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상징(출처=Celtic Design 1 Trinity Knot Custom Privacy Cling)
삼위일체 상징(출처=Celtic Design 1 Trinity Knot Custom Privacy Cling)

 

김홍기 목사/ Ph.D., D.Min. Christ Lives Ministries 대표. Talbot School of Theology (M. Div., D.Min.).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Ph. D.)
 

정통 삼위일체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구별된 위격(person)이시지만, 한 신적 본질(substance)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계심을 주장한다. 반면에 삼위일체에 대한 양극단의 이단 교리는 삼위 하나님의 연합을 부정하는 삼신론(Tritheism)과 삼위 하나님의 구별을 부정하는 양태론(Modalism)이다. 삼신론은 하나님 안에 분리된 세 하나님(three gods) 혹은 세 존재(three beings)가 있다고 믿음으로 삼위의 연합을 부정한다. 그리고 양태론은 하나님은 신적인 경영 혹은 통치(economy)에 있어서 다른 시대에 다른 방식이나 역할로 나타나는 한 위격일 뿐이라고 주장함으로 삼위 하나님의 구별을 부정한다. 1

정동수의 삼신론 이단 교리

킹유(킹제임스 유일주의) 이단자인 정동수는 하나님은 삼위이시라는 명제와 삼위는 각각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것 같으나 삼위가 한 본질 안에서 완전히 하나로 연합되어 계신다는 명제를 완강히 부정한다. 그는 “개역성경은 예수님이 창조된 신이라는 이단 교리를 가르침”이라는 얼토당토 아니한 제목의 설교에서 요 1:18에 있는 개역의 정통 교리(“독생하신 하나님”)를 이단 교리라고 주장하며,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동일 본질 안에서의 연합을 단호히 부정한다.

자 그러면 개역성경을 제가 그대로 풀이하면 아버지 품 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거지요 그쵸 그대로 보시면 아버지 품 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이 계신 거잖아요. (31:12-31). 아버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또 들어 있는 거구나 이런 데서 이단이 나오는 거예요.2

정동수는 여기서 아버지 하나님 안에 아들 하나님이 계시다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이단 교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 10-11절에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는 참으로 황당하게도 예수님이 친히 하신 이 말씀이 이단 교리일 뿐 아니라, 말이 성립이 안 된다고 감히 주장한다.

자 개역성경의 요점 아버지 하나님 안에 독생하신 하나님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게 개역성경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맞지요? 킹제임스 성경은 아버지 하나님 안에 독생하신 아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있으면 됩니까?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있으면 되겠어요 말이? 3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상호 내주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 부정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참으로 심각한 불신과 반역의 죄인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 안에 아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와 반대로 아들 하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아버지와 아들은 한 본질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아버지와 아들은 위격만 다를 뿐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하시다. 그리고 동일 본질은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내 양들을 나와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확언하신 후에,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헬라어 '하나'(ἕν)는 중성이며 남성형이 아니다. 그래서 존 맥아더 목사는 여기서 “‘하나’는 한 위격(one person)이 아니라 한 본질(one substance)을 의미한다”4고 말한다. 그는 또한 성도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목적과 행동의 일치는 본성과 본질의 일치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하나’ 즉 한 본질이시기 때문에 그 본질 안에서 아버지는 아들 안에,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신다. 그래서 가이슬러와 로즈 교수는 “더 근본적으로는 삼위일체의 구별된 삼위의 각자는 그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서 상호 내주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좋다”5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상호 내주는 아버지와 아들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포함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이러한 관계를 “그들은 본래 무한하시다. 그래서 각자가 각자 안에 있고, 모두가 각자 안에 있고, 모두 안에 각자가 있고, 모두 안에 모두가 있고, 모두가 하나이다”6라고 말한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구별됨을 인정하지만 그들이 한 본질 안에서 상호 내주하시며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계심을 믿지 않으면 삼신론이 된다. 하나님은 삼위이시라는 명제와 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명제를 확고히 믿어도 삼위의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서 상호 내주하시며 완전히 하나로 연합되어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삼신론자가 된다. 삼위의 위격적 구별을 믿어도 본질적 연합이라는 개념을 소홀히 하면 삼신론의 위험에 빠진다. 이런 맥락에서 웨인 그루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의 무리 중 누구도 삼신론을 옹호하지 않지만,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심코 삼위일체에 대한 삼신론적 견해에 기울어 성부, 성자, 성령의 각기 다른 위격은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나뉘지 않은 하나의 존재로서 단일성을 지니고 계시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7

그러나 삼위의 하나님이 한 본질 안에서 완전히 상호 내주하심으로 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그 진리를 완강히 거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전자는 비고의적이지만 후자는 명백하게 고의적이다. 정동수는 후자에 속한다. 그는 노골적으로 “아버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또 들어 있는 거구나 이런 데서 이단이 나오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있으면 됩니까?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있으면 되겠어요 말이?”라고 강변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에 침을 뱉는 신성모독적인 행위이다. 정동수는 가장 적나라한 삼신론자이다.

