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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요한 목사 ‘이단적’ 고신 규정
제 68회 총회(2018) 이단대책위원회 보고
2018년 09월 19일 (수) 16:07:40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교회와신앙> 장운철 기자예장고신 제 68회 총회(2018)는 구요한 목사에 대해 ‘이단적’이라고 규정했다. 고신 총회는 구요한 목사의 사상에 대해 “구요한 목사의 성령론에는 잘못된 성경해석, 균형이 깨진 편향된 주장 등의 문제점이 나타난다”며 “오늘날 성행하는 예언과 쓰러짐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공격하며 그런 현상을 성령의 사역으로 무분별하게 옹호하는 그의 활동과 집회는 한국교회에 큰 혼란과 폐해를 불러 올 위험이 있다”고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또한 “무엇보다 정통교회와 신학을 ‘성령을 모독한다’고 정죄함으로써 정통교회를 무너뜨리고 와해시키려는 이단적인 공격성을 보인다는 점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며 “이런 악함에서 속히 돌이키기를 바란다”고 충고했다.

   
▲ 구요한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신문 <글로리아타임즈> 첫 화면

구요한 목사는 인터넷 신문 <글로리아 타임즈>( www.thegloriatimes.org )를 운영하고 있다. 예장고신 총회가 지난 해(2017) 구요한 목사에 대해 1년간 조사한다고 하자, 구요한 목사는 자신이 운용하는 신문에 ‘예장 고신을 불건한 단체로 규정’한다는 적반하장식 주장을 담은 공고문을 올리기도 했다.

구 목사는 이전부터 예장고신, 합신, 합동 등을 기적중지론이라는 사이비 신학을 가르치는 곳이라며 공격을 해왔다. 위 교단들의 신학자인 박형룡, 박윤석, 김의환, 서철원, 심창섭, 오덕교, 이승구, 조병수, 박영돈 등을 거짓 신학을 전수하여 성령을 모독하고 소멸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하기도 했다. 자신의 무분별한 신비주의 행위에 반대하면, ‘기적ㄴ중지론자’라는 틀을 씌우며 공격을 한 것이다.

다음은 구요한 목사에 대한 예장 고신(2018)의 연구 보고서 전문이다.

 

구요한 목사의 사상

1. 고신 교단을 사이비 신학을 가르치는 불건전한 단체로 규정한 구요한 목사 

수도노회와 경남노회 67회 고신 총회에 구요한 목사(인터넷 신문 <글로리아 타임즈> 운영자)의 신학사상에 대한 조사를 청원했다. 이를 신대원 교수회에 맡겨 연구 조사가 진행되는 1년 동안 총회 산하 교회는 그의 집회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구요한 목사는 이에 맞대응하는 식으로 그가 운영하는 신문인 글로리아타임즈에 “예장 고신을 불건한 단체로 규정하고 1년의 조사 기간 동안 참여 금지를 결정한다”는 공고문을 올렸다(글로리아타임즈, 2017, 9, 21 “(공지사항) 예장교신을 불건전한 단체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이비 신학인 기적중지론을 고수하는 예장 고신이 오히려 환골탈태하는 심정으로 사이비신학에서 돌이키라고 촉구했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18).

구 목사는 이전부터 고신과 합신, 그리고 합동을 기적중지론이라는 사이비 신학을 가르친다고 공격하였다. 이 교단의 신학자들, 박형룡, 박윤선, 김의환, 서철원, 심창섭, 오덕교, 이승구, 조병수, 박영돈 등을 이런 거짓 신학을 전수하여 성령을 모독하고 소멸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하였다. 대표적인 개혁신학자들, 즉 칼빈과 루터, 헤르만 바빙크, 아브라함 카이퍼, 벤자민 훠필드, 루이스 벌콥, 리차드 개핀도 “사이비 신학, 거짓 신학, 인본주의 신학인 기적중지론(Cessationism, 은사중단론)을 주장하고 답습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과 교회 성장을 저해한 사람들이다”고 규정하였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2).

2. 구요한 목사가 사이비 신학으로 정죄한 기적중지론이란 무엇인가? 

구 목사가 공격하는 기적중지론은 기적이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입장인가? 구 목사가 기적중지론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개혁신학자 중에 지금도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며 기적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구 목사가 거듭 사용하는 기적중지론이라는 말만 들으면, 전통적인 개혁신학에서는 기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전통적인 신학을 사이비라고 정죄하려면 최소한 신중함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구 목사는 기본적인 용어 선택에 있어서조차 허위사실을 유포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치명적인 허술함을 보인다.

