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종 편집부국장
 

‘어처구니없다’고 할 때가 있다.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다. 아랫돌 윗돌 짝이 있어도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을 돌릴 수 없으니, 콩이 있어도 콩국수를 먹을 수 없다.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어처구니없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터무니없다’는 말도 있다. 종종 쓰는 말이지만 터무니가 뭘까? 터무니는 ‘터’와 ‘무늬’가 만나서 태어난 말이다. 터의 무늬다. 터는 무늬를 만든 장소이고 무늬는 터에 새겨진 흔적이다. 그래서 터는 땅이고 역사이며, 무늬는 터에 남기고 새긴 사상과 문화와 철학이다. 터가 다르면 무늬가 다르고 무늬가 다르다면 터가 다를 수밖에 없다. <고대 유대교의 터・무늬>(박정수, 새물결플러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대곡천의 반구대 하류에 있다. 너비 약 8m, 높이 약 4m 규모의 수직 절벽에 그림이 집중되어 있고, 그 주변에 있는 바위 10여 곳에서도 그림이 확인된다. 신석기 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약 300여 점의 그림이 있다. 고래, 거북, 바닷새, 물고기, 상어 등의 바다 동물과 대륙사슴, 고라니, 호랑이, 표범, 멧돼지, 너구리, 늑대, 여우 등의 육지 동물까지 새겨져 있다.

사진=나무위키
사진=나무위키

그중에서도 고래 그림이 압권이다. 무리 지어 물을 뿜는 북방긴수염고래, 새끼를 등에 업은 귀신고래, 물 위로 뛰어오르는 혹등고래 등 고래의 종류까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여러 사람이 배를 타고 고래를 사냥하는 모습, 특히 사냥한 고래를 공평하게 나누는 모습은 오늘날 소고기를 부위별로 나누는 것과 비슷할 정도다. 이렇게 고래 사냥의 전 과정까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암각화다. 신석기 시대부터 이 지역은 고래잡이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하여 학계를 중심으로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 해양 어로 문화를 알 수 있는 독보적인 유산으로, 천전리 각석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다.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는 까마득한 옛날 우리 선조들이 남긴 무늬다.

한・중・일을 젓가락으로 비교하기도 한다. 중국 것은 길고, 일본 것은 짧으며, 우리 것은 그 중간이다. 길이만 아니라 재료와 끝의 생김새도 다르다. 음식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와지붕도 그렇다. 중국의 지붕은 하늘로 치솟았다. 그것도 한참이나 뒤집어 놓았을 정도로. 일본 지붕은 일직선이다. 반면 우리 지붕은 귀솟음이다. 중국과 일본의 중간쯤이다. 기후와 철학과 재료가 다르기 때문이다. 굳이 문화인류학을 말하지 않아도 터가 다르면 무늬가 다르다는 얘기다.

정원은 어떤가. 일본은 담장 안에 정원을 축소하고 압축하여 깔끔하게 다듬는다.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말이 나옴직하다. 나만의 정원이고 내 집 담장 안으로 들어와야 볼 수 있다. 특히 가레산스이(枯山水, かれさんすい) 양식은 물 없이 바위와 모래, 이끼를 통해 정원을 표현한다. 물이 들어갈 만한 공간은 모래를 깔고 나란히 홈을 그어 물결을 표현한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파문’(波紋)이란 영화가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방사능에 오염된 물을 두려워하며 자기만 살자고 가출한 남편, 대학 입학으로 집을 떠났다가 청각 장애가 있는 연상의 여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 승낙을 요구하는 아들, 이런 집안의 여주인 요리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10년 만에 암에 걸려 남편이 돌아오면서 요리코의 일상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초대작이기도 한 영화 한 편에 가족의 의미, 용서와 화해, 편견과 차별, 사이비 종교 그리고 자아 찾기까지 많은 것을 담았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비가 내리는 눈부시게 맑은 날 상복을 입고 마당에서 우산을 쓴 요리코. 우산을 내던지고 점점 경쾌해지는 플라멩고를 추다가 ‘올레!’를 외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 온다. 맑은 날의 비, 검은 전통 기모노 상복, 하늘을 향해 뒤집어진 빨간 우산, 경쾌한 플라멩고가 이어지는 엔딩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 1915~1980)가 《기호의 제국》에서 말하는 일본 문화 압축판처럼 감각적이고 기호적이다.

