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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신정통주의' 최고 신학자 칼 바르트 비평 ①
“칼 바르트 ‘삼각관계’… 의문 당혹 안타까움”
2017년 11월 16일 (목) 14:55:01 김정언 기자 skm01_@daum.net

<교회와신앙> : 김정언 기자 】 20세기 서구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 그와 아내 넬리, 그의 연인 · 파트너 · 절친이었던 샬로테 키르쉬바움과의 복잡한 '삼각관계'*1)와 이에 대한 서구교계의 반응*2)을 시리즈로 필자의 견해 없이 객관적인 자세로 소개하려고 한다.

20세기에 영향력을 발휘한 주요 신학자로 지금까지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신학자중의 한 명이라면,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고인인데도 '신정통주의'(neo-orthodox)*3) 신학자로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특히 그의 <교회교리학>과 <로마서주석> 등 그의 저작물이 교계와 신학계에 미친 힘은 거의 절대적이다. 우리나라에만도 바르트를 연구하거나 전공까지 한 수많은 후학들이 있다.*4) 바로 요 얼마 전에도 바르트 관련 세미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영향력 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 지금 국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미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바르트와 그의 비서 내지 파트너 역할을 했던 여성,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Charlotte von Kirshbaum)과 및 바르트의 아내 넬리와의 의혹스러운 '삼각 관계'에 관한 객관적인 자료들이 분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들이 당대에 서로 나눈 서신들이다.

   
▲ 20세기 서구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에 대한 비평들이 세계 신학계를 달구고 있다.

그 결과, 지금 수많은 학자들과 논평가들, 특히 바르트 후학들이 이에 대해 의문과 당혹감과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일부 바르트 학자들은 실상을 알고 나서 반론을 펴거나 변호할 의욕조차 잃을 정도로.*5) 그의 서신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 바르트의 문제점에 대한 실상황 파악과 확인이 어느 정도 확실하게 돼 가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조직신학과 교의신학도 다뤘지만, 기독교 윤리학에도 큰 무게를 두었다. 그 점이 더욱이 그의 명성 및 덕망에 직결되어 다양한 입장의 학자들에게 '메네메네 테켈 우파르신'식*6) 저울질이 되고 있다. 또 바로 그 점이 바르트의 후학들에게는 트라우마가 될 수도 없지 않다. 과연 바르트 신학은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지킬 수 있을까? 바르트와 바르트를 우려하는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를 망라하게 될 본 시리즈를 통해 가름할 수 있길 희망해 본다.
 

칼 바르트는 누군가?

바르트는 스위스 출신의 개혁신학자로, 흔히 20세기 최고 신학자로 손꼽히곤 한다. 그의 '신정통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 교육에 대한 그의 거부로부터 왔다. 그는 현대주의와 자유주의, 역사적 비평론 등을 배운 뒤 현대주의 입장의 첫 목청을 높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 유럽의 전형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 이상의 보수주의 신학도 아울러 거부함으로써 결국은 중도주의 노선을 걷게 된 셈이다.

바르트의 새로운 신학은 당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은혜와 심판을 함께 체현했다는 신적 진리의 역설적 특성에 맞추어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이라고 불렸으며, '말씀의 신학(theology of Word)'이라고도 불린다. 그와 비슷한 변증법적 신학 노선에 섰던 사람들은 루돌프 불트만, 에두와르트 투르나이젠, 에버하르트 그리제바흐, 에밀 브룬너,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등이었다.

바르트의 저작물은 디트리히 본회퍼, 토머스 토런스, 라인홀드 니버, 자크 엘륄, 스탠리 하워워스, 한스 큉, 위르겐 몰트만 등의 20세기 신학자들과, 좐 업다이크, 미클로스 젠트쿠티 같은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아울러 J. 그레셤 메이천, 캐스퍼 W. 하지 2세, 앨빈 절비, 코닐리어스 밴틸, 고든 클라크, 네덜란드의 조지 하링크 등 보수신학자들의 반증을 부르는 역설적 영향도 끼쳤다. 근본주의 계열인 밴틸은 보수신학계에서는 대표적인 바르트 비평가였지만, 바르트를 "캐리캐처"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신학계 일각의 평가도 있다.*7)

유럽의 지배 신학에 대해 불편해 했던 바르트는 결국 독일 고백교회의 한 리더가 되어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에 저항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바르트는 나치를 지원한 선배 신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르멘 선언'의 작성자가 됐다. 바르트는 대담하게도 바르멘 선언서 내용을 히틀러에게 직접 보내기도 했다.