그렇다면 구 목사가 비판하는 기적중지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초자연적인 성경을 띤 은사, 즉 방언과 예언, 통변, 신유, 환상, 쓰러짐, 기적 등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이다. 구 목사는 지금도 성경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날 수도 있으며 방언과 병고침의 기적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신학자도 기적중지론자로 정죄한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2).

구 목사는 직통계시를 받은 듯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말을 남발하며 점쟁이처럼 미래 일을 알아맞힌다는 거짓 예언이나 사람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행하는 안수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만 해도 기적중지론자로 매도하며 성령을 모독하는 자라고 정죄한다. 구 목사가 기적중지론자로 규정하는 척도는 오늘날에도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 범람하는 쓰러짐의 현상과 예언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이라도 미혹의 영으로 의심하거나 비판하는 데 있다.

그러나 거짓 영들도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을 미혹케 하니, 기이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다고 무조건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성경은 분명히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고 했다(요일4:1).

구 목사는 쓰러지는 현상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와 교회 역사 속의 사례가 많다고 주장한다. 과거 부흥시에 사람들이 성령의 강한 역사하심에 압도되어 쓰러지거나 의자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사례가 있었다는 증언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 전파자들이 말씀만 전했음에도 일어난 현상이었다. 지금처럼 의도적으로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해 안수하거나 밀어서 일어난 현상이 아니었다. 또한 성경에도 사도 요한이나 다니엘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땅에 엎드러진 것이 기록되어 있지만, 누구를 안수하여 쓰러뜨린 예는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구 목사는 이런 잘못된 행태와 현상을 성경적으로 검증하고 비판이라도 하면 성령을 훼방한다고 저주한다. 이는 영적인 분별을 거부하고 훼방하는 사이비 성령운동가들의 전형적인 행태이다. 자신이 그런 불건전한 성령운동을 하고 있으니, 자신의 사역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비판에 날선 적대 반응을 보이는 듯하다.

3. 성령 모독죄를 악용하는 문제

구 목사의 성령론은 현대 은사주의자들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을 부인하고 사도적 직분과 은사, 선지자, 예언, 방언, 환상, 기적과 쓰러짐의 현상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서로 궤를 같이 한다. 좀 더 특이한 면은 자신의 입장과 다른 전통적인 성령론을 저돌적으로 공격하고 가차 없이 정죄한다는 것이다. 그의 신학은 차치하고라도 이런 모습에서 그는 이단들을 그대로 답습한다.

“기적중지론자들은 지나치게 완악하고 기득권이나 이권에 개입된 거머리 같은 자들이고 입에 달린 말이 ‘이단’이나 ‘이단성’이기 때문에 살살하면 오히려 얕보고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도 강한 자에는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는 그들처럼 걸핏하면 ‘이단’이나 ‘이단성’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이단은 구원 받지 못하고 지옥간다는 소리 아닌가? 오히려 성령의 사역을 ‘귀신 사역’이라 정죄하는 자들이 금생이나 내세에도 용서 받지 못하는 성령 모독죄를 저지르는 것이고 예언이나 기적행하는 은사를 부인하는 자들이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저지르는 자들이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2).

구 목사는 자신은 걸핏하면 남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자들과는 다르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저주를 퍼붓는다. 엉터리 예언과 쓰러뜨림만 비판해도 금생과 내세에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모독죄를 뒤집어 씌워 영원한 파멸을 받으라고 저주한다. 오늘날 성령 운동을 하는 이들 중에도 인격이 심각하게 왜곡된 이가 아니고는 이런 식으로 자신과 다른 입장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나 성령을 따르는 이의 모습은 구 목사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구 목사는 성령을 모독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현저히 왜곡하여 악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1).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어떤 배경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를 바로 파악해야 한다. 주님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비방하였다.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은 이사야의 예언대로(사61:1), 억압된 자들을 해방하는 메시아 사역의 일환이다. 새로운 출애굽과 같은 사건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표징이다(마12:28, 눅11:10). 주님은 메시아의 사역을 성취하는 성령을 귀신의 일로 모독하는 죄의 심각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특별한 죄를 염두에 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자신과 다른 입장을 정죄하는 수단으로 남용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현저히 모독하는 행위이다. 신빙성 없는 예언을 해 대고 쓸데없이 사람들을 밀쳐 넘어뜨리는 해괴한 행위를 미혹의 영으로 의심하는 것이, 어찌 메시아 사역을 성취하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 같을 수 있는가? 구 목사는 주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왜곡했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다른 이들을 저주하는 이중적인 중대 과오를 범한 것이다.