주인공 요리코가 매일 아침 다듬는 것이 바로 집 마당 정원이다. 깔린 모래를 구불구불한 밭고랑처럼 다듬는다. 물결 무늬를 만드는 거다. 이런 정원은 바람이 세게 불거나 비가 많이 오면 모래에 낸 무늬가 흩어져 버린다. 비바람이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흐트러진다. 꾸준히 새로 그리고 다듬어줘야 한다. 때로는 몇 시간씩 걸리기도 한다. 아주 깔끔하고 정갈하다. 완벽하다고 해야 할 정도다.

우리 담양 소쇄원 제월당은 어떻고 도산서원의 도산서당은 또 어떤가. 담장은 쌓다가 그만둔 미완성이다. 아니다. 일부러 그렇게 쌓았다. 시선만 차단할 뿐 출입까지는 막지 않는다. 외부 경치를 정원 안으로 끌어들여 내부 공간을 풍요롭게 한다. 소유가 아니라 차경(借景)이다. 경치를 잠시 빌리는 거다. 창문이나 뜰을 통해 외부 경관을 감상하고, 이를 통해 내부 공간이 확장된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나만의 정원이 아니라 모두의 정원이다. 닫힌 정원이 아닌 열린 정원, 공유정원이다. 어떤 정원이 나을까? 우리 정원일까 일본 정원일까. 문화에는 다름이 있을 뿐 우열이 없다는 말이 있다. 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터가 다르면 무늬도 다르다. 한반도에 남기고 새긴 역사와 문화, 일본열도에 남기고 새긴 역사와 문화가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이 고유명사이듯 모든 문화는 고유문화다.

소쇄원의 제월당(霽月堂)은 '비 개인 언덕의 상쾌한 달'이란 뜻이다.
소쇄원의 제월당(霽月堂)은 '비 개인 언덕의 상쾌한 달'이란 뜻이다.

기독교문화유산해설사 양성 과정이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주관한다. 두 학기 과정인데 1학기는 한국교회사를 배우고 2학기는 각 지역별 기독교문화유산을 배운다. 작년 9월에 시작하여 올 5월에 5기생으로 수료했다. 이 기간에 서울 정동 일대와 남산 지역, 인천과 종로 지역, 그리고 철원 지역을 현장 답사했다. 물론 기독교문화유적지 중심이다. 교과서에서 듣고 배우던 역사의 현장, 기독교 문화유적을 교수와 선배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돌아보았다. 그때 그 터에서 그런 무늬를 새긴 분들의 흔적을 더듬는 기회였다. 매번 수백 장씩 찍었으니 사진을 참 많이도 찍었다. 그래도 스마트폰이었으니 아주 편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한 번 더 살핀다. 공부한 것, 현장에서 듣고 보고 느낀 것을 떠올리며 한 장 한 장 살핀다. 버릴 것은 미련 없이 Delete 키를 눌러 삭제한다. 기울어진 것은 수평을 잡고, 쓸데없는 부분이 보이면 그 부분만 잘라낸다. 희미한 것은 좀 더 선명하게 하고 어두운 부분은 밝게 한다. 이러자면 시간이 좀 걸린다. 기본 보정을 마치면 답사했던 길을 따라 장소별로 폴더에 분류한다. 이제 마지막, 해설사양성 과정 톡방에 올려 전송한다. 사진은 터・무늬다.

지난 봄 영남지역 산불로 터무니없는 일이 생겼다. 아니 터・무늬가 사라졌다. 고향 산천이 잿더미가 되고 대대로 살던 집이 사라진 이들이 생겼다. 앨범도 불타고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했다. 터무니없다가 아니라 터・무늬가 사라졌다. 하마터면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도 그럴 뻔했다. 이웃 마을까지 불길이 쳐들어왔다고 하니. 다행히 나무는 세월이 지나면 싹을 틔우고 잎이 피어 다시 숲을 이룰 것이다. 터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터에 살던 이들이 남기고 새긴 무늬는 어떻게 될까? 부디 터・무늬가 살아나고 새겨지길.

