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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바르트, 자기 도우미와 불륜관계 회개 했을까?
20세기 '신정통주의' 최고 신학자 칼 바르트 비평
2018년 01월 16일 (화) 10:58:21 김정언 기자 skm01_@daum.net

<교회와신앙> : 김정언 기자 】 칼 바르트-폰 키르쉬바움 이슈에 관한 시리즈를 올리다 보니, 다양한 반응과 함께 시리즈를 어디까지,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라는 질문들도 나온다. 솔직히 말해 최대한 객관적이고 타당한 선에서 쓸 수 있는 한, 끝없이 쓰고 싶다는 것이 필자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제 크게 두 가닥을 잡았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된, 크리스티아네 티츠가 소개한 핵심 편지 내용들을 본격적으로 풀어놓기.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한 교계의 폭넓고 구체적인 반응들을 소개하기다. 하지만, 전자는 언제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후자부터 시작해 본다.

   
▲ 독서 중인 중년 시절의 바르트

마크 갤리(Mark Galli)는 복음주의권의 얼마 안 되는 바르트 관련 식자의 한 명이다. 빌리 그래엄의 언론으로 불리는 기독교종합시사물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T)>의 현 상임편집장이다. 그 전에는 CT의 자매지인 <크리스천 히스토리(CH)>와 <리더십> 편집인이기도 했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 전, 10년간 장로교 목회자였다가 성공회로 교단을 바꿨다. 학력으로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샌터크루즈와 풀러신대원을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 주립대 데이비스 박사원 과정을 밟았다. 롸저 올슨 교수(베일러대학교 조지 트루엣 신대원 · 신학)는 갤리를 "문제 이슈에 대하여 평화적 어프로치를 하는 진지한 복음주의 학자"로 평가했다.

갤리는 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기 등 최근까지 주요 도서 9권을 썼고, 최신간인 <칼 바르트-복음주의자들을 위한 서론적 전기>(KBAIBE, 2017)는 복음주의권 사람들에게 바르트를 소개하기 위한 책이다. 크리스티아네 티츠 교수의 가장 결정적인 에세이가 나오기 불과 얼마 전에 출판됐다.

   
▲ 바르트 전기 표지(왼쪽)와 저자 마크 갤리(오른쪽)

갤리의 견해를 우선, <잉글우드(북)리뷰(ERB)>(*인디애너폴리스 잉글우드크리스천교회 산하 언론)와 그 자신의 CT 기사 두 가지를 요약해 소개한다. 특히 ERB는 '마크 갤리-복음주의자들과 칼 바르트의 불륜'이라고 좀 도발적인 제목을 달았다. 그만큼 ERB가 윤리에 자신이 있는 언론인지는 알 수 없다. ERB는 바르트에 대하여 상당히 비평적인 태도를 갖지만, ERB 자체가 토머스 멀튼이나 쉐인 클레어본 같은 이들의 관상영성을 널리 보급하는 곳이어서, 자체적 문제점도 없지 않아 뵌다.

갤리와 <잉글우드 리뷰>와의 인터뷰 내용이 담은 표현들은 일부 독자에겐 좀 거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재까지 바르트-키르쉬바움 이슈에 대한 학자들의 반응을 보면, 소장 학자들 중심으로 크게 몇 가지 반응들이 있어 공평하게 고루 소개하기로 하고, 거의 여과 없이 올린다.


갤리 인터뷰에 나타난 바르트 평가

<잉글우드 리뷰>는 일단 티츠 에세이를 읽고 간추린 바비 그로의 글을 인용했다.

"바르트와 폰 키르쉬바움 사이에 오간 편지들을 통해 드러난 사실들은 둘이 서로 사랑했고, 나아가서 둘은 연인들이었으며, 더 나아가 바르트가 그녀를 아내와 다섯 자녀들이 살고 있는 자기 집으로 불러들일 정도였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키르쉬바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거의 바르트와 아내 넬리의 이혼까지 갔으나 어떤 이유로... 넬리는 이 참지 못할 상황에서 그냥 바르트 곁에 머물게 됐다."