4. 기적지속론의 문제

구 목사에 따르면, 기적의 지속성을 인정하느냐의 여부가 바른 신학의 시금석이다. 기적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사이비이고 거짓 신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적의 지속성 여부는 관점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한쪽이 옳으면 다른 쪽이 틀릴 수밖에 없다. 틀린 쪽은 사이비 신학이자 거짓 신학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적중지론은 틀린 신학이므로, 당연히 사이비 신학이자 거짓 신학이므로 교회를 위해서도 진작 추방되었어야 할 영적 적폐이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2).

구 목사는 기적중지론이 칼빈으로부터 기원하여 한국교회까지 확산되었다고 본다. “개신교 기적중지론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장 칼뱅이다. 그는 로마 천주교나 급진파들의 기적론에 대항하기 위해 기적중지론 신학의 기초를 쌓았다. 그 결과 칼뱅의 추종자들인 3대 개혁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 아브라함 카이퍼 및 벤자민 워필드는 물론 절대 다수의 칼뱅주의자들이 칼뱅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거나 악화시켜왔으며, 이들이 각 신학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기적중지론을 확산시켜왔다. 한국의 기적중지론 신학자들 절대 다수도 이들의 잘못된 신학 영향을 받으면서 각계각층에 포진하여 성령을 소멸하고 있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2). 그중에서도 “예장 고신은 한국의 대표적으로 수구적, 율법적이며 ‘사이비 신학’인 기적중지론을 신봉하는 교단이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7). 구 목사는 기적중지론은 교회를 쇠퇴하게 하고 망하게 하는 신학이라고 비판한다. 세계적으로 은사주의 교회는 성장하나 비은사주의 교회는 급속히 침체해가고 있는 것이 그 분명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고신이나 합신이 군소교단을 면하지 못한다고 한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2).

구 목사는 구속사적인 성경해석이 기적을 예수님과 사도시대에만 국한된 것으로 보는 것은 엉터리 성경해석이라고 비판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며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했듯이, 오늘날 복음전파자들도 그런 기적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만을 통해서 믿는 사람도 있지만 기적을 통해 믿는 사람들이 더 많다.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기적을 행하면서 말씀을 전했는데, 교회 시대의 신자들은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은 ‘나는 예수님이나 사도들보다 더 잘났다. 그들은 말씀과 기적으로 사역했지만 나는 말씀만으로 사역할 수 있다’는 주장밖에 되지 않는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2).

예수님과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다. 이 세 가지 사역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주님과 사도들은 말로만 하나님 나라를 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말하는 내용, 즉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인간의 온전한 상태, 즉 샬롬의 회복을 귀신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과 병이 치유되는 능력으로 증거하였다. 따라서 축사와 치유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표징이다(마12:28). 오늘날에도 복음이 처음 전파되는 선교지에서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이 일어나곤 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그 지역에 참투하는 사인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실체인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실현된 후에는 하나님 나락 임하는 표적의 빈도수는 전과 같지 않은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물론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병고침의 기적이나 어두움의 세력과의 싸움은 지속된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기적과 교회 시대에 일어나는 기적은 엄연히 구별되며 불연속적인 면이 있다. 예수님의 기사는 그가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며,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전능성과 완전성이라는 특유의 성격을 띤다. 그 같은 특성과 목적을 띤 기적을 이제는 누구도 행하지 못한다. 그 점에서 분명한 불연속성이 있다. 또한 사도들의 초자연적인 사역도 오고 오는 세대의 교회가 세워질 터를 닦는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건물의 기초를 내리는 작업이 반복되지 않듯이 사도들의 직무는 되풀이되지 않는다(엡2:20). 사도들의 복음과 가르침은 모든 세대 교회의 척도가 된다. 성경을 기록하도록 사도들에게 주어진 계시와 영감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없다. 지금도 사도직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교회가 따라야 할 또 다른 척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구 목사는 오늘날도 선지자와 직통계시와 예언이 존재하며 사도적 기능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주장한다(글로리아타임브, 2015,4.18, “당신 안의 사도를 개발하라”).

