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조지아연구소(AGSI)와 남장로교연구소(SPSI) 대표
일본을 왕래한지도 어언 25년을 넘기고 있다. 일본 선교를 필두로, 주요한 곳의 역사문화 순례를 하면서, 기독교 역사와 함께 한민족의 애환을 담고 있는 현장을 찾아 기억함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심혈을 기울여 온 세월이기도 하다. 일본을 구성하는 네 개의 섬, 즉 홋카이도, 혼슈, 시코크, 큐슈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야마토 땅에 관심이 집중되어 갔다.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방과 대별되는 관서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우리가 보통 오사카, 교토, 나라, 고베라고 일컫는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 논쟁이 여전히 극단을 달리고 첨예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사실에 근거한 입장만 밝힐 뿐이다.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당시의 선진 문화와 문명을 전파하였고, 백제를 중심으로 폭넓은 영향을 주었다. 필자는 그 옛날에 대승불교와 함께 전래된 기독교의 흔적을 찾는 데 온통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하지 못한다. 이러는 과정에서, ‘최은수 교수의 오니가조 역사 문화 순례길’이 개척되어 수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주요 여행사들을 중심으로 이 지역들을 상품화하여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왕래하게 된 것은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관서지역의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인 고베는 일본이 세계 열강들에 문호를 개방했던 1858년 이후, 그리고 공식적으로 개항했던 1868년을 기점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항구 도시로서 유명세를 떨쳐 왔다. 개항은 곧 외국인들의 도래로 이어졌고, 산과 바다의 조화로 경치가 빼어났던 고베는 항만의 발전과 함께 국제적인 도시로 발전해 갔다. 외국인들을 위한 거주지역은 영국인 하트라는 사람에 의해서 설계되었고, 영국과 독일에서 온 재능있는 건축가들의 손을 거치며 현재의 이진칸이 탄생하게 되었다. 전성기 때는 300채가 넘는 서양식 건물들이 장관을 이루었지만, 세월의 굴곡을 거치면서 현재는 30여 채의 건물들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고베를 거쳐 갔던 수많은 외국인들 중에 초교파적으로 선교사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필자는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두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미 남장로교 파송 최초의 내한 선교사였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Selina Linnie Fulkerson Davis)와 미 북감리교 파송의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선교사이다. 이들 모두 고베 이진칸과의 인연이 짧았지만, 한국 선교 역사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독신 여성 선교사로 미 남장로교 파송 최초로 한국 땅을 밟았던 리니 데이비스는 서울, 군산, 전주 등지에서 여성과 어린이 사역을 통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는 그의 모친인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이화학당을 설립하는 등 큰 족적을 남겼기 때문에 어머니의 명성에 가려져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는 의사요 목사라는 장점을 가지고 결코 적지 않은 족적을 한국 땅에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동역자들과 본국 선교부와의 갈등이 크게 부각되어 급기야 1907년에 선교사직과 함께 목사직을 내려놓고 교단까지 바꾸게 되어 역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윌리엄 스크랜턴이 1917년에 고베로 이주하게 된 데는 일본에서 외교관 부인으로 있었던 딸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딸만 넷이 있었는데 모두 외교관하고 결혼하였다. 윌리엄 스크랜턴이 고베에 거주하면서 영국 성공회 교회에 교적을 두고 출석하였다. 그는 고베에서 미국 영사관 소속의 의료 감사관으로 봉직하였고, 대영제국 성서공회의 명예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3월 23일에 그는 사고 후유증과 폐렴으로 65년의 생을 마감하였고, 당연히 영국 성공회 목사의 주관으로 장례 예배를 드린 후, 료코산 중턱에 위치한 고베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고베에 거주한 기간은 대략 5년 정도 되었다.
윌리엄 스크랜턴에 비하면,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고베 체류 기간은 일주일도 채 안 되는 4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고베 방문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극적이었다. 필자가 최근에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역이 파송 전에 미국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히면서, 당시 주미공사로 있었던 이채연의 부인이 버지니아주 살렘에 위치한 살렘장로교회에서 ‘미주 한인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규명하였다. 더군다나 필자가 찾아냈던, 이채연의 부인 이름이 ‘배선’이라는 사실은 일반 사학계에서조차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버지니아주가 미 남장로교회의 관할 구역이었기 때문에 배선 여사는 ‘미 남장로교회가 배출한 최초의 한인 세례 교인’이기도 했다.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배선 여사가 사내아이를 출산 후 두 달 만에 아들을 잃은 충격과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 속에서, 세례를 준 살렘장로교회에 요청하여 그녀에게 한국 장로교회로의 ‘이명증서’를 발급하도록 역할을 다했다. 목양의 관계에서 리니 데이비스는 배선 세례 교인을 한국 땅으로 무사하게 귀국시켜야 하는 선교적 임무를 지게 되었다. 당시 미 남장로교회는 1892년에 한국 선교를 결정하고 7명의 개척 선교사들을 선발하였다.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가 1892년 7월에 배선 여사가 세례를 받는 모든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면서, 향후 전라도 군산과 전주에서 동역하게 될 전킨 선교사와 협력하게 되었던 점 또한 귀한 경험이었다.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와 배선 여사는 샌프란시스코 옥시덴탈호텔에 머물렀고 1892년 9월 17일에 일본 요코하마로 가는 여객선에 탑승하였다. 미 남장로교 파송 7인의 선교사들 중에 전킨 선교사 부부와 레이놀즈 선교사 부부는 건강상의 이유로 덴버에서 지체하여 미주리주 풀턴 출신의 루이스 테이트(최의덕)와 매티 테이트(최마태) 남매 선교사와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 등 3명이 함께 승선하였다. 이때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와 동향 출신이면서 하노버 노회의 배려로 선교지 연구차 한국으로 가던 카메론 존슨(Cameron Johnson)도 동행하였다. 카메론 존슨은 자신이 이채연 공사 부부와 리니 데이비스를 연결해 주었다고 언급한 바 있으나, 이미 로녹대학 총장의 역할이 가시적이었고, 파송이 결정된 7인에 대하여 영사관이 개인신상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카메론 존슨의 입장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와 배선 세례 교인은 1892년 10월 5일 오전에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오랜 항해로 배선 세례 교인의 건강이 더욱 악화하여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가서 요양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루이스 테이트와 매티 테이트 남매 선교사는 요코하마에서 머물면서 기다리다가 나머지 4인과 함께 한국으로 가기로 하였다. 배선 세례 교인의 건강 문제로 마음이 급해진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배편을 수소문하다가 한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배편이 고베에서 있다는 말을 듣고 이틀 후인 10월 7일에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다음 날인 10월 8일에 고베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고베 이진칸에서 4일 정도 체류하였고, 10월 11일에 한국으로 가는 배에 승선하였다. 이렇게 하여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10월 17일에 제물포에 첫발을 디딤으로 미 남장로교 파송 최초의 내한 선교사가 되었다. 아직도 유교 전통이 강했던 한국의 상황을 유념하면서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배선 세례 교인과 미리 작별 인사를 하였고, 하선하자마자 배선 여사는 마중 나온 사람들과 함께 길을 재촉하였다. 그 이후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와 배선 여사가 만났다는 기록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렇듯 고베 이진칸과 관련하여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던 두 명의 선교사는 한 명은 전라도 전주에서, 다른 한 명은 고베 이진칸에서 하늘의 부름을 받고 이국 땅에 장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