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신앙> 이신성 기자】   서양 고대철학이 만물의 근원(<아르케>)을 찾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근대철학은 인간의 인식의 근원과 방식을 고찰하고 설명하는 인식론(epistemology)에 초점을 맞췄다. 근대철학의 세 흐름은 이성을 신뢰하는 합리론(rationalism), 감각적 경험을 강조하는 경험론(empiricism), 이성과 경험을 종합하려는 관념론(idealism)이다.

합리론은 인간 안에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본유 관념(생득 관념)이 있다고 주장했다. 경험론은 인간의 경험이 모든 인식의 근거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두 가지 철학 사조는 각각 인식의 근거로 이성과 경험을 내세워 그 둘 사이를 중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합리론과 경험론 사이의 중재가 불가능할 것 같았던 분위기에서 인식에 있어서 이성과 경험 모두 필요하다는 철학자가 나타났으니 바로 칸트이다. 그는 인간 안에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개념)이 내재되어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 밖에 있는 대상을 경험(직관)할 때에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칸트와 더불어 관념론이 시작됐으며, 그의 철학을 이어 받은 피히테와 셸링, 그리고 헤겔 모두 독일 철학자였기 때문에 보통 독일 관념론이라고 부른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리투아니아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칼리닌그라드’의 과거 명칭으로 러시아식 약칭으로는 ‘쿄니그’라고 한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철학 교수였는데, 위대한 철학자가 대학 교수가 된 최초의 경우로 알려져 있다. 칸트 이후 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대학 교수였다.

헤겔은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으며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나중에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뉘른베르크 김나지움 교장과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 대학교 철학 교수로 있었다.

이러한 쾨니히스베르크와 슈투트가르트, 튀빙엔, 예나, 뉘른베르크,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이 근대 서양철학의 올레길과 둘레길 아홉 번째 코스이다.
 

비판과 선험 철학, 칸트

▲ 칸트, 위키백과 갈무리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철학을 한편에서는 비판 철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선험 철학이라고 부른다. 비판 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의 3대 주저인 <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에서 ‘비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전의 철학들을 비판적으로 연구한다는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선험 철학이라고 명명하는 이유는 그가 형이상학적인 모든 판단들은 ‘선천적 종합판단’의 형식을 취한다고 보았고 경험에 앞서는 순수 이성의 기능을 ‘선험적(transzendental)’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한국 철학계에서는 칸트가 사용한 독일어 <트란스첸덴탈>의 번역 논쟁이 심각하게 전개된 적이 있다(자세한 내용은 한겨레신문의 관련 기사들을 참조하길 바란다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50905.html?_ga=2.147792439.1246507414.1666645134-1719318849.1580320584 ).

<순수이성비판>은 ‘나는 무엇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제시하는 저서로, 인식론이다. <실천이성비판>은 ‘나는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데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판단력비판>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나’에 대한 질문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미학으로 분류된다.

위에서 언급했듯 근대 철학은 인식론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순수이성비판>을 중심으로 칸트의 인식론을 살펴보는데 집중한다.

<순수이성비판>의 출판년도(1781년)를 보면 칸트가 57세 때 발간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사상이 무르익고 정교화됐을 때 책으로 출간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교하고 고차원적인 사상을 담고 있던 <순수이성비판>을 사람들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대학가에서는 칸트의 철학을 버클리의 관념론과 유사하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출간 2년 후 주요 내용을 보다 이해하기 쉬운 말로 정리해 <학문으로 등장할 수 있는 모든 미래의 형이상학에 대한 서설>이라는 얇은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을 보통 ‘서설’ 혹은 <프로레고메나>(Prolegomena)라고 부르는데, <순수이성비판>의 요약본 혹은 입문서로 알려져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으로 나눈 후 ‘선천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묻는다.

분석판단이란 주어 개념이 술어 개념을 포함하는 판단이다. ‘얼음은 차갑다’라는 말에서 ‘얼음’ 안에 ‘차갑다’라는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에 분석판단이다. 다만 이 말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 얼음은 어디서 나왔으며, 얼음이 된 물은 계곡물인지 우물물인지 수돗물인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종합판단이란 주어 개념 안에 술어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판단이다. 그에 따르면 술어 개념이 주어 개념에 부가적인 정보를 덧붙여준다. ‘모든 물체는 무게가 있다’라는 명제에서 ‘물체’ 개념이 ‘무게가 있다’라는 술어를 반드시 포함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확인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

이렇듯 종합판단은 확인하기 위해서 경험이라는 수단이 수반되어야 한다. 칸트의 ‘선천적 종합판단’은 이러한 경험이 없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감각적으로만 인식한다면 그러한 인식은 보편성이나 필연성을 가질 수 없다. 반면에 경험 없이 생득 관념으로만 인식된다면 그러한 인식은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칸트는 인간에게는 경험이 필요하지 않은 선천적인 인식의 틀이 존재한다고 하면서 이것을 ‘선천적 종합판단’이라고 주장했다.

