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종 편집부국장
바른 인식에 장애가 되는 4가지 우상을 제시한 사람은 베이컨이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그리고 극장의 우상이다.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 베이컨에게 이런 아이디어를 준 것은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펼치면서 말한 동굴의 비유였다.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있는 죄수들이 동굴의 좁은 입구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에 의해 생긴 자기들 그림자를 보고 자기들 실체로 믿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동굴 안은 현실 세계요, 동굴 밖은 초월적 이데아 세계다. 인간이 동굴 같은 현실에서 보는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인데, 그림자를 실체로 믿고 있다는 것. 따라서 플라톤은 “그림자를 실체로 믿고 고집하는 동굴의 죄수 같은 인간이여, 관념을 회의(懷疑)하라. 이것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역설했다.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림자는 입체감도 없고 질감도 없으며 색깔은 더더욱 보여주지 못한다. 하여 그림자는 그야말로 그림자일 뿐이다. 하지만 때로 그림자여서 좋다. 입체감이 없기에, 질감이 없고 색깔이 없기에 매력적이다. 촛불이나 등잔불 같은 불빛 가까이에서 손을 움직여 벽이나 창문에 다양한 그림자가 나타나게 하는 놀이, 그림자놀이다. 딱히 재료가 없어도 불빛과 비칠 장소만 있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한 손이나 두 손으로 여러 모양을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종이나 나무막대기 같은 소품을 더하면 더 다양한 그림자를 만들 수 있어, 특히 아이들이 좋아했던 우리 전통 놀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그림자 이전에 먼저 실체를 알아야 한다. 새의 실체를 보지 못한 사람은 그림자놀이에서 새 모양을 보여줘도 새로 인식하지 못한다. 소나 말을 보지 못한 사람은 머리 모양을 보여줘도 모른다. 현실에서 새와 말과 소를 보았기에, 아니면 그림이라도 보았기에 인식할 수 있다. 하여 그림자놀이는 상상력과 연상 능력을 자극할 것이란 생각이다. 짐작만 하다가 검색창에 ‘그림자놀이의 교육적 효과’라고 입력하니 이런 대답이 나왔다.
아이들의 창의력, 상상력, 집중력을 높여주고, 신체 인식 및 운동 능력, 시각운동신경 능력 발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또한 신체 표현 및 자기표현 능력, 사회성과 의사소통 능력을 증진시키고, 그림자 속 이야기를 통해 정서 발달에 도움을 주며, 긍정적인 마음과 자신감을 키워주는 교육적 효과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대면하고 살 사람이 없다 하시며 하나님은 등만 보여주셨다(출 33:18~23). 그러니 실루엣 사진의 원조는 하나님이 아닌가 싶다. 질감이나 입체감도 색깔도 없이 찍는 방법, 일출 일몰 실루엣 사진이다. 피사체의 실루엣을 살릴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배경은 아주 단순하다. 노을 진 바다, 저 멀리 배가 지나간다. 아니면 돛을 단 보트가 지나갈 수도 있다. 누군가의 노랫말처럼 ‘일몰의 고갯길을 가는 고행의 방랑자’도 괜찮겠다.
실루엣 사진은 장점이 많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피부에 자신이 없어도, 주름진 얼굴도 괜찮다. 심지어 얼굴에 주관적 자신감이 없어도 좋다. 얼굴 윤곽, 허리 포즈, 손발 팔다리 전체 포즈만 살려주면 되니 누구나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일출 일몰을 찍을 때 몇 가지만 생각해 두자. 이른바 Tip 10이다.
① 뺄 것은 다 빼고 필요한 것만 남겨두자.
② 두 사람 이상이라면 카메라를 바라보고 일렬횡대로 자리를 잡자.
③ 남녀와 연령, 신장 차이로 변화와 리듬을 살려주자.
④ 양쪽으로 키 큰 사람, 가운데로 작은 사람이 서도록 하자.
⑤ 옆 사람과 조금씩 떨어지되 최소 주먹 한 게 정도는 두자.
⑥ 최대한 동작을 크게 하자. 실루엣은 얼굴 표정이 아닌 몸동작으로 분위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⑦ 붉은 빛 머금은 태양이 인물에 완전히 가리게 해 보자. 반대로 노출되게도 해 보자. 이때는 보케 현상에 유의해야 한다.
⑧ 소지품을 이용해 보자. 스마트폰, 선글라스, 가방, 모자, 반려견, 꽃 등등 무엇이든 좋다. 단, 실루엣이니 소품의 실루엣도 확실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을 잊지 말자.