   
▲ 13권에 달하는 대작인 칼 바르트의 <교회교리학> ⓒwikimedia

바르트는 특히 칼뱅주의의 선택교리, 인간론과 죄론,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에 대한 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다. 바르트의 주저로는 <로마서 주석>과 무려 13권(부록포함 14권)으로 엮어진 <교회교리학>*8) 등이 있다.


칼 바르트의 생애

바르트는 1886년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리츠 바르트 역시 신학자와 목회자로서 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프리츠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자유의지론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바르트는 베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자유주의의 본산인 베를린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다 튀빙엔, 마르부르크 등을 거친다.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는 유대인 칸트 철학자, 헤르만 코헨의 강의를 일년간 듣기도 했다. 바르트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소개받아 읽고는 "학생으로서 정말 감화 받은 첫 책"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1911~1921년의 10년 동안은 아르가우 주의 자펜빌에서 목회자 생활을 한다. 이 10년간 독일 유학 당시 배운 자유주의에 대해 깊은 회오에 빠지는데, 첫째는 스위스의 사회민주주의 운동 때문이고, 둘째로는 1차 대전 당시 대다수의 (자유주의)은사들이 카이저(독일 황제) 지지 성명에 서명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르트 자신, 이렇게까지 말했다. "신약 석해와 윤리학, 교리학, 설교학 등 기본적으로 내가 신뢰했던 모든 것이 바닥까지 흔들렸다. 독일 신학자들의 저서까지도 모두 말이다." 이것이 그가 성경으로 돌아오게 된 동기였고, 특히 로마서는 그랬다. 그래서 1916년 로마서 주석을 쓰게 됐고, 1919년 첫 발행을 했다. 그의 주석은 독일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무렵인 1913년엔 바이올리니스트인 넬리 호프만과 결혼했다. 둘 사이엔 훗날의 신약학자, 마르쿠스 바르트를 비롯한 4남 1녀가 태어났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의 명성에 힘입어 괴팅엔 개혁신학 영예교수로 초청받아 약 5년간 지낸 데 이어 뮌스터, 본 등에서도 신학교수로 재직한다. 그러나 나치의 민족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저항으로 본 교수진에서 강퇴된 뒤 귀국하게 된다. 그는 그러기에 앞서 자연신학을 놓고 에밀 브룬너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괴팅엔에 있을 당시, 바르트는 샬로트 폰 키르쉬바움이란 여성을 만나며, 이 때를 기해 그녀를 장기간 바르트의 비서와 조력자로 두게 된다. 폰 키르쉬바움은 특히 그의 <교회교리학>(1927) 저술에 큰 보탬이 된다.

바르트는 1935년 히틀러에 대한 충성맹세를 거부한 뒤 스위스에 돌아가 바젤 대학교 교수가 된다(1935-1962). 바젤에서도 그는 나치를 지지한 실존철학자, 마르틴 하이덱거를 비판한다. 바젤 대학교에서 바르트는 스위스 민중들로부터 "국방을 지지하냐?"는 상투적인 질문을 받자, 독일을 의식하며 "그렇소. 특별히 북쪽 국경요!"라고 답했다.

앞서 비친대로 바르트는 본래 주로 빌헬름 헤르만에게서 독일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했으나 세계 1차 대전 당시 자유신학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는 우선 스위스-독일 중심의 종교 영향에 헤르만 쿠터 등을 중심한 종교사회주의에 몰입했고, 크리스토퍼 블룸하트, 쇠렌 키에르케고르 등의 성경적 실존주의에도 그러했다. 초기의 바르트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은 그의 <로마서 주석>에 잘 나타난다.

