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종 편집부국장
“떠들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들어.”
어린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어머니들이 자주 하셨던 말씀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 착한 아이는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아이다. 가르쳐주는 대로 잘 받아 적고, 적은 것을 기억했다가 그대로 시험 문제지에 옮길 줄 아는 아이가 우등생이다. 그게 어제까지의 우리 교육 현장이었다. 전통적인 서당 교육 방법을 근대 학교에서 그대로 물려주고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암기 방법도 배우고 나름 암기법 개발도 하고 친구들끼리 외우는 방법을 나누기도 했다. 그 결과가 이런 것들이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그 유명한 27명의 조선왕들의 묘호 이니셜이다. ‘고낭자사인신후야입파초추표미’, 중학교 때 배운 서양미술 사조 고전파 낭만파… 이니셜이다. ‘수헬리베붕탄질산플네나마알...’ 고등학교 화학 시간에 배운 원소기호 순서이다. 그럼 ‘스빌브니디바니’는? 신학교 입시 준비하느라 외웠던 초대교회 안수집사 7명(행 6:5)의 이니셜이다. 좀 어려운 문제도 있다. ‘이서방한양길Song’(이서방 한양길 가면서 노래 불렀다)은 목사고시 준비 과정에서 외운 첫 목사안수 받은 분들(이기풍 서경조 방기창…) 성씨이다. 진짜 어려운 문제, 작년 말에 외웠던 ‘전당합각재헌루정’을 아는가? 우리 고건축물의 위상과 규모 순이다. 이제 그만하자. 각자 이런 식으로 외우고 있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세대는 주입식 암기 교육의 수혜자인 동시에 희생자다.
우리는 학교 보낼 때 떠들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고 하지만, 유대인 어머니는 학교 다녀온 아이에게 “오늘 선생님께 뭘 질문했니?”라고 묻는다지 않는가. 자랄 때 질문 많이 하는 아이, 교실에서 질문 많이 하고 질문 잘하는 학생이 우수한 학생이다. 5W1H는 교실 밖에서도 필요하다. 아니 교실 밖이 더 절실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왜 결혼하려고 해? 왜 살지? 왜 예수 믿지? 왜, 왜, 왜가 인간의 삶이다. 왜만 아니라 무엇도 질문해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결혼이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아이를 낳은 사람은 산모요 산모의 출산을 돕는 사람이 산파다. 산파술이라면 ‘테스형’이다. 학생은 산모요 스승은 산파라는 것이다. 그런 스승이 있어 플라톤이 나왔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배출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가능했다. 어떻게 길렀을까? 소크라테스가 택한 것은 질문이다. 끝없는 질문으로 진리를 찾도록 도와주었던 철학자, 그러니 아테네 기득권자들이 곱게 볼 수 있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질문이 많으면 불편하다. 신성모독과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갇혔던 아테네의 그 감옥 앞, 정작 나도 아무런 질문을 하지 못했다.
우리 도서관은 정숙 유지가 기본이다. 반면 그 반대인 나라도 있다. 실제 KBS TV에서 몇 년 전 ‘공부’라는 주제로 몇 차례 방송할 때 각 국가의 공부하는 방법 차이를 방영한 적이 있다. 이스라엘 도서관은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어떤 주제로 토론하느라 시끌시끌하였다. 어떻게 도서관에서 조용할 수 있느냐는 듯이. 이른바 ‘하브루타 학습법’이다. 어떤 주제를 놓고 상대방과 서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가는 그들의 전통적인 학습법이다. 나 혼자 하는 공부가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 내 생각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방법이다. 그 과정에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나와 남이 다름을 경험하며, 창의적 생각이 자리 잡는다. 하브루타는 단순한 토론을 넘어 함께 공부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학습법이다. 질문하는 한, 모든 사람은 배우고 성장한다. 대답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철학자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이다. 슬기로운 사람이란 뜻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란 말은 익숙하지만, 호모 콰렌스(Homo quaerens)란 말은 대부분 낯설 것이다. ‘질문하는 인간’이다. 의심하고 궁금해하고 추론하고 상상한다. 삶에 대해, 타인에 대해, 세계에 대해 늘 질문한다. 인간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질문에도 종류가 있다지 않은가? 열린 질문과 닫힌 질문이다. 우리 질문의 대부분은 닫힌 질문이다. 단답형이거나 선택형이다. ‘잘 지냈어?’, ‘밥 먹었니?’ 예 아니오로 답하면 그만이다. 