⑨ 자연스런 이동도 좋다(팔을 뻗는다. 무릎을 굽힌다. 다리를 들어 올린다. 공중 부양한다. 핸드폰이나 선글라스를 들자. 두 팔을 뻗어 아기를 높이 들어보자. 아이를 목마 태워도 좋고, 부부가 샌들을 들고, 손잡고 걸어가는 모습도 좋다. 반려견을 데리고 걷는 해변 실루엣 등등)
⑩ 시간 여유가 있다면 비례ㆍ균형ㆍ조화ㆍ배치ㆍ배경ㆍ뺄셈ㆍ구도 등을 종합해 찍어 보자. 아니면 한두 개만이라도 염두에 두고 찍어 보자.
사진은 짤 찍어야 하지만 잘 찍힐 줄도 알아야 한다. 피사체가 된 사람들은 내 실루엣이 살아나려면 어떤 포즈를 취해야 가장 좋을지, 지금 이 동작이 카메라에는 어떻게 잡힐까를 ‘생각하면서 찍히자’.
지난 초여름에 다녀온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일몰을 직관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1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보트도 이용해야 했다. 벌써 일몰이 시작되는가 보다. 저만치 친구ㆍ연인ㆍ부부ㆍ가족들이 벌써 여럿 보인다. 게 중에는 포즈 잘 잡는 사람들도 보인다. 단단히 작정한 채 DSLR을 넣은 가방까지 메고 갔지만 가방 내려놓을 자리도 없다. 솔직히는 환상적 일몰에 빠진 탓에 DSLR 꺼낼 여유도 없다. 온 천지가 황금빛, 에라 모르겠다. 손에 든 스마트폰을 작동시킨다. 주위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고 황금빛은 어느새 검붉게 바뀌고 있다. 실루엣을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부지런히 셔터를 누른다. 심도(f값), 빛 감도(ISO), 셔터 속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럴 여유도 없다. 들뜬 마음인지라 보이는 대로 마구 누른다. 그야말로 그토록 욕하던 auto 모드다. 나는 확실히 '노란 띠'다.
그래도 프레임은 9:16으로 세팅했다. 1:1이나 3:4는 일몰을 담기엔 적절하지 않다. Full 프레임도 가끔은 괜찮지만 지나치게 가로 화면이 길면 불필요한 것들까지 화면에 담길 수 있다. 9:16이면 바다 넓이를 담기에 넉넉하다. 해변이라 배경에 복잡한 구조물도 없어 인물의 실루엣 중심으로 담기에 최적이다. 물론 저 멀리 배가 있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조금은 아쉽다. 만약 배경에 그런 물체가 있다면 인물과 겹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본구도는 3분할을 유지하되, 피사체의 대ㆍ중ㆍ소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리듬감을 살리기만 하면 된다.
전문 사진가가 아니라면 일몰과 일출같이 조도가 낮을 때는 스마트폰이 나을 수 있다. 요즘은 화소나 색감도 괜찮은 편이다. DSLR 카메라는 삼각대 없이 조도가 약한 조건에서 성능 발휘가 어렵기 때문이다. 뒷배경에 사람들이 여럿 있다면 가급적 피해서 자리를 잡든가, 아니면 찍는 이가 옮겨가며 배경을 깔끔하게 담아야 한다. 화면이 어지럽고 복잡한 실루엣은 실루엣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있다면 엑스트라로 삼자. 실루엣이니 초상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거리를 두고 그들은 작은 사이즈로, 주 피사체는 큰 사이즈로 넣어보자. 이른바 주인공과 엑스트라가 구별되게 찍어 보자. 내 가족 내 일행만 담는다면 현장 분위기 살리는 데 한계가 있고 입체감 살리기도 쉽지 않을 수 있다. 또 지나치게 단조로울 수 있다. 대신 내가 포착하려는 주 피사체 뒤에 엑스트라가 있으면 이들 모두 살릴 수 있다. 이때 조심할 것은 엑스트라가 주 피사체의 실루엣과 절대 겹치지 않아야 한다. 하나 더 신경 쓰자면 엑스트라들끼리도 겹치지 않도록 하자. 어떻게? 그런 순간을 포착하란 말이다. 사진은 시간이니까.
생각보다 일출 일몰 시간이 길지 않다. 낮에는 태양 이동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지만 일출 일몰 때는 금방 바뀐다. 일출은 점점 밝아지기 때문에 다행일 수 있지만 일몰은 점점 어두워진다. 우물쭈물하다가는 결정적 순간을 놓치기 십상이다. 미리 계획을 짜자. 일행과 함께 먼저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찍자고 생각을 모아보는 것도 좋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계획대로면 인위적일 수 있다. 물론 전문가라면 삼각대를 설치해 놓고 모든 조건을 세팅해 놓고 기다릴 것이다.