1914년 독일의 전쟁 명분을 지지한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아돌프 폰 하르낙 같은 바르트의 스승들이 있었다. 바르트는 그의 스승들이 하나님을 인간문화의 최상의 가장 깊은 표현과 경험에다 너무 가까이 묶는 종류의 신학에 오도된 나머지 전쟁 명분에 가담케 됐다고 믿었다. 그런 신학의 일차적인 경험은 대중의 문화사랑 증가로 나타난다. 바르트의 초기 신학 다량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바르트는 1920년경 <로마서 주석> 1권이 불만스러워 11개월간 대폭 정정하여 1922년 제 2권을 냈다. 바르트는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간문화, 성취, 소유 등과 묶으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도전하셔서 뒤엎으신다고 주장했다. 바르트 신학의 가장 오랜 표현들은 <교회교리학>에서 나타난다. 이 책은 계시론, 신론, 창조론, 대속론 · 화해론 등 4가지를 중심으로 엮어졌다. 그는 훗날 구속론과 종말론을 한데 묶어 추가해 완성하려고 했으나 만년에 하지 않기로 맘먹었다.

2차 대전 말에 그는 독일 참회화해책임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다. 그는 훗날의 '스튜트가르트'(1945) 유죄선언보다 더 철저한 성명서를 써냈다. 이 성명에서 그는 교회가 반사회주의적 보수적 세력과 나란히 하려던 것이 곧 국가 사회주의 이상에 영향받기 쉽게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이 성명은 냉전시대에 접어들면서 서구의 반공주의자들에게 거부당하기도 했다.

바르트는 1950년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AAAS)의 외국영예회원이 됐다. 1950년대에 그는 평화운동에 공감하여 독일의 재무장에 반대했다. 그는 또 "나는 반공주의를 원칙적으로 공산주의 자체보다 더 큰 악으로 간주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1962년 바르트는 미국을 방문해 프린스턴 신대원, 시카고 대학교, 유니언신학교, 샌프랜시스코 신대원 등에서 강의를 했다. 그는 또 천주교의 제2 바티칸 공의회에 초청받아 다녀온 뒤, <사도들의 문턱에서>(Ad Limina Apostolorum)라는 소책자를 쓰기도 했다. 그는 1968년 12월 10일 바젤에서 죽었다.


칼 바르트의 신학

아인슈타인을 알려면 당연히 아인슈타인의 과학을 알아야 하듯, 바르트를 알려면 당연히 그의 신학을 알 필요가 있다. 바르트는 실로 신학계의 아인슈타인 같은 존재였다.

삼위일체 중심: 바르트 신학의 주된 주제 한 가지는 자유주의 신학 탓에 잠정적으로 '상실된' 삼위일체 교리를 재발견하고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론을 근본적으로 구분해 주는 것이 곧 삼위일체 교리라고 믿었다(참고: <교회교리학> 제1권, 제1장 참고). 그래서 슐라이어마허가 그의 조직신학 저서인 '기독교신앙'의 맨끝에서 다룬 삼위일체론을 바르트는 일부러 교회교리학 첫 머리에 놓았다. 현대 신교 신학자들이 삼위일체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어 신학 저작물의 맨 앞에 두게 된 것은 바르트 이후였다.

계시관에 있어, 바르트는 하나님의 삼중 말씀으로 알려진 입장을 폈다. 즉 설교(선포), 성경, 계시가 각각 다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연합된 형태로 여겨진다는 것. 이 3중 형태론도 삼위일체에서 유추한 것이다. 설교는 우리가 하는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향대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로워서, 교회에 의해 통제되거나 소유될 성질이 아니라고 그는 썼다(이상 <교회교리학> 제1권 1장 참조). 또 기독교의 하나님은 스스로가 자기 지식의 대상이시고, 성경 계시는 인간 자신이 직관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신이신 하나님이 인류에게 '자기노출'을 하신 것이라고 믿었다.

선택교리: 바르트 교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논란의 여지가 큰(controversial)" 부분이 곧 선택교리이다(<교회교리학> 2권 2장 참조). 바르트 신학은, 구원받든 저주받든 하나님의 신적인 뜻과 목적에 따라 선택하셨다고 하는 발상을 거부한다. 그는 또 하나님이 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안하셨나를 알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선택교리는 영원히 감춰진 신의(神意) 개념에 대한 거부가 포함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중심적 방법론을 유지하면서, 인간의 구원과 심판을 추상적인 절대 신의로 돌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보다 하나님의 일부를 더 최종적, 결정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것이라고 논증한다. 바르트에게 있어 하나님의 절대 신의란, 곧 예수 그리스도 개인 속에 나타내신 인류를 위한 은혜로운 결정이다.

