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철 목사 / 초원교회 원로, 부산외국어대학교 초빙교수
작금의 한국교회는 안팎으로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외적으로는 미래세대의 급감으로, 내적으로는 교회의 세속화 현상으로 결국 교회가 세상을 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실정이다. 이런 때일수록 교회 안의 예배 생활이 세상에서 생활 예배로 나타나야 한다.
덕두교회 문홍대 장로(1957- )는 주님의 명령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산 대표적인 장로이다. 그를 만나 성도들에게 선한 영향력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담했다. 문 장로는 겸손히 사양했으나 한국교회를 위해 강권함으로 대담에 응하였음을 부기한다.
신재철 목사: 가족과 본인의 신앙 배경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문홍대 장로: 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장로와 권사의 모태 교인으로 태어나 자랐습니다. 신앙의 가정이어서 교회 중심의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유초등부 주일학교 계단 공과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고, 중고등부 수련회에도 열심히 참석했으며 교회의 부흥회에도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당시 출생지는 농촌이었기에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가난이 지속되었고 어려서부터 소여물(소죽) 끓이기, 소 꼴 먹이기, 밭매기 등의 고된 생활 중에도 성경 중심의 교육을 받은 것이 큰 힘이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정독으로 2독(讀) 이상해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기에 성경을 가까이하고 말씀을 통하여 위로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것이 저를 사로잡았기에 무슨 일에든지 저의 삶에 기준이 되었습니다.
신재철 목사: 장로님은 직장생활에 특이한 이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문홍대 장로: 1976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려고 하였으나 주일에 쉬는 직장이 거의 없었지요. 한번은 어느 회사에 지원하여 최고 성적으로 합격까지 하였으나 주일에 쉬지 않는다고 하여 포기했었습니다. 그 후 군에 입대 시기가 되어 기도하던 중 군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1977년 7월에 현 덕두교회가 있는 이곳 부산(당시는 김해)으로 발령을 받아 고향을 떠나 홀로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1977년도에 7급에 합격하였고 4년 후인 8월에 5급으로 승진하였습니다. 당시 6급에서 5급(사무관)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고액의 청탁비가 공공연하게 만연하여 있던 시기였습니다. 감사하게도 1981년도에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1. 향응접대(향응 부조리) 2. 부정 청탁(청탁 부조리) 3. 향락퇴폐 행위(향락 부조리)라는 3대 부조리 척결을 내세워 저는 너무 자유로웠음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편이셨습니다.
청탁이 없이 오직 시험(실력)으로만 합격한 제가 군 내의 참모들에게 그리 곱게 보이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만 23세의 나이에 5급이 되었으니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상 최연소 나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은근히 왕따 등 저를 괴롭히는 일이 있어 힘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회식 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참모들과 회식할 때면 온갖 음담패설과 은근히 요구하는 것이 술뿐 아니고 성 접대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을 할 줄도 모르고 저의 신앙 양심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술을 마실 때는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돌아가면서 "노털카”를 시켰습니다. '털지도 말고 카라는 소리도 내지 말라'는 그런 뜻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순서가 제게 오면 저는 그 분위기의 맥을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휘관과 상급자들은 부하들 앞에서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반드시 저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다고는 단정할 수 없으나, 그 당시 저와 함께 바로 옆에서 근무했던 불신자 중 한 사람은 오랜 후에 김해에서 장로가 되었고 친한 동료 한 사람은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함께 근무했던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저의 목표였기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모든 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변함없이 계속되심을 믿고 견뎠습니다.
그러던 중 1987년도 말에 저는 미운털이 박힌 사람인지라 광주의 신설된 시험소 반장으로 발령이 났었습니다. 낯선 그곳에서 생활이 불편하고 어색하고 새로운 교회에서의 적응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직장생활에서도 변함없이 신자로서 삶의 모습을 보이면서 직장동료들을 위한 기도를 계속했고 저 자신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대한항공으로 이동시켜 주실 것을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로 짧은 7개월 정도의 광주 생활을 접고, 11년 보름의 군 생활도 청산하고 1988년도에 대한항공으로 이직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광주 지역에 함께 근무했던 술고래 상사와 골초 군무원이 장로와 안수집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기도하게 하시고 계획하신 일을 이루신 것이라 확신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항공회사에서 31년을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일을 맡기실까?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입사한 세상적으로 막 나가는 친구가 저와의 면담을 요청하더니 “문형, 저를 좀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요청에 저는 빠르게 응답하며 복음을 전하였고 그를 교회로 인도하여 현재 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과 사명에 대해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시키시려고 이곳에 보내셨다고 생각하며 퇴직할 때까지 하나님 자녀로서의 품격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직장생활을 했었습니다. 지금도 이와 같은 사명감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며 직장생활을 합니다. 말로 하는 복음 전파(전도)가 중요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삶과 사역의 현장에서 몸으로 전하는 복음 전파를 위해 투입된 자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재철 목사: 교회의 지도자로서 인생을 사시면서 가장 중점을 두시고 하신 일은 무엇인지요?
