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대학교 교회사(Ph.D),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 조지아연구소(AGSI)와 남장로교연구소(SPSI) 대표, 버클리 연구교수
1892년부터 시작된 미 남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역사적인 결실과 유산을 풍성하게 남겼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만큼 역사가 길고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호남 지역 곳곳에서 교회의 최초 설립 시점과 연관하여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어서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특히 현재까지 교회 설립일을 정하는 기준이 모호하여 주관적인 시각에서 각기 다른 의견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런 혼란을 최소화하고 호남 교회 역사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규격화한 기준이 필요하다. 먼저 교회설립일을 특정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다루고, 이런 고려 사항들과 전문가들의 중론을 모아 교회설립일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몇 가지 고려 사항들
첫째로, 네비우스 선교 방법은 기존의 원칙을 중국에 적용한 것이다.
네비우스가 주장한 방식은 그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니다. 19세기 ‘미국해외선교회’에서 활동했던 헨리 벤(Henry Venn)과 루푸스 앤더슨(Rufus Anderson)의 자급, 자치, 자전 원리들을 중국에 맞게 도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헨리 벤은 영국 성공회 소속의 목사였고, 루푸스 핸더슨은 회중교회의 목사였다. 그들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현지인 교회’(Indigenous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헨리 벤은 선교사들이 영구적인 사역자들이 아니라 임시로 파송된 것임을 강조하면서, 현지인 중심의 사역을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그들의 주장이 폭넓게 영향을 미쳤으며, 네비우스도 이런 원칙들을 중국의 사정에 맞게 적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로, 네비우스가 정리하여 중국에 적용했던 방법들을 한국에 적용한 후 토착화의 과정에서 현지 사정에 맞게 수정하여 왔다.
존 네비우스 선교사가 1890년 한국을 잠시 방문한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하여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적용했던 방식들을 도입하였고, 향후 한국에 맞게 적용하여 발전시켰다. 존 네비우스의 선교 방법들 가운데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성경공부에 초점을 두는 것이 한국교회에 성경 중심적인 토양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삼자원칙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존재하므로 비판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사실, 한국에서 네비우스의 방식을 앞장서서 수용코자 했던 그룹이 북장로교 선교사들이었고, 네비우스 자신도 북장로교 파송이었기 때문에, 북장로교의 신학적 배경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북장로교는 소수파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민 왔던 뉴잉글랜드의 신학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울러 미국 장로교에서 일어났던 신학파와 구학파의 논쟁 속에서 신학파, 즉 뉴잉글랜드 신학과 부흥운동에 대하여 전향적인 입장에 있던 영향이 컸다.
이런 측면에서, 네비우스 선교 방식은 뉴잉글랜드 신학과 신학파의 경향을 다분히 함축하고 있다. 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의 원리와 기본 구조와는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네비우스의 삼자원칙은 장로교의 기본 골격을 느슨하게 만들어서, 향후 장로교의 핵분열과 함께 개교회주의가 만연하게 되는 불씨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선교 초기에는 뉴잉글랜드 신학과 부흥운동에 대한 영향이 기독교 복음 전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토착화하고 제도화의 과정을 지나면서 다양한 문제들이 대두된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현지인 위주’의 기조는 네비우스 선교 방식의 한국 적용 과정에서도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 미 남장로교 해외선교 실행위원회의 입장
