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대 목사 / 예린교회 은퇴목사, 전 부산장신대 교수, Drew University(예배학박사, Ph. D. in Liturgical Studies)
1980년대 서울 온누리교회를 중심으로 ‘경배와 찬양’ 형식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경배와 찬양’에서 사용하는 음악은 미국의 인테그리티 호산나뮤직(Integrity Hosanna Music)에서 나온 프레이즈 앤 워십(Praise and worship 찬양과 예배) 음악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경배와 찬양’을 중심으로 한 예배는 미국 새들백교회의 ‘열린 예배’를 모델로 하였다.
‘경배와 찬양’은 한국교회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많은 교회들이 기존 주일예배를 ‘경배와 찬양’ 형식의 예배로 바꾸었고,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교회들이 ‘경배와 찬양’ 예배를 드리고 있다.
‘경배와 찬양 예배’에서 사용하는 음악은 처음에는 미국 호산나뮤직이 주를 이루었지만 나중에는 호주의 힐송(Hillsong)도 추가되었다. 지금은 공인찬송을 비롯해서 한국 작곡가들의 복음성가와 C.C.M.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
‘경배와 찬양’ 예배를 ‘열린 예배’의 모범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며, 보수적인 측면에서는 찬양에만 집중하는, 세상적으로 너무 열려버린 예배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실제로 ‘경배와 찬양’ 팀 중에서는 회중의 인기를 크게 얻어 순회 찬양집회를 가지기도 하고, 음반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물론 일부분이겠지만,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가 개인의 인기와 수입을 올리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는 점에서 그 시작이 ‘경배와 찬양’에 있었다는 것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렇다면 ‘경배와 찬양’은 앞에서 다룬 예배음악과 복음적 교회음악의 관점에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나누어 보기로 한다.
1) 복음적 교회음악의 관점에서 본 ‘경배와 찬양’
복음적인 교회음악으로서의 ‘경배와 찬양’은 교회음악 장르의 측면에서 볼 때,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교회음악의 장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계속 변화해 왔으므로 ‘경배와 찬양’에서 사용되는 음악이 어떤 종류인가는 그렇게 심각하게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경배와 찬양’의 음악 소재가 대부분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많은 관심과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복음송 중심의 C.C.M.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관한 토의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경배와 찬양’에서 사용되는 복음송 등의 C.C.M.이 앞에서 토의한 에토스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좋은 종류의 음악의 원칙만 지키고 있다면, ‘경배와 찬양’을 복음적 교회음악에 포함시키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2) 예배음악의 관점에서 본 ‘경배와 찬양’
‘경배와 찬양’에서 사용하는 음악이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교회음악의 범주에 들어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예배음악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객관적인 결론을 섣불리 내릴 수 없다.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하며 또한 엄숙하고 경건하여야 한다. 물론 영적인 기쁨으로 드려져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흥분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몸놀림이나 소음에 가까운 큰소리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런 것은 부흥회나 기도모임, 찬양집회 등을 통해 얼마든지 표현될 수 있다.
그렇다고 ‘경배와 찬양’을 예배가 아니라고 속단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주관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형태의 예배가 모든 예배의 정형이 될 수는 없다. 즉 특정한 시대, 장소, 문화와 관습에 따른 하나의 예배가, 모든 시대와 장소, 문화에 관계 없이 똑 같이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막이나 성전의 제사제도, 초대교회의 예배가 오늘날 현대교회의 예배 형태가 될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예배는 주제가 있는 한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제에 맞춰서 말씀과 성찬, 그리고 음악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음악 지도자나 교역자들은 이러한 예배의 주제에 맞추어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예배를 위해 선곡한 음악과 준비된 말씀이 그 날의 예배 주제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 예배 순서 하나하나는 각각의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음악 또한, 그 자체의 의미와 기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예배와 음악을 따로 분리하여 설명해서는 아니 된다. 예배에서 사용하는 음악은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예배가 지향하고 있는 목적에 부합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 기독교 예배의 순서 하나하나가 각각의 의미와 기능을 가지게 된 것처럼 예배의 음악 또한 자체의 의미와 예배에서의 그 기능이 규정되어야 한다.