초기 개혁주의 전통처럼 바르트 역시 이중예정 입장을 유지하나 예수 자신을 신적인 선택과 영벌의 대상으로 삼으며, 예수는 하나님의 인간 선택과 인간 죄에 대한 거부를 모두 체현하셨다(embodied)고 그는 본다. 일각에서는 이를 어거스틴-칼뱅 신학중 개인 예정론의 한 진보단계로 보기도 하지만, 브룬너 같은 사람은 바르트의 견해를 '소프트한 보편구원론'으로서 어거스틴-칼뱅 노선을 벗어난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속론: 바르트의 객관적 대속론은 그가 캔터베리 안셀름의 대속론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발전해 갔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에서, 영예를 앗기신 하나님은 빼앗은 자들을 벌하셔야 한다는 안셀름(라틴어 안셀무스)의 개념을 지지했다. <교회교리서>(I/2)에서는 안셀름의 쿠르 데우스 호모(Cur Deus Hmo) 즉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나'의 만족대속론을 지지하여 성육신의 신적 자유를 옹호했다. 바르트는 안셀름의 대속론이 하나님의 자유와 그리스도 성육신의 필요성을 다 함께 보존한다고 봤다. 이런 안셀름 지지 입장은 II/1에서도 지속됐다. 그는 인간의 죄는 신적인 용서의 자비로운 행동만으로는 제거될 수 없다는 안셀름 적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IV/1에서는 안셀름적 견해에서 벗어난다. 대속론에 대한 과(過, over) 그리스도화를 통해 그의 객관적 대속론을 완성했다. 안셀름이 하나님의 의지의 신성과 자유를 탄탄히 구축한 곳에다 대신 하나님의 자비의 필요성을 채움으로써 종결한 것. 바르트의 견해로는, 하나님의 자비가 늘 주도하는 데서, 그 분의 자비가 두드러지게 곧 하나님의 의와 동일시됐다.

바르트는 기존 죄관과 구원관이 엄격한 칼뱅주의 사고에 영향을 받아 때때로 인류의 대다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부했으니 심판은 당연히 숙명으로 다가온다는 식의 예정론으로 '오도'됐다고 생각했다. 바르트의 구원관은 기본적으로는 기독론 중심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모든 인류와 화해하셨으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은 이미 선택받았고 의로워졌다는 주장을 그는 했다. 비록 대 놓고 기독교 보편론을 편 것은 아니나, 엄격히 말해 바르트의 견해는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두를 위한 것임을 크리스천들이 은혜의 문제로 희망해야 옳다는 것이었다.

다수의 후기 학자들은 이러한 바르트가, 심판은 절대적으로 다수 또는 대다수의 인류에게 미칠 것이라는 신교적 기독교의 보수적 흐름을 거슬러 가며 "현저히 전통신학을 벗어났다"고들 보고 있다.*9)

마리아 관: 바르트는 대다수의 후기 신교 신학자들과는 다른 마리아관을 펼쳤다. 바르트의 견해는 로마 가톨릭 성모관과 거의 일치하지만, 단지 마리아 흠숭만은 반대했다. 그는 마리아를 '신모'(神母, 그리스어 Theotocos, 라틴어 Dei Genetrix, Deipara)로 굳게 믿었고, 마리아를 통해 예수는 인류에 속하게 됐고, 예수를 통해 마리아가 신모가 됐다고 봤다. 이 같은 견해는 일부 개혁가들과 닮은 점들이다. 루터와 칼뱅, 츠빙을리 등이 마리아의 신모설과 신성, 영원한 처녀성 등을 믿었다. 이 점에 대해 후기 학자들은 개혁가들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바르트와 여타 입장

바르트 신학은 독일 신교권의 자유주의를 거부한 것이었지만, 고백론자들과 근본주의 그룹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의 말씀 교리는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인데도, 성경이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일치하게 정확하다는 논증을 편 위에다 나머지 신학적 바탕을 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자와 근본주의자들이 다 함께 바르트를 '신정통주의자'라고 부르게 된 주된 이유는 그가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신학적 진리와 역사적 진리는 구분해야 한다고 봤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을 신학 바탕으로 삼는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 아닌 딴 바탕을 이용하는 셈"이라고 응수했다. 또한 성경의 정확성과 가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오직 성육신한 말씀이신 예수님의 참 증인이 되려는 의미로서만 제대로 뜰 수 있다고 봤다.

