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Berkeley GTU 연구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조지아연구소(AGSI)와 남장로교연구소(SPSI) 대표
 

1893년 말에 미국을 떠나서 1894년 3월에 입국한 알레산드로 다말 드류 (Dr. Alessandro Damar Drew) 선교사는 미 남장로교회가 한국으로 파송한 최초의 의사 선교사였다. 목포 기독교의 기초를 놓은 오웬(Owen) 선교사(의사와 목사)에게 드류 선교사는 친형보다 더 가까운 관계였고,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드류 선교사 가족이 1901년 말에 한국을 떠나서 1902년 1월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는 드류 박사의 건강이 최악으로 치달아 부친인 토마스 드류 목사에게 긴급히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할 정도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드류 박사가 건강을 이유로 의무적인 안식년으로 군산 선교 스테이션을 떠나있을 때, 오웬 선교사는 형님 드류 박사의 건강이 회복되기가 쉽지 않다고 진단했는지, 드류 선교사의 선교선인 황포돛단배를 군산 선교 기지의 재산으로 귀속시켜서 공적으로 관리하도록 제안하였다.

초가집에서 시작된 군산 선교 스테이션의 간이 진료소 및 약방이 어엿한 군산 예수 병원(The Jesus Hospital at Gunsan)으로 발전해 갔다. 건강상 이유로 의무적인 안식년을 갖고 있던 드류 박사의 건강회복과 빠른 복귀를 염원하던 전위렴(William M. Junkin) 선교사는 이 병원의 이름을 드류 기념 병원(The Drew Hospital at Kunsan)으로 부르려고 자신의 구상을 공론화 했었다. The Gunsan Clinic to The Jesus Hospital at Gunsan.
초가집에서 시작된 군산 선교 스테이션의 간이 진료소 및 약방이 어엿한 군산 예수 병원(The Jesus Hospital at Gunsan)으로 발전해 갔다. 건강상 이유로 의무적인 안식년을 갖고 있던 드류 박사의 건강회복과 빠른 복귀를 염원하던 전위렴(William M. Junkin) 선교사는 이 병원의 이름을 드류 기념 병원(The Drew Hospital at Kunsan)으로 부르려고 자신의 구상을 공론화 했었다. The Gunsan Clinic to The Jesus Hospital at Gunsan.
드류 의사 선교사는 한국에 파송된 모든 사역자들 가운데서 가장 지리학적 지식이 탁월했고, 인문학적 소양이 월등하여 역사와 문화 등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캠브릿지 대학교에 한국에서 간행된 초기 문헌들을 다수 기증하였다. 아울러 이 지도를 소장중인 그의 외손녀를 포함하여 후손들이 적지 않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지도에 보면 단순히 동해도 아니고, 대한해라고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Dr. Drew’s Map of Korea
드류 의사 선교사는 한국에 파송된 모든 사역자들 가운데서 가장 지리학적 지식이 탁월했고, 인문학적 소양이 월등하여 역사와 문화 등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캠브릿지 대학교에 한국에서 간행된 초기 문헌들을 다수 기증하였다. 아울러 이 지도를 소장중인 그의 외손녀를 포함하여 후손들이 적지 않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지도에 보면 단순히 동해도 아니고, 대한해라고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Dr. Drew’s Map of Korea
한국으로 가는 관문이었던 샌프란시스코 페리 터미널 전경. 미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들은 거의 대부분 이곳을 통하여 태평양을 횡단했다. 드류 선교사는 건강이 회복되어 가는 과정에서, 1. 전라도 선교지로 복귀하려는 염원을 잊지 않고, 2. 한국인 이민자들을 도우면서, 3.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건강 관련 연방 공무원으로 복무하였다. 이곳을 통해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혜련 여사가 도착한 후 근처의 차이나 타운에서 유리방황 하였고, 서울에서 안면이 있었던 드류 선교사가 이들을 만나서 자신의 집을 임시거처로 제공하였다.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 외교관 스티븐슨을 저격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으로 가는 관문이었던 샌프란시스코 페리 터미널 전경. 미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들은 거의 대부분 이곳을 통하여 태평양을 횡단했다. 드류 선교사는 건강이 회복되어 가는 과정에서, 1. 전라도 선교지로 복귀하려는 염원을 잊지 않고, 2. 한국인 이민자들을 도우면서, 3.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건강 관련 연방 공무원으로 복무하였다. 이곳을 통해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혜련 여사가 도착한 후 근처의 차이나 타운에서 유리방황 하였고, 서울에서 안면이 있었던 드류 선교사가 이들을 만나서 자신의 집을 임시거처로 제공하였다.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 외교관 스티븐슨을 저격한 곳이기도 하다.
