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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르트와 둘이서 공동 작업하며 응축된 사랑 나눠
20세기 '신정통주의' 최고 신학자 칼 바르트 비평
2017년 12월 22일 (금) 10:53:09 김정언 기자 skm01_@daum.net

<교회와신앙> : 김정언 기자 】 <칼 바르트-샬로테 폰 키르쉬바움 서신모음> 제1집(2009, 편집: 롤프-요아힘 엘러)은 바르트의 편지 162편, 키르쉬바움의 편지 70편이 수록된 것으로, 모두 1925~1935년에 오간 서신들이다. 이 가운데는 칼과 샬로테 사이의 초기 핵심 상황이 여실히 나타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수잰 셀린저의 표현에 따르면, 이 편지들 속에는 너무나 많은 기쁨과 슬픔, 아픔이 서려 있다.1)

   
▲ 바르트와 폰 키르쉬바움의 행복한 한 때. 바르트는 "이젠 더 외롭지 않다"고 그녀에게 고백했다. ⓒSRB

셀린저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편지들에서는 비용을 불문하고 그토록 함께 하려했던 이유가 밝혀진다. 그들은 거듭 거듭, 서로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글로써 정답게 애무하는 느낌도 든다. 서로 함께 있으려는 탄식이 거듭된다. 서로를 걱정한다. 나치 치하 기독교 투쟁기(鬪爭期)2) 당시 가장 긴장된 시간에, 바르트는 그녀가 그리운 이유를 반농담으로 나열했다. 둘은 서로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해야 했고, 확인하곤 사랑으로 응했다. 서로가 점점 진해져가는 사랑의 강도와 수십 년이 흘러도 여전한 사랑의 다짐의 확실성을 서로 말하고 있다. 바르트는 이젠 더 외롭지 않다며 자신의 심연의 욕구에 응해준 그녀가 얼마나 고마운지 표현할 길 없다고 고백했다. 특히 키르쉬바움의 편지에서는 '둘이 함께 함의 느낌(das Gefühl der Zusammengehörigkeit)'을 말하면서 그 함께 함의 중요성과 정당성, 그리고 전적으로 그에게 속한 느낌을 노래 후렴처럼 읊었다."3)

그런데 이런 둘의 사랑이 함께 승화되어 이룬 문서 출판 준비작업 속에서, 둘의 응축감은 더더욱 실감날 것이다.


바르트의 비서와 도우미들4)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은 1929년 베르클리의 페스탈로치 별장에서 바르트 등과 오랜 안식 휴가를 가진 뒤, 그 해 가을 바르트의 풀타임 도우미가 되고, 10월 14일엔 바르트의 집안으로 입주하게 된다.

바르트는 가을 학기 교수진들 가운데 학장(또는 학무처장)이 되어, 더 많은 일과와 더 긴 시간, 더 복잡한 업무 사안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대표 업무를 수행하게 됐다. 그는 또 19세기 신교 신학에 관한 강의를 급진적으로 바꾸어, 성경적 바탕을 가진 새로운 칭의 교리 세미나를 시작하게 됐다.

11월 16일 투르나이젠에게 보낸 서신에서, 바르트는 롤로(샬로테)가 비서 업무에 "완전불가결"한 사람이 됐다고 선언하다시피 한다. 샬로테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학장(처장)실 업무에 관심을 갖고 강의초록을 만드는가 하면, 강의 내용을 좀 더 다지기 위한 근거를 수집해 제공하고 자신의 신학 독서 보고도 제출하곤 했다.

그녀에게 새롭게 늘어난 일들은 비서와 행정 업무, 그리고 전통적인 교회 관련 참고 도서 기능을 하던 카드 파일의 계발이었다. 바르트와 함께 한 일은 공동연구, 도서··강의·연설 등 받아쓰기, 바르트의 원고 본문 편집 및 타이핑 등이었다. 둘이서 한 공동작업은 베르클리에서의 사진이 힌트를 준다. 거기서 둘은, 루에디 페스탈로치가 바르트의 업무와 그 자료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 준 다락방에 있는 커다란 창문 곁 테이블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작업했다.

롤로는 수동 타자기를 갖고 있었다. 대화는 받아쓰기와 교차되었다. 그들은 책장을 넘기면서 서로의 코멘트를 기다리곤 했다. 1935년 이후 뮌스터와 본, 바젤에서는 각방에서 서로 따로 해온 연구를 연결했다. 그렇게 해서 바르트의 라이브러리는 점점 규모가 커져 두 방을 꽉 채우게 됐다.