영영 돌아오지 않는 터도 있다. 4학년까지 다녔던 산골초등학교, 졸업하고 안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지구라 새로운 곳에 새로 지었다. 터가 바뀌고 무늬도 바뀌었으니 어릴 적 추억마저 수몰된 셈이다. 그래서일까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아니 가보지 않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사하여 5학년부터 다녔던 도회지 초등학교는 취학아동의 증가로 분립된 신설 학교라 2회로 졸업했다. 학교 다듬기에 어린 손들까지 보태야 했다. 우리가 심고 물을 주었던 운동장 가장자리의 플라타너스가 잘도 자랐다. 뿌듯했다. 결혼 후 여름휴가 때 모교를 찾았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물 주며 돌봤던 나무라고 자랑까지 했다. 몇 년이 지났다. 얼마나 더 자랐을까? 다시 찾았을 때는 아뿔싸, 흔적도 없이 베어지고 말았다. 누가 그랬을까, 우리 동의도 없이... 꽃가루 때문이었을까, 터는 그대로인데 무늬가 사라졌다.

졸업하고도 한참 지나 찾은 중학교는 같은 재단의 실업계고등학교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터는 그대로인데 무늬가 바뀌었다. 실망이다. 다시는 가지 않았다. 하여 이번엔 고등학교를 가보고 싶었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차를 몰고 찾아간 모교, 졸업한 지 30년도 더 지났기 때문일까? 벌판 같던 주변은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로 변해있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그래도 여기쯤이겠거니 하며 찾아보지만 이상하다. 분명 여기가 맞을 텐데 전혀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가 안동고등학교가 아니냐고. 돌아온 대답은 충격이다. 옮겨갔단다. 이럴 수가. 어쩐지 아까부터 내비게이션 안내하는 게 이상하더라니... 한참을 달려 강 건너편 신축 학교를 찾아 들어갔다. 모든 것이 생소하다. 낯설다. 어색하다. 여기가 내가 졸업한 그 학교라고?? 지나가는 후배에게 물었다. 언제 이리로 옮겨왔느냐고. 잘 모르겠단다. 한참 되었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것도 모르고 살았던 게 죄라면 죄다.

모교는 그 시절 그 친구들, 그 선생님들, 그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학교는 터와 무늬인 탓이다. 적어도 학교의 정문과 본관만큼은 손대지 말았으면 좋겠다. 리모델링은 하더라도 외관만큼은 수십 년 수백 년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게 모교를 그리워하고 방문하고 싶어지게 하는 무늬라 믿기 때문이다.

유럽종교개혁지 탐방 때 들렀던 드레스덴, 2차 대전 당시 미영 연합공군의 폭격으로 도시 전체는 폐허가 되었다. 유서 깊은 로마네스크와 바로크 양식의 수많은 석조 건물들이 붕괴되었고 프라우엔교회(Frauenkirche)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틀 밤낮 공습을 견뎠지만 65만 발의 소이탄이 투하되어, 교회 내부 온도가 1,000도를 넘자 돔이 폭발하면서 붕괴했다. 산산조각 난 돌 6,000톤 가량이 떨어져 검게 그을린 돌무더기가 폐허를 뒤덮었다. 패전국 독일은 분단되고 동독이 차지한 그곳은 검게 그을린 돌들이 45년이나 쌓여 있었다.

다행히 드레스덴 시민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폐허에서 파편을 골라내 일일이 번호를 매겨 보관했다. 재건되는 날 파편을 재사용할 수 있도록. 잔해를 밀고 주차장을 만들려던 당국의 계획도 무산시켰다. 시커먼 돌들은 평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시내 여러 교회가 가세하여 공산주의의 붕괴와 통일을 향한 인권 저항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1989년 11월 9일,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프라우엔교회 재건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드레스덴 시민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민간기금과 미국,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 각국 민간 단체들이 재건에 필요한 비용을 모은다. 노벨상 수상 기금 전액을 기부하는 이도 있었고 기업들의 참여도 있었다. 재건 원칙은 터・무늬였다. 자재는 가급적 폐허에서 찾아낸 잔해의 재사용이다. 시민들이 보관하던 잔해 중 실제로 건축에 재사용된 잔해는 무려 3,800여 개. 불타서 검게 된 재사용 자재와 새 자재가 확연히 대조되어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했을까?

복원된 프라우엔키르헤, 옛 돌과 새 돌이 어우러진 외관이다.
복원된 프라우엔키르헤, 옛 돌과 새 돌이 어우러진 외관이다.

