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철 목사 / 초원교회 원로ㆍ부산외국어대학교 초빙교수ㆍ본지 편집인

부산시 영도구에 있는 제일영도교회(강화구 목사)는 1896년에 설립되어 2026년에 설립 130년을 앞두고 감사예배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동 교회는 장로교회의 기존의 단일총회에 소속되었다가 1952년부터 고신총회에 속한 교회로 특별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교회가 위치한 부산 영도구는 젊은이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함 등으로 인구감소 현상이 두드러진 가운데도 강화구 목사가 16대 목사로 부임(2019.12.15.)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성도들에게 교회의 역사의식을 일깨우고 고신총회의 설립 정신을 교훈하면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고 있다. 제일영도교회는 장자교회의 역사에 걸맞게 교회 안에 역사관을 설치함으로 성도들과 나아가 고신 교회의 역사 성찰까지 돕고 있다. 이에 제일영도교회 강화구 목사와 대담의 자리를 마련했다.

강화구 목사와 대담
강화구 목사와 대담

신재철 교수: 강 목사님과 대담하게 되어 감사히 여깁니다. 우선 독자들을 생각하시어 간단하게 강 목사님의 소개를 청합니다.

강화구 목사: 먼저 이렇게 귀한 대담의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난 2019년 말부터 제일영도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친 이후,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와 기회를 주셔서 13년간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구약학을 조금 더 깊이 공부할 수 있었고, 귀국하여 제일영도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130년에 가까운 전통을 가지고, 교단에서도 귀중한 역사를 만들어 온 교회에서 목회하는 점이 큰 영광이요 은혜라 여깁니다.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위기의 순간 버텨내고 극복하는 우리 교회만의 특별한 저력을 느끼면서 목회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은퇴하고 다음 목회자에게 바통을 넘겨줄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목회로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제일영도교회
제일영도교회
제일영도교회 구 예배당
제일영도교회 구 예배당
제일영도교회 교육관
제일영도교회 옛 교육관

신재철 교수: 제일영도교회는 장로교 단일총회(1896-1952)에 속하였다가 신사참배 문제로 1952년 고신교단이 형성하였을 때 함께 함으로 현재 129년 역사 중 고신 교회로 73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신총회의 중요한 역사를 지닌 교회인데 제일영도교회가 고신총회에 속하게 된 배경과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강화구 목사: 1952년 당시는 대한민국은 물론 우리 교단에도 격동의 시간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우리 교회는 단일총회의 경남노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당시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 운동이 전개되는 중에 교단 내에서 이를 강조하는 경남노회가 축출되는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 1952년 9월 축출된 경남노회(법통노회)를 중심으로 총 노회가 조직되었고, 그것이 시작이 되어 고신교단이 출범하게 되었죠. 이런 변화의 시간에 우리 교회도 고신 측 총 노회에 소속하게 되었고, 당시 우리 교회를 목회하셨던 한명동 목사님을 비롯해 박손혁 목사님 등이 고려 신학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오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신총회에 자리를 잡게 된 것으로 압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아시는 내용이 될 텐데요, 사실 단일총회와의 법적인 동거는 그 이후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의 대지가 통합 측 경남노회 재단에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재단에 가입된 교회 대지를 나누는 최종적인 행정 절차는 1995년이 되어서야 마무리됩니다. 이런 절차를 마무리하게 된 것은 1996년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재철 교수: 현재 고신총회는 KPM(고신총회선교회)을 통해 선교를 모범적으로 감당하는 교단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제일영도교회가 고신 최초의 선교사를 배출한 교회로 압니다.

