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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르트의 첫 사랑과 둘째 사랑… 불행한 결혼
20세기 '신정통주의' 최고 신학자 칼 바르트 비평
2017년 12월 08일 (금) 11:31:17 김정언 기자 skm01_@daum.net

<교회와신앙> : 김정언 기자 】 앞서 언급한 대로,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 여인은 괴팅엔에서 바르트를 처음 만날 무렵, 독일 적십자 간호사였다. 그런데 둘의 관계가 진척되면서, 바르트의 권유와 페스탈로치의 재정적 도움으로 뮌헨의 비서학교에 다니게 되자, 샬로테는 간호사직을 떠나 뉘른베르크의 산업지대에서 사회노동자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1926년 후반에는 이미 실제로 바르트의 신학 보조요원으로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음을 본다. 비록 바르트가 그런 용어를 쓰고 있지는 않더라도 말이다.1)

당시 둘 사이에 편지도 오갔다. 그즈음 바르트는 그녀가 자신의 '원고비평가'로서 제공해 주는 도움에 관하여 친구 투르나이젠에게 보낸 편지에다 언급했다.


바르트의 첫 사랑과 둘째 사랑

셀린저에 따르면, 1925-1926년은 바르트와 폰 키르쉬바움에게 특별한 기간이었다. 둘이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10월부터 이듬해 3월초까지 바르트는 집에서 나와 있었고, 괴팅엔에서 머물던 집의 매매를 마무리하고 뮌스터에 새 집을 마련해 곧 가족과 합류할 참이었다.

   
▲ 젊은 시절의 바르트. 뢰지 뮝어라는 아가씨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결혼에 실패했다. ⓒEC

둘은 두 가지를 조건으로 서로의 상황에 직접 부딪고 부대끼곤 했다. "바르트의 결혼은 깨지지 않은 채 이어질 것이로되, 샬로테가 바르트의 애인 ‧ 정부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였다."2) 이에 대한 바르트의 결정은 물론 극난했다.

그런데 셀린저는 여기서 매우 흥미롭게도 바르트의 젊은 시절을 떠올려 준다. 바르트가 베른에서 공부하고 있던 스물 한 살적인 1907년 여름. '뢰지 뮝어'라는 젊은 여성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3) 바르트가 보기에 뮝어는 미인인 데다 다정했고, 온전한 아내와 어머니가 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판단돼, 그녀에게 자기처럼 신학을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있었다.

바르트와 뮝어는 둘 다 서로 결혼하리라는 절대 확신 같은 것을 갖고 있었으나 바르트의 부모가 이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바르트는 이를 묵묵히 수용했다.14) 마지막 만남 때, 둘은 그동안 주고 받은 연애편지를 모두 불살랐다. 안타까운 결말이었다. 

뮝어 양과 헤어진 뒤 바르트는 우연히 단 한 번 다시 그녀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1915년 즈음 베른의 한 교회당에서 바르트가 설교하는 모습을 그녀가 지켜본 것. 불행히도 뮝어는 1925년 백혈병으로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세상을 떴고, 비보를 전해 들은 젊은 바르트는 그날 온종일 서재에서 슬퍼하며 지냈다. 바르트는 상실한 이 첫 사랑을 그냥은 극복할 길이 없어, 뮝어의 사진 한 장을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


불행한 결혼과 되찾은 '기쁨'

투르나이젠과 함께 바르트의 제자 겸 연구도우미로 바르트 자서전을 쓴 바 있는, 에르하르트 부쉬는 지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강 이런 얘기들을 들려 준다.5)  1913년 바르트는 자신의 교인인 여섯 살 손아래의 바이올리니스트, 넬리 호프만과 결혼했으나, (셀린저의 표현으로는) "거의 처음부터 트러블로 점철된 불행한 결혼"이었다.