ER: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일부일처제에 관한 강한 확신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갤리: 바르트에 관하여 익히 아는 편인 대다수 복음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이미 알고 바르트를 아예 무시하는 쪽, 또는 그냥 끼고 살기를 배우는 쪽이다. 가장 최근의 '발견'(*즉 티츠 교수의)이라야, 바르트의 자기정당화에 관한 좀 더 상세한 내용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갤리는 "나같은 사람에겐 바로 그 부분이 가장 걸리는 대목이다"고 토로한다. 까닭은 "바르트의 신학을 꽤 아는 편이고, 그의 전기를 쓰면서 (비유적으로나마) 그와 얼마간 함께 지내왔기" 때문. 그가 얼마나 자신의 불륜을 정당화하는지를 듣고 있기가 참 힘들다. 그렇지 않다면 사려 깊은 신학인인데 말이다.


ER: 칼 바르트와 또 (수많은 여성들을 성적으로 괴롭힌) 존 하워드 요더(*바르트를 감히? 요더와 비교하려 해서가 아니라 요더가 바로 바르트의 제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케이스를 접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그들의 신학저작물들을 다루어야 할까? (갤리)님은 그들의 신학저작을 아예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죄악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저서를 읽을 때, 어떤 비평적 렌즈가 필요할까? 세상의 평범한 죄에 영향을 받거나 아니면 아직 같은 죄가 드러나진 않은 다른 신학자들과 비교할 때, 그들을 좀 다르게 읽어야 하는가?

갤리: 행동이 신학과 불일치한 사람들의 경우, 그 저작물을 좀 더 신중하게 읽기를 우리는 바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르트의 신학은 종교를 '의존감정'으로 정의한 19세기 진보주의의 주관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바르트는 우리 속에 일어난 일들은 우리 밖에서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말씀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애써 강조했다. 그는 신학과 윤리의 뿌리를 인간 감정 밖에 두길 바랐다. 바로 여기서, 그는 자기 도우미와의 불륜관계가 너무나 좋고 바르게 느껴지다 보니, 마귀의 것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이런 행동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심지어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어겨가면서까지도 감정에 승복하게 되나를 보여 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신학은 이전보다 더 중요하다.


ER: 바르트의 혼외 관계에 관하여 (최소한) 가장 혼란스러운 점 한 가지는, 어떤 종류의 유감이나 회개도 내비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죄인들이지만, 기독교전통으로 볼 때, 죄에 대한 신앙적 반응은 고백과 돌이킴이라는 것이 전형적인 이해였다. 바르트에게서 추정되는 이 회개의 결핍성이 우리가 바르트 신학을 읽을 때 어떤 영향을 주는가?

갤리: 최근 발견된 일부 코멘트는 일종의 회개로 비친 적이 있다고 내가 해석한 바 있다. 바르트는 그런 행위와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 있음을 시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물론 그것만으로는 참 회개가 아니다. 그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의 계명의 빛 속에 걸어가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회개의 결핍이 뜻하는 바는, 자기 행동의 중대성을 보는 눈이 가려진 것 같다는 점이며, 매우 슬픈 일이다. 물론 우리 중 누군들 눈앞에 가려진 죄가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만 바르트는 도덕적 지성이 신학적 지성과 정확하게 일치하진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했듯, 인간의 심성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으로 사악하다.


ER: 바르트의 그런 부정(不貞)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물이 복음주의 현 상황에 대해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 한두 가지 있다면?

갤리: 첫째로, 신앙으로 말한다면, 복음주의자들은 경건주의에 가깝다. 예수님을 따스하게 체험하고 있고, (흔히들 자평하듯) 그 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즐기고 산다. 이것은 우리 신앙에 중요한 부분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바르트 신학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우리의 속이 아닌 바깥에서 온 것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속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임을 상기시켜 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주관주의에 대한 중대한 체크인데, 사실 주관주의는 우리가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움직임 속에서, 때로는 가장 와일드하게 작용할 수 있다.

