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종 편집부국장
아버지는 이발사요 친가 외가를 다 뒤져도 음악가는 1명도 없는 집안이다. 그런데 아이는 오르간과 바이올린에 남다른 재능이다. 아들만큼은 가위를 쓰지 않아도 되는 법조인이 되기를 바랐다. 재능을 키우지 못하게 아예 집안 모든 악기를 치워버렸다. 심지어 악기 있는 집으로 놀러 가는 것도 막았다. 하지만 아이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참을 수 없었다. 모두 잠든 밤, 아무도 모르게 다락방에 올라가 클라비어 건반을 두드린다.
어느 날 아이는 아버지의 고용주인 대공 앞에서 오르간을 연주한다. 아이의 천부적 재능을 알아본 대공은 아이 아버지에게 음악가로 키울 것을 당부한다. 내키지 않았지만 대공의 권유를 거부할 수 없어 허락한다. 아홉 살이 된 아이는 오르간을 배우고 작곡까지 배운다. 예배 시간에 선생님 대신 오르간을 연주한다. 3년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법관이 되라는 유언을 남긴다. 유언 때문에 할레대학 법학과에 입학한다. 떠밀려 하는 법학이 무슨 재미가 있겠나. 답답할수록 음악적 욕구는 더 커진다. 입학 한 달 만에 교회 견습 오르간 주자가 된다. 교회 부속 학교에서 성악을 가르치고 합창단까지 조직해 여러 교회를 다니며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를 연주한다. 그 열정 누가 말릴 수 있겠나.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G. F. Händel) 이야기다.
"발바닥에 물집을 달고 살았다. 우리 때만 해도 고무매트가 아니고 마룻바닥에서 훈련하고 시합했다. 발바닥에 불이 난다. 물집이 잡히면 바늘로 터뜨린 뒤 실을 끼워 넣었다. 물집이 터져도 물이 남아 있으면 계속 옆으로 번지니까 실을 넣어 물을 빨아들이는 거다. 터진 물집이 서로 밀려 쓰라린 상태로 계속 연습한다. 몸살이 나도 오늘 하루 연습 쉬고 싶다는 말을 못했다. 1시간만 더 자면 나을 것 같은데 입 밖으로 그 말이 안 나온다. 스포츠의 세계에 타협이란 없다. 독해야 살아남는다. 1등은 한 사람이니까. 밟고 밟고 밟아서 나 스스로 서야 했다."
한때 ‘발바닥을 깁는 여자’로도 알려졌던 사람이다. 깁는다면 옷이지 발바닥을 깁는다는 게 말이 되나. 얼마나 많이 밟고 디뎠기에 그 굳은살 박인 발바닥이 헤졌을까. 그걸 기운다니 너덜너덜할 정도였다는 말인가. 깁고서도 또 훈련했다는 말인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발이 온전한 게 이상하지. 발톱 빠진 발, 발바닥 깁기는 현정화의 탁구 열정을 상징한다.
"남보다 10분 먼저 연습하고 10분 더 남아 연습했을 뿐, 무조건 오래 하지는 않았다. 특히 집중력 키우는 훈련을 많이 했다. 공만 보는 훈련을 죽어라고 했다. 상대의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볼과 상대의 라켓만 본다.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공과 라켓과 내 몸이 하나 되는 순간이 온다. 신들린 듯 공을 치게 된다." (조선일보 2011.12.3.)
어찌 현정화뿐이랴. 60년대 농구선수 신동파는 던졌다 하면 골인이었는데, ‘비결이 뭐냐’ 고 물었다. 비결은 없다며, ‘단체 연습 끝나면, 아무도 안 볼 때 500번씩 던졌더니 어느 날 공에 눈이 달려 빨려 들어갔다’고 했다. 김연아도 그렇다. 아세안은 피겨스케이팅 못 한다 했다. 그런데 엉덩이에 멍이 들어도 연습을 더 했다. 손흥민이 인종주의 심한 유럽 백인 사회에서 세계 Top 10에 들었다. 지금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 비결은 없다며 ‘단체 활동 끝나고 나면 천 번씩 공을 찼다’고 했다.
스피노자(B. Spinoza)는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노력과 추구, 지속하려는 경향성, 즉 역량(코나투스 conatus)에 있다고 했다. 모든 존재 특히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지속하려는 내적인 경향성, 즉 본질적 속성인 코나투스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부잣집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덕분에 어릴 때부터 그림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당시엔 구입하기 어려운 나라 밖 미술 관련 잡지나 책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아이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빠져든다. 다섯 살쯤에는 사과를 주면 그림을 그린 다음에야 먹었다. 소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의 어릴 적 이야기다. 틈만 나면 들판에 나가 소를 구석구석 관찰하고 그리고 또 그렸다. 오산고보 기숙사 방에는 소의 몸통, 앞발과 뒷발, 머리와 꼬리 등을 스케치한 그림들로 가득했다. 소를 그리되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리겠다는 열정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주변에서 미쳤다고 했겠나.