샬로테의 서재는 자신의 방 일부였다. 바르트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성향인 데 비해 샬로테는 잠이 더 필요하곤 해서, 그는 다음 날 아침 강의를 앞두고 받아쓰기를 위해 그녀를 깨우기가 곤란하다고 말하곤 했다. 바르트의 더 큰 참을성은 한계가 보였다. 폰 키르쉬바움은 "바르트 스타일을 따르느라"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그를 도우면서, 휴식이라곤 정오에 잠시 기분전환을 위한 블랙 커피를 마시고 카드게임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점심 때 가족식사를 하면서 서로가 느끼는 내적인 긴장과 갈등은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것이었다. 때로는 바르트가 제자들을 데려오곤 했다. 바르트의 초기 제자였던 디트리히 리츨은 바르트-폰 키르쉬바움 협력관계를 대강 이렇게 간추렸다:

"바르트와 롤로의 협무(協務)는 강의본문 작성, 강의 도중 (바르트의)즉흥 발언에 따라 일부 수정하기, 그렇게 해서 <교회교의학>(KD)을 채워 나아갈 본문의 완성 작업 등이었다. 규율적 스케줄에 따르는 둘의 팀워크는 실로 놀랄 만하고 주목할 만한 경험이었다."

바르트의 어림으로는, 매주 50분짜리 강의를 4회 하는데 그 준비에 30~40시간 필요했고, 나흘마다 KD 출판을 위해 최소 여덟 쪽 분량의 매끈한 원고를 마련해야 했다. 이 과정의 일부로 그녀가 모든 강의마다 참석해 경청, 필사를 했다. 바르트의 강의 도중 그의 관심사와 호기심의 방향이 바뀌면서 강의 토픽도 수시로 바뀌었기에 샬로테의 일거리가 점점 더 늘어만 갔다. 그녀가 교리학을 위한 1, 2차 본문을 결합해 준비해 놓으면, 거기에다 바르트가 부언과 평가를 했다.

폰 키르쉬바움은 일찍이 1927년부터 발췌해온 파일에서 <교의학> 텍스트를 마련해 나아가면서 필요한 부분은 보충하곤 했다. 바르트 자신 그런 파일링을, 어렵던 괴팅엔 시절인 1922년부터 해 왔다. 샬로테는 교부 시대와 중세, 개혁기의 문서를 해독하느라 라틴어를 배웠다. 1920년대 말엽엔 바르트의 딸 프란치스카와 함께 주 3회 라틴어 강사를 두고 작업을 했다. 샬로테는 자신의 글에 프랑스, 네덜란드어, 영어 출처를 포함시켰다. 교리학 전체에 걸쳐 바르트가 개입하는 현대 학계의 흐름 추적을 위해 여러 현대 언어에 어느 정도 능통해야 했다.

   
▲ 둘의 사랑은 일종의 승화된 공동작업 속에 더욱 응축되고 농축됐다고 할 수 있다. ⓒZZ

이런 작업을 위해 바르트는 또 헤르초크, 부쉬, 힌리히 스퇴브잔트 같은 학생 연구 보조요원들을 고용했기 때문에, 그의 집은 늘 일종의 다번 교대 팩토리 같았다. 도우미들의 일은 샬로테와 겹치곤 했다. 그들은 카드파일 작업도 병행했지만, KD 각권의 교정과 색인 작업도 같이 했다. 바르트는 교리학 서문에서 5명의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샬로테는 같은 작업을 해도 뭔가 다르게, 더 세련되게 확대해 가며 했다. 중요한 출처들을 주요 어휘 순을 따라 카드색인 작업으로 확보하고 유지해 나아간 것. 그녀의 이 주제 인덱스가 강의 준비에 엄청 활용된 것은 물론이다. 바르트는 책과 저널 등 현대 학계에 관한 광범위한 독서를 했기에 샬로테에게 크게 의존했다.