옛 설계도를 바탕으로 3D 컴퓨터 그래픽으로 파편의 원래 위치를 파악해 제자리에 맞물리도록 했다. 교회의 옛 모습을 기억하던 사람들의 증언과 옛 사진 수천 장, 교회 건설 때 사용된 모르타르와 도료의 주문서까지 확인하며 원형을 되살렸다. 참나무로 만든 교회 정문을 복원할 때가 문제였다. 문에 새겨진 조각의 막연한 묘사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했을까. 파괴 전 교회를 구경한 관광객이나 결혼식을 올린 부부는 꼭 교회 정문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음을 떠올렸다. 정문이 찍힌 사진을 보내달라고 공개적으로 알렸다. 결혼사진첩을 통째로 보내주는 등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 덕분에 정문 원래 모습 재현까지 가능했다. 사진은 터・무늬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던 조국 근대화를 지나 K-Culture 시대를 맞은 대한민국이다. 방화로 불탄 숭례문을 복원할 때다. 잔해 속에서 살릴 수 있는 것은 살리려 애썼다. 기존 목재를 최대한 재사용하려 했고 화재로 손상된 부분을 잘라내고 쓸 수 있는 부분을 활용했다. 1층에 쓰인 목재의 약 90%가 기존, 2층에 있는 네 개의 중심 기둥은 새 목재와 옛 목재가 정교하게 연결되게 했다. 과정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G2를 자랑하는 중국,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때 갈아엎은 무늬들이 많았다. 일례로 유교의 원조인데 제례악까지 사라져 버렸다. 하여 우리에게서 종묘제례악을 배우고 우리가 전수까지 한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은 지금도 복원 중이다. 돌기둥 하나하나에 옛것과 새것이 정교하게 접합된 것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터에 무늬를 남기고 새기려는 문화강국의 모습이다.

한국 기독교의 터・무늬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나라 초대교회 예배당 출입문은 대체로 둘이었다. 좌측으로는 남자, 우측으로는 여자가 드나들고 안에서도 그렇게 앉았다. 고향 교회도 그랬다. 아예 남자출입문, 여자출입문이라고 붙여놓기까지 한 사진도 볼 수 있다. 익산의 두동교회, 영천의 자천교회, 금산의 금산교회는 직접 찾아가 본 한옥 예배당들이다. 내부 평면은 남녀 성도를 분리한 구조거나 가운데에 커튼을 쳤다. 남녀칠세부동석 문화 속에서 짜낸 지혜였다. 이런 자랑스런 무늬도 있지만 가슴 아픈 무늬, 끔찍한 무늬도 있다. 제암리교회는 일제강점기의 끔찍한 무늬요, 4.3과 서북청년단은 해방공간의 가슴 아픈 무늬요, 철원제일교회의 무너진 예배당은 한국전쟁기 동족상잔의 무늬다. 사진은 터・무늬다.

일제강점기, 터는 그 터인데 무늬는 갑자기 바뀐다. 그것도 강제로 함부로, 총칼까지 들이밀며. 끌려가고 짓밟히며 무늬를 새겼다. 저들은 식민지 문화를 새겼고 우리는 항일과 친일의 무늬를 새겼다. 시대가 급변하던 때, 새마을 운동이 벌어지면서 시골 마을은 초가지붕이 하나둘 사라지고 슬레이트와 기와로 갈아입었다. 알록달록 페인트칠이 덧입혀지기도 했다. 시골만 아니다. 도시 변두리 달동네도 고도 성장기에 개발 지역이 되면 모조리 뜯고 무너뜨리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살릴 것은 살리고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것은 한참 지나서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도시재생사업이다.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면 알록달록 원색 지붕이 한국적 풍경이 되어 버렸다.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좀 익숙해졌지만 처음엔 얼마나 어색하던지. 그래서 몇십 년 몇백 년이나 그 표정 잃지 않는 유럽의 붉은색 모노 톤 테라코타 지붕이 좋다. 아니 부럽다.

인간은 지구라는 터에서 무늬를 새겨왔다. 그게 인류 역사다.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복음의 씨를 뿌리셨고, 제자들은 그 터에 복음의 무늬를 새겼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 그 다음 무늬들이 새겨지는 중이다. 우리 모두 물려받은 터・무늬 속에서 역사를 배운다. 지금 여기서 새로운 무늬를 새기고 있다. 우리가 새긴 무늬를 다음 세대들이 물려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터 위에서 그들의 무늬를 새롭게 새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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