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신앙> : 김정언 기자 】 신구교는 대강절로부터 성탄절인 12월 25일에 이르기까지, 정교회는 1월 7일까지 각각 크리스마스 시즌을 지킨다. 성탄절에 관한 댓글들을 읽어보면 으레 성탄절 전통과 이교적 상징물, 그리스도의 탄생시기 등에 관한 비판물이 빡빡하다.

특히 가능한 최대한 정통기독교를 깎아내리려는 이단성 집단에서는 기존교회의 성탄 전통이 마치 역설적이고 결정적인 이단의 근거인 양 맹공을 가하곤 한다.

과연 성탄절 날짜가 중요한 것인가? 이에 관해 브랫 러슬 목사(올드파워턴교회)의 답변을 들어본다.

복음의 중요성을 논할 때 성경대로 바르고 정확하게 다잡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올바르자"는 우리의 갈망은 성령께서 가능하게 하신 우리의 사랑과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온유, 정다움, 신실함, 절제의 사람들이 되자는 것과 관계된다. 복음을 바로 알자는 것과 올발라짐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12월 25일에 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2월 25일에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가정하고 지키는 것이 바람직한가? ⓒchurchpop.com
12월 25일에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가정하고 지키는 것이 바람직한가? ⓒchurchpop.com

이 날이 4-5세기 가톨릭교회에 의해서 지정된 긴 역사를 여기서 논하진 않겠다. 예수님이 정말 12월 25일에 태어나신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년중 그 어느 날도 탄생은 가능하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봄철이었다고 한다. 폴 마이어와 앤드레이어스 코스텐버거는 11월말설을 주장한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어쩌다 12월 25일을 축하하게 됐는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선 어떤 사람이든 종교인이든 이맘 때쯤 어떤 종류의 축일을 지키곤 한다. 유대인들의 하누카(수전절)로부터 이교도들의 동짓날(winter solstice), 고대 독일의 겨울장작 축제인 율차이트(Julzeit=Yuletide), 로마의 태양신탄생제(DNSI) 등이 그런 것들이다. 트리 장식, 상록수와 장작, 미슬토(겨우살이나무), 할리(감탕나무) 나뭇가지 등의 유래가 어떻게 예수님의 탄생일과 결부됐는지를 보면, 기독교 초기 신자들이 당대에 흔한 이교 절기에 대응하여 이교도들을 복음으로 이끌기 위한 대응문화적(counter-cultural) 내지 일종의 양성화 차원에서 축하하려고 한 듯 보인다.

그런가 하면 서기 274년 아우렐리안 황제는 '정복불가한 태양'의 탄생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진 비잇 같은 학자들은 실상 그 전에 신자들이 성탄절을 이미 지켜온 것에 이교도들이 대응하기 위하여 이 절기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코스텐버거 등은 크리스천들이 로마인들 대신 진정한 정복왕이자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탄신일을 이날 지키려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둥근 성체면병(wafers), 성체현시대(monstrance) 등 다양한 태양형 상징물을 보면 아닌 게 아니라 그럴 법하기도 하다. 과연 이교도들이 기독교를 흉내낸 것인가, 기독교가 이교를 흉내낸 것인가?

두 번째로는 서구교회가 3월 25일을 예수님이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된 성수태고지(Annunciation) 또는 원죄 없는 잉태(Immerculate Conception)의 날로부터 임신기간을 추산하여 성탄절이 결정됐다는 설이 있어왔다. 12월 25일은 9개월 후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기 예수가 잉태 후 태어나신 때가 9개월 후였는지 10개월 후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무튼 두 가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서구 교회력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통치기에 결정된 것으로 정교회는 1월 6일 또는 7일로 결정했다. 과연 12월 25일에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가정하고 지키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날을 특별한 날로 구별하여 꼭 지키는 것이 옳은가?

예스와 노의 두 답이 있을 수 있다.


우선 '노'라는 답들이다.

1. 첫째로, 날짜는 중요하지 않다

사도 바울은 날짜와 달, 계절과 해수를 특별히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을 경계하며 조심하라고 했다(갈라디아 4:9-10). 크리스천의 생활을 지상적 요소들과 지나치게 근접 연계시키는 것은 바보짓이다. 요컨대 예수님이 12월 25일에 태어나셨는가 아닌가는 그 날을 반드시 더 또는 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2. 우리의 믿음의 바탕은 크리스마스가 아닌 그리스도

성탄절 시즌의 사회적, 종교적, 축전적 의미를 다 합해 봐도 인간의 전통일 뿐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아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성탄절 전통이 아닌,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 죄인들의 대속물로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되살아나신 그 주님(고린도전서 15:3-4) 위에 우리의 신앙을 구축해야 한다.

