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Berkeley GTU 연구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조지아연구소(AGSI)와 남장로교연구소(SPSI) 대표
오웬(Clement Carrington Owen) 선교사는 ‘오기원’ ‘오목사’로 불리며 ‘의사’요 ‘목사’로 헌신하였다. 오기원 선교사는 전라남도의 목포와 광주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필자의 최신 연구들을 통하여, 미 남장로교 파송 최초의 의료 선교사, 전라도 최초의 서양 의사, 전라도 최초의 서양 의술 시행 등 많은 명칭을 가지고 있는 드류(유대모) 의사 선교사와 오웬(오기원) 의사/목사 선교사가 친형제보다도 더 각별한 관계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드류(유대모)와 오웬에 대한 최신 연구들은 이미 출판된 필자의 ‘목포 기독교 근대 역사관의 배경’에서 다뤄졌다. 아울러 현재 출판이 진행 중인 필자의 또 다른 저서인 ‘최초의 서양의사 드류 유대모’를 통해 더 구체화 되었다.
필자가 미 남장로교 한국선교 역사 및 전라도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가려지고 버려지고 무시되고 왜곡되어 억울하게도 역사의 한구석에 처박혀져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부분들이 제자리를 찾을 때, 교회사가로서 보람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역사 앞에서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게 된다. 드류(유대모) 선교사의 삶과 사역 전체가 그러했고, 드류 선교사의 친동생보다도 더 각별한 오웬(오기원)의 배경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두 권의 책을 통해서 오웬 선교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 충분히 밝혔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짐으로 감격과 함께 도전이 된다. 필자가 발로 뛰고 현장을 찾아서 오웬(오기원) 선교사에 대한 추가적인 사실들을 ‘최초’로 찾아냈다.
첫 번째 최초
오웬(오기원) 선교사는 1867년 7월 19일에 버지니아주 할리팩스 카운티의 메요(Mayo)에서 태어났다. 필자가 2025년 4월 초에 오웬 선교사의 생가 및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있는 집을 ‘최초’로 찾아냈다. 2024년 4월 말, 즉 정확히 1년 전에 순천 안력산의료문화재단 서종옥 이사장과 함께 근처까지는 방문했었다. 당시 큰 길가에 살던 분이 자신의 집터가 오웬 선교사의 생가인 줄 착각하였었다. 더군다나 오웬 선교사의 생가는 그분의 땅도 아닌, 전혀 다른 주인의 소유이다. 오웬의 생가 근방에는 오웬 가문의 사람들이 많이 살아왔기 때문에, 필자의 연구 이전까지 알려져 왔던 오웬 선교사의 집은 전혀 다른 오웬 가문의 집이었다. 최근까지 출생지와 성장배경과 연관하여 오웬 선교사에 대한 연구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체 진행되어 왔다. 급기야는 오웬 선교사의 어머니인 메리 그릭스비 캐링턴 오웬은 남편인 로버트 오웬이 사망하자, 어린 오웬 선교사를 양육하지 않고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에게 보낸 ‘비정한 엄마’로 오해를 받아 왔다. 최근까지 전라도 교회사 속에서 오웬 선교사의 어머니는 자신의 새 인생을 위해서 아들을 버린 여인으로 설교 예화나 호사가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오웬 선교사의 어머니는 자녀양육에 참으로 헌신적인 여인이었으며 단 한 번도 어린 오웬 선교사를 버리거나 방치한 적이 없었다.
두 번째 최초
2025년 4월 초에 필자가 ‘최초’로 오웬 선교사의 외가를 방문하였다. 오웬 선교사가 나고 자란 ‘메요’의 바로 옆에 ‘오크 클립’(Oak Cliff)이라는 외가의 저택이 있었던 것이다. 오웬 선교사의 외할아버지인 의사이자 정치가 윌리엄 워싱턴 캐링턴, 외할머니인 제인 캐링턴, 그리고 이모들과 외삼촌들이 매우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세 번째 최초
필자가 ‘최초’로 오웬 선교사의 외가를 방문하여 외관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오크 클립 저택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오웬 선교사의 외가인 캐링턴(Carrington) 가문의 한 분과 연결되어 모든 일들이 성사되었던 것이다. 현재도 오웬 선교사의 외갓집에는 캐링턴 가문의 가족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다.
저택의 기본적인 구조와 내부의 가구들은 1700년대부터 사용되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오웬 선교사의 메요(Mayo) 집에서 가까운 외갓집, 저택의 안과 밖에서 뛰어놀며 헌신적인 어머니의 친정 식구들의 사랑 속에서 자라난 어린 오웬 선교사가 실제처럼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만큼 오웬 선교사의 외갓집 분위기가 당시와 동일하게 보존되어 있다.
네 번째 최초
필자가 오웬 선교사의 외갓집인 오크 클립 저택의 한켠에 있는 가족묘지를 ‘최초’로 방문하였다. 이 묘지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으나, 도무지 찾을 수 없어서 안타까워했다. 그때 캐링턴 가문의 한 분이 정확한 묘지의 위치를 알려주어 방문할 수 있었다. 오웬 선교사의 외갓쪽 직계가족들이 대부분 잠들어 있다. 오웬 선교사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삼촌들과 이모들, 그리고 어릴 때 사망한 외사촌들까지 함께 있다.
다섯 번째 최초
오웬 선교사의 어머니인 메리 그릭스비 캐링턴 오웬 여사는 첫 번째 남편을 잃은 지 약 8년 만에 스펜서 씨와 두 번째 결혼하였다. 오웬 선교사는 새아버지와 이부 형제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1892년경에 오웬 선교사의 가족들은 버지니아주 렉싱턴으로 이주하였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오웬의 친동생인 로버트가 렉싱턴에 있는 워싱턴 앤 리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말이다. 필자가 오웬 선교사 가족의 렉싱턴 집을 ‘최초’로 방문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집은 수리했지만, 성구가 적힌 이 펜스 부분은 오웬의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웬 선교사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방학이 되면 어머니와 친동생 로버트, 그리고 온가족이 살고 있던 렉싱턴 집으로 돌아왔다. 렉싱턴은 ‘한국선교의 요람’으로 불리며 전킨 선교사 부부를 포함하여 여러 명의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하였다. 당연히 오웬도 어머니의 가족이 있는 렉싱턴에서 출발하여 한국으로 향했다.
여섯 번째 최초
필자가 버지니아 렉싱턴의 오크 그로브 묘지에 안장된 오웬 선교사의 어머니 묘지를 ‘최초’로 찾아내어 방문하였다. 이 묘지에는 남북전쟁의 영웅인 스톤월 잭슥 장군의 묘가 있어서 유명하다. 아울러 렉싱턴의 명문가 출신인 메리 레이번 전킨 선교사 가족도 여기에 잠들어 있다. 하지만 오웬 선교사의 어머니와 나머지 가족들이 오크 그로브에 있다는 것은 ‘최초’로 밝혀진 것이다. 사실 오웬(오기원) 선교사의 어머니 묘지를 찾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묘지 지도를 가지고 있는 관리직원조차도 필자와 함께 한참을 헤매고서야 찾아낼 정도로 어려웠다. 교회사를 연구하며 40년 가까이 전 세계 묘지를 찾아다닌 필자조차도 난해하게 느꼈으니 말이다. 오웬 선교사는 어머니를 비롯하여 이부 형제들과도 서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우애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오웬 선교사에 대하여 오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