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Berkeley GTU 연구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조지아연구소(AGSI)와 남장로교연구소(SPSI) 대표
드류(Alessandro Damer Drew, 유대모) 의사 선교사와 루시 드류(Lucy Exall Law Drew) 선교사 부부는 1894년 3월 13일부터 서울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필자는 드류 박사와 관련하여 ‘전라도 최초의 서양의사’, ‘전라도 최초의 서양 의술 시행’, ‘미 남장로교 파송 최초의 의료 선교사’ 등의 명칭을 사용해 오고 있다. 미 남장로교회 전체로는 드류 의사 선교사가 두 번째 의료선교사였다. 필자의 책인 ‘최초의 서양의사 드류 유대모’가 출판 중에 있고 곧 독자들과 만나게 된다. 이 책의 저술을 마치고 나서 필자는 드류 선교사 부부에 대한 유산들을 확보하였다. 여기에 공개하는 유산들은 극히 일부이다. 모든 공개 자료들이 ‘최초’이다.
드류 선교사의 임명장이다. 드류 의사 선교사는 1893년 4월 3일에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드류 선교사와 관련해서는 당연히 최초 공개이고, 특히 초기 파송 선교사들의 실물 임명장은 매우 희귀한 자료이다.
드류(유대모) 선교사의 부인 루시 드류 선교사의 임명은 1893년 9월 11일이었다. 드류 선교사가 4월에 임명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4월 이후에 두 사람이 만나서 교제하고 결혼을 약속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들은 1893년 9월 27일에 루시의 고향 교회인 단빌장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드류 선교사 부부는 한국으로 파송되어 오는 여정에서 일본에 들러 1894년 2월 전후로 거의 한 달 동안 체류하였다. 드류 선교사가 낭만 닥터로서 인문학적 소양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 역사, 전통 등에 대하여 관심이 지대하였다. 앞에 앉은 부부가 드류 선교사, 뒤에 기립해 있는 부부가 그레함 가족이다. 당시 일본에서 찍은 실물 사진들도 필자가 다수 가지고 있다.
1894년 3월 13일부터 서울에서 사역을 시작한 드류 선교사는 주한 미 공사관을 통해 주한 미국인으로 등록하였다. 이 문서는 주한 미 공사관이 발급한 공식 등록증이다. 빨간색으로 찍힌 주한 미 공사관의 인장이 선명하다.
1894년 3월 27일부터 드류(유대모) 선교사는 레이놀즈 선교사와 함께 전라도 지역만 치면 42일간 선교 스테이션 후보지 물색을 위해 답사했다. 이 편지는 당시 동행했던 레이놀즈 선교사 가족이 보낸 서신이다. 드류 의사 선교사는 레이놀즈보다 8년 정도 연배가 많았고, 햄든 시드니 대학 선배였다. 드류 선교사는 한마디로 레이놀즈에게 큰 산과 같은 존재였다. 당시 레이놀즈는 나이도 어린데다 이제 막 안수를 받은 목회 초년생이었다.
군산이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에게 밀려 군산 선교 스테이션은 임피군에 속한 구암(동의어로 궁말, 궁멀)으로 이전하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유대모 또는 유의원으로 더 많이 알려진 드류 선교사에게 임피 군수가 보낸 공문서 원본이다. 1900년 7월 29일(양력으로 환산) 날짜다.
드류 선교사가 사용하던 태극 문양의 부채다. 드류(유대모) 선교사는 한국 사람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존중하였다. 그는 군산에 간이진료소와 약방을 운영하면서, 평일 진료 시간에는 적십자기를 내걸어 환자들에게 알렸고, 주일에는 미국 국기를 걸어 진료하지 않는다는 표식으로 삼았다. 드류 선교사는 미국 국기 대신 태극기를 게양하려고 백방으로 찾았으나, 처음에는 구하지 못했다. 1902년 10월에 도산 안창호 선생 부부가 미국 오클랜드에 있는 드류 선교사의 월세 집에 체류하기 시작할 무렵에, 그 집 거실에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드류 선교사는 전라도에서 이미 태극기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드류 선교사가 전라도 선교지에서 사용하던 밥그릇과 젓가락이다. 그는 덩치가 커서 식욕이 대단하였다. 한국에서 태어난 세 명의 자녀들도 먹성이 대단하였다. 드류 선교사는 우유와 고기를 얻기 위해 염소 떼를 기르기도 했다. 부위렴(윌리엄 불) 선교사가 파송받아 임지에 왔을 때, 염소 떼를 기르는 드류 선교사를 보고 웬 서양 목동인가 할 정도로 드류 선교사의 몰골이 품위 있는 명의의 모습이 아니었고, 신참 선교사의 눈에는 충격 그 자체였다.
드류 선교사의 부인 루시 드류 선교사가 신던 꽃신과 짚신이다. 선교사의 부인들도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자녀 양육과 함께 바쁜 사역을 소화했다. 루시 드류 선교사는 ‘뚜부인’으로 불리기도 했던 것 같다.
루시 드류 선교사가 신던 겨울용 버선이다. 전라도가 남쪽에 있었지만, 겨울에는 여전히 추위가 기승을 부렸기 때문에 방한을 위해서 한국적인 의복들이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루시 드류 선교사는 결핵성 늑막염으로 죽어가던 남편을 돌보면서, 1901년 말에 만삭의 몸이었기 때문에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1901년 12월 초에 샌프란시스코 옥시덴털 호텔 방에서 막내인 엘리자벳을 출산하였다. 참으로 강인한 분이었다.
구한말에 청나라의 동전들이 유통되었다. 드류 선교사가 소장하던 청나라 동전 광서통보이다. ‘광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쓰던 연호다.
이상과 같이 드류 의사 선교사와 관련하여 필자가 확보한 한국교회와 전라도교회의 문화유산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하였다. 개별 종류별로 계수하자면, 필자가 가지고 있는 항목의 수가 수백가지는 더 된다. 모두 실물이고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들이다. 필자가 기회가 되는대로 강조해 오고 있듯이, 한국교회와 전라도교회의 문화유산은 상업적 거래나 특정 개인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결코 사용될 수 없는 공유재산이다. 자세한 규정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글로 발표한 것이 있으니 참고하기를 바란다. 아무쪼록 이 모든 문화유산들이 적재적소에 위치하여 기독교인의 역사적 사명인 ‘기억함’의 역할을 다하여, 현세대와 다가오는 세대들에게 자랑스러운 긍지요 자부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