강화구 목사: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고신총노회가 1952년 말에 조직되었고, 고신총회가 시작되는 것을 기념하여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했는데, 이때 우리 교회 출신이신 김영진 선교사님이 대만으로 가심으로 최초의 해외 선교사가 되신 것입니다. 초대 고신총회의 선교부장이 본교회 담임목사님이셨던 박손혁 목사님이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첫 선교지를 대만으로 정하고, 김영진 목사님을 1년간 어학 준비를 시키고, 1957년 9월 17일에 파송하고, 1958년 5월에 출국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김영진 선교사님은 제일영도교회 출신으로 전도사로 섬기다가, 제2영도교회에 파송을 받아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 이후 김영진 선교사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대만 땅을 지키며 사역하시다가 평생 사랑하며 섬기던 대만 땅에 묻히셨습니다. 김 선교사님은 대만 신죽교회, 죽동교회, 화원교회 등을 개척하고 평생 섬기셨는데, 이 교회들이 1963년부터 세워졌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2025년은 개척한 교회들이 60년을 넘기는 시점입니다. 우리 교회는 50주년 때도, 60주년 때도 신죽교회 등을 방문하여 함께 감동적인 예배를 드렸고, 신죽교회, 화원교회 등은 60주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 교회로 사모하던 우리 제일영도교회에도 방문해서 함께 예배하며 교제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그들도 교회 60년사 책을 출판하여 우리에게 보내주기도 했죠. 지금도 김영진 선교사님의 따님과 사위인 김영수 선교사님은 선교사역을 은퇴하신 이후에도 대만으로 건너가 김영진 선교사님이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며 순회하며 사역하고 계시니, 대만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대를 이어 충성하고 계신 셈입니다.


신재철 교수: 한명동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때인 1949년에 제일영도교회가 분립 개척하여 영도에는 여러 영도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한국교회의 중요한 모델을 제시한 선구적 교회란 생각이 드는데 분립개척 역사에 대해 설명하여 주시겠습니까?

강화구 목사: 사람들이 영도에 오시면 영도에 숫자로 된 교회 이름에 관해서 자주 묻곤 합니다. 이런 역사가 한국교회 안에서도 아주 독특한 역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곳에 제일영도교회가 세워진 지 거의 130년이나 되었고, 우리 교회가 세워진 지 50년이 넘어가는 때 즈음에 교회를 분립할 결정을 하게 됩니다. 1949년 7월 17일 결의에 따라 우리 교회는 제2, 3, 4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기도소를 설립했습니다. 1952년까지는 대체로 오전 예배는 우리 교회에서 함께 드리고, 나머지 다른 예배는 각기 기도소로 흩어져서 예배를 드리다가 52년 6월 이후에 완전히 독립된 교회로 세워지게 됩니다. 기도소 설립과 성도를 파송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교회의 필요한 건축비와 생활비 등을 지원하면서 초기에 교회가 바로 세워지는 데 중요한 역할들을 했습니다.

제5 영도교회 경우도 교회 당회록에 따르면 1949년 7월 31일에 결의하여 기도소를 설립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 제5 영도교회의 연혁을 보면 53년 임교원 조사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49년 기도소 설립 이후 폐쇄했다가, 53년에 다시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임교원 조사는 당시 제5 영도교회와 제6 영도교회 두 교회로 파송을 받아 사역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때인 1953년에도 우리 교회가 상당한 분량의 건축비를 제5 영도교회를 위해 지출하기도 하는 등 일정한 역할을 계속했습니다.

제일영도교회의 분립 및 개척 사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1949년에 부산내륙에서 교회로 출석하던 제9구역 식구들을 중심으로 현재 동광동에 부산남교회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963년에는 송도제일교회 설립을 위해 우리 교인들을 파송하기도 합니다. 당시 송도제일교회 개척의 주역이었던 박재영 목사, 박영훈, 김하용, 정기상, 서인만 등 다수는 실제 제일영도교회 출석 교인이었다가, 송도제일교회 개척 설립에 동참하고, 그 후 64년이 되어서 송도제일교회로 이명을 해 가게 됩니다.

