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대 목사 / 예린교회 은퇴목사, 전 부산장신대 교수, Drew University(예배학박사, Ph. D. in Liturgical Studies)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채,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이 있다. 일명 ‘십자가 상의 칠언’이다. 이 중에 두 마디 말씀을 시편에서 인용하셨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태복음 27:46)
이 말씀은 시편 22편 1절에서 인용하셨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 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2:1)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이므로 대부분 곡조가 있다. 시편 22편의 제목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아얠렛 샤할에 맞춘 노래’이다. ‘아얠렛 샤할’은 ‘(이른) 아침의 사슴’이란 뜻이고, 당시에 유행했던 곡조의 이름을 말한다. 그러니까 시편 22편은 다윗이 지은 시에다, ‘아얠렛 샤할(이른 아침의 사슴)’이라는 전통 유행 곡조에 맞추어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부른 노래이다. 예수께서 바로 이 시편 찬송을 십자가상에서 부르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조용히 읊조리신 것이 아니라, 크게 소리 내어 불렀다는 것니다. 이유는 십자가 형벌의 육체적인 고통이 너무 아프고,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영혼의 고통이 극심한데서 터져 나온 노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상의 칠언 중 마지막 말씀도 시편에서 인용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누가복음 23:46)
이 말씀은 시편 31편에서 인용하셨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시편 31:5)
시편 31편의 제목에도,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다윗의 시에 곡조를 붙여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노래를 불렀다는 뜻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린 상태로는 말하는 것조차 힘들지만 그런 조건 속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시편 찬송을 읊조리셨다는 것은 그만큼 찬양하기를 좋아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음치였다?
바울은 빌립보의 감옥에서 실라와 함께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사도행전 16:25)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하던 중, 점을 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니까 수입이 끊어진 여종의 주인이 바울을 고소하여 옥게 갇히게 되었다. 바울은 한밤중에 실라와 함께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는데, 옥에 있던 죄수들이 들을 정도로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찬송을 불렀다고 하는데, 바울의 음악 실력이나 지식은 어느 정도이며, 얼마나 음악을 좋아했을까?
단언컨대 만약 바울이 구약의 다윗 정도로 악기를 연주하거나 작곡하는 등,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면 신약의 분량이 지금보다 배는 더 늘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들에게 서신을 보낼 때마다, 지금 서신서 내용에다 자신의 음악 지식을 덧붙여서 언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바울이 다윗처럼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쩌면 구약의 시편과 같은 또 하나의 찬양 성경을 기록했을지도 모르고, 신약성경의 분량이 조금 더 늘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뛰어난 음악인이 아닌 것이 성경의 독자들에게 불행인지 아니면 다행인지 모르겠다.
바울이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다는 사실은 다음에서 드러난다.
고린도교회 안에 방언의 은사로 인한 문제가 일어났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부터 은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은사(카리스마)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자랑할 것이 없이 모두가 동일하지만 굳이 최고의 은사를 원한다면 최고의 은사(카리스마)는 사랑(아가페)임을 13장에서 제시한다. 그리고 14장에 넘어와서는 문제가 되었던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악기 소리의 예를 들어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고전 14:7-8)
방언 기도는 분명한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마치 피리가 피리 소리를, 거문고가 거문고 소리를 내지 않으면 어떻게 그 악기가 피리인지 거문고인지 알겠느냐면서, 방언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거문고는 우리나라 고구려 재상 왕산악이, 중국 칠현금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악기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거문고로 번역한 헬라어 원어는 ‘키타라’이다. 키타라는 초대교회 당시의 헬라 악기로서 무릎 위에 올려서 손가락으로 뜯어 연주하는 작은 하프 모양의 악기이다. 물론 현악기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거문고는 키타라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악기이고, 거문고는 신약성경이 기록된 이후 3~4백 년 뒤에 만들어진 고구려 악기이다. 그래서 거문고로 번역하기보다는 소형(미니, 핸디) 하프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쨌든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방언 문제를 지적하면서 악기 소리를 예로 들었다. 그런데 악기에 대한 바울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
바울이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의 의도는 방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악기 소리를 예로 들면서 악기가 생명 없는 물건임을 언급하였다. 물론 피리와 거문고가 생명 없는 것이 맞기는 하다. 하지만 입술이 터지도록 피리를 불어보았더라면, 손가락에 물집이 생겨 굳은살이 박이도록 줄을 뜯어보았더라면, 악기를 생명 없는 것이라고 쉽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악기 연주자는 한 번의 연주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연습하고, 악기에 자기의 혼을 불어넣어서 마치 연주자와 악기가 하나가 되어 연주하게 된다. 이때 악기는 생명 없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와 함께 살아있는 악기가 된다. 바울이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음악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초대교회의 교회음악신학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