지금도 기적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기적의 특성과 목적은 다르다. 오늘날에도 더 이상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임을 입증하기 위해 행하신 오병이어 같은 기적을 교회가 행할 수 없다. 또한 사도들에게만 맡겨진 교회의 터를 닦고 기준을 세우는 독특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기적, 성경의 기록을 위한 직통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 시대에는 그 누구도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사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모든 세대의 교회에 규범이 되는 신앙의 척도를 확립할 수 없다. 사도들의 메시지에 오류가 없었듯이, 그 권위의 표증인 사도들의 치유사역에도 실패와 결함이 없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사도적인 권위를 입증할만한 완벽한 치유를 행하지 못한다. 지금도 교회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이 전파될 때 어두움의 권세가 물러가고 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것은 지금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능력으로 통치하며 그의 자비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증표이다. 구 목사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기적이 오늘날에도 지속된다는 점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그 특성상 불연속적인 면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5. 반복되는 성령 강림

이와 맞물린 문제는 구 목사가 오순절 성령강림을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는 사건으로 보는 점이다. “중지론과 맞물려서 오늘날의 은사 사역을 대적하는 또 하나의 ‘사이비 신학’은 오순절 성령 강림 단회설 또는 단회론(이하 ‘단회론’)이다. 단회론은 오순절에 성령이 한 번 강림하였으므로 이제 더 이상 성령은 다시 강림하지 않는다는 ‘사이비 신학이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04) 구 목사는 오순절 성령강림이 단회적으로 끝난 사건이라는 주장은 명백한 성경 말씀을 배격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단회론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한 번 강림한 것으로 끝이 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의 명시적 기록에 위배되는 주장이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2) 그는 사마리아인들과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했다(내려오다)는 표현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여기서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해묵은 논쟁을 자세하게 되풀이할 필요는 없지만,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누가는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복음이 확산되는 결정적인 전이단계마다 어떻게 성령님이 역사하셨는지를 밝히고 있다. 민족과 관습의 장벽을 넘어 복음이 사마리아와 더 나아가 이방에(고넬료에게) 처음 증거될 때 성령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셨음을 부각시켰다. 이런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사마리아와 고넬료, 그리고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사역을 이해해야 한다.

사도행전 10장에는 하나님을 경외한 이방인 고넬료가 성령을 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고넬료는 분명 구약의 성도와 같은 경건한 이였지만, 아직 신약적인 의미에서 온전히 믿는 자라고 볼 수 없다. 그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다. 그는 역사적으로는 오순절 후에 살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직 새시대의 은총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복음을 아주 상세하게 증거하였다(행10:34-43).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다.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말씀을 들음으로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동시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는 사건은, 하나님이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합법적인 백성이며 신약 교회의 정식 멤버로 받으셨다는 것을 친히 확증하신 사건이다.

에베소에 있던 제자들도 아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의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여전히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 증거한 이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자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믿음과 세례와 성령받음이 한 세트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을 때 성령을 받는 아주 정상적인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분문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고 전후 문맥만 살펴보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을 놓쳐버리고, 단지 이것을 믿은 후 2차적으로 성령을 받은 분명한 사례로 보는 것은 어설픈 성경해석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증거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2장 38절에 명시되었듯이 믿음(회개와 세례)과 함께 성령을 받는 것이 규범적인 패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건들은 ‘믿은 후 성령세례’의 도식보다는 이 규범적인 패턴과 더 잘 들어맞는다.

유일하게 이 규범에서 벗어난 사례가 사마리아에서 나타났다(행8:14-17). 사마리아에 성령의 임하심이 잠시 지연된 것은, 오랜 민족적인 대립과 반목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에 빚어질 수 있었던 교회 분열의 위험을 막고, 민족적 단절의 아픔을 치유하며, 유대와 사마리아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상이 아니라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바울서신뿐아니라 다른 서신서에서도 성령세례를 2차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확실한 성경적 증거는 없다. 성경의 모든 확실한 증거들과 가르침을 무시한 채, 극히 예외적인 한 사례에만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강변할 수 없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내려오다”는 표현을 성령의 선물을 주는 것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다(행11:15-17). 이는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행2:38), 또는 성령을 받는 것과 서로 매치된다(행8:15-16, 10:44-47). 누가는 오순절 후에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각각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했다(행2:38).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후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것을 “성령이 내려오다”라고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 없던 성령의 선물이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니, 성령이 위로부터 내려온다는 표현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이는 특별히 성령의 초월성을 부각시킨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내재하시는 동시에 초월하신다.

