 적용한다. 3이나 4분할의 수직 수평 교차점에 Accent가 되는 주 피사체를 놓고 찍는다. 이럴 때 이상적인 비례 조화 균형이라는 아름다움이 표현되며, 인간에게 가장 결정적인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인물 사진의 경우는 Dynamic Symmetry가 된다. 이 하나만 적용해도 훨씬 나은 구도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부탁한다. 여권 사진도 아니고 수감자를 찍는 머그샷(mug shot)이 아니라면 제발 주 피사체를 정중앙에 놓지 마시라.
미치 리우에(Mitch Leeuwe)가 제시한 그림 구도
주 피사체를 놓는 위치에 따라 사진의 표정이 바뀐다. 피사체를 어디에 둘지 결정하는 것은 사진가의 몫이다. 권력자로서 결정할 것인가 섬기는 자로 결정할 것인가? 예수님은 섬기는 자의 자리에 서셨다. 제자들에게만 그러시지 않았다. 안식일에 찾은 가버나움 회당,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도 그러셨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3:1~5)
가버나움에 갔을 때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 회당은 방이 둘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회당은 남녀로 구분되었다. 이 사람은 남자였으니 여자들보다 앞자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가 있어 회당에서도 그는 변두리에 있어야만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세요”(새한글성경)
얼마나 멋진 말씀인가!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세요.’ 그는 단 한 번도 가운데서 살지 못했다. 주변부 인생, 아웃 사이더로만 살아야 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장바닥도 아니고 회사도 아니다. 회당이다. 예배당이다. 예배당마저 그를 밀쳐내고 있었다. 언제나 변두리 인생, 밑바닥 인생, 3류 인생, 루저로 살았던 사람을 향해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세요.” 예수님은 그를 주 피사체로 불러내셨다. 주목받는 인물로, 존중받는 인물로,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우리 예배당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가운데로 불러낼 수 없을까?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교회가 많아지면 좋겠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신다.
사진은 토브보다는 야페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패션잡지나 상업적 사진은 모두 외형적 미를 추구하는 야페이다. 그러나 토브를 추구하는 사진도 있다. 유니세프나 굿네이버스 같은 단체가 보여주는 영상이다. 그린피스와 같이 기후 위기로 파괴되는 지구 생태계를 안타까운 가슴으로 바라보며 고발하는 사진가도 토브로 사진을 찍는다. 국경없는의사회처럼 테러나 전쟁으로 파괴되는 현장을 고발하고 생명을 치료하는 현장 사진도 토브성 사진이다.
물론 지나치게 틀에 박힌 구도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전혀 사진 구도에 맞지 않는 구도로 촬영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해야 할 때도 있다. 파조(破造)이고 파격이다. 이론은 기본이고 원칙일 뿐 만고불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고정불변일 수는 없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나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게 그림인가 싶을 정도로 엉망이다. 아니다. 그가 어렸을 때 그린 스케치를 아는 사람은 그가 데생의 기본이 얼마나 탄탄했는지 안다. 11세 때 그린 토르소 스케치만 봐도 그렇다. 기본이 있고야 응용이 있고 융통성이 있다.
하나님도 그런 분이시다. 사울 왕의 명을 받은 체포조에 쫓겨 다니던 다윗 일행이 성막을 찾아왔다. 너무 급한 나머지 다윗은 아무 것도 챙기지 못한 상태, 우선 병사들의 시장기를 달래줘야 한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을 꺼내 준다(삼상 21:1~6). 진설병,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안식일 아침마다 진설병상 위에 올려놓는 열두 덩이 떡이다. 제사장과 그 가족들만 먹어야 한다. 그게 율법이다. 그런데 아히멜렉은 그런 진설병을 다윗 일행에게 준다. 주면 안 된다는 율법을 알면서도. 허기진 병사들의 배를 달래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거나 진설병을 함부로 아무 때나 주는 것은 문제다. 하나님이 그냥 두실 리 없다. 그러나 하나님도 아히멜렉의 포용적 율법 이해를 용납하셨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의 안식일 논쟁에서 그 사건을 설명하기까지 하셨다(막 2:25~28).