바르트가 본 대로, 슐라이어마허와 헤겔이 주도한 19세기 자유주의는 주로 인간 사고의 신격화가 문제였다. 특정 철학개념이 거짓 하나님이 된 결과, 신학이 인간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포로가 됐다고 그는 봤다. 바르트 신학이 거듭 거듭 강조한 것은 어떤 종류의 인간적 개념도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하다고 여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관점에서는, 성경도 인간 언어로 쓰여진 것이기에 유일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와 견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는, 어떤 의미에서 이원론적 견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자유와 사랑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손길을 뻗치셔야 한다는 견지에서, 인간언어와 인간 개념으로 자신을 진정 드러내신다고 그는 봤다. 바로 이런 바탕 위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성경과 교회의 설교 · 전파 내용에 현존 · 임재해 계신다는 스위스 개혁교회의 16세기 헬베틱 신앙고백의 입장에 동조했다.

바르트는 누누히 자신은 "반철학적이 아니다"면서도 신학과 철학을 연계시키려는 어떤 시도에도 반대했다. 그의 어프로치는 사도적 어프로치에 반대되는 의미로, 그리스도 중심적, 케뤼그마적이었다고 요약된다.

그는 특히 변증학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로마서 주석>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복음은 다른 진리들 가운데 한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진리에 대하여 의문부호를 단다. 복음은 문이 아닌 경첩이다. ... 복음의 승리에 관한 초조감-즉 기독교변증학-은 무의미하다. 이유는 복음은 세상을 정복해버린 승리이기 때문이다. ... 그것(복음)은 책임감을 지닌 대표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복음전파를 받는 사람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책임이 복음(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양쪽 모두를 위한 옹호자이다. ...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 참으로, 그 분이 하나님이 아니셨더면, 우리에 대해 부끄러우셨으리라. 그럼에도 우리는 그 분을 부끄러워 할 수가 없다." 바르트는 현대 기독교 윤리학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이 방면에서 스탠리 하워워스, 존 하워드 요더, 자크 엘륄, 올리버 오도너번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칼뱅과 바르트

1922년 여름, 젊은 바르트는 칼뱅 신학 과목을 하나 맡아 가르쳤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칼뱅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몰입했다. 따로 한 과목 더 가르치기로 한 히브리서를 취소하면서까지. 그는 칼뱅 신학에서 발견되는 이상한 힘에 압도됐다. 그는 그 놀라움을 자기 절친인 변증신학자, 에두와르트 투르나이젠에게 이런 식으로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칼뱅은 하나의 백내장이고 원시림이요, 악령 같은 힘이며, 히말라야에서 직접 내려온 그 무엇, 절대 중국적인, 이상한 신비적 존재라네. 나는 이 현상을 적절히 흡입할 도구-빨아들임용 컵-조차 완전히 결핍이야. ... 난 기꺼이 그리고 적절히, 자신을 내려놓고 나의 여생을 칼뱅과만 보낼 수 있어."(1922년 6월 22일 바르트가 투르나이젠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칼뱅에게 공감하거나 그렇지 못한 부분들로 엇갈렸다.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과의 관계

앞으로 이 시리즈가 다룰 주된 이슈이다. 폰 키르쉬바움 여인은 30여년이라는 장기간동안 바르트의 비서 겸 신학 조력자로 지냈다. 바르트가 1924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당시 자신은 이미 결혼생활 12년차였다. 그런데도 1929년 바르트의 열망을 따라, 폰 키르쉬바움이 바르트 아내 넬리와 5명의 자녀의 가정과 삶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바르트 신학을 섭렵한 전문가로, 프린스턴 신대원 바르트 연구소(CBS) 소장을 역임한(1997-2001년) 조지 헌싱어 교수는 바르트에 대한 폰 키르쉬바움의 역할과 영향을 다음과 같이 간추린다: "그(바르트)의 독특한 제자, 비평가, 연구자, 조언자, 동역자, 동료, 조력자, 대변인, 절친이었던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은 그에게 없어선 안 되는 존재였다. 그녀 없이 바르트는 바르트일 수 없었고, 그의 저작도 그랬다.“