칼의 결혼을 주도한 사람은 바로 그의 어머니, 안나. 그녀와 며느리 넬리는 여러 모로 공통점이 있어, 바르트가 한 번은 "두 사람이 모든 게 너무 닮았다"고 할 정도였다. 둘 다 말을 거침없이 했고 언동의 윤곽이 뚜렷하고 지배주의적이어서, 사람들이 정말 대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더구나 넬리는 주방 일꾼들을 너무나 거칠게 다루고 독단적이어서 수시로 일꾼이 바뀌었다. 주방 직원들은 그녀를 참을 수 없는 존재로 봤다.

   
▲ 바르트 부부와 자식들과의 한 때. "처음부터 불행한 결혼"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PSE

넬리는 남편 칼도 그런 식으로 대했다. 이래선지 부쉬는 '안나-넬리 형'이라는 용어를 쓰곤 해왔다. (페미니스트인) 저자 셀린저가 보기에, 바르트는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신랄한 표현에서 언뜻언뜻 두 여성(안나와 넬리)을 염두에 두는 듯 보이곤 한단다.

반면 샬로테는 뮝어나 넬리를 "계승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바르트의 외로움을 종식시킨 여성이었다. 외로움(Einsamkeit·아인잠카이트)은 바르트의 키워드의 하나였는데, 그는 외로움을 지옥과 동일시했다. 바르트의 생애에 비춰볼 때, 이것은 역설적이다. 그는 여럿과의 오랜 우정 관계를 지속한 놀라운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폰 키르쉬바움은 다정다감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늘 친절했다.

바르트의 삶은 그녀가 온 뒤로 극적으로 변화됐다. 1929년 4월에 베르클리의 페스탈로치 별장에서 바르트가 친구 투르나이젠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런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 베르클리 주변에 만발한 꽃송이 이야기를 하는 등 한 마디로 봄 같은 기쁨에 찬 삶이었다.


중간 이야기

여기서 잠깐. 독자들도 느끼겠지만, 지난 세월동안 바르트와 폰 키르쉬바움의 친밀 관계에 관한 정보의 폭이 깊고 넓어질수록, 관련 저서와 글들의 농도도 높아지는 일종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예를 들면, 초기의 비평 글보다는 나중으로 올수록 저자의 평도(評度)가 강해지든가, 때로는 저자의 의도와는 거의 무관하게, 독자들과 제3 평자들의 근접도 역시 대담해지는 점들이 그렇다. 또, 어떻게 된 건지 저자들의 기술상, 둘의 관계가 '약 30년'에서 '35년 이상'으로, 심지어 '50년까지'로 이어졌다고 숫자상으로도 더 해 가는 수위(?)를 보게 된다.

   
▲ 아기 바르트와 어머니 안나. ⓒPB

레나테 쾨블러는 그녀의 책 제목처럼 주로 폰 키르쉬바움의 관점 쪽에서 하나의 여성 전기로서 어프로치하면서, 두 사람을 사뭇 온정적인 자세로 묘사하고 있다. 쾨블러는 프랑크푸르트와 마르부르크, 캘리포니아 버클리 등에서 개신교 신학을 공부했다. 1992-2003년 프랑크푸르트 근교 에겔스바흐의 기독교 공동체의 목회자였다가 현재는 오덴발트 에르바흐에서 신학교육 자문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쾨블러는 독일인인데도 과거 폰 키르쉬바움의 이름도 들은 적도 없었다가, 마르부르크 대학교 강사로 초청받은 한스 프롤링호이어 박사에게 세미나 논문으로 개신교 현대사 속의 여성활동에 관한 논문을 쓰겠다며 조언을 부탁한 것이 이 전기 저술의 동기가 됐다.

그녀의 책에는 바르트의 며느리인 로제 마리 바르트의 서언도 달려 있는데, 훗날 그녀가 '롤로 숙모'라고 불렀던 폰 키르쉬바움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이 넘친다는 느낌이 든다.6)바젤 교회의 투르나이젠은 결혼을 앞둔 로제에게 어른들의 책임인 그들만의 상황과 관심사에 개입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으라고 충고했었다. 그 상황은 바로 마마 바르트, 파파 바르트와 한 지붕 아래 살 롤로 숙모에 관한 것이었다. 훗날 롤로는 로제에게 "너도 알지만, 그(바르트)가 날 자기한테로 불렀어."라고 말했다.7)

로제 바르트는 이 서언에서 이렇게 썼다.