그 외에도 제6 영도교회의 시작도 우리 교회와 관련이 있습니다. 1918년 조도교회(지금의 해양대학교)가 시작되었는데 당시는 제일영도교회의 담임목사가 조도교회와 항서교회를 동시에 담임하던 때였습니다. 1953년 제직회 기록을 보면 조도교회 건축을 결의하고 당시 돈으로 1만 2천5백 환을 지출하고, 그 후 매월 3천 환의 보조금을 지출하며, 담임교역자로 임교원 전도사를 파송합니다. 그 조도교회가 현재 제6 영도교회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제9 영도교회도 제일영도교회 김영선 장로를 중심으로 사업체 공장 일꾼들과 이웃을 모아서 고은교회를 개척했는데, 이것이 모체가 되어 제9 영도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때가 1985년인데, 86년부터 개척교회 설립을 위한 건의안을 채택하고, 우리 교회가 제9 영도교회 교역자의 생활비를 지급할 뿐만 아니라, 건축 협력 추진위원회를 조직해서 당시 돈으로 1,700만 원을 지출하기도 합니다. 이 교회는 태종로 교회와 합병하면서 현재 은평교회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재철 교수: 고신 교회에는 학생신앙운동(SFC)를 통해 많은 기독 인재들을 양성했는데 이 단체의 모체인 ‘학생신앙협조회’가 제일영도교회에서 탄생했는데 이에 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강화구 목사: 학생신앙협조회는 1947년 4월경 제일영도교회를 담임하시던 한명동 목사님이 교회 사택에서 십 대의 학생들을 모아 기도회를 시작한 것이 모체가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사택에서 기도하던 것이, 교회의 마룻바닥 기도회로 발전했고, 더 체계적으로 기도하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행동강령을 작성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놀랍게도 단순히 10대의 삶에 관한 이야기만 아니라, 내일의 조국과 세계 교회 건설을 위한 구호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던 14명 정도의 학생 중 7명이 제일영도교회의 학생들이었고, 한명동 목사님이 지도하셨죠. 바로 이 모임이 SFC의 모체가 된 것입니다. 당시 타 교단에서 청년신앙운동(YFC)이 있었는데, 신앙협조회 멤버들이 이 모임을 주도하면서 1948년 정례모임이 진행되었고, 그때부터 전국적인 하기 수양회 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51년 9월 고려신학교에서 한명동 목사님을 중심으로 학생신앙운동 결성 준비위원회를 결성했고, 당해 10월 1일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SFC 창립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SFC의 모체라는 사실에 자부심과 책임감을 소유하고 지금도 매년 10월 마지막 주를 종교개혁 기념주일 및 SFC 주일로 지키면서 그 역사를 되새기고, 지금도 SFC 사역을 위해 정기적으로 헌금을 하는 등 여러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SFC 해외 지부에서 전도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목적 헌금을 드리기도 하고, 몽골에 SFC 간사 기숙사 건립을 위해, 그리고 학생들의 경건 생활 지도를 위한 도서 출판 등을 위해서도 헌금하여 후원하며 기도하며 동참하고 있습니다.


신재철 교수: 제일영도교회가 고신총회 복음병원의 설립에도 귀중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압니다. 이런 역사도 이번 기회에 성도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강화구 목사: 복음병원의 대지를 마련하고, 고려신학교를 시작할 때 그곳에 터를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당시 제일영도교회 담임목사였던 한명동 목사님이었습니다. 해당 토지의 주인이 약 20여 명 정도나 되었고, 매입을 위해 당시 돈으로 60만 원이 넘는 거금이 필요했었는데, 극적으로 이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복음병원 설립의 주역이었던 전영창 장로가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한 목사님이 그를 우리 교회 등록하여 출석하게 허락하셨고, 장기려 박사님도 6.25 와중에 우리 교회에 출석하며 초기 병원 사역을 주도하였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가 세운 제3 기도소 터(제3영도교회)에서 복음병원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의 고신의료원으로 확장하는 데 큰 공을 세우신 박영훈 장로님 등도 우리 교회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셨던 분입니다. 게다가 우리 교회의 황원일 장로님도 당시 의료원의 첨단 설비를 갖추는 일에 큰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의료원 본관과 신관 등 신축 때도 현장 총책임자로 일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1대 병원장, 2대 병원장을 포함하여 초창기 고신의료원의 핵심 일꾼들 상당수가 우리 교회에서 자라고 양육 받은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초기의 기초를 든든히 세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재철 교수: 고신총회의 언론매체인 월간고신과 기독교보에 제일영도교회가 모태가 된 것으로 압니다. 이를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시면 합니다.

