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대학교 교회사(Ph.D),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 조지아연구소(AGSI)와 남장로교연구소(SPSI) 대표, 버클리 연구교수

 

1894년 3월 27일부터 시작된 레이놀즈(이눌서) 목사 선교사와 드류(Alessandro Damar Drew 유대모, 의사) 박사 선교사의 전라도 답사 여행은 ‘미 남장로교 선교 스테이션 선정을 위한 답사’로 불러야 정확하다. 지금까지 레이놀즈의 전라도 여행 일기만을 중심으로 1894년 답사를 이해하여 왔는데, 이제는 그런 선입견에서 벗어나서 드류 선교사를 중심으로 보다 정확한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합리적이다.
 

레이놀즈 선교사
레이놀즈 선교사
드류 선교사
드류 선교사


첫째, 레이놀즈와 드류를 중심으로 편성된 ‘선교 스테이션 선정팀’은 드류 박사가 주도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94년 6월 30일자로 작성된 선교 스테이션 후보지에 관한 레이놀즈 명의의 보고서가 일자상으로 약간 앞서서 작성되었다. 1894년 7월에 드류는 전라도에 대한 전반적인 보고서를 만들었다. 하지만, ‘더 미셔너리’(The Missionary) 선교 메거진은 드류의 글을 기반으로 먼저 다루고, 이어서 레이놀즈 명의의 보고서를 게재하였다. 이 두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드류의 지리학적 전문지식에 근거한 서술에 근거하여 ‘예상 선교 스테이션 지역들’을 제시한 레이놀즈의 보고서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비록 나이는 드류보다 레이놀즈가 8년 정도 어리지만, 레이놀즈가 1892년 7인의 일원으로 먼저 내한하였기 때문에, 선임인 레이놀즈가 ‘예상 선교 스테이션 지역들’에 대한 보고서를 그의 명의로 했던 것 같다.
 

둘째, ‘더 미셔너리’ 선교 메거진 편집자는 1894년 10월호를 통해서 한국(Korea)에 대한 특집편을 게재하였는데, 드류 박사가 작성한 보고서를 기초로 편집하였다. 먼저 드류 박사의 기술을 인용하면서 한국을 소개한 후, 미 남장로교 한국선교가 시작된 배경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드류 박사 명의의 보고서를 중심에 놓고 소개하였다.
 

셋째, ‘더 미셔너리’ 한국 특집에 실린 레이놀즈 명의의 ‘예정 선교 스테이션들에 대한 설명’도 드류 박사가 기록한 글을 축약해 놓은 것처럼, 문체나 스타일이 각기 다른 저자의 글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글을 형식상 두 사람의 명의로 나누어 놓은 듯하게 매우 유사하고 일관성이 있다. 필자는 드류 선교사가 모든 글들을 작성하였고, 공식적으로 제기한 미래의 선교 스테이션 후보지들을 선정하여 설명하는 부분에는 선임인 레이놀즈 목사 선교사의 이름으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드류 박사가 모든 보고서를 작성한 후, 자신의 글에 레이놀즈 선교사의 이름을 올려 발표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레이놀즈 선교사가 답사 기간 작성했던 일기에는 거리표기를 한국식으로 ‘리’로 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관되게 ‘리’를 사용하였다.
 

넷째, 그동안 드류 박사에 대한 행적이 베일에 가려져 있었지만, 최근에 연구된 바에 의하면, 그가 사경을 헤맬 멜 정도의 중한 질병으로 위기를 넘기면서도 건강이 호전되면 호남 선교지로 복귀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어간에 드류 박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혜련 여사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 그의 주선으로 1902년 12월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기자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터뷰를 갖도록 했고, 이것이 1902년 12월 7일자 전면 기사로 실렸다. 이 인터뷰를 드류 박사가 통역했는데,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 기술하기에는 너무나도 전문적인 한국 지리에 대한 묘사가 상세히 기술된 것으로 보아, 이 분야에 해박한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드류 선교사의 설명으로 보아야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그만큼 드류 박사는 내한 선교사들 중에서 탁월한 지리학적 전문지식의 소유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 같다.
 

다섯째, 드류 박사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을 때, 자신의 고향인 영국 잉글랜드를 방문하였다. 특별한 사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일단 요양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때 그는 한국에서 수집한 한국교회 초기 신앙 문헌들을 캠브리지대학에 기증하였다. 드류 박사는 그만큼 한국과 한국 기독교 관련 책들과 전통 물품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박물관에 한국의 전통 물품들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가 뒤늦게 고향 교회와 파송 교회를 방문했을 때도 다양한 소장품들을 전시하여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드류 박사는 여타의 선교사들과는 차별되는 독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여섯째, 드류 박사의 탁월한 지리학적 전문지식은 그의 성장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국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있는 채널 아일랜드의 섬인 건지섬에서 출생하였다. 채널 아일랜드의 크고 작은 섬들이 군산의 고군산도나 섬이 많은 전라도의 지리와 유사하였다. 드류 박사의 부친인 토마스 드류 목사가 영국 잉글랜드에서 ‘근본 감리교회’(The Primitive Methodist Church) 소속의 목사였기 때문에, 이 교단의 특성상 야외 집회, 임시 텐트 집회, 순회 집회 등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 찬 부친의 열정과 한 영혼을 찾아 기꺼이 다가가는 모습을 드류 박사가 어려서부터 보아 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모습은 1870년 이후 미국 남부의 버지니아주 메클렌버그 카운티로 이민을 와서 부친이 ‘근본 감리교회’에서 미 남장로교 목사로 편목하여 활동하는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목격되었다. 드류 박사가 성장 과정에서 경험한 바다, 섬, 해안, 호수, 바다로 연결된 강 등 모든 요소들이 호남의 지형과 매우 유사하였고, 그의 지리학적 전문지식이 상호작용하며 유익한 결과를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그의 호남 선교사로서의 정체성, 한국과 호남 선교지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언제라도 여건이 되면 복귀하려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는 의사라는 전문직 종사자로서 얼마든지 일신의 영달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한국으로 가는 관문인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지 않았고, 특히 한국인과 아시아계 등 이민자들로 넘쳐나던 이스트 오클랜드를 떠나지 않고, 1년 계약의 렌트, 즉 셋집을 전전하며 한국 이민자들을 도우며 여전히 선교사로 살았던 것이다. 드류 박사 내외는 한국과 한국민들을 섬기며 살다가 의학의 발전을 위하여 시신을 기증함으로 마지막까지 모두 주고 떠난 삶을 살았다.
 

지난 7월 군산시의사회관에서 드류(유대모, 의사) 선교사를 추모하고 기념하는 세미나에서 최은수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출처=군산신문) 
지난 7월 군산시의사회관에서 드류(유대모, 의사) 선교사를 추모하고 기념하는 세미나에서 최은수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출처=군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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