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종 편집부국장
대학 때 학과에서 매년 한 번씩 고건축 답사를 다녔다. 하회마을이나 해인사, 부석사, 마곡사 등지로 기억한다. 강의실에서 공부하던 한국건축사를 답사 현장에서 직접 배우고 익히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목적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때는 그저 놀러 가는 것이 좋았다. 그렇다고 답사에 아주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40년도 더 지났지만 그곳에서 했던 지도 교수의 말도 극히 일부지만 생각나니 말이다.
답사라면 최순우 선생의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가 생각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문화유산 답사 붐을 일으킨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그 책에 푹 빠진 적이 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둘째가 여섯 살 때였다. 그때부터 매년 여름휴가를 맞으면 그 책을 들고 돌아다녔다. 현지에서 같은 책을 들고 다니는 가족 단위 사람들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한 해는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 문화권, 그다음 해는 부여와 공주 중심의 백제 문화권, 또 그다음 해는 담양ㆍ강진ㆍ해남의 ‘남도답사 1번지’를 찾았다. 또 몇 년 후에는 한려수도 일대 같은 식으로.
정작 담임 때는 못 했지만 부목사 때는 10일간 여름휴가를 가질 때도 있었다. 한 달 전부터 준비하고 대략적인 일정까지 세웠다. 2~3일은 텐트 치고 잠자고, 그다음 날은 여관에서 1박 하며 샤워하고, 또 텐트 치고 샤워하고... 돈도 아끼고 텐트에서 추억도 쌓기 위해서였다. ‘아빠는 목사님인데 왜 매번 절을 찾아가느냐’고 아이들이 말할 거라던 아내였다. ‘거기가 거기 같았다’는 말은 그때를 돌아보며 결혼한 딸이 웃으며 했던 말이다. 목사(가족)이기에 이런 기회가 아니면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아이들도 집ㆍ학교ㆍ교회라는 트라이앵글에 갇히지 않게 하고, 학교 공부에도 도움이 되리라. 물론 학창 시절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풀려는 내 속셈도 깔려 있었다.
여름 휴가철이니 얼마나 더울 때인가. 때론 뜨겁기도 했다. 이를테면 첨성대를 바라보며 아이들은 양산을 써야 했다. 착하기도 한 아이들, 그래도 답사는 답사다. 그 앞에서 설명에 들어간다. 네모난 받침대는 땅을, 둥근 몸체는 하늘을 의미한다. 맨 위 정자석(井字石) 각 면은 동서남북 방위를 가리키고 있다. 허리에 난 창턱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정자석 아래에 걸친 판에 앉아 하늘을 관찰했다. 창을 기준으로 위로 12단, 아래로 12단 합쳐 24절기를 상징한다, 땅에 묻힌 단을 포함하여 맨 위까지 28단은 기본 별자리를 표현했다. 돌 개수를 모두 합치면 음력으로 1년을 뜻하는 360개인데... 며칠 전 벼락치기 공부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아이와 말을 주고받았다. 거의 일방적이었지만. 물론 요즘 학계에선 다른 해석도 하는 모양이다.
첨성대는 물론 흔히 많이들 찾는 대릉원과 천마총ㆍ오릉ㆍ계림ㆍ동궁과 월지ㆍ포석정ㆍ분황사ㆍ불국사ㆍ석굴암에, 김유신장군묘ㆍ무열왕릉 그리고 박물관까지. 무슨 수행 과제라도 하듯 며칠을 돌아다녔다. 답사에 빠진 탓에 숙소나 야영장엔 관심을 두지 못해 어둠이 내리는 시간, 형산강 지류 알천을 가로지르는 구황교 밑 급히 친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은 경주에 갈 때마다 생각나곤 했다. 물론 그땐 아날로그 카메라(Nikon F-801s)였고 필름도 꽤 많이 필요했다. 사진은 답사다. 아니 답사라고 우긴다.
역사 유적지나 고고학 발굴 현장을 멀찍이 또는 가까이 지나갈 때가 있다. 뙤약볕도 마다하지 않고 삽질ㆍ호미질ㆍ붓질하는 학자들이나 관계자들을 볼 때면 고마움과 안쓰러움이 겹친다. 어김없이 발굴 부분에 하얀 테두리 선을 이리저리 그어놓았다. 선 안이 발굴 현장이라는 뜻이리라. 발굴지 위에 가로세로 줄을 일정한 간격으로 띄워놓았다. 현장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촬영하고 또 정밀하고 꼼꼼하게 그림까지 그린다. 발굴된 유적이나 유물들의 정확한 위치나 관계성을 표시하고 그것이 연구에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행전에 있는 사도 바울의 선교 루트인 ‘터키ㆍ그리스 성지 순례’를 오래 전 다녀왔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지였던 ‘이스라엘과 요르단 성지 순례’도 다녀왔다. 개인적으로 순례라는 말보다는 ‘답사’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순례와 답사는 다르다는 생각 때문이다. 순례는 “성지를 차례로 찾아가 참배하는 것으로, 종교적 의무 또는 신앙 고취의 목적으로 하는 여행”(나무위키)이고, 답사는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조사하는 것이기에 천주교는 순례에, 우리는 답사에 가깝지 않을까. 물론 일반 답사와는 달리 우리 답사는 믿음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신앙을 돌아보고 영적 재충전과 새로운 다짐도 있어야 겠다.