강화구 목사: 월간고신의 모체는 1964년 당시 제일영도교회 집사였던 김영찬 장로가 발행인이었고, 정홍권 목사가 편집하여 펴낸 <고려>라는 잡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잡지는 우리 교회의 청년면려회에서 발행한 기관지였는데, 내용을 보면 단순히 일반 교회의 청년부 주보와는 상당히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엔 10페이지 정도로 시작했는데, 고려신학교나 교단의 여러 소식을 전하는 내용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로 영향을 주었던 한명동, 박손혁 목사님 등이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행정, 교수 등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잡지 <고려>는 일정 기간 후에 중단되었다가 나중에 <파수꾼>으로 발간이 이어졌고, 이후 <개혁주의>, <개혁신앙> 등으로 계승되다가 마지막으로 <월간 고신>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 청년부의 소식지였던 <고려>가 <월간 고신>의 첫 번째 전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보도 일정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1955년 기독교보가 창간될 때 기사 작성과 편집 등의 실무를 본교회 청년인 이원홍(후일 문공부 장관이 됨)이 도맡아 했었기 때문입니다. 첫 기독교보는 그렇게 시작해서 1년 남짓 32호까지 발행하다 중단되었다가 33년 후인 1989년 9월에 복간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보와 월간 고신 등이 중단된 기간을 가지고 있기에 만약 첫 발행 시점들과 현재 발행되는 책들 사이에 연결고리를 인정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하나의 소중한 유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신재철 교수: 제일영도교회가 고신총회에 여러 공헌을 한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1970년대 고신총회 안에는 성도 간의 불신법정 소송 문제가 있었고 이로 인해 석원태 목사는 반고소 고려교단을 형성해 교단을 분열했습니다. 석 목사가 제일영도교회를 떠난 것이 이 문제였는지요? 이는 제일영도교회가 중요한 역사 자료를 알려주는 일이 된다고 여깁니다.

강화구 목사: 성도 간의 불신 법정 소송 문제는 1975년 24회 총회에서의 결의가 중요한 변곡 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석원태 목사님이 경향교회를 개척하신 시점에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석 목사님이 이 부분에 대해 당신의 견해를 밝히신 것이 1973년 중순이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는 제일영도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하신 이후의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 생각에는 제일영도교회 사임과 반고소 논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적어 보입니다. 그래도 제일영도교회를 떠나 서울에서 경향교회를 개척했던 과정이 반고소 운동을 통해 고신교단과 결별하게 되는 일에 있어서 석 목사님 본인에게는 처신에 상당한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만일 제일영도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면 교단을 떠나는 결정까지는 어려웠을 수 있겠다고 제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석원태 목사님이 제일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1958년부터인 것 같습니다. 주일학교 유년부 부장으로 봉사한 것을 시작으로 주일학교 중고등부와 청년부에 이르기까지 교회학교의 여러 사역에서 두각을 드러냈었습니다. 1968년 박손혁 목사님이 사임하시면서 당시 부목사로 사역하던 석원태 목사님이 후임 목사로 선정되어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여러 어려운 일들이 있었지만, 1969년 2월부터 사역을 시작했고, 당해 9월 위임투표를 통해 위임목사로 허락되었죠. 1970년대 접어들면서 석 목사님 지도하에 교회는 획기적인 부흥과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실제로는 본교회에서 4년 정도밖에 시무하지 않았지만, 말씀에 있어서 탁월한 은혜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부임 시 340명 정도였던 교인 수는 사임하기 전인 72년 장년 평균 600명이 넘었고 주일학교도 평균 390명 정도였습니다. (72년 1월 첫 주 출석은 882명).