둘째로, 바르트의 삶은 불건전한 주관주의를 점검하는 것은 단순히 좋은 신학을 공부하는 것만큼 쉽지는 않음을 보여 준다. 이는 또, 한 사람의 신학을 바로잡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 은사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성숙을 돕는 기도와 성찬, 설교와 친교 등의 선물을 주신 이유가 있다. 크리스천의 온전한 주변 삶은 슬기로운 신학도 포함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CT에 실린 바르트-키르쉬바움 관계 분석

다음은 마크 갤리가 그가 편집장으로 일해 온 매거진인 <크리스채너티투데이>에 실린 자신의 견해이다.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칼 바르트 전기를 내놓은 후 그 저자로서 나는 바르트와 키르쉬바움과의 관계에 대한 가장 최신 정보(*즉 티츠 교수의)를 궁금해 했다. 전기를 쓸 당시 나는 문제의 관계가 바르트의 아내 넬리에게 몰아온 고통, 특히 바르트가 샬로테에 대한 사랑을 아내에게 고백했을 때뿐 아니라, 자신의 신학저술 작업을 위한 도움을 받으려고 그녀를 집안에 들이라고 주장할 때 넬리가 겪은 고통을 주목하면서 간단히 다루었다.

바르트 학자 헌싱어를 참고해 보면, 바르트는 젊었을 때 아버지가 결혼을 금한 사랑에 빠졌었고, 넬리와는 어떤 의미에서 중매결혼을 한 셈이다. 따라서 그는 정서적으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결론은 설령 그것이 정서적 불륜이라고 해도,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게 된다:

"(바르트보다) 업적이 훨씬 적은 남편들도 그런 관계가 부부생활의 건실성을 허물고 가족에게 무거운 짐이 될 때, 결혼 서약을 지키기 위해 자기 욕망을 희생시키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고.

바르트와 키르쉬바움이 1925~1935년에 나눈 서신에 관한 티츠 교수 분석 에세이를 읽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단순히 바르트가 통간을 했다거나 한 위대한 신학자가 사생활에선 별 볼 일 없었음을 보여준 정도가 아니다. 교회역사가 보여주듯, 유혹과 죄악은 아무리 위대한 개인도 가리지 않고 상대한다.

나는 사실 구체적 정보가 없어서, 문제의 관계에 대해 별 깊은 생각이 없이 대강 어림만 했었다. 바르트의 이 차원은 내겐 다소 추상적이었던 것. 그러나 이제 나를 통절하게 만드는 점은 바르트가 그 '관계'를 정당화한 근본 이유가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한 기독교 교사를 바라보고 그가 얼마나 결점 투성이인가 발견하고 나면, 나의 반응이 이해가 갈 것이다. 그 삶이 자신들의 가르침과 오로지 모순되기만 한 사실을 알고 나면, 그들의 가르침을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소화해야 하나?


바르트의 문제

바르트에 관한 그런 정보가 왜 문제인지를 좀 더 깊이 설명해 보겠다. 이것은 그가 한 죄인으로서 단죄된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문제의 깊이를 시사하지 않는다.

내 책의 주요 포인트의 하나는, 우리의 주관적 경험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속에 우리의 신학이 터잡도록 바르트가 도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그것이 바르트가 대항한 19세기 진보주의의 문제점이었다. 그것은 종교를 '의존감정'(das Gefühl der Abhängigkeit)으로 정의한 주관주의였고, 바로 그 도취감이 민족주의적 애국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도록 휩쓸어간 동인이었다. 그것은 바르트의 스승을 포함한 수많은 신학자들이 세계 1차 대전을 위한 독일의 전쟁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바르트를 동요하게 하여 신학을 바닥부터 재고하게-위로부터 하나님의 계시로 "내려오게"-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주관주의에 바르트가 빠졌다. 바르트는 그녀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건 그냥 마귀의 일일 수가 없소. 분명 의미가 있고, 살 권리가 있는 거요...나는 그대를 사랑하며, 이것을 멈출 그 어떤 가능성도 보이지 않아요." 그 정도로 그 관계가 선하고 정당해 보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작업에 들어간다. A점에서 B점으로, B점에서 결론으로 옮겨가기 위한 엄격한 로직보다는 언제나 변증논리에 더 깊은 진리가 있다고 그는 믿었다. 예를 들자: 예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시다. 다른 예: 하나님은 심판관이시고 구주이시다. 이 진리들은 쉽게 화해될 성질이 아니며, 오히려 긴장관계에 있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바르트는 이 방법을 기독교신앙의 수많은 신비를 탐구함에 있어서 실리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에 있어 이 방법의 한계가 보인다. 티츠는 바르트가 어떻게 사물을 이해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추린다:

"바르트는 자신의 상황을 신학적으로 풀이하되, '질서'와 '인간 심연의 불가사의한 죄책으로부터 본의 아니게 우리에게 덮친 것' 사이의 긴장 관계로 해석한다. 또한 '명령의 거룩함'과, 또 '그대(샬로테)와 내가 (어느 수위인가는 모르지만), 옳음과 자연적인 이벤트 사이에 함께 한다는 것 사이의 것으로 해석한다."

바꿔 말하면, 바르트는 자신과 샬로테가 선택의 여지 없이, 부부의 정절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하는 것과 자신들이 옳다고 느끼는 것-두 가지 사이의 변증적 긴장 속에 살아갈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가 이것을 아내 넬리에게 설명할 때, 그녀의 얼굴 모습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부모들은 가끔 자녀가 이런 식의 말을 하는 것을 듣곤 한다. "훔쳐선 안 된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동생의 캔디바를 갖는 건 괜찮다고 느껴지는데 어떡해요." 하지만 부모는 "네 자신의 느낌과 무관하게 그건 그르다"고 설명하고 그를 방으로 돌려보낸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단순히 바르트가 죄인이고 그의 죄는 혼외부정이라는 정도가 아니다. 숱하게 훌륭한 사람들이 삶 속에서 미련한 소위를 저지른다. 문제는 자신의 신학적 방법론과 신학적 프로젝트에 철저히 모순된 바로 그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오랜 세월동안 그랬다. 이제 도대체 나는 바르트 신학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바르트 스스로 자기 신학노선을 따를 수 없었는데도, 남에게 그의 신학을 바른 양심으로 추천할 수 있겠는가?


세 가지 명백한 관찰

이 물음들을 깊이 상고하고 좋은 벗들과 토론하던 중에, 나는 이것이 통째로 얼마나 철저히 공통되고 예측 가능한 것이었나를 떠올렸다.

첫째로, 자신들의 최고 신학적 · 윤리적 이상을 실제로 실천하고 살아가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은 매우 드물다는 사실. 사실 대다수는 자신들이 그토록 남에 대해 열렬하게 흥분해 하는 바로 그 주제가 바로 자신들도 가장 취약하게 느끼는 바로 그 이슈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한 설교자가 도박의 죄악을 장시간 열나게 설파하고 있다면, 결국 그 자신이 도박에 유혹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가 쉽다. 포르노에 대한 경고를 두드러지게 해온 목회자가 자기 컴퓨터에 엄청난 양의 포르노를 저장해 두고 있었다면, 누구든 그를 "헐~ 굉장한 위선자네"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설교자 자신, 포르노 중독을 이기고 싶어 발버둥 쳤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의 설교는 청중뿐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리라.

바르트는 자신의 내적 유혹에 관하여 쓴 예가 드물다. 하지만 추측컨대, 그는 자신의 감정에 미혹되면서 아픔을 느꼈을 법하다. 그가 삶의 한 부분에서 이 싸움을 성공적으로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의 전체 프로젝트가 다 실패라는 의미는 아닐 터이다. 우리의 변덕과 작은 욕망들보다는 그리스도의 계시가 내 삶을 지배하게 함이 곧 거대한 도전이다. 애당초 예수 그리스도께 일차적인 초점을 맞춰 놓고 우리의 종교감정을 둘째로 삼는 것이 중요함을 숙고하게 한 것이 바로 바르트의 신학이다.