번호 찍기다. 깊은 고민이나 생각이 필요 없다. 닫힌 질문에 익숙해지면 열린 질문에 당황하거나 머뭇거리게 만든다. 열린 질문은 말 그대로 열려 있다. 생각하게 하고 논리적이게 하며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남의 생각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한다. 불편한 질문이 우리의 삶을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 철학자 안광복은 “도대체 인간은 뭘 잘할까?”를 묻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영역은 의미 탐구라 답한다. 철학이 무엇인가? 생각하기 질문하기이다. 영장류도 생각은 하지만 인간처럼 의미 탐구는 하지 않는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 )는 질문은 잊어버리고 인터넷을 헤매고 다니면, 유튜브에서 개 고양이 동영상만 보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올해 초등학생이 된 손녀는 내가 자기에게 질문하는 패턴을 자기 엄마에게 말했다고 한다. “○○아, 왜 그렇게 생각해”, “어떤 생각이 들어?”, “~하면 어떻게 될까?” 내가 늘 묻는 말들이다. 요즘 엄마들은 개방형 질문을 많이 한다니 참 다행이다.
기자는 질문을 위임받은 사람이다. 기자에게 질문은 사명이다. 2010년 9월 G20 서울정상회의 폐막식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폐막 연설 직후 개최국인 한국의 기자들에게 질문을 하라고 했다. 얼마나 멋진 기회인가.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질문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조용했다. 당황한 듯한 오바마가 몇 번이고 계속 질문하라고 하는 데도 질문하는 한국 기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참다 못한(?) 중국 기자가 일어서서 자신이 아시아를 대표해서 질문하면 안 되느냐고 한다. 오바마는 한국 기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며 다시 기다린다. 참 난감한 상황, 어떻게 되었을까. 끝끝내 질문은 없었고 결국 그 중국 기자가 질문하고 오바마가 답변해야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5SoRrXCz9U
그토록 마이크 들이밀고 쫓아가며 질문하기 좋아하던 기자들이 아닌가. 왜 그랬을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이른바 시험에 나올 ‘예상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여전히 우리 제도권 교육은 질문보다는 ‘진도 나가기’가 우선이다. 나 역시 질문을 잘 못하고 창의성이라곤 1도 없는 부류, 암기식 주입식 교육의 수혜자요 피해자 중의 하나다.
이제 AI를 빼고는 현대를 말하기 힘들고 AI 없이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AI는 영국의 수학자요 컴퓨터 과학자인 앨런 튜링(1912~1954)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945년 알고리즘과 계산 기능이 있는 튜링 머신을 만든 다음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아무도 묻지 않던 ‘엉뚱한’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 것이 AI다. 질문의 힘, 질문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는 시대다.
하나님은 질문하시는 분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아담에게 던진 하나님의 첫 질문이자 성경에 맨 처음 나오는 질문이다. 가인에게 처음 하신 말씀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는 질문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 33:27)고 질문하신 하나님,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에게, ‘네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 4:2)고 질문하신 하나님이시다. 아직 끝이 아니다. 밧세바 사건 후 나단을 통해 다윗을 추궁하실 때도 질문이다. ‘너는 어찌 내가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하였느냐?’(삼하12:9). 하나님은 계속 질문하신다. 엘리야에게 ‘너는 여기에서 무엇하고 있느냐?’(왕상 19:9). 아모스를 향해, ‘네가 무엇을 보느냐?’(암 7:8), 이사야에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까?’(사 6:8) 요나에게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욘 4:4)고 따지듯이 질문하신다. 또 에스겔에게는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겔 37:3) 욥을 향해서도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욥 38:4)며 끊임없이 물으시는 하나님이시다(신의 위대한 질문-배철현). 어디 구약만이겠는가. 페이지마다 귀 기울여 들어야 할 하나님의 질문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질문으로 가득하다.