샌프란시스코 페리 터미널과 연결된 차이나 타운. 드류 선교사의 배려로 미국에 안착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한국 사람들끼리 인삼을 팔면서 심하게 경쟁하며 싸우는 모습을 보고 ‘한인 친목회’를 조직하게 된 계기가 바로 차이나 차운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친목회는 미주 최초의 한인 모임이었다. Dr. Drew’s missionary work at San Francisco Chinatown.
샌프란시스코 페리 터미널과 연결된 차이나 타운. 드류 선교사의 배려로 미국에 안착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한국 사람들끼리 인삼을 팔면서 심하게 경쟁하며 싸우는 모습을 보고 ‘한인 친목회’를 조직하게 된 계기가 바로 차이나 차운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친목회는 미주 최초의 한인 모임이었다. Dr. Drew’s missionary work at San Francisco Chinatown.
옥시덴털 호텔이 있던 자리에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 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호텔이 무너진 후 회복하지 못했다. 옥시덴탈 호텔(The Occidental Hotel)은 샌프란시스코 페리 터미널에서 한국으로 가는 여객선을 타기 전에 선교사들이 잠시 체류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미 남장로교회 파송 최초 내한 선교사인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와 목회적 동행을 하게된 주미공사 이채연의 부인이자 미 남장로교 최초의 세례교인인 배선 여사가 묵었던 호텔이기도 했다. The Hotel for Missionaries to Korea
옥시덴털 호텔이 있던 자리에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 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호텔이 무너진 후 회복하지 못했다. 옥시덴탈 호텔(The Occidental Hotel)은 샌프란시스코 페리 터미널에서 한국으로 가는 여객선을 타기 전에 선교사들이 잠시 체류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미 남장로교회 파송 최초 내한 선교사인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와 목회적 동행을 하게된 주미공사 이채연의 부인이자 미 남장로교 최초의 세례교인인 배선 여사가 묵었던 호텔이기도 했다. The Hotel for Missionaries to Korea
해외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 본부가 있던 곳. 1905년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공립신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드류 선교사도 안창호를 적극 후원하였고 대한 독립에 대한 대의에 동참하였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드류 선교사는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지진 피해 한인들을 수용하였으며, 고종 황제가 보낸 구호금을 일제가 악용하려고 획책하자, 공립협회와 보조를 맞추어 단호히 거절하였다. 드류 선교사는 민간 차원의 순수한 구호금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공평하게 배분하였다. 드류 선교사가 공립신보에 광고를 게재하면서 ‘미국인 드류’라고 밝힌 것은 당시의 분위기상 목숨을 내놓는 행동이었다. 당시 오클랜드 힐스 지역에 주로 모여살던 백인들은 백인우월주의 단체(KKK)를 중심으로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자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Dr. Drew’s Support for the Korean Independent Movement
해외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 본부가 있던 곳. 1905년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공립신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드류 선교사도 안창호를 적극 후원하였고 대한 독립에 대한 대의에 동참하였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드류 선교사는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지진 피해 한인들을 수용하였으며, 고종 황제가 보낸 구호금을 일제가 악용하려고 획책하자, 공립협회와 보조를 맞추어 단호히 거절하였다. 드류 선교사는 민간 차원의 순수한 구호금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공평하게 배분하였다. 드류 선교사가 공립신보에 광고를 게재하면서 ‘미국인 드류’라고 밝힌 것은 당시의 분위기상 목숨을 내놓는 행동이었다. 당시 오클랜드 힐스 지역에 주로 모여살던 백인들은 백인우월주의 단체(KKK)를 중심으로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자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Dr. Drew’s Support for the Korean Independent Movement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친일 외교관 스티븐슨 저격 사건을 계기로 공립협회 등 여타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하여 대한인 국민회를 결정하였다. 이곳은 총회관 터이다. 이와같이 드류 선교사는 처음에는 건강상 이유 때문에 전라도 선교지로 복귀하지 못하는 동안,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인교회 설립 및 독립운동 단체 결성 등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하며 여전히 선교사로 살아갔다. 드류 선교사 부부의 선교사역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친일 외교관 스티븐슨 저격 사건을 계기로 공립협회 등 여타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하여 대한인 국민회를 결정하였다. 이곳은 총회관 터이다. 이와같이 드류 선교사는 처음에는 건강상 이유 때문에 전라도 선교지로 복귀하지 못하는 동안,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인교회 설립 및 독립운동 단체 결성 등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하며 여전히 선교사로 살아갔다. 드류 선교사 부부의 선교사역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던 것이다.