몇 년 전 노회 내 시찰회에서 종교개혁지를 다녀오기로 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 한국교회도 종교개혁지 순례 붐이 일던 때이다. 우리는 일부러 한 해 늦은 2018년, 5월로 정했다.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이들로 붐비는 것을 피하면서, 10월보다는 5월이 낮도 길고 기온도 적당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지역은 웬만하면 귀동냥들이 있다. 하지만 종교개혁지는 잘 모르는 편이다. 목사들도 비텐베르크와 제네바, 취리히 또 스트라스부르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장로들은 더 할 것이다. 그 몇 해 전 아내와 함께 다른 일행과 먼저 다녀왔다는 이유로 답사준비위원장을 떠안았다.
위원회를 꾸리고 동의를 거쳤지만 답사 일정과 여행사 선택까지 주도했다. 출발 전에 종교개혁을 전공한 교수(현 장신대 총장)의 특강도 계획했지만, 사정으로 실행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었다. 그래도 일행들에게 관련 동영상 몇 개를 톡방에 올려 미리 시청하도록 했다. 또 둘러볼 국가와 도시 그리고 지역과 장소를 PPT로 만들어 두 차례에 걸쳐 PㆍT도 했다. 준비 없이 떠나는 건 죄(?)라고 말했다. 몇 년간 기금을 적립하면서 기다려 온 시간과, 시찰회 보조금까지 받고 떠나는 종교개혁지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답사 자료집도 준비했다. 관련 사진을 수없이 검색하고 선택하면서 또다시 사전 답사를 한 셈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출발할 때는 웬만한 내비게이션이 그려진다. 다시 찾아가는 곳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처음 가보는 곳 중에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을 포함시켰다. 개인적으로라도 꼭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방학을 맞은 루터가 만스펠트의 부모를 뵙고 귀교하던 길, 에르푸르트 인근 작은 마을 슈토테른하임을 지날 때 폭우를 만났다. 세찬 장대비를 동반한 벼락까지 떨어졌다(루터와 동행하던 친구는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도 하지만 글쎄...). 두려움에 사로잡힌 루터는 쓰러져 소리친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그러면 제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예수님의 외할머니인 안나를 당시 천주교인들은 광부들의 수호천사로 믿었다. 루터의 아버지가 광산업자였으니 집에서는 안나에게 자주 기도하는 것을 겪었을 테고, 루터는 본능적으로 안나를 찾았을 것이다). 2주 후 루터는 에르푸르트대학 법학 공부를 중단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문을 두드린다.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도시, 신학교에서 배우긴 했으나 답사를 앞두니 책도 읽고 인터넷 검색도 하면서, 모니터에 뜨는 사진들도 살펴보고 몇 장씩은 다운하고 저장한다. 이런 준비 과정으로 밑그림을 그렸으니 일행보다 조금은 밀도 있는 답사가 될 것이다. 순례든 답사든 현장에서 사진만 열심히 찍는 이들도 있지만 준비 없는 사진 찍기는 그야말로 ‘찍기’에 그치지 않을까. 사진은 답사다.
종교개혁지 답사의 절정이라 할 비텐베르크(Lutherstadt-Wittenberg,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대략적인 지도가 떠오른다. 비텐베르크 성(城)교회, 그 앞에 있는 담임목사 유스투스 요나스의 사택, 궁정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집과 인쇄소 그리고 약국,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설립한 비텐베르크대학, 루터가 선제후로부터 넘겨받은 루터하우스, 그 옆 프리드리히가 지어준 루터의 평생 동지 멜란히톤의 사택, 교황청의 파문 경고 문서를 불태운 곳의 루터 참나무, 도시 옆으로 흐르는 엘베강, 시청사 광장에 서 있는 루터와 멜란히톤 동상, 시청 옆 부겐하겐이 담임이고 루터가 자주 설교하던 시립교회와 강단에 있는 크라나흐 부자의 종교개혁 제단화 등등 말이다. 인터넷 유튜브에는 드론으로 촬영한 비텐베르크 동영상도 여럿 만날 수 있다. 물론 출발 전 다운로드하여 외장하드에 보관도 하고 일행들에게 보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진은 답사다.
