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철 목사 / 초원교회 원로, 부산외국어대학교 초빙교수


류윤욱 목사(1928-2023)는 1960년 고려신학교(14회)를 졸업하였고, 한참 전인 1953년 추풍령교회를 개척하여 섬겼고 초곡교회와 용전교회, 옥산교회 전도사를 거쳐 경주교회(1962-1976)에서 사역했다. 그리고 대구 성산교회(1976-1996)에서 은퇴했다. 고신교단 제36회 총회장을 위시하여 여러 부서에서 임원으로 봉사했다. 교회사학자 최은수 교수는 류윤욱 목사의 삶과 목회를 알고 ‘한국의 사도 요한’이라고 칭하며 대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장남 류종근 장로(대구 산성교회)를 만나 그의 아버지 류윤욱 목사에 관해 들어 보기로 했다.

고 류윤욱 목사
고 류윤욱 목사
류종근 장로
류종근 장로


신재철 교수: 장로님은 류윤욱 목사님께서 93세에 저술하신 ‘빛 되신 주 내 길을 비추시다’에서 ‘나의 아버지 류윤욱’이란 감사의 글에서 류 목사님을 “대단하시다”라고 표현하셨는데 이에 대해 좀 듣고 싶습니다.

류종근 장로: 누구든지 그 부친에 대해 기억하면서 삶의 여정을 돌아볼 때 감회가 클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93세의 고령에 지난날의 삶과 목회 그리고 교단 행정에 동참했던 기록들을 PC를 이용하여 기록으로 남기심이 대단하셨지만, 어떤 면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아버지의 목사로의 여정을 지켜본 저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사로서, 그리고 교단 행정에 참여하신 지도자로서 정도와 정향을 추구하심이 대단하시다는 마음을 가지고 표현한 것입니다.
 

신재철 교수: 글에서 류 목사님께서 교단의 일로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셨을까요?

류종근 장로: 1946년 고려신학교 설립 시에 합류한 이들을 통해 1952년 기존 총회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되어 고신교단이 설립되었고 이때부터 재산권 소송에 휘말렸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성도 간의 불신법정소송을 반대하시다가 결국 1960년 고신교단을 떠나셨고, 송상석 목사님은 당한 소송에 응소하여 고신교단의 재산권을 지켜내셨습니다. 이때 또 다른 중요한 지도자인 한상동 목사님은 두 분의 이견 사이에서 애매한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송상석 목사님을 긍정하신 것으로 나타났지요.

이후 1970년대에 고신교단은 내부에서 소송 문제에 휘말렸습니다. 송상석 목사님은 법정 소송까지 당하였고 면직 처분을 받으셨습니다. 송 목사님은 1950년대는 교단이 달라 소송 문제를 해결할 내부 기구가 없어 응소했지만, 1970년대에는 교단 내부에서 해결했어야만 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교권을 잡은 이들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송 목사님이 고려학원 이사장이실 때 아버지는 서기로 섬기셨기에 이 소송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신재철 교수: 소송 문제로 인한 어려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었을까요?

류종근 장로: 아버지께서 경동노회의 경주교회를 담임하실 때 성도 간의 불신법정소송이 옳지 않음을 들어 계속하여 주도적으로 고신총회에 반 고소를 주장했습니다. 이런 문제가 전면에 부상되기 전인 1972년 22회 총회에서 송상석 이사장을 불법적으로 해임시키고자 한 일이 있습니다. 이때 점심 식사 후 총회가 재회 되자 아버지의 발언으로 교권주의자들의 의지를 꺾은 일이 있습니다. 이 일로 아버지는 고신교단에서 한상동 목사님을 지지하는 ‘한파’가 아니고 송상석 목사님 편의 ‘송파’로 분류되었고 한파가 대세인 교단에서 당하신 고난이 연속되었습니다.


신재철 교수: 결국은 그 소송 문제로 1975년에 고신교단에서 고려교단(반고소 고려)이 분리되었지요?