   
▲ 칼 바르트와 폰 키르쉬바움. 30년간의 긴 세월을 함께 했다. ⓒKath.ch

물론 둘의 관계엔 어려움이 따랐다. 바르트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바르트의 그런 행동을 불쾌해 했다. 넬리가 집안과 자녀를 돌보는 동안 바르트는 폰 키르쉬바움과 아카데믹한 관계를 유지했다. 페미니스트로 드류대학교의 신학사서인 수잰 셀링어 부교수는 "바르트와 폰 키르쉬바움의 문제에 대한 리얼한 반응의 하나는 분노일 것"이라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바르트 저작에 대한 폰 키르쉬바움의 기여도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바르트는 <교회교리학> 제3권 서문에서 이러한 폰 키르쉬바움의 도움을 예찬했다.

지난 2008년 바르트 유족들은 바르트와 키르쉬바움이 1925-1935년의 10년 어간에, "이들 두 인간 사이에 깊고 진한, 압도하는 사랑"을 나눈 내용을 담은 서신들을 공개했다. 2016년 독일의 본회퍼 전기 · 저작 전문가인 크리스티아네 티츠 교수(취리히대학교, 신학)가 2000, 2008년에 공개된 편지에 근거하여 바르트와 폰 키르쉬바움, 넬리 바르트 사이의 40여년에 걸친 복잡한 삼각관계를 심층분석해 미국종교학회(AAR)에서 발표한 데 이어 2017년 여름 프린스턴 신대원 학술지 '오늘의 신학'(TT)에 논문 형식으로 실었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 수많은 바르트 찬반 학자들이 티츠의 바르트 분석에 대한 견해와 나름의 비평을 내놓고 있다. 이 시리즈는 이런 이슈에 대한 교계 인사들의 다양한 반응과 비평들을 객관적으로 전하는 것이다.    < 계 속 >
 

각주)-------------

*1) 글쓴이가 임의로 갖다 붙인 용어가 아니라, 서구교계에서 세 사람에 관하여 이미 1990년대부터 이런 표현을 쓰고 있음.
예: Suzanne Selinger, Charlotte Von Kirschbaum and Karl Barth: A Study in Biography and the History of Theology, 180.
다음 글의 네 번째 제목을 보기 바람. https://postbarthian.com/2017/10/09/bright-bleak-constellation-karl-barth-nelly-barth-charlotte-von-kirschbaum/

*2) 구글 검색 결과 관련 글과 사이트가 현재 197,000개를 넘어섰음. 그러나 한국교계나 사회엔 둘에 관한 구체적인 관련 비평이 여태도 거의 전무함.

*3) 이 용어는 본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측이 만들어낸 말이고 바르트 자신이 싫어했지만, 현재는 폭 넓게 쓰이고 있다.

*4) 예를 들면 박순경, 김재진, 김명용 같은 학자들이다.

*5) 현재 인터넷상에서 당장 확인할 수 있는 현상임.

*6) 다니엘서 5:25 참조.

*7) 개빈 오틀런드가 그런 평가를 했다. “Wholly Other or Wholly Given Over: What Van Til Missed in his Criticism of Barth" Presbyterion 35.1 (2009): 35-52.

*8) 미완 저서인 <교회교리학>은 칼뱅의 <기독교강요>의 분량의 9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약 2배 분량이나 되는 대작이다.

*9) 바르트는 흔히 보편구원론(Universalism)을 믿었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그러나 바르트 자신은 보편구원 필수론이 "하나님의 자유를 몰아냈다"며, 그런 주제로 (찬/반) 논란을 하는 것은 "교회의 임무 밖"이라고 주장했다(<교회교리학> 제2권 2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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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신정통주의' 최고 신학자 칼 바르트 비평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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