그 비텐베르크에서 있었던 일이다. 루터의 95개 논제가 게시되었던 성교회 정문과 외관을 둘러보고, 시간 때문에 내부는 점심 후에 들르기로 했다. 좀 떨어진 곳에서 식사하고 휴식한 뒤 버스로 성교회에 가는 길이다. 이게 뭐지? 버스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더니 외곽으로 빠지는 도로로 진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데 현지 가이드는 아는지 모르는지다. 어떻게 하지. 잘 못 가고 있는 게 확실한가? 내 판단이 맞을까? 그 짧은 순간에 생각이 복잡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등어리에 식은 땀이 흘렀다. 기사도 가이드도 가는 길이 헷갈렸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시간을 한참 되돌려 튀르키예 고대도시 에베소로 가보자. 에베소는 바울이 선교하고 디모데가 목회했으며, 사도 요한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생애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특히 바울이 2~3년간 심혈을 기울였던(행 20:31) 대표적 선교지이다. 데메드리오의 소동으로 바울이 끌려갈 뻔했던 2만 5천 명 수용의 대극장(행 19:23~41)과 귀족 전용 극장인 오데온. 냉온탕에 탈의실까지 갖춘 스콜라스티카 목욕탕과 여기서 흘러나온 물을 이용하던 남성 전용 수세식 공중화장실. 시청사 격인 프리타네이온과 에베소의 명동 쿠레테스 거리 그리고 도미티아누스ㆍ하드리아누스 신전. 한때 교회용 달력 사진에 두란노서원이라고 설명 잘못 붙였던 셀수스도서관, 테라스하우스의 프레스코 벽화와 모자이크 바닥. 헤르메스와 니케 여신 부조, 헬라클레스문 기둥 부조 등등.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제자들을 가르쳤던 두란노서원(행 19:9)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업 아고라의 방 한 칸, 에베소공의회(431)가 열렸던 성 마리아교회, 바울을 이어 사역했던 사도 요한의 기념교회와 무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행 19:27) 터에 쓸쓸하게 남은 돌기둥 하나, 항구에서 들어오는 주도로인 아르카디아네, 대극장에서 도서관으로 뚫린 대리석 거리와 도서관 맞은편 유곽(遊廓)을 안내하는 바닥 돌, 마차 경주장 히포드롬, 입구 앞의 누가의 묘로 알려진 무덤, 폴리오 분수, 물을 공급하던 토관까지(잊었던 이름 몇 개는 글을 쓰면서 찾아 보고야 포함할 수 있었다).
인구 25만 명의 에베소는 소아시아지방 수도로 로마제국 본토 밖에서는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바닥조차 흙을 밟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전부 돌을 깔았다니 그 화려함과 세련됨을 어찌 가늠할 수 있으랴. 하기야 로마 귀부인들 버킷 리스트에도 들었다니 말 다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발굴 복원한 유적들은 10%도 되지 않는다는데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곳도 눈을 감으면 대략 지도가 나타난다. 사진은 답사라서 그렇다.
수학여행을 기억할 것이다. 대부분 2박 3일이나 3박 4일 정도 일정이었다. 우리, 아니 내가 다닌 학교는 일주일도 넘었다. 어떻게 그렇게 길었느냐고? 짐작하겠지만 떠나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수학여행을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녀온 후에도 며칠 동안 교실이 왁자지껄하고 수학여행 에피소드로 쉬는 시간이 채워졌으니까. 실은 모든 학교가 그랬을 것이다.
답사는 답사만이 아니다. 답사 전의 답사가 있고 답사 중 답사, 답사 후 답사가 있다. 사전 답사는 주로 책이나 인터넷으로 한다. 미리 답사 장소를 검색하고 관련 자료를 찾아 읽고 화면에 뜨는 사진과 동영상을 틀어본다. 자료집을 준비하면 금상첨화다. 현장 답사는 가이드 안내를 받는 것은 물론 준비한 자료집이나 휴대한 책을 통해 숙소에서, 차량 이동 중이나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발 전 조금만 준비하면 가성비 높은 답사가 된다. 이곳에 가면 이걸 확인하리라. 저곳에 가면 저것을 배경으로 찍고, 거기 가면 그 옆에서 찍으리라는 계산 말이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바둑처럼 ‘복기’ 답사가 이어진다. 귀국 후가 아니다. 며칠만 지나도 헷갈리기 때문이다. 당일 머무는 숙소가 제일 좋다. 어디 어디를 다녀왔는지를 생각하며 그곳에서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챙겨 간 노트북에 옮겨 바로 정리한다. 이때 날짜와 장소별로 폴더를 만든다. 저장할 때 다시 한번 일일이 사진을 보면서 저장할 것 버릴 것을 나눈다. 물론 귀국하면 저장했던 폴더를 열어 최종 정리(기본 보정)에 들어간다. 며칠 걸리는 동안 사진으로 또 답사한다. 사전 답사-도중 답사-사후 답사의 3~4중 답사인 셈이다. 사진은 답사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