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조지아연구소(AGSI)와 남장로교연구소(SPSI) 대표
미 남장로교 최초의 의료 선교사, 전라도 최초의 서양 의사
드류 박사는 1893년 9월 27일에 버지아니주 피트실바니아 카운티의 단빌(Danville)에서 루시 엑솔 로 드류 선교사와 결혼하였다. 알레산드로 다말 드류 박사 부부는 1894년 1월 14일에 미국을 출발하여 ‘시티 오브 베이징’이라는 여객선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1894년 2월 8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드류 선교사 부부는 신혼여행을 하듯이 일본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아울러 요코하마나 그 주변에서 일본 선교를 위해 먼저 파송되어 온 사역자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신혼부부인 드류 박사 내외는 거의 한 달 가까이 일본에 체류하였다.
42일간 펼쳐진 선교 스테이션 후보지 선정을 위한 답사
드류 선교사 부부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무렵에 미 남장로교 한국선교부의 제2차 연례회의가 1894년 2월 13일 화요일과 2월 14일 수요일에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서 드류 박사와 레이놀즈 선교사의 선교 스테이션 후보지 선정을 위한 답사여행이 결정되었다. 드류 선교사 부부가 1894년 3월 13일부터 서울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니, 그로부터 14일 후인 1894년 3월 27일 화요일 아침 7시 30분에 서울을 출발하여 42일간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루이스 테이트(최의덕)과 매티 테이트(최마태) 선교사 남매
드류 선교사 일행은 군산을 보면서 감탄사를 연이어 표현하였으며, 임피를 거쳐서 4월 3일 전주에 도착하였다. 미주리주 풀턴 출신의 루이스 테이트와 매티 테이트 남매 선교사가 3월 19일 월요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꼬박 6일이 걸려서 1년 전에 마련해 둔 숙소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드류 선교사 부부가 서울에 도착한 지 6일 만에 남매 선교사는 전주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특히 어디를 가나 눈에 띄는 서양 여자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매티 테이트 선교사는 이미 명사가 되어 있었다. 매티 선교사를 돕기 위해 함께 동행한 노년의 여인은 얼마나 헌신과 희생정신이 투철한지 고개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 노파의 모든 경비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님인 존 언더우드가 전액 지원하였다. 드류 박사와 레이놀즈 선교사는 전주에서 그들과 재회하였다.
전라도 최초의 서양 의료 시행일은 1894년 4월 4일 수요일 전주에서
전주에서 드류 의사 선교사는 쳔주교인 채영칠의 부인을 치료함으로 전라도 ‘최초’의 서양 의술을 시행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채영칠의 감사 편지가 갑오년 2월 30일로 되어 있고, 이를 환산하면 1894년 4월 5일 목요일이었다. 이날은 드류 선교사 일행이 전주를 떠난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하루 전날인 4월 4일 수요일에 드류 선교사가 채영칠의 요청으로 피부궤양을 심하게 앓고 있던 그의 부인을 두 번씩이나 방문하여 소독도 하고 내복약도 주고 하니 눈에 띄게 차도를 보였던 것이다.
천주교인 채영칠은 너무 고마운 마음에 감사의 편지를 써서 드류 선교사와 레이놀즈 선교사에게 전했다. 그 편지는 레이놀즈를 학문에 능통한 대인으로, 드류 선교사를 의술에 통달한 대인으로 표현하며 극존칭으로 시작하였다. 채영칠은 죄 많은 인생에게 베푸신 천주의 큰 은혜에 감사하며 이역만리까지 와서 이 병으로 죽을 줄만 았았던 사람을 치료한 거룩한 의술과 고귀한 말씀까지 전해주니 감사하고 평안한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고 정성을 다해서 썼다. 나중에 드류 박사는 누가복음 9장 2절의 말씀,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치유의 역사가 성취된 사건이라고 간증하였다.
드류 선교사 주도의 답사여행과 처음부터 선교선(mission boat)을 통한 사역
드류 선교사 주도의 답사여행이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근거한다. 1. 한국선교부가 드류 박사의 도착에 맞추어 선교 스테이션 후보지 선정을 위한 답사 여행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2. 드류 선교사가 햄든 시드니 대학의 선배이자 레이놀즈 선교사보다 약 8년 정도의 인생 선배였고, 드류 박사가 34세였던 반면에 레이놀즈 선교사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목사 안수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목회 초년생이었기 때문에, 드류 박사를 여러 면에서 적지 않게 의지하였던 것이다. 3. 1894년 10월호 ‘더 미셔너리’ 저널이 한국 특집을 게재하면서 드류 박사의 보고서를 중심으로 했다는 점이다. 4. 레이놀즈 선교사의 일기에서는 의도적으로 한국식 거리 계산인 ‘리’를 변함없이 사용했던 반면에, 드류 박사가 주도한 보고서는 처음부터 미국식 ‘마일’을 사용하여 전체적인 일관성을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후에 프레스턴(변요한) 선교사는 드류 박사가 42일간 펼쳐진 선교 스테이션 후보지 선정을 위한 답사 여행을 통하여 선박을 이용한 선교 방식에 대하여 확신을 굳혔다고 하였다. 브라운(부명광) 선교사도 1963년에 유니언 신학교에 제출한 신학박사 학위 논문에서 이런 사실을 재차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