이런 상황을 뒤로 하고 교회 안에 분란이 시작된 것은 석 목사님의 당회 운영 방식과 장로들이 원하는 바가 많이 달랐기 때문에 잠재되어 오던 분란이 석 목사님의 외부 집회 문제들로 인해 직접적으로 발단된 것 같습니다. 전국교회에서 석 목사님의 부흥 집회를 원했기 때문에, 점차 교회 안에서 피로감이 커졌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70년 연말 당회에서 석 목사님의 외부 부흥회를 월 1회로 제한하는 안건이 통과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73년 1월 당회에서는 석 목사님의 외부 집회는 당회의 의결로 결정하기로 하도록 결의하기도 하였고, 이때도 6월까지는 당회와의 협의 없이 이미 집회 일정이 꽉 짜여 있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중 72년 12월 10일 주일예배에 석 목사님이 참석하지 않은 일이 생겨 격렬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9일까지 외부 집회를 했는데 어떤 사정으로 인해 10일에 돌아오지 못한 듯 보입니다. 이 논쟁으로 석 목사님은 장로들의 주일 오전 예배 기도를 그만두게 하고, 자신의 목회 기도로만 진행했고, 그것이 발전하여 당시 외부 강사로 왔던 어떤 목사가 장로들의 기도에 대해 저주성 발언을 퍼붓는 사건이 발생하여 큰 분란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분란으로 사임하게 된 것이 73년 4월 8일이었습니다.


신재철 교수: 이종만 원로장로님께서 1988에 장로 임직을 받았고 그 후 고(故) 김용섭 장로님의 청으로 교회 안에 역사관을 설치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제일영도교회의 역사를 볼 때 중요한 일이었다고 여깁니다. 역사관 설치에 관해 들려주시겠습니까?

강화구 목사: 안타깝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역사 진술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역사관이 세워지게 된 과정은 <제일영도교회 100년사> 집필을 위해 전국의 교회사 연구소와 전문가들, 관련 인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수집한 자료들을 모으고, 보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역사관을 만들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100년사 집필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신 분이 김용섭 장로님이시고, 당시 당회에서 이종만 장로님 등이 적극적으로 도우신 것으로 압니다. 그 당시 뜻을 가지고 교회 내 역사관을 세운 것이 계기가 되어 역사 자료들을 더 잘 모으고 보관하게 된 것 같습니다. 고신 교회의 장자교회로서 이런 역사 자료들을 잘 모으고 보관한 일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 여깁니다.

제일영도교회 역사관과 자료들
제일영도교회 역사관과 자료들
제일영도교회 역사관과 전시 보관 중인 자료들
제일영도교회 역사관과 전시 보관 중인 자료들
제일영도교회 역사관 자료들(당회록 1913~현재)
제일영도교회 역사관 자료들(당회록 1913~현재)
1973년 제일영도교회 직원 및 기관장
1973년 제일영도교회 직원 및 기관장

신재철 교수: 고신 교회를 위해서는 물론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제일영도교회의 역사관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 역사관에 전시된 자료들에 관해 설명해 주시면 합니다.

강화구 목사: 우리 역사관에는 설립자가 직접 필사하던 성경 사본, 1913년 제1회 당회로부터 1,800회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보존된 당회록, 제직회록, 공동의회록 등을 비롯해서 희귀한 문서들도 다수 보관되어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보아도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모든 당회록이 온전히 보관된 예가 많지는 않은 것으로 압니다. 일제시대 말엽 무기 제조를 위해 몰수당했다가 다시 찾은 교회의 오래된 종과 초창기 모습을 담고 있는 희귀사진 등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외 교회에서 발행했던 자료들이나, 상으로 받았던 트로피, 행정 문서들이 계속해서 보관되고 있습니다. 역사관이 있고 기록을 보존하는 데 대한 관심 때문인지, 우리 교회는 지금도 매년 연말이 되면 교회와 기관에서 공적으로 발행했던 모든 문서를 세 권의 책으로 제본하여 역사관에 모아두고 있습니다. 이것들도 또 한세월이 흐르고 나면 제일영도교회의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겠지요.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 번쯤 방문해서 둘러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당회가 조직된 후 그 당회록이 모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은 고신교회는 물론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깁니다.

신재철 교수: 1996년에 제일영도교회 100년사가 출판되었습니다. 잘 알려진 역사학자 이상규 교수님은 교회 역사책의 홍수 가운데 가장 잘 만들어진 책으로 평가하였는데 이에 관해서 설명해 주시면 합니다.

