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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바르트와 역사 속 인물들의 영감녀(뮤즈)
바르트 외 아벨라르, 기사들, 니체와 사르트르 등
2018년 08월 28일 (화) 17:49:14 김정언 기자 skm01_@daum.net

<교회와신앙> 김정언 기자】 이번 회에는, 바르트와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 둘의 연애 중심에서 곁길로 벗어난 이슈 한 가지를 다뤄 보려고 한다.

 

칼 바르트는 위대한 신학자로서, 이처럼 큰 윤리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그녀-샬로테를 끝끝내 곁에 앉혀 둔 것일까? 더구나 멀쩡한 여자를 시집도 못 가게 초(超) 노처녀로 죽기까지 끝끝내 붙잡아 두면서 말이다.

 
   
 바르트의 영감녀(뮤즈)였던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의 1920년대 모습
 
 

그 비밀 한 가지라면, 바로 바르트의 노작 곧 자신의 저술 작업에 그녀가 크게 도움 됐기 때문이다! 명성을 다져온 작가들이 이른 바 '유령필자(ghostwriter)'1조차도 좀체 밝히지 않는데 비해, 바르트가 자신의 노작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고 당당히, 밝히 공표한 것을 보면, 샬로테는 그에게 이만저만한 보통 도우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바르트나 샬로테 자신들이 그녀를 한낱 유령 필자 정도로 놔 두길 바라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바르트는 1950년 자전적으로 고백한 바 있다: "도움 받는다는 것이 뭔지를 나는 안다2." 이것에다 그의 속마음까지 곁들여 풀어 쓴다면, "나는 (단 하나의) 도우미를 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제야 알게 됐다"고 할 수 있겠다. 한 마디로 '속 없는 만두'처럼, 샬로테 없는 바르트는 있을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둘의 초기 여정인 1925-1935년 사이에 오간 231통 편지의 일부만 읽어 본다 하더라도, 둘 사이엔 학적, 교회사적, 신학적, 정치적 판단과 확신 등에 관해 엄청난 상호 교감 및 영향과 나눔이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3.

그런데 <교의학> 저술에 있어, 폰 키르쉬바움의 위치는 단순한 도우미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등한 작가, 곧 '공저자—ein Mitautor oder der weibliche Koautor—였다고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4. 이를테면 교의학 표지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최소한 아래위로 나란히 나열돼 있어야 했다는 것. 바르트는 비록 샬로테가 조력자였음을 넌지시 비치긴 했어도 좀 더 공정하진 못했고, 그만큼 떳떳하지도 못했다는 설이다.

사실 둘의 서신서에서 밝혀진 샬로테의 조력(助力) 범위가 정작 표면상으로는 그다지 드러나 있지 않다. 이 점에서 샬로테는 남편도 아닌 바르트에게 아내 못지 않은 희생적인 헌신과 봉사를 한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샬로테는 학적으로, 넬리는 가정적으로 바르트에게 철저한 희생을 바친 두 여인이었다고 하겠다. 바르트의 신학연구라는 '제단' 위의 두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물론 공저작 설에 대해서도 찬반양론이 나뉜다. 샬로테는 비록 매우 지성적이긴 했지만 바르트만한 깊이의 (대)학자는 아니었으므로 공저자일 순 없었다는 게 반대론의 요지이다. <교의학>을 둘의 동등한 기여(gleiche Beiträge)에 의한 공저작(die doppelte Autorschaft)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대작은 우선적으로 바르트의 천재성과 거의 절대적인 학문성의 소산이라고 봐야 옳겠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교의학 문단과 문장을 샅샅이 분석해 본다고 한들, 샬로테가 이 저작에 어느 정도 '공저자'로서 깊이 개입하여 일일이 간여했는지를 알기 어렵다. 그런 연구는 있어 왔지만. 다만 샬로테가 엄청난 기여와 영감과 나눔을 베풀었는지만은 감이 잡히고 느낌이 온다고 할 수 있다. 좀 지나친 표현을 해 본다면, 기록계시인 성경을 쓸 당시, 선지자들에게 준 성령의 기름부음 및 영감과 비슷한 역할을 부분적으로 감당했다고 할 수 있을까?

   
바르트는 성령보다는 이 내연녀에게서 더 영감을 받은 것 같다.  

 

영감녀(뮤즈)

역사 속에는 위대한 작가나 예술인에게 영감을 준, 이른 바 '영감녀'(靈感女)가 더러 있었다5. 이 개념은 기독교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기에 다루기가 좀 조심스럽긴 하다. 더구나 연원(淵源)을 따진다면, '뮤즈'라는 용어나 영감녀라는 개념 자체에 있어 신화적 요소마저도 배제할 수 없다6. 그럼에도 굳이 논지를 몰아가는 이유라면, 객관적으로 볼 때 엄연히 유부남인 바르트와 미혼녀인 샬로테로서 워낙 진리의 도를 벗어난 '불륜'의 길을 걸어갔기에7, 여기서 딱히 기독교적인 영감으로만 다루기란 상당히 애매한 탓이다.

그런 점에서는, 둘의 사랑은 (바르트의 유일한 기쁨과 만족, 행복의 면모와는 달리) 서글프고 애석하기도 하다. 그대로 그들의 사랑이 실연(失戀)은 아니고, 결합되어 맺어진 사랑의 결실이긴 하였다. 바르트의 한 때의 바람[願]과 같이, 둘이 서로 부부가 되어 바르트와 넬리 사이처럼 자녀를 출산하진 못한 대신, 둘의 정신적 교합의8 열매로써 '교회교의학'이라는 걸작을 낳았다!