‘경배와 찬양’도 치유음악 목회차원에서 필요한 찬양집회이다. 이 집회를 통하여 믿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나며, 영적으로 방황하는 심령들에게 새로운 영적 기쁨을 제공하여 삶에 대한 긍정적인 안목을 소유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는 찬양을 통하여 새로운 기쁨의 자리로 들어가는 경험을 제공해 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항상 ‘경배와 찬양’의 열정 속에만 빠져 있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형태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성도는 영적 신앙의 성장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경배와 찬양’ 집회로부터 얻은 이러한 영적인 기쁨이 진정한 예배로의 인도자 역할을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경배와 찬양’ 집회는 공예배로의 과정이 되어야지 예배 자체로서의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라고 신앙의 점진적인 단계를 언급하고 있다. 즉, 마음으로 믿는 감성적인 단계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이성적인 단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이성으로 판단해 보고 난 뒤에 결정하지 않는다. 우리도 알 수 없는 어느 순간에 우리의 가슴이, 우리의 감성이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은 이러한 구원의 감격을 항상 간직하고 기억하면서 이후로는 자신의 이성의 도움으로 성경 말씀을 통해 더욱 더 삼위일체 하나님을 깊이 알아 가기 위해 노력하여, 보다 차원 높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해 가야 한다. 믿음이 성장하지 아니하고 구원의 첫 단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며,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모유와 부드러운 음식을 받아먹기만 하는 유아기의 신앙에서 정체되어 있는 성도가 아니라, 딱딱한 음식을 씹기도 하고 나눠주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성장해 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독수리는 참새가 높은 공중으로 따라 올라갈 수 없을 만큼 하늘 높이 올라간다. 모름지기 신앙의 성장을 원하는 성도들은 더 이상 참새 신앙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라는 말씀처럼, 독수리의 날개 치고 올라가는 수준의 신앙을 갈망하고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경배와 찬양’도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부분이지만, 정적이면서 거룩하고 경건한 예배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만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새로이 경험하며 기억하게 하고, 에토스 이론에서 제시한 좋은 종류의 음악인, 조용하고 경건한 찬양을 통해 우리에게 보다 높은 차원의 영적인 평안과 치유의 경험을 제공하여 준다는 면에서 신앙 성장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 준다.
한국교회의 교회성장 프로그램에서 항상 표본으로 삼으며 연구 대상이 되어왔던 새들백교회의 ‘구도자 예배’는 한국교회의 교회성장 모델이 되어왔다. 한국교회의 교역자들은 교회성장의 모델이 되는 이 ‘구도자 예배’야 말로 열린 예배의 표본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적으로 새들백교회는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에 드리는 ‘구도자 예배’를 통하여 많은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국교회는 새들백교회의 구도자 예배가 주일예배로 대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조사도 없이 성급하게, ‘열린 예배’라는 이름 아래 ‘경배와 찬양’과 함께 새들백교회의 ‘구도자 예배’ 형식으로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새들백교회의 ‘구도자 예배’가 교인 수를 증가시킨다는 사실에만 현혹되었고, 안타깝게도 새들백교회가 별도로 수요일 저녁에 드리는 ‘헌신된 자’들의 공적인 예배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새들백교회가 교회를 처음 찾아온 사람들로 하여금 항상 ‘구도자 예배’에만 머물게 하였다면 오늘날의 새들백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는 ‘구도자 예배’에 참석한 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훈련시켜 결국에는 교회의 핵심 멤버인 ‘헌신된 자(The committed)’로 만들어, 보다 성숙되고 거룩한 헌신된 자들만이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수요예배를 별도로 드리고 있는 데서 새들백교회의 숨겨진 성장요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즉 새들백교회는 일요일이 아닌 수요일에 공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수요일에 드리는 주일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인가?
* 릭 워렌, 『새들백교회 이야기』(서울: 도서출판 디모데, 1995), 김현회․박경범 역, 162, 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