강화구 목사: 저 또한 박사과정을 마친 학자의 길을 추구한 한 사람으로 처음 제일영도교회 100년사를 읽으면서 놀라움과 감동을 경험했습니다. 가령 어떤 교회의 100년사를 상상해 보십시오. 일반적으로 다수의 사진과 조직 체계 등을 취합해 둔 성격이 강합니다. 그런데 제일영도교회 100년사는 그야말로 학적 가치를 충분히 가질 만큼 역사 서술 방식과 고증, 학문적 추론에 있어서 흠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셨던 김용섭 장로님의 오랜 교수 생활과 저술 경험이, 그분의 신앙에 기초하여 그대로 묻어난 책이기 때문입니다. 무려 1,2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으로 출판되었고, 대부분이 사진 자료 보다 역사적 고증을 통해 실제 역사의 단면을 열어 보고자 노력했던 것이었습니다. 김용섭 장로님과 이종만 장로님이 우리 교회 설립자로 알려진 김치몽 님의 자손들도 자주 만나 증언을 들었고 한명동, 오병세 박사님 등 유관인사들도 만나 증언을 듣고 고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제일영도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다시 읽어보니 제가 접해본 여러 교회 역사책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탁월하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부임한 후 김용섭 장로님이 소천하시어 장례를 집례했는데 제일영도교회를 위해 참으로 크게 헌신한 큰 별이 주님의 품에 안겼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역사관 관리자들과 함께
역사관 관리자들과 함께

신재철 교수: 고신총회의 장자교회라는 역사 깊은 교회에 목사님께서 제16대 담임목사님으로 부임하셨습니다. 목사님의 목회와 비전 등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강화구 목사: 교회에 방문하시는 분들이 곧잘 우리 교회를 장자교회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왠지 그런 표현이 제게는 하나의 부담으로 다가오는 점이 사실입니다. 일종의 무거운 책임감도 느끼게 되지요. 저보다 앞서 15분의 목사님이 전심을 모아 교회를 섬겨오셨고, 이제 저에게 잠깐의 시간이 허락된 것으로 압니다. 주어진 시간이 다할 때까지 선배들의 훌륭함과 올바른 전통을 잘 이해하고 계승하되, 그 위에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들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하여 발전시켜 보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제일영도교회의 최고 유산은 말씀에 대한 열정과 올바른 신앙에 대한 헌신과 복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앞에서 사역하셨던 분 중에는 한국교회에서 말씀의 사역자로 크게 인정을 받아오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전통 위에 현재 제일영도교회가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의 관심과 제일영도교회의 관심이 맞닿아 있습니다. 저는 특별한 은혜로 구약 성경을 오랫동안 공부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일선 목회 현장에서 저는 두 가지 원리를 가장 중요하게 추구합니다. 오직 성경과 전체 성경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선배 목사님들의 사역을 생각하면서 저의 목회는 오직 성경과 전체 성경을 온전히, 균형 있게 드러내는 일에 헌신하려 합니다. 주일 오전 예배는 구약과 신약 성경을 오가며 강해 설교를 진행하고 있고, 수요 강해 시간에는 성경의 각 책을 8-10주에 걸쳐 공부합니다. 새벽기도회는 <복 있는 사람>을 따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평생 설교해도 66권 성경을 다 설교할 수 없는 점이 현실이지요.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 7년간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으면 구약 성경 한 번과 신약 성경 두 번을 읽고 간단한 묵상과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향후 20년간 수요 말씀 강해 시간을 지키면, 전체 66권의 성경을 최소 8주간 정도로는 공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다른 여러 프로그램이나 유행을 따르는 일을 최소화하고 말씀 자체에 헌신하고 결단하는 일에 목회적인 역량을 맞추려고 하고 있습니다.

장학금 수혜 학생들과 함께
장학금 수혜 학생들과 함께

신재철 교수: 내년에 130주년을 맞이하면서 어떤 계획이 있는지 그리고 한국교회를 위해 남기시고 싶은 말씀을 주시면 합니다.