나라 잃은 설움 속 민족교육의 산실 오산고보에서 민족정신을 배웠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빠지고 고려 상감기법에 관심이 쏠리고, 조선의 추사체를 관통하게 했다. 종이 살 형편조차 없을 땐 담뱃갑 속 은박지로 종이를 대신했다. 물감 살 돈조차 없어 뾰족한 도구로 음각하고 거기에 검은 잉크를 채워 선의 맛이 드러난 그림을 그렸다. 전쟁과 가난 속에서 그림을 향한 열정이 탄생시킨 ‘은지화’들이다. 은지화는 고구려와 고려와 조선을 잇는 현대적 해석이 된 셈이다. 멀리 떨어진 가족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자, 엽서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이별의 아픔과 그림 열정이 탄생시킨 ‘편지화’이다. 《방구석 미술관》2 은지화ㆍ편지화는 이중섭의 코나투스였다. 지난 9월 연세대학교 박물관 특별전에서 그 은지화를 만났다. 눈은 빛났고 셔터 누르는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한순간 미친 듯이 좋아하는 것은 열정이 아니다. 설렘은 아직 열정이 아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힘들 때가 오기 마련, 그걸 이겨내게 하는 것이 열정이다. 글자 그대로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 열정이다. 좋아하던 것이 갑자기 싫어질 수 있다. 열정이 식어서라기보다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열정은 흥미를 잃더라도 유지될 수 있는 마음이다. “열정은 온도가 아니라 횟수이다.” 함께 식사하던 자리에서 신대원 동기이자 서울여대 교수인 장경철 목사가 했던 말이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힘을 쏟느냐가 열정의 가늠자란 뜻이렸다.
누구나 한 번쯤 뜨겁게 사랑할 순 있다. 목숨 바쳐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문제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느냐다. 글의 수준은 탈고의 횟수에 비례한다고 한다. 문필가가 한 편의 글을 탈고하기 위해 얼마나 지난하게 자기와 싸우는지, 탈고에 탈고를 거듭할수록 글은 더 높은 수준이 된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노란 띠’는 ‘기자가 된 목사의 사진 이야기’를 연재하느라 몇 번을 고치고 고치는지 매번 이렇게 헐떡거린다.
열정이 유행처럼 바뀌는 사람이 있다. 사진에 빠졌다가 이내 빠져나가는 사람이 있다. 빠졌다기보다는 빠진 것 같았을 뿐이다. 30년 40년 사진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한평생 동네 사진관을 지키며 동네를 지키는 사람들, 사진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신앙도 그렇다. 냄비 신앙이 아니라 가마솥 신앙이라야 신앙이다. 신앙은 전기장판이 아니라 온돌바닥이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누가복음 2:49)
열두 살에 가졌던 ‘주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이 서른 살 넘을 때까지 단 하루도 변함없이 지속되었으니, 예수님의 열심은 열정이 맞다. 하나님 사랑ㆍ성전 사랑으로 뜨거운 열정을 보이신 예수님의 뜨거운 심장이다. 약속의 땅을 향한 40년 모세의 열정,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한결같은 바울의 열정, 모두 하나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을 자기 열정으로 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전도서에 나오는 표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염세주의자의 독백처럼 들리는 이 문장, 뭐가 헛되다는 걸까. 여기 ‘헛되다’로 번역된 말 헤벨הֶבֶל은 원래 ‘숨’, ‘입김’, ‘안개’라는 뜻이다. 그러니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짧고도 짧으며 짧고도 짧으니 모든 것이 짧도다’로 옮겨야 제맛이 난다. 어짜피 헛된 인생, 대충 살라는 염세주의 허무주의적 말씀이 절대 아니다. 짧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살라는 말씀이다. 그럼 어떻게 살라는 건가. 현재에 만족하고 오늘을 즐기라는 말이다. 허랑방탕 흥청망청이 아니라, 오늘 하루 여기 지금(Here & Now) 하는 일을 즐기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성경의 대표적인 지혜서는 잠언과 전도서이다. 잠언은 규범적 지혜를 가르치고, 전도서는 반성적 지혜를 가르친다. 곧 잠언은 원칙대로 살면 복 받는다는 교훈이고, 전도서는 그렇게 살아도 복 못 받는 현실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서다. 그러니 잠언은 신명기적 신앙관을 닮았고, 전도서는 하박국의 신앙관을 닮았다. 하박국은 의로운 사람이 못 살고, 불의한 사람이 도리어 잘 살다가 죽을 때조차 잘 죽는 것을 목격하며 하나님께 따졌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 있습니까?’ 하박국은 지금 우리가 따지는 걸 먼저 따진 예언자였던 셈이다.