   
▲ 폰 키르쉬바움과 게어트루드 슈티번(1938년) ⓒKBA

여기서, 바르트를 존경하여 그의 평생 친구가 된 또 다른 여성에 관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게어트루드 슈티번(Gertrude Staeban).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 깊은 감동을 받아, 평생 바르트 및 폰 키르쉬바움의 친구가 된 사람이다. 슈티번은 2차 대전 중 나치에 저항한 여성 레지스탕스의 일부였고, 고백교회를 도왔으며, 전쟁 후 수감자들을 돕기도 했다. 시리즈 3회에도 게재했던 바르트 가족 사진 속에도 그녀가 나타나 있다.5)

폰 키르쉬바움은 1929년 여름부터 몇 달 동안 특히 마르틴 루터의 어록에 깊은 관심을 갖고 메모를 해 나아갔다. 물론 매우 중요한 자료였다. 바르트는 1928년 5월 30일 투르나이젠에게 쓴 편지에서, "롤로는 루터에 관한 작업에 불가사의한 바지런함을 떨쳐 왔다."면서 "날마다 이 분(루터)의 어록에 대한 중요한 노트들 다량이 그녀 때문에 빛을 보게 됐다. 루터의 (기존)설교집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숨겨졌던 내용들을... 나의 헛간(자료창고)에 저장해 놓고 있는 것이다."라고 귀띔을 했다.

뿐만 아니라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에 관해서도 동일한 작업을 수행했다. 특히 천주교의 중요한 현대 형이상학 철학자이자 예수회(Jesuit) 회원인 에리크 프츠바라(Erich Przywara)6)의 키에르케고르 관련 저서에서 많은 초록을 했다. 프츠바라는 바르트의 중요한 논적이면서도 존중의 대상이었다. 바르트와 샬로테가 프츠바라를 알게 된 것은, 그들의 또 다른 친구이자 예수회 사제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덕분이었다. 바르트가 이들 예수회 회원과 오래 친교를 나눈 점은 그의 신학에 어떤 영향과 자극을 받았는지, 다소 의아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바르트 최대의 적수, 프츠바라6)

여기서 이야기가 잠시 빗나가는 느낌이지만, 참고 되는 삽화(揷話)를 하려고 한다.

프츠바라는 근래 천주교 철학계에서 점차 더 중시되고 있는 인물이다. 전 로마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존중해 마지 않더니, 최근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프츠바라를 인용해 가며 존경감을 표한 바 있다. 프츠바라의 저술물은 많지만, 그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바가 적었다가 근래 위키피디어 등을 통해 상당량 밝혀졌다. 프츠바라는 현대 철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최초의 가톨릭 명사 중 한 명으로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등에 대한 존재유비론을 펼쳐 주목 받아왔다. 그는 신의 내재와 초월 사이의 긴장을 '긴장 속 연합'으로 봤다.

프츠바라는 (현재 폴란드에 속한) 옛 프러시아의 실레지아 북부 카토비츠에서 폴란드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독일에 발효 중이던 예수회 금지법에 따라, 대신 1908년 네덜란드 엑스헤이든의 예수회에 수련수사로 들어갔고 인근 팔컨부르의 이그나티우스 대학에서 철학 및 신학 공부를 마쳤다.

1913~1917년엔 오스트리아 펠트키르히의 예수회 학교인 스텔라 마투티나에서 가르치면서 음악담당관으로도 봉직했다. 1920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 1922년 뮌헨으로 옮겨가 1941년까지 예수회 계열 정간물인 <슈팀멘 데어 차이트>(SDZ. '시대의 목청'이란 뜻. 부제: 기독교문화저널) 편집진에서 활약한다.

그즈음 그는 중부 유럽을 누비면서 수 백 회의 강연을 했는데, 특히 1928~1929년 다보스에서 이끈 세미나는 유명하다. 그는 굉장한 다작형이어서 평생 총 40여권의 책과 800여 편의 글을 썼는데, 1922~1932년의 10년 어간에만 17권의 책과 230여 꼭지의 글과 비평을 써냈다.

   
▲ 1930년대의 바르트. ⓒSD

바로 이 시기에 그가 바르트와의 에큐메니컬 대화에 아우러졌다. 바르트는 그를 가장 진지한 상대자로 여겨 1929년 뮌스터에서, 1931년 본에서 열린 자신의 세미나에 이 '골리앗의 화신'을 초청해 맹토론을 벌였다. 바르트는 그의 신존재 유비론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어, "천주교에 절대 귀의할 수 없는" 최악의 이유로 삼았지만, 둘은 나치에 대한 저항과 바르멘 선언 정신 등에 공감했다.