강화구 목사: 130주년을 기념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은혜요 특별한 복이라 생각합니다. 내년 한 해는 지나온 130년을 돌아보기도 해야겠지만, 우리가 맞이할 앞으로의 130년도 내다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 점에서 130주년을 기억하는 기념 예배도 드리겠지만, 다음 세대를 위한 We Love 찬양집회, 미래 130년을 내다보는 부흥 집회 등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사회의 오래된 친구처럼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일환으로 몇 해 전에 발족하고 기금을 마련해서 실질적인 열매를 맺기 시작한 이웃사랑위원회의 다양한 프로젝트들도 가동하려 합니다.

오래된 전통은 일견 고리타분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본 오래된 전통은 급격히 변화하는 현실 속에 흔들리지 않도록 깊이 뿌리내린 심지와도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교회 130년의 역사 속에는 숱한 은혜와 감격의 시간도 있었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 안의 오래된 문제들과 갈등으로 고통받던 시간 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130이라는 숫자의 무게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바다는 흘러 들어오는 물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요. 모든 기쁨과 모든 눈물과 고통을 바다처럼 다 품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마치 어제가 없었던 교회처럼 새로운 교회가 되고, 그러면서도 그 방향에 있어서 흔들리거나 방황하지 않는 역사의 무게를 지닌 교회로 자리매김하기를 원합니다.

제일영도교회 주일 오후예배 모습(11.2.)
제일영도교회 주일 오후예배 모습(11.2.)

신재철 교수: 고신 교회의 장자 된 교회의 담임목사님으로 고신 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남기시고 싶은 말씀을 전해주시고 대담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강화구 목사: 우선 장자교회라는 말을 가끔 듣는데, 이는 단순히 오래된 교회 이상을 뜻하는 것이기에 들을 때마다 부담이 되곤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 교회가 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교회와 세상을 향한 거룩한 부담을 기쁘게 짊어지고자 하는 선한 동기부여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고신 교회와 한국교회에 대해 말할 위치에 있지 않아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고 바라는 점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지금 계속하여 쇠퇴하고 있습니다. 신학생 수는 지속하여 줄어들고 있고, 상당수 교회에서 부교역자를 청하기가 사실상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10년 정도 후면 심지어 담임목사를 구하지 못하는 교회들도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외부적 요인도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분들 사이에서 종교적 호감도 역시 가장 낮은 상황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움직일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교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하나님의 말씀이 균형 있게 선포되는 건강한 강단의 회복이 첫 번째 소명이요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교회의 부르심이라 생각합니다. 거룩한 그루터기로 남아 다시 싹을 피우고 세워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를 맞이하였다고들 합니다. 교회의 세속화란 말이 회자되고 있지요. 제일영도교회를 중심으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 전하고 가르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 공동체의 덕을 쌓는다면 한국교회 회복의 한 알의 밀알 역할이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한국교회가 초대교회의 신앙 정신을 회복하기를 바란다는 말씀으로 답으로 가늠하고자 합니다.

새예배당 건축 전의 제일영도교회 전경(출처=kcnp.logos)
새예배당 건축 전의 제일영도교회 전경(출처=kcnp.logos)

결론: 한국교회는 교회를 개척하고 십자가만 세우면 교인이 찾아오고 성장하는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세기를 바꾸어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한국교회는 내외적으로 총체적인 위기를 맞이하고 있음이 현실이다. 제일영도교회는 130년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축소판으로 보여주는 전형적인 교회이다. 부산에서는 여러모로 낙후된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영도에 설립된 후 변함없이 하나님 나라 확장에 사용을 받으면서 한국교회 특히 고신 교회의 장자 역할을 감당하였다.

하지만 어려움도 있었다. 구약 신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형 젊은 목사를 제16대 목사로 맞이한 제일영도교회는 교회의 내외적 성장을 통하여 명실공히 장자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교회와 신앙’은 강화구 목사와 대담하면서 제일영도교회가 고신 교회를 넘어 한국교회를 위해 역사적 소임을 더욱 잘 감당함으로 영적 영향력을 파급하여 줄 빛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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