성경은 성령의 역사를 두 가지 전치사로 표현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in) 거하시는(요14:17, 롬8:9, 고전3:16, 약4:5) 동시에 우리 위(on)에 임하신다(행10:44, 11:15, cf.마3:16). 성령의 내재적인 관점에서 벼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성령의 초월적인 관점에서는 성령님이 우리 위에 임하신다고 볼 수 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만 갇혀 계시지 않는다. 성령님은 우리를 추원해 계신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만이 아니라 우리 위에도 계신다. 성령님은 편재하시니 물질처럼 여기서 저기로 공간을 이동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3차원을 초월한 성령의 임재와 사역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성경은 시공간적인 제약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해하기에 적합한 공간적인 개념을 사용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동시에 우리 위에 임하신다는 표현을 적절히 배합하여 사용함으로 성령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균등하게 강조함이 필요하다. 성령님은 신자 안에 거하신다. 신자 안에 전인격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요14:16, 엡1:13, 4:30, 고후1:22). 동시에 우리를 초월해 계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위에 임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순절 성령감림이 반복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원역사에서 큰 획을 긋는 독특하고 단회적인 사건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오심과 성령님의 오심을 대비하였다. 예수님이 첫 번째 보혜사로 오심같이 성령님이 두 번째 보혜사로 오신다(요14:16). 예수님처럼 성령님도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요15:26). 성령님도 진리를 가르치시고 세상에 대해 증거하신다. 세상이 예수님을 영점하지 않았듯이 성령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14:17).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떠나심과 성령님의 오심을 대칭시켰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성령님이 오시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예수님이 떠나심, 즉 승천이다.

주님의 가심이 되풀이될 수 없는 사건이듯이, 성령의 오심도 그 가심의 공백을 바로 대체해야 할 단회적인 사건이다. 승천이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종료를 뜻한다면, 오순절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열매를 세상에 전달하고 적용하는 성령사역의 시작이다. 오순절 성경강림은 구약의 오랜 소망인 새언약과 새창조가 온 세상에 실현되는 시발점이다. 성령의 오심으로 삼위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새로운 성전으로서의 신약교회 시대가 개막하였다. 그 교회를 통해 만물을 충만케 하며 우주적인 갱신사역과 세계선교사역이 출범하였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역사 속에 구약의 오랜 예언이 성취되는 새시대를 획기적으로 도래케 한 독특성을 띠었다. 구 목사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내려오다는 동사의 자구적인 해석에만 매달리다가, 그 사건의 부요한 의미를 개인적으로 경험적인 차원으로 축소시켰다.

성령강림은 되풀이되지 않지만 오순절에 그 직무를 시작하신 성령의 우주적인 갱신 사역, 만물을 새롭게 하는 새창조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된다. 오순절에 제자들을 충만케 하신 성령님은 지금도 교회와 신자들을 충만케 하신다. 성령 충만은 단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체험이며 계속 위로부터 부음을 받아 흘러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신자는 이미 성령을 받았지만 매일 새롭게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을 주장한다고 해서 성령의 새로운 은혜와 능력에 대한 기대와 추구도 없는 성령론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오히려 성령님이 강림하신 사건의 탁월한 영광과 놀라운 은혜를 구속사의 맥락에서 바로 알 때, 우리 가운데 지속되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더 간절히 사모하며 추구하게 된다.

6. 잘못된 성경 해석

구 목사는 기적중지론은 잘못된 성경해석에 근거한다고 본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누가의 성령론을 바울의 관점에 꿰맞추어 읽음으로 누가가 증거하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사역을 무시하거나 더 이상 규범으로 보지 않는 오류에 빠졌다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을 구분할 때, 사도행전은 ‘사역적이고 경험적인 성령’(Ministerial and Experiential)을 다루고 서신서는 ‘중생시키고 성화시키는 성령’(Regenerating and Sanctifying Holy Spirit)을 다룬다. 전자는 일하시는 성령(Holy Spirit at Work), 후자는 인격적인 성령(Holy Spirit as Person), 전자는 사역과 관련된 성령의 외적 능력, 후자는 구원과 관련된 성령의 내적 능력을 다룬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07).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요한하고 눈에 보이게 역사’하는 ‘사역적이고 경험적인 누가의 성령’과 ‘비밀스럽고 조용하게 역사’하는 ‘중생시키고 성화케 하는 바울의 성령’을 구분하지 못한다”(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04).

