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종 편집부국장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국가나 애국이나 그런 것이 아니야, 진실이야!”

《전환시대의 논리》로 세계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불러 유신체제의 한복판에서 터진 ‘지적 다이너마이트’란 별명을 얻은 리영희(1929~2010) 선생이 한 말이다. 민족이나 국가, 애국애족보다 진실을 우위에 두었던 선생이다.

캐나다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1916년 내한했던 프랭크 윌리암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石虎弼, 1889~1970) 박사 이야기를 해 보자. 3.1독립운동 만세 시위를 촬영해 해외에 알렸다.  3.1운동 하루 전 이갑성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식과 만세 시위가 있을 것임을 들었다. 독립선언문 사본을 영어로 번역해 백악관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당일 오전 다시 찾아온 이갑성 선생에게서 오후 2시까지 탑골공원에서 있을 대규모 학생 시위 현장의 사진을 찍어 줄 것도 부탁받았다.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으로 탑골공원까지 갔던 스코필드는,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정문에서 나오는 대열을 향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종각과 광화문을 거쳐 덕수궁 대한문까지 이른 군중을 따라갔다. 한쪽 다리와 팔의 불편함을 잊고 대한문 맞은편 높은 곳에 기어 올라가 촬영하고 이를 세계에 알렸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4월에는 화성 제암리교회와 수촌리를 찾아 일제의 만행으로 잿더미가 된 현장을 살 떨리는 손으로 촬영하고,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까지 작성해 알렸다. 작년 가을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만난 <스코필드기념관>, 흉상과 기념물들을 찍는 내 손도 떨리고 있었다. 그분의 떨림은 만행에 대한 분노요, 내 손 떨림 아니 가슴 떨림은 그분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었다. 사진은 진실이다.

1958년 이화여고 노천강당에서 열린  스코필드 박사 환영회(출처=국가기록원)
1958년 이화여고 노천강당에서 열린 스코필드 박사 환영회(출처=국가기록원)

신학생 때다. 가깝게 지내는 동기가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나귀 두 마리를 타셨다는 것이다. 뭐라고? 서커스도 아니고 그게 말이 돼? 그런데 성경에 그렇게 적혀있다는 거다. 팩트체크 들어간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마 21:7)

이게 뭐지? 영어 성경을 보면 확실하다. ‘그 위에’(on them) 얹으매, ‘그 위에’(on their backs) 타셨다. 어미 타고 몇 걸음 가시다가 새끼 타시고, 또 어미 타시고 새끼 타셨나? 아니면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타셨나? 세상에 이럴 수가! 내가 성경을 몰라도 이렇게 모르는 걸까? 다른 복음서를 보자.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막 11:7)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를 태우니(눅 19:35)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요 12:14)

성경을 꼼꼼하게 읽지 않은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질문 없이 읽은 탓이다. 다른 복음서는 모두 나귀 새끼 ‘한 마리’인데 마태복음은 왜 ‘두 마리’일까? 히브리어에 ‘동의적 평행법’(同意的 平行法)이 있다. 히브리인들이 시를 쓸 때 자주 쓰는 방법이다. 시편 1편 1절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들・죄인들・오만한 자들, 동의어 반복이다. 따르지 아니하며, 서지 아니하며, 앉지 아니하고는 점층적 반복이다. 하나만 더 보자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3)

‘주의 나라’와 ‘주의 통치’, ‘영원한 나라’와 ‘대대에 이르리이다’, 모두 같은 뜻의 반복이다. 성경 특히 시편에 이런 표현들이 정말 많다. 이런 동의적 평행법을 즐긴 까닭이 있다. 강조도 하면서 운율이 있어 읽기 쉽고 듣기 쉽고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장치다. 종이도 없고 개인이 소장할 두루마리도 없던 시대에 누구나 쉽게 기억하게 하려는 지혜였다. 