류종근 장로: 그렇습니다. 1970년대 당시만 해도 소장파였던 하찬권 목사님과 석원태 목사님을 중심으로 반고소를 주장한 이들이 서울에 고려신학교를 세웠고 이때 반고소 사상을 가지고 경동노회에서 내부 투쟁을 하였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이름을 그 고려신학교 이사에 기록함으로 아버지가 홍역을 치르셨습니다. 석 목사는 그의 선배인 아버지께서 당연히 반고소사상을 가졌으니 자신과 함께하리라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이름을 올려 고신교단으로부터 어려움을 크게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지혜롭게 사실을 들어 대처하심으로 결백은 밝혀졌고 이것이 후에 교단에서 아버지를 이해함에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신재철 교수: 류윤욱 목사님을 이해함에 중요한 사건이라니 궁금하네요.

류종근 장로: 고신 23회 총회(1973)는 성도 간의 사회법정 소송 불가를 결의하였지만 1974년의 24회 총회에서는 1년 전의 결의를 뒤집고 소송남용금지로 번복하여 결국 소송의 길을 연 셈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송상석 목사님을 사회 법정에 소송하고 총회에서는 재판국을 열어 면직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아버지께서는 경동노회를 통하여 23회 총회의 결의대로 돌릴 것을 거듭 요구하였고 송 목사님에 대한 조치가 부당하였음을 주장하셨습니다.


신재철 교수: 류 목사님이 반고소 사상을 가지셨다면 석원태 목사님의 뜻대로 고려교단에 합류하시어 뜻을 관철하심이 옳지 않았을까요?

류종근 장로: 저는 아버지의 훌륭하신 점을 이 부분에서 찾았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교파가 많고 교단이 더욱 난무합니다. 특히 합동 측 교단에서 셀 수 없을 정도의 교단이 생성되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 됨에 의구심이 들게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불신자들도 교단의 난립에 대해 조소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염려하고 이끌어야 하는 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에 대해 염려하는 기막힌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성도 간의 사회법정 소송이 고린도전서 6장의 소송 불가를 어기는 진리 문제였을지라도 교단이 나누어지는 일을 결단코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내부에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위해 고투하셨습니다. 아버지가 크게 신뢰하고 따르던 송상석 목사님이 경남법통노회와 함께 분리되어 석원태 목사와 함께 고려교단을 설립하셨을지라도 아버지는 교단을 나누는 일에는 추호도 동참하지 않으셨습니다. 송 목사님도 아버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셨고 이에 대해 아버지는 후일 역시 이런 면에서도 송 목사님은 훌륭한 지도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재철 교수: 역사학도인 저도 류 목사님께서 교단 분열에 동참하지 않고 다수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내부 개혁을 위해 헌신하신 점을 높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런 류 목사님이 1986년 제36회 총회에서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넘어 총회장이 되셨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류종근 장로: 그 당시에 ‘송파’로 분류된 아버지께서 총회장이 되신다는 일은 상상조차도 어려웠지요. 세 표 차이로 당선이 되셨는데, 종종 신 교수님의 글을 보면 총회 총대들이 아버지의 신앙과 인격을 신뢰한 결과라고 쓰셨더군요. 저는 아버지가 결과적으로 한상동 목사님의 반대편에 서셨다는 이유로 한학수 목사님을 통하여 호된 공격대상이 되셨음을 아버지 회고록 등을 통해 뒤늦게 알았습니다. 세상적으로 판단하면 원수지간이었더군요, 그런데 저는 당시 한학수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대구 대현교회에서 찬양대 반주자였고 그런 상황을 전혀 몰랐습니다. 신 교수님께서 2021년에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이에 관하여 물으시니 저의 신앙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으시려 일절 언급하지 않으셨다고 하시어 곁에서 듣고 눈물이 나는 것을 참지 못하였습니다.


신재철 교수: 그것이 류 목사님의 신앙 인격이셨습니다. 류 목사님께서 설교집 두 편을 내셨고 고신 역사를 담은 책 두 권도 출간하셨지요?