문홍대 장로: 1976년에 직장을 따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오게 되었고, 그 당시 제일 먼저 찾은 곳이 교회였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당시 덕두교회의 담임목사이셨던 백종우 목사님을 찾아갔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아들처럼 맞아 주셨고, 저의 부모님도 목사님께 잘 부탁드린다고 하시면서 이곳 덕두교회에서의 신앙과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목사님의 가르침은 신전 인격자, 인화 협동적인 인격자, 문화적 인격자를 강조하시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목사님은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항상 그 삶에서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신앙의 생활에서 항상 모든 성도보다 앞서 계셨습니다. 그 신앙훈련 덕분에 청년 시절에도 섬김과 봉사도 끊이지 않았고 기쁨으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유년주일학교 교사와 총무로, 찬양대로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기도 생활도 열심히 하였는데, 저와 다른 집사님 한 분이 매일 교대로 번갈아 가며 교회에서 기도하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새벽엔 새벽기도 타종하는 임무도 함께 맡았었습니다. 부산으로 오기 전에 기타를 칠 수 있도록 연습을 많이 했었는데, 그것이 주일학교에서 찬양을 가르치는 데 정말 유용하게 쓰임을 받았었습니다. 엄격한 고신 교단인지라 그 당시는 ‘사탄의 악기’라 불렸었지만, 손수 붓글씨로 차트도 만들고 아이들에게 찬양도 가르치는 봉사를 통하여 그러한 염려를 불식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일을 위하여 미리 준비시키셨습니다.
덕두교회에 제일 먼저 기타를 들여오게 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유년주일학교 뿐만 아니라 청년회와 기관의 모임, 교인 전체 모임 등에서 항상 찬양 사역에서 기타로 봉사하였습니다. 1993년 3월에 안수집사로, 2002년 11월에 장로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2023년 10월에 현재의 최기천 목사님이 오실 때까지 너무나 어려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제게도 부족함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50여 년을 지키며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보이는 점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일깨웠습니다. 천 마디의 말보다 내 몸으로 직접 솔선수범하는 것이 진정한 가르침이고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신앙 생활하면서 고신 교회의 정신인 하나님 앞에서라는 '코람데오'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직장생활에서도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참 스승은 예수님이시니까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했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 생각하고 실천하고자 힘을 냈습니다. 모태 교인으로 70세를 바라보지만, 아직도 부족함이 많이 있다고 여겨 하나님 말씀을 부여잡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신재철 목사: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한국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문홍대 장로: 이 질문은 제게 다소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래도 저의 짧은 소견만 말씀드리자면, 교회가 성경대로 하자니, 교인을 잃을 거 같고 인간적으로 용납하다 보니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성장 사이에서 정답은 질과 양이 함께 성장하는 것이겠지만,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에 더욱 비중을 두느냐 하는 것은 딜레마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헤매고 상황에 따라 기도로 답을 구하지만, 주님의 응답이 우리의 기대와 다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대세에 따라 휩쓸리는 현실 속에서 정도(正道)를 고수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현재의 여러 상황 즉 인구감소, 노령화, 환경문제, AI 도래 등에 따른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특성을 잘 고려해서 특화된 방향으로 가야만 되겠지만,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3대 강령은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주의가 성행함으로 신앙도 사사기에서 언급된 말씀처럼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본인이 좋아하는 대로 선택적으로 말씀을 듣고 본인의 판단에 옳은 대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가르침에는 이제 한계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 개개인의 선택을 돕기 위해서는 훌륭한 모델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러한 모델이 많아지는 교회가 올바른 교회가 될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재철 목사: 이참에 한국 교계에 던지고 싶은 화두는 무엇인가요?
문홍대 장로: 성경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말씀을 해석함은 다 다릅니다. 사이비 종교와 이단도 있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을 그 어떤 누구보다 더 말씀대로 잘 섬기고자 하는 정신이 여러 교단으로 나눠진 것은 이해가 되지만, 성공의 기준을 대형교회를 목표로 잡는 점은 잘못된 일이라고 판단합니다.
일만(一萬)교회 운동을 벌이던 고신 교단은 술집과 나이트클럽이 생기는 것보다는 교회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면서 시작했지만, 지역에서 교회의 역할은 살아남기에 급급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행함에는 거리가 먼 모습들이 보여 안타깝습니다. 교회 간의 빈부 차이, 사역자들 간의 빈부격차가 모두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사역자들의 성공의 척도인 것처럼 여겨지고 고달픈 현실의 사역자들 또한 그러한 편안함과 부(富)를 누리는 삶을 동경하고 그 세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성공으로 여긴 사역자들의 결말은 썩은 과일이 떨어지듯 다 떨어지는 것을 저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사역자들도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다며 그 말씀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그 말씀대로 사는 데 부족함이 보입니다. 목사님들이 설교하신 대로 살고자 노력함을 보였으면 합니다. 목회를 직업이 아닌 사명으로 다시 인식하고 한 영혼을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함에 최선을 다하셨으면 좋겠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신재철 목사: 이제 장로직 은퇴를 앞둔 신앙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또는 다음 세대에 주시고 싶은 명언 한마디는 무엇인가요?
문홍대 장로: 한마디로 명언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뻔한 얘기이기도 하며, 저도 이렇게 살지 못하면서 외칠 수는 없지만, 목표라고 생각하고 한마디 말씀드리자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에 빛이요 등이며, 나의 삶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실 것을 저는 믿었고 삶에서 간증 거리로 나타났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은 빛이셨고, 공의의 하나님이셨고, 사랑의 하나님이셨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려면 말씀을 잘 알아야만 되고 또 순종하는 삶이 될 때 가능합니다. 말씀을 잘 알고 순종할 때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수도 없이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말씀 속에서 성령께서 인도하심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이라 확신합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예수님이 십자가 형벌이란 저주를 받은 일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이지요. 이에 대한 감사는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자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를 대담에 청하신 것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주님의 자녀로 살고자 노력한 점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노력한 것은 제 양심의 고백이지만 앞으로 더욱 그렇게 살라는 뜻으로 알고 대담에 응한 점도 있습니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저의 힘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가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