버지니아 체이스 시티로부터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오빠인 드류 선교사를 방문한 호르텐스 드류(Hortense Drew) 여사. 집안의 장남으로서 드류 박사는 동생들을 살뜰하게 챙기며 오빠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드류 박사에게는 두명의 여동생들이 더 있었는데, 아넷은 19세의 나이에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고, 에바는 현재도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호르텐스 드류 여사는 버지니아에서 여성 교육 및 사회 활동가로 활약이 대단하였다. 1876년에 모친이 사망하고 나서 홀로 지내게 된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를 곁에서 돌보느라 결혼도 못했다.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가 1922년에 97세의 일기로 별세한 후 그때야 동거한 기록은 있다. Dr. Drew and his Sister Hortense
버지니아 체이스 시티로부터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오빠인 드류 선교사를 방문한 호르텐스 드류(Hortense Drew) 여사. 집안의 장남으로서 드류 박사는 동생들을 살뜰하게 챙기며 오빠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드류 박사에게는 두명의 여동생들이 더 있었는데, 아넷은 19세의 나이에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고, 에바는 현재도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호르텐스 드류 여사는 버지니아에서 여성 교육 및 사회 활동가로 활약이 대단하였다. 1876년에 모친이 사망하고 나서 홀로 지내게 된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를 곁에서 돌보느라 결혼도 못했다.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가 1922년에 97세의 일기로 별세한 후 그때야 동거한 기록은 있다. Dr. Drew and his Sister Hortense
드류 박사가 소장하던 목포 선교 스테이션 사진이다. 탁월한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의사답게 드류 선교사는 한국과 연관된 모든 것들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평생을 전라도 선교지로 돌아가고자 했던 드류 선교사 부부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소원한다. 아울러 드류 선교사의 손을 거친 모든 유물들도 그의 염원과 함께 한국으로 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드류 선교사가 전라도 선교지로 복귀하지 못했던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에 한일합방으로 일제가 한반도 통치를 시작한 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가 노골적으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드류 박사가 요주의 인물이었을 가능성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독립기념관의 도산 안창호 선생 기록에 드류 선교사의 이름이 정확하게 거명되는 것과도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Dr. Drew’s Photo
드류 박사가 소장하던 목포 선교 스테이션 사진이다. 탁월한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의사답게 드류 선교사는 한국과 연관된 모든 것들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평생을 전라도 선교지로 돌아가고자 했던 드류 선교사 부부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소원한다. 아울러 드류 선교사의 손을 거친 모든 유물들도 그의 염원과 함께 한국으로 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드류 선교사가 전라도 선교지로 복귀하지 못했던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에 한일합방으로 일제가 한반도 통치를 시작한 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가 노골적으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드류 박사가 요주의 인물이었을 가능성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독립기념관의 도산 안창호 선생 기록에 드류 선교사의 이름이 정확하게 거명되는 것과도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Dr. Drew’s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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