프츠바라는 나치의 탄압을 받아 건강도 상하고 기회도 줄었지만, 성당이나 개인의 사저 등에서 작은 세미나를 열어 프레데릭 횔덜린(본명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횔덜린. 독일 낭만파 시인으로 헤겔과 쉘링, 마르틴 하이덱거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침)과 릴케, 철학자 니체 등에 관하여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자, 그의 제자 겸 친구인 폰 우르스 발타자르가 1947년 스위스로 데려가 휴양에 들어갔다. 하지만 스위스에서 장기적 회복을 노린 발타자르의 플랜은 실패했고, 프츠바라는 뮌헨으로 돌아가 하겐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집필을 하며 여생을 보내다 1972년에 죽어 플라흐의 예수회 묘원에 묻혔다.

프츠바라는 초기에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아레오파고의 디오니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성공회에서 구교로 개종한 존 헨리 뉴먼 등의 저서를 읽고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철학적, (에큐메니칼)신학적 바탕에서 천주교를 변호해, 현대사회에 창의적, 비평적으로 개입한 최초의 카톨릭 신학자로 평가된다.

철학적으로는 에드문트 후설, 막스 쉘러, 마르틴 하이덱거 등의 현대 현상학에 개입한 첫 카톨릭 사상가의 한 명이었다. 신학적으로는 칼 바르트와의 대화에 개입한 첫 천주교 신학자로, 신교의 변증신학에 대해 존재의 유비로 맞섰다. 그는 더 나아가 베를린의 레오 배크 등 유대교 랍비와도 토론적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주저,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는 최근에야 영역됐다. 프츠바라는 아퀴나스를 따라, 본질과 실존 사이의 구분은 창조된 실재 전체 속에 흐르며, 그것은 본질 존재이신 하느님과의 차이로부터, 곧 창조된 실재가 정의된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이 존재유비론이 곧 천주교 신학의 형식적 핵심 원리로 잔존해 있다.

프츠바라는 카톨릭 신학자 칼 라너, 폰 발타자르, 요제프 피퍼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나치 수용소에서 끝내 숨져간 유대계 카톨릭 여성 철학자, 에딧 슈타인 수녀의 친구 겸 멘토어이기도 했다. 바르트는 프츠바라의 신학을 일종의 자연신학으로 보고, '적 그리스도의 발명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바르트와 프츠바라의 상호 논점은 오늘날도 개혁계와 천주교의 에큐메니컬 신학 쟁점이 되곤 한다.


'둘 관계'의 카피? … 발타자르와 폰 슈파이어

엄연히 가톨릭 학자인 발타자르도, 바르트와의 토론을 통해 서로 여생의 친구가 된 사이였다. 발타자르에 관한 이야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하나가 신교 출신으로 천주교로 개종한 여성 신비가(mystic),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Adrienne von Speyr)이다. 발타자르와 폰 슈파이어의 관계도 가끔 바르트-폰 키르쉬바움과 비슷한 관계로 오해받곤 해 왔다.

스위스의 여성 내과의사, 작가였던 폰 슈파이어는 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뒤, 신비가, 성흔보유자(stigmatist)로서 '계시적 영감'을 받아 영성과 신학에 관한 저서 60여권을 낸 바 있는데, 그녀의 책 다량이 발타자르의 필사 도움을 받아 출판됐다. 발타자르는 그녀를 천주교로 개종시킨 장본인이다. 내과의사이면 일종의 과학자인데도 신비가가 된 것은 그녀의 어릴 때부터 삶에 작용한 천주교 종교령의 결과로 봐야 맞을 것이다.
 

각주

1) Selinger, Suzanne, Lollo Closer Up: First impressions of the Barth-von Kirschbaum correspondence 앞 부분 일부 참고.
2) Kirchenkampf(키르헨캄프). 나치 치하인 1933-1945년 기간 독일 기독 교회의 몇 가지 상황을 가리키는 용어로, 해석도 다양하다. 우선 나치에 적응하려는 독일 기독교(Deutsche Christen)와 거기 저항하는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사이의 갈등, 또 나치 체제와 신교 공동체 사이의 투쟁, 나치 체제와 구교 사이의 투쟁 등이 포함된다. 당시 독일인의 3분의 2는 신교인들, 3분의 1은 구교도들이었다.
3) 이런 대목들은 다분히 솔로몬의 아가를 연상시킨다. 둘은 사랑하고 살아가면서, 필시 계속 성경의 아가를 의식했을 것이다.
4) 이 부분은 셀린저와 쾨블러의 책을 상당량 참조했다(형편상 추후에 해당 면수를 상세히 밝히겠다).
5) 시리즈 3회의 ‘사진4’ 속 맨 왼쪽 첫 번째인 여성.
6) 이 부분은 위키피디어 해당 항목을 일부 간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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