미 남장로교 총회는 1877년 총회에서 해외선교를 더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해외선교 실행위원회 관련 규정을 마련하였다. 파송 목사 선교사에 대한 정의, 사역, 그리고 역할에 대한 내용을 보자: ‘선교사는 성경적 관점에서 볼 것 같으면 복음 전도자로 간주 된다. 목사 선교사의 사역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고, 현지인 주도의 교회들이 준비가 되었을 때, 노회 설립을 도우며, 필요에 따라 성경을 번역하고, 현지인 설교자들을 훈련하고, 복음적인 신앙의 전파를 위하여 기타 필요한 일들을 감당한다. 목사 선교사는 한 교회의 시무 목사가 되지 못하며, 가능한 이른 시일에 합당한 현지인 사역자를 세워야 하고,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다른 지역들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목사 선교사는 해당 교회의 요청이 있을 시에 당회에 참석하여 조언(언권)을 줄 수는 있으나, 모든 의사 진행 과정에서 투표권 또는 결정권은 행사하지 못한다. 목사 선교사는 현지인 교회들이 여건을 갖추는 대로 노회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노회가 성립된 후, 목사 선교사는 요청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 언권회원으로 참석하여 조언을 줄 수는 있다. 목사 선교사는 본국의 노회에 속한 정회원이기 때문에, 현지인 중심의 노회에서 정회원이 될 수 없고, 그 어떤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
미 남장로교회의 해외선교 실행위원회는 1. 성경 중심 2. 복음 전하여 현지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고, 당회를 조직하고, 노회를 구성하도록 사역 3. 시무 담임목사가 되지 못하며 4. 당회나 노회에서 언권을 가지고 조언은 하되 결정권이나 투표권은 행사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넷째로, 미 남장로교 한국선교부의 입장
미 남장로교 한국선교부도 본국 총회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선교부 규정에 보면, 선교부 구성은 파송 선교사들로만 구성되고, 현지인들은 원칙적으로 회원이 될 수 없었다. 선교부는 파송 선교사들만의 조직이니 충분히 이해되고 남는다. 총회의 해외선교 실행위원회의 규정대로, 한국선교부도 ‘현지인’ 위주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중국에 적용했던 네비우스의 방식과는 약간 다르게, 현지인 사역자들에게도 사례비를 책정하였다.
다섯째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대한 사료 비평
1) 1928년에 발행된 상권은 일제의 검열과 방해 가운데서 우여곡절 끝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교회사 서술의 중립성과 객관성에 제약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2) 각 지역의 공식 교회 문서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고는 하나, 개중에는 그런 문서들을 제출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3) 공식 문서와 사료가 없을 경우 해당자의 기억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4) 당회록과 같은 교회 문서들을 기반으로 하여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기가 기록되었다고 하지만, 당회가 조직되기 위해서는 목사가 위임되고 장로가 장립되는 과정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설립 이후 상당한 기간이 흘러야 했다. 당회록 등 교회의 공식 문서는 역사기술이 목적이 아니다.
교회설립일의 기준
첫째 기준은 개교회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단, 객관적인 사료적 증거를 전제로 한다. 개교회의 구전이나 전통에 근거한 경우 철저한 검증과 합당한 근거 자료를 찾는 데 함께 노력한다. 개교회의 입장에 무게를 두는 것은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주장해 왔다는 점을 열린 마음으로 사필귀정하기 위함이다. 이런 자세를 취할 때, 교회설립일과 연관된 반목과 질시를 넘어서, 고귀하고 지엄한 교회 역사를 올바르게 받들어 섬기게 된다. 교회 역사 앞에서는 예외 없이 누구나 겸손해야 한다.
둘째 기준은 선교사가 아니라 현지인 중심으로 기준을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19세기 선교의 위대한 시대에 제기되었던 ‘현지인 중심’의 원칙은 미 남장로교회 해외 선교 실행위원회 규정에도 정확히 명시되어 있다.
셋째 기준은 교회당 토지, 건물, 교회 직함, 당회와 노회와 같은 제도 등이 아니라, 현지인 개종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기준은 단회적인 예배나 모임이 아니라, 두 명 이상의 결신자가 모여서 지속적으로 예배 등 모임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기준은 미 남장로교회의 호남 선교 역사가 개교회가 정한 교회설립일보다 앞설 수 있고 풍성할 수 있다는 열린 자세가 항상 견지되어야 한다. 교회 역사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이 생명력 그 자체임으로 억지로 우기거나, 왜곡하거나, 감정싸움을 하거나, 인위적으로 고집을 부리는 등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역사는 역사를 부르고, 생명은 생명을 부르기 때문이다. 제대로 역사를 기억하면 살고, 망각하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