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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말씀들
장기자 세상읽기 24/ 한희철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등
2021년 01월 13일 (수) 14:36:15 장운철 기자 kofkings@hanmail.net

<교회와신앙> 장운철 기자】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그분이 한 말은 촌철살인과도 같았다’라는 식으로 사용되곤 한다. 무슨 뜻인가? 한자어 풀이로는 ‘작은 쇠조각이 사람을 죽인다’라는 뜻이다. 다음과 같은 의미로 기억하면 보다 쉬울 듯하다. ‘죽여주는 한 마디’라고 말이다.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로 이해하는 것도 부드럽다.

일상 중에 촌철살인과 같은 말들이 참으로 많다. 옛 인생 선배들이 들려주는 촌철살인과 같은 말씀들을 살펴보자. 그 속에 해학과 풍자가 들어있다. 교훈은 물론 위로와 즐거움도 함께 녹아져 있다. 인생 그 자체다.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한희철, 꽃자리, 2016)에서 정리해 보았다.

   
 

먼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는 무엇일까? 압력밥솥 뚜껑을 막 열었을 때 구름처럼 환하게 퍼져 나오는 밥 냄새, 출근길 커피숍에서 무차별 난사하는 커피향, 숲속을 걸을 때 내 몸에 달라붙는 피톤치드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갓난아기 살 냄새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구수한 청국장을 떠올리며 입맛 다시는 이도 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우리네 선배들은 ‘석 달 가뭄 후, 빗방울에 튕겨져 나오는 흙냄새’라고 했다. 그 냄새 속에는 생명이 들어있다. 가족의 행복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도 스며들어 있다. 그 냄새는 마음으로 맡는 것이다. 농사를 천직으로 알았던 우리네 옛선배들의 마음 말이다.

‘반보기’라는 말이 있다. 시집 간 딸이 친정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시댁과 친정 중간 지역에서 잠깐 상봉하는 것을 일컫는다. 한 번 시집가면 쉽사리 친정에 올 수 없었던 과거의 슬픈 이야기다. 시댁 입장에서는 일거리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고, 또 며느리 친정 갈 때 해 주어야 할 ‘정받이’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라 생각했다. 며느리는 반보기라도 허락받으면 밤잠을 못 잘 정도로 설레며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유안진 씨의 <딸아 딸아 연지 딸아>(문학동네, 2003)에 반보기의 옛 민요 가사가 나온다. 그 당시 딸 시집 보낸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살펴보자.

하도하도 보고 저워/ 반보기를 허락받아
이내 몸이 절반 길을 가고/ 친정 어메 절반을 오시어
새중간의 복바위에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엄마 엄마 울 엄마야/ 날 보내고 어이 살았노
딸아 딸아 연지 딸아
너를 삶아 먹을 것을/ 너를 끓여 먹을 것을
그랬더면 니 꼬라지/ 이리 험악하지는 않지
밤 못 먹고 살았구나/ 잠 못 자고 살았구나
금옥 같던 두 손이사/ 갈구리가 되었구나
구실(구슬) 같은 두 볼이사/ 돌짝밭이 되었구나
금쪽 같은 정내 딸이/ 부엌 간지(강아지) 다 되었네
모지도다 모지도다/ 그 댁 인심 모지도다
안사돈에 바깥사돈/ 그 댁 식구 그 댁 친척
그 댁 일가 일솔들이/ 하나같이 모지도다
자게들도 시집 살았거든/ 어이 이리 부렸는고
자게네도 딸이거든/ 남의 딸을 이 꼴 했노

후반부에 ‘살아내라 살아내라 ... 살아야 한데이 살아야 한데이’에 와서는 마음 한 구석에서 ‘찡~’함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제 문제 형식으로 촌철살인의 옛 말들을 살펴보자. 이 글을 읽는 독자께서는 한 번 가늠해보시기를 바란다.

‘어머니는 살아서는 서푼이고, 죽어서는 (   )이다’의 괄호 속 단어는 무엇일까? ‘만냥’이다. 어머니의 은혜를 잘 모르고 있다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

‘게으른 머슴은 (   )이 바쁘다’의 괄호 속 단어는 ‘저녁나절’이다. 할 일을 제 시간에 마쳐야 한다는 말이다.

‘고운 사람 미운 데 없고, 미운 사람 (   ) 데 없다’에서는 ‘고운’이다. 사람은 보이는 대로 보아야 하는데,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뜻이다. 한 번 곱다고 여긴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보고, 반대로 한 번 밉다고 여긴 사람은 계속 그렇게만 대하게 된다는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좋은 목수한테는 버리는 (   )가 없다’에서 괄호는 ‘나무’다. ‘좋은 농부는 땅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과 의미가 상통한다.