칸트의 인식론의 특징은 인식의 틀이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면, 시각능력을 가진 눈, 청각능력을 가진 귀, 후각능력을 가진 코 등의 신체 기관처럼, 인식능력을 가진 무엇인가가 인간에게 있다는 뜻이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능력인 ‘감성’(sensibility), 그렇게 받아들인 자료를 인식 정보로 구성하는 ‘오성’(‘지성’, understanding), 감성을 넘어선 것에 대해 사유하는 ‘이성’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칸트에 따르면 선험적 지성 형식인 범주들을 통해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감성 형식 안에서 포착된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아무튼 그는 감성의 직관 능력(포착)과 오성의 개념 능력(범주)이 우리 인식의 원천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경험과 이성의 하나가 되어야 우리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뜻에서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Thoughts without content are empty, intuitions without concepts are blind). 직관 없는 개념은 합리론을, 개념 없는 직관은 경험론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칸트의 관념론 철학은 이성과 경험을 각각 강조했던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칸트는 인간은 직관과 개념을 통해서 인식된 대상을 알 뿐, ‘물 자체’(Ding an sich)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인간 인식의 한계를 지적했다. 경험과 이성으로만으로는 인식하기 어려운 영역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 헤겔

▲ 헤겔, 다음백과 갈무리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독일 남부의 ‘뷔르템베르크’ 궁전의 하급 공무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튀빙엔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나중에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개인 강사 및 신문 편집인을 거쳐 김나지움 교장과 대학교 철학 교수를 역임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했다. 다만 인간은 물 자체(Ding an sich)를 알 수 없다며 이성의 한계를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영혼불멸’이나 ‘세계종말’과 같은 개념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은 감성과 오성(지성)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그런 것은 경험하거나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은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갖는다. 이것이 문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헤겔이 나섰다. 헤겔은 칸트의 감성과 오성(지성), 이성을 정신의 발전 단계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의식, 자기의식, 이성, 정신, 종교, 절대지의 순서로 위계질서를 만들었다. 그는 ‘의식’에서부터 시작해서 ‘절대지’에 이르는 과정으로서의 정신의 발전사를 다룬다. 그의 <정신현상학>은 이러한 정신의 발전사에 대한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정신은 결국 절대지에 도달한다. 이때 정신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자연과 역사 속에서 상이한 단계를 거쳐 전개된 운동이 자기 자신의 완성 과정과 실현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서 ‘절대정신’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헤겔의 절대정신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보편적 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몸이 발달하듯 인간의 이성 역시 성장하며 발달한다. 이렇게 성장하며 발달하는 이성이 결국 역사를 이끌어가게 된다. 헤겔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이성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봤다. 헤겔이 철학에 있어서 역사를 접목시킨 것을 그의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하곤 한다.

헤겔은 정신의 발전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했다. 헤겔의 변증법은 모든 것이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를 가지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별히 그는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변화한다고 봤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나 합리론에서 언급한 실체처럼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했다. 변증법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의 변화 과정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하는 데 기본적인 법칙이 있다. 첫째, 대립과 투쟁의 법칙이다. 이러한 대립과 투쟁을 통해서 하나는 다른 하나를 극복하고 기존의 상태를 뛰어넘어 변화하게 된다. 둘째, 양질 전환의 법칙이다. 이것은 양적 변화가 축적되면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셋째, 부정의 법칙이다. 사물은 부정을 통해 변화한다는 것이다. 변화라는 것은 지금의 상태를 부정하는 것이다. 과거의 모습을 부정하기 때문에 새로운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 과정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과정을 헤겔은 정반합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정(正)은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반(反)은 그 어떤 것(정)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합(合)은 정과 반을 수용하고 극복하여 나타나는 새로운 개념이다. 말 그대로 일종의 통합이고 종합이다. 이러한 정반합의 변증법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오래되고 부정적인 것을 버리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세상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헤겔은 이러한 법칙과 과정을 통해 이 세상의 역사는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헤겔은 역사를 절대정신의 자기 실현의 과정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위대한 정신을 가진 영웅이 역사 발전을 실현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나폴레옹을 보고 헤겔이 ‘절대정신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성의 한계와 역사의 진보 가운데 크리스천은?

▲ 김상봉, <자기의식과 존재사유>(한길사, 2003)

서양 근대철학은 인식에 있어서 이성의 능력만을 주장한 합리론(정)과 그에 반대로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경험론(반),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요소를 종합한 관념론(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성만을 주장했던 합리론과 경험을 강조했던 경험론을 종합한 독일 관념론은 어찌보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론적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철학에 대한 평가가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관형은 “독일관념론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 입장에 따라 ‘독일정신을 세계정신에 이르게 한 위대한 운동’일 수도 있고, ‘현실에서 좌절한 독일 시민계급의 사변적 소외’일 수도 있다. 근대의 경제적 기초는 영국 산업혁명이, 정치적 기초는 프랑스혁명이, 철학적 기초는 독일관념론이 세웠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현실에서 시민사회를 실현했다면 독일은 현실이 아닌 관념 속에서 실현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고 언급한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 <다시쓰는 서양근대철학사>(오월의봄, 2012), 363쪽).

칸트와 헤겔의 철학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다. 칸트는 인간은 물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며 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주장했다. 이러한 칸트의 주장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혹은 알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지침 혹은 기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이성의 한계를 강조할 때 쉽게 불가지론에 빠지거나 오히려 신비주의에 현혹될 가능성이 크다.

경험과 이성을 종합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한 이성의 한계를 강조한 칸트의 철학과, 변증법적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절대정신을 주장한 헤겔의 철학이 오늘 크리스천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교회 안에서 신앙적 경험만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고, 맹목적 신앙보다 합리적 이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칸트의 철학은 화해와 조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며 완성하는 정신의 모습을 강조한 헤겔의 철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며 세계를 완성해 가시는 것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데 큰 틀을 제공한다. 특별히 헤겔은 ‘정신으로서 하나님’(Gott als Geist)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했는데, 헤겔의 절대정신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이성에 대한 확신은 헤겔에게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끄는 최고의 정신으로까지 격상됐다. 다만 이러한 격상에 걸맞게 과연 이성은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역사를 발전시켰는가 질문하게 된다. 20세기 초반의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생각해 본다면 인간의 이성에 기반한 과학과 기술이 얼마나 악랄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성이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전쟁(정)을 반성함으로써 평화(반)를 생각하며 공생공존의 세계(합)로 나아간다고 헤겔식 변증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추천도서
김상봉, <자기의식과 존재사유>(한길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