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철 목사 / 초원교회 원로ㆍ부산외국어대학 초빙교수ㆍ본지 편집인
<기독교보>에서는 2024년에 필자가 고려 교단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고신총회의 분열과 통합을 살피기를 원하였다. 역사의 진실기록을 특히 고려 측의 역사 공개를 부담스러워하는 일부 인사들로 인해 이 일은 <교회와 신앙>으로 옮겨 계속되었다. 이제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서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 고려 교단에 관한 긍정과 부정적인 면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먼저 고려 교단이 남긴 긍정적인 면이다.
첫째는 개혁주의 신앙 운동의 확산이다. 고려 측은 고신교단에 뿌리를 둔 자교단(子敎團)으로서 고신교단이 추구해 온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삶과 실천을 일관되게 강조하였다. 특히 불신 법정 소송 건과 관련하여서는 ‘반고소’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한국에서 개혁주의 신학운동을 전개하여, 같은 신학을 공유하는 고신, 합동 교단 등과 함께 복음주의 신앙 운동에 크게 공헌한 점을 들 수 있다. 고려 교단은 부산에 거점을 둔 고신교단이 이루지 못한 중부권 이북의 경인 지역에서 개혁주의 신학운동을 광포한 점은 중요한 공헌이었다.
둘째로 교회(교단)의 신학교가 되도록 한 신학교육이다. 고려신학교는 1976년 3월 9일 서울에서 재복교를 선언하고, 1977년 2월 19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고려) 직영신학교가 되었다. 이 신학교가 신학교육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 훈련을 받은 인재를 배출한 점은 교회 건설에 공헌한 일이다. 특히 신학생 전원(석사과정)에게 특별 장학 혜택을 주어 등록금과 기숙사, 식비 일체를 면제하는 목회자 양성 제도는 목회자 후보생을 교단이 키워야 한다는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이점은 교회의 지도자는 교회(교단)가 양성함으로 교회에 의한 교회의 학교가 되도록 한 점은 선구자적 시도라고 판단된다.
셋째로 개척교회 설립을 우선시한 교단 정책이다. 1973년 4월 석원태 목사에 의해 설립된 경향교회가 고려 교단의 모(母) 교회 역할을 감당했다. 교단 초창기에 교단 소속 교회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목사 후보생들이 기존 교회에서 사역하기에 어려운 여건이어서 고려 교단은 처음부터 교회 개척을 우선시하는 교육을 시행하였다. 따라서 1990년 이전까지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고, 1990년 이후 교회 개척에 대한 열의가 식어가는 조짐이 보이자 교단은 정책적으로 부목사는 5년 이상 사역할 수 없도록 하여 개척을 장려했으며, 교회를 개척하고 세례교인이 15명이 되면 졸업한 당 해에 목사고시에 응시하도록 하여 교회 개척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교단 정책이 소속 교역자들이 교회설립과 교회 성장에 공헌하게 했다.
넷째로 선교 의식 고취와 선교사 파송 또한 교회 건설에 공헌한 일이다. 고려 교단은 1980년 초부터 세계선교를 강조하고 2001년 세계 각국에 53명의 선교사가 2010년에는 87명의 선교사가 사역하였다. 석원태 목사가 총회 선교부장직을 20년 이상 감당하면서 선교사 훈련과 파송, 현지 사역 지원 등의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런 긍정과 달리 고려 교단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야기된 문제점도 있었다.
첫째는 불신 법정 소송을 반대하는 ‘반고소’입장이 별도의 교단 설립까지 필요로 했는가 하는 점이다. 반고소 주장이 기존의 교단을 이탈하여 새로운 교단을 조직해야 할 타당성과 명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교회사를 보면 그보다 경한 신학적 견해차로 교회 분리와 분열, 교단 형성의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신학적 이설(異說)이 교단 분리와 교단 형성의 당위성을 갖는다고 볼 수 없다.
둘째로 지나치게 분리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이다. 고려 교단은 신학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주창하고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말하면서도 고신교단과 통합은 물론이지만, 연합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석원태는 공공연하게 “언젠가는 부산 고신교단과 합한다.”라고 말했었다. 단지 교단 발전의 요새를 확보하기 위해 서울에 고려신학교를 복교 한다고 했다. 그는 고신교단과 신학적 동질성을 인정하면서도 연합에 대한 시도가 없었다. 고신총회에서 2000년 9월 고려 교단과 합동을 위해 합동추진위원회까지 구성하였지만, 고려 측에서 2000년 10월 16일 합동불가성명서까지 발표하여 실제로 합동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석원태 목사는 결국 신학적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고신교단과 완전히 단절하여 독자노선을 추구한 것이다. 이러한 분리주의적 입장은 개혁주의 교회관과는 다른 것이다.
셋째로 타 교단에 대한 지나친 배타성이다. 석원태 목사는 고려 교단을 형성한 후 교단 발전을 위하여 전략적으로 고려 교단이 고신교단보다는 분명한 신학과 신앙 노선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며, 더욱이 여타의 다른 교단보다는 여러 가지 면에서 탁월하다고 하는 독특성을 강조해 왔다. 신학교에서 수업이나 경건회 또는 교단의 여러 행사 시 설교를 통하여 타 교단과 목사에 대해 비난하고 배타적인 입장을 천명해 왔다. 이것이 교단을 소종파 집단으로 고정화를 시켰다.
넷째로 교단 행정이 석원태 목사 중심의 일인 체제의 교단을 형성해 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지도력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합리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교단의 제반 행정체계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1인 지도자의 주관적 판단으로 처리됨으로써 때로는 초법적인 독점적 치리 기관화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이것은 건실한 교회 행정이라 볼 수 없고 개혁주의 정치원리에도 맞지 않는 점이다.
2015년 고신총회와 고려총회는 통합하여 고신총회로 일원화했다. 그리고 10년이 되어가고 있다. 고신 측에서는 고려의 장점은 수용하여 발전시키고 단점은 교훈으로 받아 숙고한다면 양 총회의 통합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사적 기록으로 남을 것이란 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