‘속 검은 사람일수록, (   ) 입는다’의 정답은 ‘두루마기’이다. 겉모양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말이 고우면 비지 사러왔다가 (   ) 산다’의 괄호는 무엇일까? ‘두부’다. 비지는 두부를 만들도 남은 찌꺼기다. 당연히 값이 저렴하다. 말이 고와야 한다는 옛말의 교훈이다.

‘석달 가는 (  ) 없다’에서는 ‘흉’이다. 흉 없는 사람은 없다. 내 흉에 대한 사람들의 입방아에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말이다. 이 말로 조금은 평안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조는 집에 (  ) 며느리 온다’에서는 ‘자는’이다. 즉, 며느리 탓만 하지 말고, 졸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라는 기가 막힌 훈수다.

‘늙은 (  )가 짖으면 내가 봐야 한다’에서는 ‘개’다. 늙은 개는 힘이 없다. 쓸모없어 보인다. 그러나 늙은 개는 꼭 필요할 때 짖는다. 늙었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말이다.

‘혼인 날 신부 방귀는 (  )다’의 정답은 ‘복방귀’다. 재미있는 말이다. 혼인 날 새색시가 방귀를 뀌면 얼마나 창피하고 무안할까. 우리네 선배들은 그것을 넉넉한 마음으로 덮어주려고 말을 만들어 냈다. ‘복방귀’라고 말이다.

‘흉년 손님은 (  )가 예쁘다’의 답은 무엇일까? 바로 ‘뒷꼭지’다. 흉년, 또는 보릿고개 시절인 봄에 오는 손님은 반갑지 않다. 당연하다. 대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때는 돌아가는 손님이 반가운 일이다. 뒷꼭지는 가는 손님의 뒷모습이다. 사람은 떠날 때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사흘 길 하루 가서 (  ) 눕는다’는 말이 있다. 괄호는 ‘열흘’이다. 인간의 욕심과 미련함을 잘 보여준다. 사흘 길은 사흘에 가는 게 좋다.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  ) 걱정’에서 알맞은 답은 ‘만 가지’다. 잘 생기고, 돈 많은 사람이 꼭 부러움의 대상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그들만의 걱정거리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이러한 촌철살인의은 옛 말들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사람을 이해하며 지혜와 위로는 물론 재미까지 얻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참 기쁨과 지혜와 평안함을 발견할 수 있는 촌철살인과 같은 성경구절들은 무엇이 있을까? 수많은 은혜의 성경말씀들이 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몇 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1. 황금률

‘황금률’이라는 게 있다. 황금과 같이 귀중한 말씀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삶의 원칙을 잘 표현해 주는 촌철살인의 성경 말씀이다. 마 7:12, 눅 6:31 말씀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이러한 인간관계로 살아간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남녀노소, 부자와 가난한 자, 힘 있는 자와 없는 자 상관없이 누구든지 정말 살 맛 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을 해 보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과연 위에서 언급된 ‘대접’에 대한 것일까? 이렇게 보면 고개가 갸우뚱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는 사랑이다’라고 말하고 들어왔다. 기독교의 핵심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요13:34-35 말씀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한다. 이것을 ‘다이아몬드률’이라고 하면 어떨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사랑할 만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할 만한 사람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그 부름으로 제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시는 촌철살인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않을까?
 

2. 요한, 바울, 예수님

세례 요한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아래와 같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

예수님 당시에는 랍비(선생)들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고전1:12)라고 언급한 것도 소위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로 사람들은 구분하여 추종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있었다.

어느 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달려왔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3:26)

무슨 말인가? 요한의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 외에 예수라는 사람도 세례를 준다며 어찌된 일인지 묻는 내용이다. 요한 입장에서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을 빼앗길 수 있는 상황이다. ‘세례라고 하면 내가 정통이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입지를 높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요한은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고백한 말이 바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이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조금 더 흥미롭다.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요3:30, NIV)

해석을 하면 ‘그는 시간이 갈수록 반드시 점점 더 높아져야 하겠고, 나는 그 반대로 반드시 점점 더 낮아져야 한다’는 의미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자세를 설명하는 촌철살인의 성경구절이지 않을까.

사도 바울의 글을 생각하면 무슨 말씀이 떠오르는가?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 27권 중에서 히브리서까지 포함시킨다면 13권을 쓴 위대한 인물이다. 신약 성경 거의 절반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는 주옥 같은 많은 교훈을 남겼다.

고후5:17절 말씀이 가장 먼저 뇌리에 떠올려진다. 청년 때 신앙훈련을 받으며 맨 처음 외웠던 말씀이다. 아래와 같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위 말씀 안에는 사도 바울의 신앙 철학, 조금 유식하게 말하면 ‘바울 신학’이 담겨져 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이다. 사도 바울이 쓴 13권의 신약성경을 하나로 압축하면 바로 위 말씀, ‘그리스도 안에서’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참된 생명이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평안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있으며, 또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위로가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놀라운 성경구절을 암송하며 때때로 묵상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다.