둘째로,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불법행동을 정당화할 신학방법론을 응당 사용하려고 들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자기 죄를 정당화할 로직을 사용한다. 자기정당화는 우리 영혼 속속들이 섬유처럼 올올이 짜여져 배여 있다. 더구나 그것을 뽑아내는 데는 필생의 노력이 든다. 사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완전히 다 빼어낸다고 장담할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친구들과 배우자라는 도우미를 둔 이유이다. 나의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나의 불쌍한 의도를 노출시켜주는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내 아내이다.

이 아이러니와 모순은 수많은 위인 영웅들에게서 발견되는 사실이다. 나는 여러 해 전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썼는데, 놀란 사실 하나는 '겸허의 성자'쯤으로 널리 알려진 그가 자신의 오만 탓에 자주 실패했다는 점이다. 그는 예수님을 위하여 한 자신의 희생을 자주 자랑스럽게 여겼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사랑함에 관하여(De Diligendo Deo)'라는 아름다운 영성 에세이를 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버나드)도, 십자군을 성공적으로 유도한 설교가로서, 무슬림들을 모조리 쳐 죽이라는 살인적 호소를 했다.

이런 이슈는 단지 신학 분야로만 그치지 않고 철학적으로 연계된다. 토머스 제퍼슨을 보자. 그는 독립선언문을 직접 쓴 사람으로 인간자유에 관한 가장 유명한 대목을 썼다고 평가된다.

"우리는 자명한 이 진리를 붙들고 있다. 즉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창조됐고, 양도 못할 모종의 권리들을 그들의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았는데, 그 가운데는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한 제퍼슨 자신, '샐리 헤밍즈'라는 한 흑인 여성노예와 장기간 성적인 관계를 가졌으며, 그것은 상호합의로 맺어졌거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의 일환일 수가 없었다.


암흑 속의 선한 빛

그들의 이런 심오한 모순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의 메시지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사상을 실추시키는가? 우리 마음속에 세워진 그들의 영예로운 상아탑을 허물고 두 번 다시 되돌아보지 말아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의 약점이야말로 바로, 우리 자신을 그들의 사상에 좀 더 깊이 잠가야 할 역설적 필요성을 강조해 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제퍼슨이 외친 인간의 존엄과 자유는 바로 자신의 이상과 영예와는 철저히 모순된 그의 모습을 철저히 기소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장 겸손해 뵈는 사람이 교만과 싸워야 하고 흔히 패배까지 한다면, 그것은 가망 없는 위선적인 제스처일 뿐이라고 치부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겸허의 이상은 인간의 오만이 얼마나 천박하고 허망된가를 보여 준다.

나는, 좋은 신학은 경건한 삶으로 이끌어주는 지대한 도움의 하나라고 굳게 믿는 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울러 기도와 친교, 성경과 예배를 다른 많은 선물들과 함께 주신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돕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인용한다면, 어떤 '죄의 신학'은 스스로 구축할 수 없어도 기도와 금식으로 해방될 수 있다.

나는 바르트 신학을 여전히 추천한다. 그러나 나의 책에서 말한 대로, 그가 모든 신학적 질문에 대하여 바른 답을 가져서가 아니다. 바르트는 그 어떤 위대한 사상가와도 마찬가지로, 비평적으로 읽어야 한다. 그의 생각과 가르침이 성경과 일치하는지를 점검해 가면서 말이다.

내 책에서도 말했다시피, 그가 주는 답변이 도움 되어서라기보다 신학적, 특히 성경적으로 생각하게끔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르트는 '바르트 학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생각 깊은 크리스천들의 학파를 일으키길 바랐다.

바르트의 불륜에 대한 상세 정보를 안 것은 여전히 슬픈 일로 남는다. 자신이 존중해온 한 사람 탓에 실망한 데 대해 누군가는 용서하고 잊어버리거나 반대로 결코 용납하지 못하고 잊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단호히 찬탄할 수 있는 영웅적인 인간상을 찾게 되길 오래 기대해 봤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참 사람이자 참 신이신, 단 한 분 외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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