"바젤에서, 특히 각처에서 가십을 하는 이들은 알빈링(바르트의 바젤 저택)집에 관해 아는 게 적을수록 말할 거리는 더 찾았다. 그들 중 아무도 그 집 지붕 아래 어떤 괴로움이 있는지를 전혀 모르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신학 작업은 즐거웠고 그래서 그 일에 어떤 정도로 관여됐든, 셋이서 함께 고통과 위험을 감수해나갔다."8)

한편 페미니스트인 수잰 셀린저는 둘의 관계를 조망하되,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바르트에 대해 훨씬 더 비평의 강도를 더한 쪽이다. 셀린저는 쾨블러에게서 자료수집 등 방법론을 다대하게 배운 것 같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런데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를 갖고 봤기 때문에, 그만큼 특이하면서도 전체 독자를 위한 보편성은 그만큼 결여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독자가 다 페미니스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 바르트 일가의 한 때. 왼쪽서 두 번째가 페터 바르트, 마르쿠스(장남), 폰 키르쉬바움, 한스 야콥, 칼 바르트, 프란치스카, 크리스토퍼, 마티아스, 넬리.

그런가 하면, 시대가 시대인지라 현재까지 가장 많이 공개된 서신 자료로부터 가장 많은 정보를 거머쥔, 가장 최신 논평의 티츠 교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분석 ‧ 제시하면서 자신은 시쳇말로 '내가 뭐라고' 식으로 거의 아무런 주관적 평가도 가하지 않는, "투명한"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반대급부적으로 그녀의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작용은 가장 지대하고 작용폭도 가장 넓다.

과연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긍정적으로? 아니면 부정적으로? 아니면 그냥 자연스러운 역사적인 과정으로만 봐야 할까. 아니 그보다는 어차피 알게 될 것을 거의 다 알고 난 이제, 더 깊이 알아볼 것이 없는 이상, 독자들 각자가 바르트에 대한 느낌과 태도, 더 나아가 입장을 달리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각주)--------
1) 쾨블러, In the Shadow (바르트의 그림자), 31, 143. 셀린저는 바르트와 폰 키르쉬바움과의 관계에 관한 가장 많은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쾨블러를 상당량 의존하면서. 시리즈 본 회도 성격상 자연히, 둘을 무겁게 의존하게 된다.
2) 'Mistress'라는 표현은 셀린저가 (자료수집차) 바르트의 친구, 에버하르트 부쉬와의 사이의 개인적 교신에서 나온 것인지, 부쉬의 표현이었는지(셀린저의 번역? 포함) 또는 저자인 셀린저 자신의 것인지 겉으로는 알기 어렵다.
3) 매우 흥미로운 이 극비(?) 스토리 역시, 셀린저-부쉬 통신 후 기록에서 처음(?) 공개되는 듯. 셀린저, 같은 책 5쪽 및 해당 각주(18~20) 참조. 물론 부쉬가 주변 지인들과 가끔 나눈 이야기였겠지만. 부쉬의 바르트 관련 도서도 따로 있다.
4) 부모가 왜 뮝어 양을 거부했는지 깊이는 알 수 없으나, 셀린저에 따르면 뮝어의 가정 배경('리브럴한' 가내제조업)이 썩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둘의 결혼에 대한 절대확신을 갖고 있던 바르트가 순순히 부모에게 승복한 것도 이 점을 시사한다.
5) 아마도 이런 얘기들 때문에 한 켠으로, 독자들은 어떤 의미로 바르트의 입장을 '이해' 또는 동정할 지도 모르지만.
6) 쾨블러, 16 참조.
7) 같은 책, 같은 쪽.
8) 같은 책,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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