류종근 장로: 2011년에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를 내셨습니다. 역사 연구에 공헌한 인물을 무시하지 못하지요. 신 교수님도 잘 아시는 대로 고신교단은 한상동, 송상석 목사님을 빼고는 설명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송상석 목사님을 무시했고 경시함으로 고신의 역사기술이 공정하지도 균형이 잡히지도 못하였습니다. 고신 역사의 전문학자이신 이상규 교수님과 신 교수님의 노력으로 이 문제가 언급되기 시작한 즈음에 아버지의 이 책 출판은 고신 역사의 정립이 중요함을 일깨운 책이 되었습니다. 책이 출판되기 전에 아버지는 고난의 경험이 엄청나게 많으셨지만, 그 책이 나오고 나서는 오히려 평안하셨습니다. 교권주의자들이 전쟁을 걸어 올 것을 대비하셨지만 정반대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세 차례의 송상석 기념강좌를 대하고 보니, 아버지의 그 책에서의 기술이 모두 사실에 근거한 역사기록이었기에 상대편에서 잠잠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중에 아버지는 주님의 부름을 받으시기 두 해 전인 93세에 자서전을 남기셨지요. 이상규 교수님께서 제목을 붙여 주셨는데 ‘빛 되신 주 내 길을 비추시다’였고 부제로 ‘고신의 산증인 류윤욱 목사가 걸어온 길’이라고 적었습니다. 너무나 멋진 책명이었고 부제였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앞의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라는 제목은 이상규 교수님께서 그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시려다가 아버지의 역사 증언이 너무나 귀하고 중하여 제목 자체를 양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신재철 교수: 제가 역사학도로서 연구하는 데 류 목사님은 멘토셨습니다. 류 목사님이야말로 거목이시고 거장이셨습니다. 류 목사님이 2023년에 소천하신 후 류 장로님을 보니 큰 위로가 됩니다. 신앙의 계승은 물론 아버지의 뜻을 이어 고신 역사 정립을 위해 2024년 10월 18일에 류 목사님께서 사역하셨던 대구 성산교회당에서 ‘류윤욱 목사 소천 1주기 기념강좌’도 크게 섬기셨지요. 강사셨던 경동노회의 샘터교회 강현복 목사님이 ‘류윤욱 목사의 경동노회와 고신교회 기여’를 연구하면서 류 목사님을 대단히 존경하는 어른으로 가슴에 새겼다는 말이 생생합니다.

류종근 장로: 그 현장에서 강의를 들으며 그렇게 사신 저의 부친을 정도를 걸어가도록 인도하시며 사용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신 교수님의 대담 요청에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응하였지만, 아버지께서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진리를 고수하는 일에 타협이 없으셨고 교단이나 교회를 쪼개는 일을 극히 반대하신 일은 작금의 교회 세속화가 농후한 시대에 교훈으로 새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재철 교수: 장로님께서 아버지에 관한 부분을 정통하셨군요. 아버지의 정신은 2015년에 고신 역사에서 꿈처럼 성취되었습니다.

류종근 장로: 이번에는 제가 신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설명하여 보겠습니다. 그간 신 교수님과 여러 책을 읽고 이해한 부분입니다. 맞는지 확인도 청합니다.

1975년에 반고소를 표방하고 석원태 목사님이 분리한 교단은 고려교단으로 존속했지요. 이 교단은 1985년에 고려신학교 34회 졸업생을 중심으로 고신과 통합했고 2000년에는 65명의 목사가 고신과 통합하여 서경노회가 허락되었습니다. 2015년에는 아예 고려와 고신이 총회적으로 통합했습니다. 이때 고려의 요구를 받아 23회 총회의 결의대로 반고소가 성경 진리임을 확인했고 나누어진 교단은 다시 하나가 되었지요. 그러니 저의 아버지께서 교단을 지켜주신 점들이 얼마나 중요했나를 생각하며 대담의 기회를 주신 기회에 저의 마음을 전해 드리는 것입니다.

고려신학생 시절의 류윤욱 목사
고려신학생 시절의 류윤욱 목사
고려학원 이사장 시절의 류윤욱 목사(1992)
고려학원 이사장 시절의 류윤욱 목사(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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