그럼 예수님의 말씀은 어떠한가. 요한이나 사도 바울의 증언들이 사실 모두 예수님으로 인한 것이지 않은가? 예수님의 생명수 같은 말씀 중 어떤 것이 요즘 우리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가?

요26:39절 말씀은 어떨까.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요26:39)

우리는 과학 세상에서 살고 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방식, 실험을 통해 물적 증명이 되어야 믿게 되는 방식으로 사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과학이 우리네 삶을 모두 설명해 줄 수 없다. 오히려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사랑할만한 과학적 이유를 묻는다. 또한 용서해 주어야 할 만한 과학적 이유를 따진다. 그 이유에 합당하지 않으면 사랑도 용서도 하지 않는다. 매우 과학적인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인생살이에 옳은가?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내가 왜 저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이유가 뭡니까?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거부할 능력도 있었다. 십자가를 외면한들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원하는 대로 되기를 구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삶의 상황에서 예수님의 고백을 그대로 따라 해 보면 어떨까.
 

3. 생각

심리학을 이해하는 핵심은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내용이다. 지혜를 얻고 싶은 사람에게 심리학은 ‘너 안에 또 다른 지혜의 너를 찾으라’라고 말한다. 위로 받고 싶은 사람에게 심리학은 또한 ‘너 안에 울고 있는 너 자신을 위로 하라’고 언급한다. 심리학은 ‘나’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벗어나면 심리학이 또한 아니다. 모든 문제는 ‘나’ 자신 안에서 발생되면서 동시에 모든 해결책 또한 ‘나’ 자신 안에 있다는 식이다. 그래서 ‘자아성찰’이 답이다. 자기개발서와 같은 인문학의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된다.

반면 철학은 ‘자신을 떠나라’라고 말한다. 자신을 깊이 생각할수록 함정에 빠지고 만다는 말이다. 탈자아, 무념무상 또는 무아지경도 여기에 해당된다. 자신을 벗어나는 게 참된 자신을 찾아간다는 식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느 길을 가야할까?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생각의 기준점이 된다는 말이다.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대제사장’이다. 우리를 위해 흠 없는 제물되심과 동시에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분을 깊이 생각하라는 의미다. 그 생각 안에 참된 생명이 있으며, 지혜와 용기가 있고, 위로와 평안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분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4. 함께하심

사무엘상을 요즘 큐티(QT)로 묵상하고 있다. 삼상 18장 10-16절까지의 내용을 보자. 죽이려는 목적으로 사울왕이 던진 창을 다윗이 피했다는 내용이다.

이전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사울왕은 하나님을 불신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했다. 아각왕을 생포했으며, 보기 좋은 짐승들을 살려두었다. 그리곤 하나님께 드릴 제사를 위한 일이었다고 핑계를 댔다. 하나님을 슬프게 하면서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상황이다.

그 결과 사울 왕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악령이 들어왔다(삼상16:14). 반면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삼상16:13).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전투에서 다윗이 대승을 하게 된다. 전쟁에서 돌아온 다윗을 향해 백성들이 춤추며 노래하며 환영을 했다. 이때 부른 노랫말이 문제가 되었다. 아래와 같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삼상18:7)

사울 왕의 귀에 그 노랫말이 거슬렸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불안하고 두렵기까지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왕위를 다윗에게 빼앗기겠다는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급기야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로 결단했다. 코 앞에 있는 다윗을 향해 창을 3번이나 던졌다(삼상18:11, 삼상19:10). 그러나 다윗이 모두 피하고 말았다. 어떻게 피할 수 있었을까?

사울 왕이 힘이 약해서일까? 결코 아니다. 그는 평균 사람보다 어깨가 하나 더 있을만큼 키가 크고 준수했다(삼상9:2). 그럼 다윗의 민첩함 때문일까? 아니면 우연이라고 말해야 할까? 모두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이 사건의 핵심 내용이다. 14절은 물론 28절에서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삼상18:14)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키워드(Key word) 중 하나다. 그 함께하심이 이 땅에 임하셨다.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게 하셨다. 그 의미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이다.

우리는 수많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다. 배고프다고, 아프다고, 상처받았다고, 앞길이 막혔다고 등이다. 모든 기도 제목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 바로 ‘함께하심’이다. 이것이 모든 기도제목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촌철살인 같은 하나님의 말씀 중 하나는 바로 ‘내가 너화 함께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41:10말씀을 한 번 더 묵상하면서 마치려고 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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