예수 잘 믿으면 ‘삼박자 구원’을 받는 게 맞을까?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복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사노라면 내 뜻대로 안 되고 안 되는 것이 널린 세상 아니던가. 꼬이는 것이 얼마나 많던가. 그게 우리 현실이다. 그러니 소위 ‘삼박자’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잘 보자. 요한은 그렇게 되기를 ‘간구한다’ 했지, 그렇게 ‘된다’고 하지 않았다(요삼 1:2). 잘 믿는 사람도 꼬일 때가 있다. 아니 더 많이 꼬이고 더 크게 꼬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믿어야 할까?
정직하게 성실하게 회사 방침을 지키며 일하던 A가 배임죄로 일터에서 갑자기 쫓겨났다. 모두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며 비난했다. 해명할 기회조차 없었다.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일용직으로 헐떡거린다. 빈자리는 전부터 그 자리가 부러웠던 B가 이어받았다. 실력도 있어 큰 무리 없이 업무를 추진하더니 성과도 좋았다. 실력자로 부상한 B는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회사 임원이 되었다. A는 예수 잘 믿는 사람이고, B는 ‘나이롱 신자’라고 하자. 누가 복 받은 사람이고 누가 성공한 사람인가. 당연히 B다. 중요한 것은 여기까지가 10부작 중 5부까지라면 어떻게 될까? 드라마가 이어지며 배임죄를 지었다는 증거로 제시된 장부는 B가 조작했음이 드러난다. 10부작 드라마의 최종회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면서 A는 복직되고 승진한다. B는 쫓겨날 뿐 아니라 법정에서 큰집으로 가라는 선고가 내린다. 누가 복 받은 사람이고 누가 성공한 사람인가. 자, 이 땅에서의 삶이 5부까지라면 어떻게 될까?
신대원 동기 중에 한 동기는 같은 교회에서 함께 부목사로 지냈다. 담임 목회지에서 교회 부흥은 물론 멋지게 아름답게 다들 부러워할 정도로 목회했다. 교단에서도 모범적 목회자로, 끝까지 겸손하고 후임자에게 깨끗하게 물려주면서 조기 은퇴했다. 큰 기쁨이요 감사다.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갑자기 암 진단을 받았다. 건강 관리도 잘해 왔는데 말이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해야 한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다. 10부작 중 지금은 몇 회 방영 중인 셈일까. 하나님은 과연 어떤 각본을 갖고 계실까. 부디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시라고 예배 때마다 기도하고 있다. 전도서가 대답해 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עוֹלָם 올람)에 비해 짧은 시간(헤벨)을 사는 인간이, 어찌 세상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규범을 다 알겠는가. 이게 전도서다.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나 중심의 개인주의적 신앙, 인간 중심적 신앙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고 거시적 안목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에 알맞고 적절하게 운행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 모두 3부까지만 보면서 이러쿵저러쿵,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있습니까’ 하며 불평한다. 그래서 전도서는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을 다는 모르기에 그분을 두려워하라.
잠언의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출발하지만, 전도서의 지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무지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잠언의 지혜가 초등 지혜라면 전도서의 지혜는 고등 지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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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떡거리며 숨이 턱에 차는 험준한 언덕이다. 맨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코스를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동행하는 카메라맨이 있다. 아프리카 밀림을 찾는다. 남미에서 동행 취재하며 모기에 뜯기고, 뱀에 물려도 야생을 촬영하는 사진가들, 전장에 뛰어든 종군기자들, 시위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들이 있다. 열정 없인 불가능이다. 어쩌면 저들은 ‘짧고도 짧으며 짧고도 짧으니 모든 것이 짧음’을 알고 지금 여기서(Here & Now) 하는 일을 즐기고 최선을 다하는지 모른다. 열정은 온도가 아니라 지속성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니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다.
아무리 실력 있고 능력 있더라도 열정 없으면 오래 갈 수 없다. 예술의 원동력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열정이다. 예술이란 말 대신 사진을 넣어도 좋겠다. 열정이 식으면 실력도 능력도 재능마저 힘을 잃고 성취는 멀어진다. 열정은 예술가의 시각을 번득이게 하고 철학은 사진가를 견고하게 만든다. 사진은 열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