질문하면 예수님을 빼놓을 수 없다. 예수님은 질문의 달인, 질문의 대가이셨다. 심지어 저들이 함정에 빠뜨리려 할 때는 역질문을 하셨다. 대표적인 장면을 보자.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이르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막 12:13~17)
납세에 대한 반응은 정파 따라 달랐다. 진보였던 열심당원들은 거부했으며, 보수였던 바리새인들은 분개하면서 바쳤고, 현실 타협적이던 헤롯 당원들은 협조했다. 이들 중 누구도 납세가 모세 율법과 랍비의 가르침에 부합하다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니 납세가 옳다 하면 역적으로 몰아세울 수 있고, 옳지 않다 하면 제국의 반역자로 공격하려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상황. 대답 대신 동전을 두고 질문을 던지신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 한마디에 반전이 시작된다. 코너에 몰아넣으려던 자들이 코너에 몰리기 시작한다. 로마 동전의 앞면은 신성을 상징하는 월계관을 쓴 티베리우스의 형상(두상)을 돋을새김하고, TI CAESAR DIVI AUGF AUGUSTUS(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케사르)라는 글이 적혀 있다. 뒷면에는 신들의 평화를 나타내는 홀과 감람나무 가지를 양손에 들고 보좌에 앉아 있는 황제 어머니가 새겨져 있고 PONTIF MAXIM(지극히 높은 사제)라고 찍혀 있다. 아마 유대인들은 이 말을 ‘대제사장’이란 뜻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구절을 두고 신학자들 해석이 분분하다. 로마제국의 압제를 인정하셨느냐 아니냐, 정교분리를 말씀하신 것이냐 아니냐는 질문은 핵심이 아니다. 학자들은 한글 번역 성경이 생략한 접속사에 관심을 둔다. 헬라어의 접속사 καὶ(카이)는 ‘그리고’라는 뜻이지만 ‘그러나’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로 쓰일 때는 앞보다 뒤를 강조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말씀이 된다.
데나리온에 새겨진 황제의 얼굴과 문구, 유대인들은 이런 동전 소지를 꺼렸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 때문이다(출 20:4). 동전을 꺼낸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저들은 이미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을 품고 다닌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강도떼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절기마다 쏟아지는 성전세와 제물들, 순례자들 편의 제공이라는 명분 아래 성전 마당에 진열을 허락한 제물들과 환전상들의 돈뭉치들이다. 당연히 장사꾼들과 성전 종교지도자들 간의 커넥션이 있었다. 신약성서의 유다적 배경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인 요아힘 예레미아스, 그가 쓴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에 따르면 절기에는 제물값이 폭등했다. 심지어 100배까지 오른 때도 있었다니,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비둘기를 쫓아버리고 채찍까지 만들어 장사치들의 좌판을 뒤집어엎은 그분의 분노를 알 만도 하다.
예수님의 역질문에 이은 명쾌한 답변을 들어보자.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라.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인 너희는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예수님은 질문과 역질문의 대가가 맞다.
베뢰아 사람들은 질문하는 사람들이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달라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행 17:11~12)
“상고하다”란 '자세하게 골라내다, 시험하다, 재판하다'란 뜻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말씀이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한 말씀에 부합하는지 자세하게 광범위하게 매일 살피고 연구했다. 맹목적이지 않았다. 이단에 왜 빠질까? 바보라서? 똑똑하지 않아서? 아니다. 도리어 바보가 아니라서, 똑똑해서 빠지기 쉽다. 질문은 하지 않고 암기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질문하더라도 닫힌 질문만 하기 때문이다. 무조건 아멘, 생각 없이 하는 아멘이 얼마나 무서운가.
《예루살렘의 아히히만》이란 책이 있다. 1963년에 출간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저서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하고 분석해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렌트는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 광풍 속에서 탈출하여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오토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1906~1962)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정되었던 대학 강의까지 취소하고 예루살렘으로 간 아렌트가 재판을 직접 참관하고 집필한 책이다. 유대인 600만을 죽이도록 한 인간이니 얼마나 흉측할까? 피고석의 아히히만이 사악하고 악마적인 인물일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너무도 평범했다. 아렌트의 글을 읽어보자.