마태는 복음서 기자 중 유일하게 스가랴서 9:9까지 인용했다.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분명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라고 했다. 그럼에도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는 두 마리를 타셨다고 썼다. 이게 뭔 말이래요. 한 마리인가 두 마리인가, 무엇이 진실일까? 마태는 히브리어의 동의적 평행법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마태가 성경을 왜곡시켰다기보다 히브리어 용법에 약한 상태로 복음서를 헬라어로 기록했을 것이다. 적어도 마태가 생각한 종려주일의 진실은 예수님께서 나귀 두 마리를 타셨다. 이렇게 진실은 주관적일 수 있다. 주관적 진실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특히 가짜뉴스가 판치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문은 무보다 강하다. 학창 시절 영어 참고서에서 수없이 만났던 명문장 중의 하나다. 1839년 에드워드 불워-리튼이 처음 사용했다는데, 문이 어떻게 무보다 강할까. 진실일 때이다.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이란 보불전쟁(普佛戰爭) 후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휩쓸었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강박적인 애국주의 때문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프랑스 포병 대위와 관련된 사건이다. 그의 간첩 혐의를 놓고 프랑스 사회가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유죄를 주장하는 반드레퓌스파로 양분되어 격렬하게 투쟁했던 정치적인 스캔들,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이자 간첩 조작 사건이다.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여 군부의 부도덕성을 대중에게 고발하며 진실을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1906년에야 재심을 통해 무고함이 입증되며 사건이 종결되었다. (위키백과)

'로로르'지에 실린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출처=경기신문 캡처)
'로로르'지에 실린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출처=경기신문 캡처)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 있다. 김기설 씨 분신 사망 후 강기훈 씨가 유서를 대필해 자살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은 지 23년 만이다. 또 2009년 서울고등법원 재심개시결정 이후부터 다시 5년 가까이 지나 무죄 판결이 났다. 그 밖에도 암울한 시대 이 땅에는 유사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다.

작년 12월 3일, 계엄이 선포된 그날 밤, 국회로 달려가 계엄군을 제지하고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아섰던 시민들이 있었다. 총부리까지 붙잡고 “부끄럽지도 않냐!”며 외치던 여성, 로텐더홀 진입 저지를 위해 바리 케이트를 치던 사람들, 의사당 상공에 굉음을 내며 나타나던 헬리콥터, 국회 담장을 넘던 국회의원들까지. 대통령 탄핵 소추 현장, 대통령 체포를 촉구하는 현장, 폭설 예고에도 아랑곳없이 시위 현장을 지키며 ‘키세스 단’이 된 시민들, 매서운 한파를 견디며 서로 격려하고 선결재했던 현장, 현장에 카메라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장면 장면들이다. 현장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 사람들까지, 사진은 현장이고 사진은 진실이다. 

진실과 진리는 어떻게 다를까. 진실은 상대적이고 진리는 절대적이다. 천동설은 고대인에게는 진실이었으나 현대인들에게는 거짓이다. 오늘은 진실인데 내일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진실해야 한다.

하지만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진리이다. 헬라어 문법에서 명사가 연속적으로 나오면 뒤의 명사는 앞의 명사를 수식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이 구절은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예수님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시다. 하지만 문법을 살리면 예수님은 ‘진리의 길’이며 ‘생명의 길’이다. 예수님은 진리의 길을 걸으셨으며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 곧 예수님에게 진리는 생명이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리요 우리 생명이시다.

사진은 진실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아버지 책 속에 꽂혀있던 5.18 관련 사진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실을 담은 사진이 노벨문학상을 잉태했다. 사법 살인이 된 인혁당 사건, 사형선고 하루 만에 형을 집행하고 시신까지 불태워 버렸다. 재판정 사진은 있지만 처형 사진, 시신을 불태우는 사진은 없다. 진실이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사진은 진실이다.

인혁당 사건 재판정(사진=서울신문)
인혁당 사건 재판정(사진=서울신문)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할렐루야기도원의 김계화 씨, 암 환자의 암 덩어리를 기도로 끄집어내고 치료한다는 소문이다. <교회와신앙> 사무실 자료철에는 관련 장면을 찍어놓은 사진들이 수두룩하다. 하나같이 끔찍한 장면들이다.