APEC이 열렸던 경주, 감포 앞바다 대왕암 일출 장면도 장관이다. 일교차가 큰 계절, 안개나 박무가 바다 위에 깔려있고 하늘에 구름이 살짝 있는 날, 갈매기 떼가 날고 저 멀리 고깃배가 지나간다. 부지런히 조업하는 어부들까지 보인다. 그 순간 동해에 찬란한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셔터를 누르고 누른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박두진 <해>
검붉은 아침 해,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영상 화면에 나올 만한 장면이다. 이런 순간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수십 번 찾아가야 만날 수 있으려나. 고깃배도, 갈매기도, 안개ㆍ박무ㆍ연무도, 구름도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그저 사진가는 그 계절 그 시간에 그곳에서 그 순간을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다. 이런 이야기는 ‘사진은 시간이다’에서 했다. https://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513
유명하다 하여 보고 싶지만 여자의 외출이 쉬 허락되지 않던 시절, 어찌어찌 갔을 때는 날씨조차 도와주지 않았다. 부임 3년째 되던 해, ‘내 기어이 보리라’ 작심하고 남편에게 이른다.
“인생이 얼마나 되오? 사람이 한 번 돌아감에 다시 오는 일이 없고, 심우(心憂)와 지통(至痛)을 쌓아 매양 울울(鬱鬱)하니 한번 놀아 심울(心鬱)을 푸는 것이 만금(萬金)에 비하여 바꾸지 못하리니 덕분에 가고 싶도다.”
남편과 동행하여 설렘으로 밤을 꼬박 새우고 날이 밝기도 전에 찾아간 귀경대(龜景臺)에서 맞이한 일출 묘사를 보자.
그 붉은 위로 훌훌 움직여 도는데, 처음 났던 붉은 기운이 백지 반 장 나비만큼 반듯이 비치며, 밤 같던 기운이 해 되어 차차 커가며, 큰 쟁반만 하여 불긋불긋 번듯번듯 뛰놀며, 홍색이 온 바다에 끼치며, 먼저 붉은 기운이 차차 가시며, 해 흔들며 뛰놀기 더욱 자주하며 항아리 같고 독 같은 것이 좌우로 뛰놀며, 황홀히 번득여 두 눈이 어질하며, 붉은 기운이 명랑하여 첫 홍색을 헤치고 하늘 가운데 쟁반 같은 것이 수레바퀴 같아서 물속으로부터 치밀어 받치듯이 올라붙으며, 항아리, 독 같은 기운이 스러지고, 처음 붉어 겉을 비추던 것은 모여 소의 혀처럼 드리워 물속에 풍덩 빠지는 듯싶더라.
어찌 이런 글귀를. 그저 놀랄 뿐이다. 18세기 조선 후기 의유당(意幽堂) 남씨가 동명 일출을 보고 묘사한 우리 고전 수필문학의 백미, 고등학교 때 배웠던 <동명일기>(東溟日記)의 한 대목이다.
일출 일몰 사진은 해변 가까이 가서 찍는 것도 좋지만 멀찍이서 일출 일몰 사진 찍기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찍어 보는 것도 좋다. 그런 곳에는 세계 각지, 아니 전국에서 작정하고 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포즈 취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도 섞여 있기 십상이다. 그들은 이런 곳에서 어떤 포즈를 취하는지를 엿보는 것은 덤으로 얻는 재미다. 영상으로만 영화에서나 잡지에서 봤던 포즈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다.
실루엣은 각각의 특징을 살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토끼의 실루엣은 어떻게 살릴까. 당연히 큰 귀, 캥거루는 가슴에 새끼를 품은 옆모습, 코끼리는 긴 코, 기린은 긴 목... 동물은 동물마다 나름의 외형이 있다. 그런 외형의 바깥 라인을 살려주는 것이 실루엣 사진이다. 인물 실루엣은 큰 동작이 키 포인트가 된다.
피지와 산토리니 그리고 코타키나발루, 세계 3대 석양으로 이름난 곳이다. 이곳보다 더 이름난 곳이 왜 없겠는가. 누가 투표한 것도 아니고 AI가 뽑은 것도 아닐 터. 3대 석양만 석양인가? 웬만한 지형적 조건이 있고 특히 그날 석양 무렵의 날씨가 갖추어진 곳이라면 석양 명소가 될 수 있다.
3대에 걸쳐 덕을 쌓은 것 같지도 않은데 오늘은 석양이 우리를 좋게 보았나 보다. 아니지 하나님께서 분위기 살려주신 거겠지. 코타키나발루에서 일몰 사진을 찍는다. 3분할 구도 우측에 주 피사체인 딸 가족이 있고, 좌측에는 엑스트라 역할을 해 준 3명의 여성들과 그들을 담는 남성 2명이 고맙기만 하다. 게다가 중간쯤에 홀로 있어 준 남자도 고맙다. 피사체의 사이즈와 피사체 간의 거리까지 비례와 균형이 잡혔고, 키 높이의 리듬감과 입체감도 보인다. 계획도 없었고 의도하지도 않았으며 할 수도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최적의 장소에서 최고의 포즈를 취해 준 연출이 되었다. 다만 ‘노란 띠’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