율법의 개방적 적용은 하나님이 먼저다. 땅은 하나님의 것, 다른 지파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려 남자들에게만 분배하도록 했다. 그게 율법이다. 이른바 남자는 장가 ‘들고’ 여자는 시집 ‘가기’ 때문이다. 부의 편중을 막으려는 장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들만 낳은 가정도 있을 테고 아들딸을 낳는 가정도 있겠지만 딸만 낳는 가정도 있었다. 슬로브핫이 그랬다. 다섯을 낳았는데 모두 딸이다. 딸들로서는 걱정이 태산이다. 아버지가 딸들만 낳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아버지 소유의 땅은 어찌 되는가? 슬로브핫의 딸들이 모세를 찾아가 사정을 말한다(민 27:2~4). 율법에 익숙한 모세도 처음 겪는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나님께 여쭙는다. 하나님의 대답이 놀랍다.
“슬로브핫의 딸들의 말이 옳다!”(민 27:7)
지엄한 하나님의 율법이다. “감히 너희가 내 율법에 이의를 제기할 참이냐!” 호통치실 것 같은데, 너희들의 말이 ‘옳다’ 하신다. 슬로브핫의 딸들의 말, 율법의 한계, 율법의 불완전함을 제기한 것이 아닌가. 무엄한지고! 감히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태클을 걸다니...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받아주신다. 하나님의 권위가 손상될 법도 한데.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율법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하신다. 바뀌되 더 포용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바뀐다. 이게 성경이다. 이럴 때 하는 게 할렐루야다.
예수님을 보라. “~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태복음 5장에만 여섯 번 나온다(22, 28, 32, 34, 39, 44절). 두 눈 부릅뜨고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이 있음을 잘 아시면서도 제자들에게 율법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셨다. 옭아매는 율법, 꼼작 못하게 감시하고 처벌하려는 율법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 1926~1984)가 쓴 《감시와 처벌》에 판옵티콘(panopticon, 원형감옥)이 나온다. 공리주의자 벤담(J. Bentham)이 고안한 감옥 구조다. 감시자는 높은 감시탑에 있고 수감자들은 낮은 곳 철창 안에 있다. 중앙 감시탑에서 강한 빛을 아래로 쏘면 수감자들은 감시탑의 감시자를 볼 수 없다. 감시자가 없어도 감시하는 줄 알고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며 ‘자체 검열’에 들어간다. 가장 적은 인원으로 가장 많은 이들을 감시할 수 있다. 판옵티콘은 최대 효율을 올릴 수 있는 공리주의적 구조물이다.
몇 년 전 일제가 만든 서대문형무소(서대문형무소역사관)를 찾아갔다. 옥사 배치와 격벽장을 둘러보며 확인했다. 거의 판옵티콘이다. 일제가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기 딱 좋은 공간 구도다.
바울 선교지를 둘러볼 때 소아시아(튀르키에) 고대도시 에베소에도 갔다. 두란노서원이 있던 곳도 궁금했고, 바울 일행이 끌려갔던(행 19:25~41) 대극장도 현장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지름 154m, 높이 38m 반원형 구조로 총 66층의 줄이 3개의 단으로 나누어진 객석이다. 요즘은 안전을 위해 세 번째 단은 펜스로 막혀 있다. 일행이 무대 바로 앞에 있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높은 곳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콤팩트 카메라로 대극장과 바울 당시 항구에서 에베소로 곧게 뻗은 주 진입도로까지 프레임에 넣고 몇 장을 찍었다. 출국 전 이미 그걸 생각해 두었으니까. 숨을 몰아쉬며 연신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행은 저 아래에서 찬양을 불렀다. 가장 멀고 가장 높은 곳인 데도 찬양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대학 시절 강의실에서 들었던 로마의 건축술을 귀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놀라운 구도이다.
몇 년 후 이스라엘·요르단 바이블랜드 답사 때 헤롯이 황제를 위해 건설한 해양신도시 가이사랴에 갔다. 거기도 물론 원형극장이 있다. 가이드는 무대에서 찬양을 부르고 우리는 객석에서 들었다. 로마 건축술을 재확인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은 모두가 들어야 한다. 변두리에 있든 가운데 있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상관없다. 예배당 앞자리는 금자리, 중간은 은자리, 뒷자리는 ‘똥’ 자리라고 했던 때가 있었다. 무의식 중에 모든 것을 돈으로 표현하는 자본주의적 사고가 드러난 것이라 씁쓸하기는 하지만 다시 물어본다. 당신은 어디에 앉아 예배하고 싶은가? 어디에 앉아 예배하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