비슷한 것이 필리핀 ‘준 라보 사건’이다. 1992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TV 카메라 앞에서 직접 맨손으로 환자의 몸에서 암 덩어리나 종양을 꺼내는 모습을 공개해 큰 화제가 됐다. 무통 무흔 기적의 심령 치료사다. 소식을 들은 한국인들이 필리핀 원정 치료까지 받았다. 사실일까. 제보를 받은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필리핀으로 날아갔다. 담석 환자를 치료했다고 하자 취재에 들어갔다. 누군가의 배에서 나왔다는 담석 알맹이의 진위를 외부에 문의한 결과 인간의 피가 아니라 동물의 피였다. 담석도 그냥 작은 돌일 뿐이었다. 어떻게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곁에서 뚫어져라 지켜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마지막 결단, 제작진 중의 한 사람이 직접 시술을 받아보기로 했다. 물론 출국 전 정밀 건강검진에서 건강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이다. 준 라보는 이번에도 어디가 안 좋다며 기자의 배를 만지고 배에서 덩어리를 꺼냈고 목을 만지면서 또 뭔가를 꺼냈다. 물론 고통도 없고 흔적도 없는 무통 무흔이다. 다행히 그 과정 전부 허락을 받고 촬영했다. 숙소로 돌아온 취재진, 녹화 영상을 보고 또 봐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재도전해야 했다. 이번엔 줌인(zoom in) 기능이 있는 특수 고속카메라가 동원되었다. 촬영된 영상을 수십 번 돌려본 후에야 눈속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이 진실을 밝혀내는 도구였다. 팁 하나. 마술사 최현우 씨가 ‘꼬꼬무’ 채널에서 했던 고백, '한 수 가르쳐주면 거액을 지불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국내외 없이 신자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치부하는 이단 사이비의 민낯이다. 

1934년 아돌프 히틀러가 완전히 정권을 잡으면서 나치당의 지지율도 크게 올라간다. 이에 히틀러는 그해부터 1938년까지 바이에른 주 뉘른베르크에서 나치당원들과 지지파 외에 다수 사람을 모아놓고 나치에 대한 선전을 홍보하는 연설을 했다. 하필 바이에른 주 뉘른베르크일까? 신성로마제국 시기 선제후들의 모임, 속칭 제국의회(Diet)를 열어 황제를 선출하던 곳이다. 신성로마제국 계승을 자처하던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나치당의 지지율이 크게 올라간 것도 이때부터이며 이것으로 독일 전역을 나치로 물들게 하는 데 성공했다.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장은 거대했다. 무려 콜로세움의 2배 크기였다니. 저들은 관중석 배치와 동선을 미리 계획하고 카메라를 어디에 설치해야 가장 돋보이게 할 수 있는지 그 위치까지 치밀한 배치 계획을 세웠다. 거대한 프로파간다(propaganda, 정치적 선전)이다. 주연은 요제프 괴벨스요 주인공은 히틀러였다. 괴벨스는 전당대회를 촬영하여 홍보 영상을 만들었으며 집권한 이후에는 영화감독들까지 초빙한다. 대표자 레니 리펜슈탈, 두 차례의 전당대회를 촬영하여 각각 홍보 영화를 만든다. 이 영화는 오늘날도 선전 영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4일 석간 2면에 일장기가 지워진 베를린올림픽 영웅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게재했다. 민족지다운 항일이다. 사실일까? 회사의 결정이 아니라, 몇몇 기자들이 회사에 알리지 않은 채 은밀히 해낸 쾌거였다. 일제 비위 맞추기에 온갖 아첨과 굴종을 다 하던 경영진에겐 청천벽력. 사주 김성수는 “몰지각한 행동”이라고 개탄했고, 사장 송진우는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웠다”며 분개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사장부터 평기자까지 13명을 해고해 버렸다.

이런데도 동아는 사사(社史)에서 “민족의 아픈 가슴을 달래기 위하여 민족의 대변지를 자임해 온 동아일보가 그냥 무심히 넘길 수 없었던 것은 … 거의 자연발생적인 본보의 체질에서 우러난 것이었다”고 한다. 역겹지 않은가. 동아는 이 사건으로 정간되고 나중에 풀리자 총독부 처분에 감읍하며 이렇게 다짐한다. “금후부터 일층 근신하여 대일본 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 통치의 익찬을 기하려 한다.”  지금껏 동아는 단 한 번도 사죄는커녕 사과 한마디 없이 일장기 말소 사건을 앞세워 민족지를 외친다. (자세한 내용은 자유언론실천재단이 발간한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에 있다.) https://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60

아! 조중동이여!

국민은 속일 수 있지만 시민은 속일 수 없다. 시민까지 속일 수 있지만 역사의 심판까지 속일 수는 없다. 아니 역사의 심판조차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사진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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