3. 예수님은 늘 베이비가 아니시다

"그 아이(예수님)는 자라나고 강해지며 지혜로 가득해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그 위에 있었습니다"고 누가는 묘사했다(눅 2:40). 구유 안에 누인 아기에게만 집중하는 신앙은 죄 없는 구주로 오셔서 죄 없는 삶을 사시다 죄인의 대속물로 죽으신 그분에 대한 신앙을 놓치는 셈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날 베이비 생일을 축하하러 갈 뿐, 은혜와 진리를 입으시고 제자들에게 그 분 같은 삶을 살라고 요구하시는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의 삶에서 12월 25일이 유일하게 중요한 날이라면 날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예스' 쪽의 답들이다.

1. 매일이 중요하니 12월 25일도 중요하다.

우리 인생의 흐름은 수증기와도 같다. 수증기는 덧없지만 생각해보면 매우 중요하다. 12월 25일에 단지 친구들과 함께 세상이 어떻게 화려하게 보내고 즐기는가를 생각하면서 지낸다면 우리가 날마다 즐거워하는 그 예수님의 위대성을 모독하는 셈이 된다.

만약 세상이 빨간 산타들과 쇼핑과 파티나 즐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이 순전히 상록수 등 이교적 축제 파트만 즐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신자로서는 매일이 거룩한 날이다. 신자는 매일 하루가 "세월을 아껴야 할" 날들이다.

더 중요한 것은 12월 25일이 크리스천들로서는 뭔가 축하할 것을 찾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우위성과 탁월성을 선포할 놀랍게 중요한 기회의 날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날을 누구에겐가 정말 축하하고 즐거워할 유일한 대상인 그 분을 선사하는 데 왜 사용하지 못하는가?

2. 그리스도 말고는 우리에게 신앙의 대상이란 없다

천사들은 말하길 "두려워 마오. 자 보시오, 내가 그대들에게 모든 사람들을 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오. 오늘 다윗의 성에서 그대들에게 구주가 나셨는데 바로 그리스도 주님이시라오" 했다(눅 2:10-11). 이 축하의 날을 크리스마스라고 부른다고 해서 열매 없는 헛일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 함은 하나의 신앙행동이다. 예수님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을 믿는 것이 한 신앙행동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고 함도 신앙행동이다. 그러므로 강림절은 세상에 대한 신자의 증언에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해 줄 수 있는 계절이다.

메시아가 오시리란 기대 속에 우리가 사는 삶은 우리의 희망과 믿음의 대상이요 우리 영혼의 닻이신 예수님의 위대성을 증언하는 기회가 된다. 마찬가지로 성탄절은 이 땅에 다시 오실 그 주님에 대한 기대와 이 세상에 주님 밖엔 아무 소망도 없다는 사실을 시위하는 계기가 된다.

성탄절의 한 가지 위험성은 북적대는 혼잡 속에서 그리스도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크리스마스의 개념에 관한 우리들의 논증싸움에서 우리가 옳다고 나서려는 의식 탓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핵심인 그 분 자신을 나누는 것을 잊어버림도 하나의 위험이다.

3. 구유의 아기는 경배 대상으로서 가치가 있다

그 분 속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기꺼이 머무르며 그 분을 통해 땅이나 하늘의 모든 것들과 화해하시되 그 분의 십자가의 피로써 화목하게 하신다(골로새 1:19-20). 신자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킬 것이냐 말 것이냐 식의 상투적 논쟁을 하다 보면, 구유 속 아기를 정말 기뻐할 가치가 있고 거룩하신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주로 맞이해야 한다는 진리에 귀착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 아기는 우리의 놀라운 카운슬러이시고, 능력의 하나님, 평화의 왕이시다. 이 아기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 모든 실체의 충만이시며 이적을 행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되살아나신 바로 예수님과 동일한 아기다. 비단 천사들과 목자들, 박사들만 경배할 뿐더러 모두가 경배할 가치가 있는 분이다.

따로 한 날을 빼내어, 지상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의 사건, 하나님이 아기가 되시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사건, 성삼위의 제2위이신 그 분이 우리에게 몸소 내려오신 이 사건을 신자들이 한 모듬체로서 함께 집합적으로 축하하고 경배하는 것은 일년중 한 날을 활용하는 훌륭한 사례로 보인다.

12월 25일은 바로 그런 날로서 단 하루일 뿐이다. 우리 모두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겨야 할 성육신 사건의 날이다. 평소 익히 잘 알던 예수님과의 친숙한 감정에서 잠시 '일탈'하여 가장 큰 기적이신 그 분을 다시금 새롭게 관조해 볼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앤드류 피터슨이 노래했듯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태중에 그 아기는 / 산이라도 옮길 믿음의 창시자였네"

밑바닥 본질은 그리스도께서 정녕 오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우리 각 사람에게 지금과 영원히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