그러나 누가와 바울의 성령을 이런 식으로 단순 대조할 수 없다. 사도행전에서도 성령의 사역이 요란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충만은 초자연적 사건이나 방언과 같은 엑스타시와 연관되기도 하지만, 그 핵심요소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영적 감화이다. 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는 첫 번째 증거는 성령의 영감으로 복음을 온전히 깨닫은 것, 그리고 선포한 것이다.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전파한 첫 번째 메시지는 주님의 말씀과 구속사역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확신에 근거한 복음이었다. 성령님은 공백 속에서 역사하지 않는다. 성령충만은 베드로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말씀을 계시해 준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말씀, 특별히 주님으로부터 듣고 배운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신 것이다. 직통계시가 아니라 들은 말씀의 회상이다. 그의 설교는 구약의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의미를 풀어낸 탁월한 성경해석의 진수였다(행2:14-36).

여기서 요한복음에 기록된 보혜사 성령에 대한 말씀이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성취됨을 볼 수 있다. 주님이 보혜사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다(요14:26). 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회상하고 상기시켜 주는 것만이 아니라, 온전한 이해와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성령의 주된 역할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즉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고난당하고 부활하여 아버지께 가서 보혜사를 보내실 것을 생각나게 하며 그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님에 관하여 인용된 구약의 말씀이 결국 실현되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결국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은 구약 말씀의 배경과 맥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이런 요한의 성령 이해는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누가의 관점과 맥을 같이 한다. 그에게 성령충만의 우선적인 결과는 성령의 영감에 의한 성경해석과 선포였다. 청중들에게 나타난 성령충만의 임팩트는 많은 사람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고 믿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영감에 의한 성경해석과 성령의 능력에 이끌리는 설교의 전형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은 일차적으로 증인됨의 권능을 부여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지만, 복음사역의 열매에서 성령의 다양한 사역이 나타남을 볼 수 잇다. 인간의 심령을 변화시키며 새생명을 얻게 하는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가 밝히 드러난다.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니 3천명, 5천명이 주께 돌아왔다. 영적으로 죽었던 많은 사람들이 소생한 것이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루는 에스겔의 비전이 실현된 것이다. 에스겔은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와 같은 이스라엘의 비참한 현실 속에 놀라운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에스겔 골짜기에서 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가 일어나듯이, 오순절에 성령님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이스라엘, 즉 교회를 일으키신 것이다.

성령의 권능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릴 뿐 아니라 새사람으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창조하는 능력이다. 새로운 이스라엘, 교회를 창조하는 권능이다(행2:44-47). 예루살렘교회는 성령 안에서 사랑과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공동체, 즉 참된 교회의 모습이다. 온 백성이 그들의 변화된 모습과 삶을 보고 칭송했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들로 인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니 믿는 자의 수를 더하셨다고 했다. 누가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 자체가 세상에 빛이 되는 증인됨의 방편이며 간접적으로 전도의 효력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점에서 누가는 어두운 세상에서 빛된 미션을 강조한 바울과도 맥을 같이 한다.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은 복음 전파를 위한 능력일 뿐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를 갱신하는 새창조의 영이다. 성령의 사역이 구원역사적이며 선교적인 맥락에서 묘사되었지만, 그 안에서 성령의 교회론적이며 구원론적인 기능이 결코 부재하지 않다. 구 목사는 사도행전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지엽적이고 특이한 현상에만 집중한 나머지 큰 숲을 보지 못하였다.

사도행전에서도 성령의 사역이 요란하고 전시적인 현상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님은 제자들 안에 은밀히 역사하여 그들의 속사람을 새롭게 하고 강건하게 하여 겁약했던 이들이 담대한 증인으로 변하며 자기 영광을 쫓던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이들로 변화된 열매를 증거한다. 성령의 능력은 구 목사가 말하는 요란한 현상에서가 아니라, 돌에 맞아 죽으면서 원수를 사랑하는 스데반의 온화한 얼굴, 고난과 핍박을 즐겁게 감수하는 제자들의 모습,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울며 목회한 바울의 겸손과 오래 참음에서 은밀하게 증거되었다.