지방교회의 양태론 이단 교리

반면에 정동수의 노골적인 삼신론과는 정반대로 지방교회는 양태론을 주창한다. 지방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상호 내주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지만, 삼위의 구별을 성경의 가르침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본질적(내재적) 삼위일체에서는 삼위의 구별을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경륜적 삼위일체(창조와 구속의 역사에 있어서 삼위가 서로 관계를 맺고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는 삼위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성경과 정통 교리는 본질적 삼위일체에서나 경륜적 삼위일체에서나 공통적으로 삼위의 구별을 확고하게 인정한다. 지방교회의 교주인 위트니스 리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지방교회가 삼위의 구별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들은 아버지로 불리니, 아버지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떻게 아버지라고 불리면서 아버지가 아닐 수 있겠는가?8

이 말은 위트니스 리가 이사야 9:6을 해석하면서 나왔다. 리는 이사야가 예수님을 “영원하신 아버지”로 불렀으니 아들 하나님은 곧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리의 말처럼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분이라면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상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아들이 아버지요 아버지가 아들이라면 성경이 두 위격의 부자 관계를 묘사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사야가 이런 혼돈을 유발하기 위해서 아들을 아버지라고 호칭했단 말인가? 리는 자신의 말이 어떤 혼돈스러운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인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을 말하면, 이사야는 리의 말과는 전혀 상반되게 아들의 위격이 아버지의 위격과 동일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본질이나 인격적 특징이나 장래의 사역의 성격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성경 전체가 아들과 아버지를 일관되게 구별하고 있는데 유독 이사야만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하지 않고 동일시했다고 말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며 성경 해석의 법칙에도 맞지 않는다.

삼위일체 상징(출처=Ireland Wide)
삼위일체 상징(출처=Ireland Wide)

모든 정통 신학자는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렀으니 아들은 아버지여야 한다는 리의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은 아들 자신의 본질이나 인격이나 사역의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로건(Grogan) 교수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은 “그의 백성을 향한 그의 아버지 같은 돌봄(his fatherly care of his people)”9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라이들닉 교수와 스펜서(RydelnickandSpencer)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형용사 ‘영원한’은 영원한 분이라는 개념을 나타낸다. 그분은 "영원의 아버지"로, 시간의 창조자 또는 저자이심을 나타낸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는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은 시간의 창조자이시며 영원의 저자이다.10

그리고 존 마틴(John Martin)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원하신 아버지’라는 칭호는 메시아와 시간의 관계를 묘사하는 관용어일 뿐, 삼위일체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영원하시다고 한다. 메시아는 "아버지 같은" 통치자가 되실 것이다.11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따라 아들(聖子)은 아버지(聖父)라고 믿는다. 그들은 삼위일체의 위격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리는 “아버지이시고, 아들은 또한 성령이시다. ... 그리고 영원한 아버지이신 주 예수님이시다. 우리의 주님은 아들이시고, 그는 또한 아버지이시기도 하다”12라고 말했다. 지방교회는 가장 뻔뻔한 양태론자들이다.

결론

세 위격의 한 하나님이라는 신비한 삼위일체의 개념을 사람의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의 핵심적인 개념을 분명히 이해하는 일은 가능하다. 그루뎀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삼위이시고(God is three persons), 각 위격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Each person is fully God),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There is one God) 세 가지 명제는 정통 삼위일체론의 근간을 이룬다. 정동수의 삼신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셋째 명제를 강력히 부정한다. 즉, 삼위가 본질 안에서 상호 내주하시며 하나를 이루신다는 진리를 완강히 거부한다. 반면에 지방교회의 양태론은 ‘하나님은 삼위’이시라는 첫째 명제를 뻔뻔하게 부정한다. 그들은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삼위의 구별을 거리낌 없이 부정한다. 그래서 가이슬러와 로즈는 지방교회는 “경륜적 양태론(operational modalism)”13을 신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동수는 국제적인 거대한 규모의 킹유(킹제임스 유일주의) 이단의 독보적인 한국인 선두 주자로서 유튜브 방송과 책들과 무료 PDF 등을 통해 한국교회에 지난 30년간 크게 악영향을 끼쳐왔다. 그리고 지방교회는 워치만 니의 인기 있는 책들을 배경으로 반 세기 이상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상당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들은 정통인 것처럼 교활하게 가장을 하기 때문에 두드러지게 노출된 이단들(예: 신천지, 여호와의 증인 등)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속히 이 둘을 분명하게 이단으로 규정해서 한국교회를 간교한 여우들로부터 지켜야 할 것이다.

1 Norman Geisler, Systematic Theology, vol. 2, God, Ceation (Minneapolis: Bethany House, 2003), 295.

2 정동수, “개역성경은 예수님이 창조된 신이라는 이단 교리를 가르침,” 유튜브 동영상, 38: 27-44, 2024. 2. 23., http://https://www.youtube.com/watch?v=IKtAr6xSE7s

3 같은 동영상, 32:03-24.

4 John McArthur, John 1-11, The MacArthur New Testament Commentary (Chicago: Moody, 2006), 443. 1.

5 Norman Geisler and Ron Rhodes,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2009),” 8, Norman Geisler. https://normangeisler.com/a-response-to-cri-local-church/ 영문: “One does well to recognize that, more foundationally, each of the three distinct Persons of the Trinity coinhere in the same divine essence.”

6 St. Augustine, On the Holy Trinity (Savage: Lighthouse Publishing, 2018), Book VI, Chapter 10, Kindle. 영문: “They are infinite in themselves. So both each are in each, and all in each, and each in all, and all in all, and all are on.”

7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Zondervan, 1994), 248.

8 다음의 글에 인용됨. Geisler and Rhodes, “A Response,” 3.

9 Geoffrey W. Grogan, Isaiah,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eds. Kenneth L. Barker and John R. Kohlenberger (Grand Rapids: Zondervan, 1994), 9:5-6, Kindle Edition.

10 Michael Rydelnick and James Spencer, Isaiah, The Moody Bible Commentary, eds. Michael Rydelnick and Michael Vanlaningham (Chicago: The Moody Bible Institute of Chicago, 2014), 9:6-7, Kindle.

11 John A. Martin, Isaiah,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eds, John F. Walvoord and Roy B. Zuck (Wheaton: Victor Books, 1983), 9:1-7, Kindle.

12 다음의 글에 인용됨. Geisler and Rhodes, “A Response,” 3.

13 Geisler and Rhodes, “A Response,”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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