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화 / 부산교육대학교 명예교수ㆍ부산 땅끝교회 은퇴장로

초등학교 때였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시즌에 미군 부대에 두 차례 초대받아 가서 장난감과 C레이션을 선물로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레이션 박스 속에 각종 통조림, 껌, 커피 등이 있었다. 나의 관심은 온통 통조림을 따는 도구와 플라스틱으로 된 하얀 플라스틱 스푼에 있었다. 설탕 봉지를 찾다가 인스턴트커피 봉지를 찢을 때가 있었다. 검은 가루가 혀에 닿는 순간 바로 뱉어 버렸다.

커피를 직접 끓여서 마신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여름방학부터 밤에 노윤현과 이웃 석포마을에 사는 양자 누나 집의 방을 빌려 공부하였다. 그해 겨울밤에 윤현이가 커피를 가지고 왔다. 커피를 타서 마신 적이 없으니 냄비에 물을 끓여 커피를 열 숟가락 정도를 넣었다. 그러고는 많은 설탕을 넣어도 써서 마실 수가 없어서 더 많은 설탕을 넣고서야 마셨다. 그 순간만큼은 에스프레소보다 더 진한 커피를 마시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대학생이 되면 당구, 카드, 연애, 다방을 빼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었다. 오전 강의가 비면 대학 근처의 다방에 가서 커피를 주문하면 커피에다 달걀노른자를 넣은 ‘모닝커피’가 나온다. 아침 식사하지 않고 등교했던 학생들이 즐겨 마셨던 커피다. 방학이 되어 부산에 내려오기만 하면, 오아시스 다방, 보리수 다방, 칸타빌라 다방, 쎄씨봉 다방 등에서 친구와 만나 커피를 마시며 DJ에게 음악을 청하였던 게 엊그제 같다.

C레이션(사진=공기화)
C레이션(사진=공기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 사람은 프랑스 신부이자 1865년 병인양요 후 체포되어 순교한 시모옹 베르뢰 Slmeon Berneux 였다. 그는 마카오에 있었던 나포레옹 리브아 Napoleon Libois 신부에게 필요한 물품 속에 커피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서 약 1년 후인 1861년 4월 7일에 받아서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서양 선교사나 외교관과 교류하는 이들 이 남들보다 먼저 커피를 마셨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82년 미국 등 서양 국가들과 수교하면서 외교관들이 궁중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접대용 커피를 제공하였다. 조선왕실에서 언제부터 커피를 마셨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1896년 아관파천 한 이후,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예전에 커피를 가비加非, 가배(珈琲, 중국의 커피 명칭), 갑비甲非, 갑배차, 양탕洋湯국이라고 불렀다. 부산에서는 커피를 언제부터 마셨을까? 아마도 1876년에 개항되고 세관의 역할을 했던 해관海關이 부산에 설립되자, 해관장은 1883년 10월에 부산에 온 영국인 윌리엄 넬슨 로바트 William Nelson Lovatt 였다. 이때 커피가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부산에서 1892년에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것으로 알려졌으나, 부산학당 이성훈 대표의 사무실에 갔더니, 해은일록海隱日錄에 ‘1884년 7월 27일 민건호가 갑비차甲非茶를 대접받았다.’라는 내용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기존 알려진 사실보다 8년 앞선 내용이다.

책 출간의 일로 김한근 부산포 대표의 사무실을 찾았더니 경매로 구입한 한국전쟁 당시의 C레이션을 내놓았다. 그 속에 인스턴트커피와 설탕 봉지가 있었다. 1950년대에 보았던 것 바로 그것이었다. 김 대표의 설명으로 인스턴트커피는 6.25 한국전쟁 시에 미국에서 만들어졌으니 낙동강전투에 참전한 미군들과 부산사람들이 가장 먼저 마셨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에서 동서식품이 1974년에 ‘프리마’라는 식물성 크림이 개발된 이후 1978년에 처음으로 지금과 같은 커피, 프리마, 설탕을 적절히 배합된 일회용 ‘믹스커피’가 나왔다고 한다.

이효석은 커피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낙엽을 타는 냄새를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다형茶兄이라는 호를 사용한 김현승 시인은 커피를 즐겨 마셨다. 선교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열두 살부터 커피를 마셨다는데, 생전에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그는 커피 맛을 분석하고 향기와 농도를 분별하는데 독보적이었다. 그의 집안에 들어서면 커피의 향이 짙게 풍겼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들을 잃은 후, 에스프레소보다 더 짙은 고독을 잊기 위하여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신앙으로 슬픔을 이겨내고, 커피를 사랑하며 시를 쓰다가 기도실에서 기도하다가 작고하신 분이다.

커피를 시키면 한 종류의 커피만 나왔던 시절에 다방에 다녔던 나는 커피전문점이 생긴 이후로는 카페에 가면 바보가 된다.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 룽고, 아메리카노, 카페라떼, 카푸치노, 카페모카, 카페 마키아토, 카페비엔나 등 수십 가지가 되니 어느 것을 선택할까 한참이나 주저한다. 그 밖에 버터를 넣은 방탄커피, 아포가토, 보스니아 커피 등 보고 듣지도 못한 커피까지 있으니 영락없는 바보다.

미국을 여행하면서 식후에 커피를 마셨는데 커피잔이 커서 여러 동료와 나눠 마셨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아메리카노에 비해 커피 농도가 옅어서 그런지 숭늉처럼 마셨다. 포도주를 ‘사랑의 묘약’으로 그린 오페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커피 또한 포도주 못지않게 요물인 것이 틀림없다.

부산에 커피전문점이 우후죽순으로 선다. 이제 부산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제주도와 남해안 따뜻한 도서 지역에 커피나무를 심어 맛있는 커피의 원두만 생산하면 커피 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식사를 끝내고 커피믹스를 찾다 보니, 짙고 달콤한 다방 커피의 맛은 아예 잊었다.

봉지 안에 커피 가루, 프리마와 설탕이 함께 들어 있는 커피믹스와 뜨거운 물을 잔에 넣어 저어 바로 마시며 눈을 감으면 커피의 달인인 김현승 시인이 격식에 맞지 않다며 나무라면 무엇이라 말하지…

C레이션의 인스턴트 커피(사진=공기화)
C레이션의 인스턴트 커피(사진=공기화)
공기화 장로 / 서울대를 졸업하고 부산교육대학교 체육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한 명예교수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거의 인생 전부를 보낸 토박이이기에, 남다른 애정으로 부산과 관련한 글을 즐겨 쓰면서 부산문인협회와 한국장로문인협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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