아이히만은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는데, 각각의 죄목에 대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나는 유대인을 죽인 적이 없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 반복해서 자신은 단지 유대인을 수용소까지 이송하는 역할만 맡았고, 그것은 법으로 정해진 명령이었기 때문에 명령에 따라 수행했을 따름이라고 항변했다.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아히히만의 정신을 감정하고 '정상'으로 판정했다. 한 정신과 의사는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는 아이에게는 바람직한 아버지였고, 아내에게는 바람직한 남편이었으며, 아우에게는 바람직한 형이었고, 친구에게는 바람직한 동료였다. 정신과 의사들은 그의 모든 정신적 상태가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함'을 발견했다. 더 심각한 것은 아이히만은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반유대주의에 열광했거나 세뇌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유대인을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실제로도 유대인을 싫어하지 않았다!
멘붕에 빠진 아렌트는 아히히만의 발언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분석한 다음, 그 이유를 ‘무사유’(thoughtlessness)라고 규정했다.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권리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의무라는 것이다. 사유 없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밝혔다.
작년 말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국회로 달려온 시민들, 맨몸으로 탱크를 막았다. 맨 손으로 총부리를 잡았다. 지금이 비상계엄을 선포할 상황인가? 질문했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 국회의사당으로 출동은 했지만 멈칫멈칫, 주저주저한 군인들이 있었다. 군인이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어도 되는가? 상명하복이 생명이지만 불법적 명령도 따라야 하는가? 질문했다. 사유했다. 계엄 해제 결의가 나고 철수하던 몇몇은 죄송하다며 인사까지 했다. 질문이 민주주의를 지켰다. 사유가 나라를 구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질문하자. 상고하자. 질문은 하지 않고 읽기만 하는 성경읽기는 1년에 몇 독이라는 숫자 채우기에 머무를 수 있다. 1독 아니 1/10독을 하더라도 질문하고 상고하며 읽는 성경이 제대로 된 성경 읽기다. 이 땅에 복음이 도달한 지 개신교만도 140년이다. 이제는 몇 독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할 때도 되지 않았나. 구역별 성경 읽은 장 숫자를 주보에 싣는 일은 이제 그만 둘 때도 되지 않았나.
슬로브핫의 딸들도 호모 콰렌스였다. 모세를 통한 율법에 이의를 제기하며, 율법의 갱신을 이끌어냈다(민 27장, 36장). 바울도 호모 콰렌스였다. 다메섹에서의 강렬한 예수 체험 후 아라비아로 갔다(갈 1:17). 무엇을 했을까? 지금껏 배웠던 유대식 랍비 교육, 율법에 철저하고 전통에 전념하던 바리새 전통 앞에서 질문했을 것이다. 이 구절은 무슨 뜻입니까? 저 구절은 무슨 뜻입니까? 내게 나타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행 9:5)라고 한 그 예수는 누굽니까? 랍비 교육을 통해 배운 율법을 묻고 물으면서 복음으로 바꿀 수 있었다. 질문 속에 보냈을 3년의 아라비아였을 것이다. 유대교적 신앙에서 기독교적 신앙으로, 율법에서 복음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도 질문 때문이었다. 지나친 상상인가? 신앙도 질문해야 한다. 당신은 질문하는 그리스도인인가? 사진은 질문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많다. ‘찍사’에서부터 사진사, 사진가, 사진작가 그리고 포토 저널리스트. 누가 찍사인가? 질문 없이 찍는 사람이다. 그렇다. 사진은 질문이다. 질문하는 사람이 사진가다. 왜 사진 찍는 거야. 왜 하필 여기서 찍지? 왜 하필 이 시간, 이 계절에 찍어? 왜 이렇게 찍었지, 누구를 위한 사진이야, 이 사진이 말하고 싶은 게 뭐야... 끝없이 묻고 물어야 한다. 이 상황을 가장 잘 담은 사진인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진인가? 공동체의 유익에 보탬이 될까? 이런 수준의 질문은 나로서는 여전히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아직 노란 띠다.
사진가는 질문하며 찍고 사진으로 질문한다. 질문하는 동안, 우리는 점점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간다. 묻고 답하는 동안 우리는 점점 더 고귀해진다. 우리는 서로의 질문에 존재의 빚을 지고 있다. 질문이란 자기 모순적이고 연약한 인간이 이 미스터리한 세계와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낯선 타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사진가는 호모 콰렌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