또한 바울도 개인을 중생케 하고 거룩하게 하는 성령의 사역만 다룬 것이 아니다. 그는 새로운 성전인 교회를 충만케 하며 그로 인해 만물을 충만케 하는 성령의 우주적이고 선교적인 사역을 부각시켰다(엡5:18, 1:23). 또한 바울서신에도 성령의 다양한 은사의 나타남과, 구 목사가 말한 요란하고 눈에 보이는 성령의 사역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고린도교회는 그런 현상으로 인해 큰 혼란과 진통을 겪었다. 따라서 구 목사처럼 누가와 바울의 성령론을 대립시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성경해석이다.

우리는 누가와 요한, 바울 성령론의 독특성을 인정해야 한다. 서로 다른 특성과 초점을 무시해 보리고 무리하게 획일화하는 시도를 지양해야 한다. 성급하게 바울의 시각을 누가의 기록에 투사하기보다는 누가를 그 고유의 관점과 의미로 읽으려는 통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렇게 읽을 때 서로가 다른 독특성과 다양성에도 불고하고 핵심적인 면에서 누가와 요한과 바울이 신비하게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누가의 성령론에는 요한이 증거한 보혜사의 특성이 결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는 오히려 요한복음에 기록된 보혜사의 약속이 여러 면에서 성취되는 것이 밝히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믿을 때 성령을 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과 성령체험에 대한 누가의 증언이 과연 상충되는가를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좀더 세밀한 관찰과 연구가 이런 피상적인 선입관을 교정해 준다.

7. 결론

1) 구요한 목사는 성경시대의 기적적인 은사가 오늘날도 그대로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사도적 직분, 선지자, 예언, 방언, 통변, 신유, 기적 등의 초자연적인 은사와 쓰러짐, 환상, 신비체험 등이 지금도 존재하며, 오늘날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 꼭 있어야 할 성령의 사역이라고 강변한다. 이런 기적적인 은사와 현상을 부인하는 기적중지론자들은 교회를 망하게 하고(출처 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7)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한다.

2) 구 목사의 사상은 현대 은사주의나 신사도 운동의 성령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단회적이 아니라 반복되는 사건으로 본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명시된 말씀을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성령이 내려오다”는 동사의 자구적인 해석에 갇혀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성령강림의 부요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

기적적인 은사가 그대로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기적과 오늘날 교회에 일어나는 기적이 그 특성과 목적상 구별되고 불연속적인 면이 있음을 간과하였다. 또한 그는 요란하고 가시적인 성령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 누가의 성령론과, 내밀하고 중생케 하는 성령의 인경에 주안점을 둔 바울의 성령론을 단순 대조하였다. 여기서부터 그의 성령 이해는 다양성 가운데 조화와 통일성을 이루는 누가와 바울의 성령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표류하였다.

3) 구 목사가 다른 은사주의자들과 두드러지게 다른 면이 있다면, 자신과 입장이 다른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며 정죄하는 호전성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기적적인 은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전통적인 신학자들, 칼빈을 비롯한 대부분의 개혁신학자들을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이라고 단죄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정통신학과 교회를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저주를 퍼부은 것이다. 정통신학자들과 교회는 금생과 내세에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할 전제로 정죄한 것이다. 여기서 그가 과연 그리스도인인지, 성령의 사람인지가 심히 의심스러워진다. 성령을 체험했다는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 인성이 심각하게 왜곡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광포함과 잔혹함이 엿보인다.

4) 구 목사는 오늘날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해도 사람들을 쓸데없이 쓰러뜨리는 행위나 거짓 예언과 하나님의 음성을 비판하면 성령을 모독한다고 비방한다. 구 목사는 잡다한 영적인 현상을 비판이라도 하면 성령을 모독한다고 저주하며 성경적인 검증과 영적인 분별을 훼방하는 사이비 성령운동가들의 전형적인 행태를 보인다. 자신이 그런 성령운동을 하고 있으니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비판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구요한 목사의 성령론에는 잘못된 성경해석, 균형이 깨진 편향된 주장 등의 문제점이 나타난다. 오늘날 성행하는 예언과 쓰러짐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공격하며 그런 현상을 성령의 사역으로 무분별하게 옹호하는 그의 활동과 집회는 한국교회에 큰 혼란과 폐해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정통교회와 신학을 ‘성령을 모독한다’고 정죄함으로써 정통교회를 무너뜨리고 와해시키려는 이단적인 공격성을 보인다는 점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구 목사는 이런 악함에서 속히 돌이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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