좀 딴 소리지만, 그렇다면 성적으로는 이루지 못한(?)9 둘의 사랑을 우리는 비련(悲戀)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런 정신적 '출산'이나마 이루었기에 그래도 행복한 사랑과 결합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 역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바르트와 샬로테가 실제로 성생활을 했는지 어땠는지 정황에 걸맞은 실증이 아직 손에 잡히지 않아서, 둘이서 성적 행복까지도 이루었는지 그러지 못했는지(vollendet oder unvollendet), 우리가 딱히 확언하기 어렵거니와, 혹 이루었더라도 그것이 과연 가당한 행복이라고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바르트와 폰 키르쉬바움 주변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아무튼 작가들은 그래서 여인에게서 자신이 생성하고픈 바람직한 이성상을 만들어 내곤 했다. 이번 회는 이런 역사 속의 영감녀들을 몇 사람 다뤄 보고자 한다10. 다름 아닌 우리의 주인공 바르트에게도 샬로테라는 '영감녀'가 있었기에 말이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프랑스 파리의 페를라 세즈 묘지에 가면, 수사와 수녀 한 쌍이 나란히 누운 기이한 묘비가 있다. 12세기 스콜라 철학자/신학자/논리학자/시인이었던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라틴명: 페르투스 아벨라르두스, 1079-1142)와, 그의 어린 연인이었다가 나중 극비의 아내가 된 엘로이즈(Héloïse, 1090?-1164)-둘의 무덤이다.

폐일언하고, 천주교에서 수사-수녀는 각각 평생 독신제인 데다 서로 오누이 사이여서 절대로 결혼해선 안 되는 철칙이 있으며, 이를 어겼다간 이른 바 '근친상간'이 된다. 그런데 왜 이 둘은 부부처럼 나란히 누워 있을까? 수사 마르틴 루터와 그의 아내인 수녀 카트리네 폰 보라보다 무려 4세기 전, 이미 서로 사랑을 나눠 자식까지 낳고 뒤늦게 밀혼한 부부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중세 철학자였던 아벨라르의 학식은 대단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재현'이라고 불릴 정도였단다. 그의 철학은 실재론(Realism)으로 출발하긴 했으나, 실재론-유명론(Nominalism)의 이원론에서 벗어나 인간 사고의 경험적, 추상적 양면을 다 중시하여 중세 보편논쟁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 '개념론(conceptualism)'을 주창한 바 있다.

사실 그는 집시적인 방랑 음유시인(troubador)으로 젊음을 시작해, 사상과 논리로써 주위를 정복해 갔다. 그의 투명한 논리성에 대하여 당시는 제자였던 엘로이즈는 "님은 유리보다 더 맑고, 쇠보다 더 강해요!"라고 찬탄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끌렸던 것은 그의 교사로서의 능력보다 음유시인으로서의 탁월한 음악적 재능 때문이었다.

   
아벨라르(오른쪽)와 엘로이즈 무덤의 와비(臥碑)

아무튼 아벨라르는 35세의 나이에 일약 노트르담 주교학교의 교수가 되어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는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자신이 가정교사로서 가르치던 아름다운 엘로이즈와 약 2년간 열애에 빠지면서 중대한 전기를 맞게 된다. 엘로이즈 자신, 당대 사회와 교계에 이름난 지성이었다. 엘로이즈의 삼촌인 노트르담의 참사회원, 퓔베르는 아벨라르와 자기 조카딸과의 밀애 사실을 발견하자 이를 극력 막으려고 나선다11.

둘 사이의 뜨겁고 지속적인 정사 끝에 급기야 임신한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친가로 가서12 아기를 낳고 돌아오지만, 아벨라르가 교수직을 뺏길까 봐 결혼은 적극 피하려 했다. 결국 둘은 밀혼을 하고 아벨라르의 미래를 위해 별거하기로 했지만, 퓔베르는 이를 폭로하고 몰래 자객들을 보내어 무참하게도 아벨라르의 남성을 거세해 버린다13! 성생활이 불가능해진 둘은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고, 아벨라르는 상 드니 등의 수도원을 전전하다 파라클레테 수도원을 세워 원장이 되고, 아내 엘로이즈는 같은 곳 수녀원 원장으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1132년 아벨라르가 쓴 '나의 불행한 이야기'(Historia calamitatum)라는 책을 읽은 엘로이즈는 자신에 대한 연인/남편의 사랑과 오해에 충격을 받아 정정을 바라면서, 서로의 회한과 절절한 사랑을 서신으로 재개했다. 뉴질랜드의 젊은 학자, 콘스턴트 뮤즈는 이보다 앞서 1115-1116년 사이에 오간 둘 사이의 서신 113통을 새로 발견해 학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엘로이즈가 수녀원에 들어간 것은 회심이나 하느님께 대한 복종 차원에서가 아니라, 연인이 촉구했기 때문에 그를 만족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이 아시지만, 지금까지 내 삶의 단계에서마다 나는 하느님보다 그대의 마음을 혹시 상하게 할까 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그분보다 그대를 기쁘게 하려 애썼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당신의 명령이 저를 수녀가 되게 했어요."

아이러닉하게도(?) 엄숙하고 정갈해야 할 수녀원에서 쓴 사랑의 편지에서, 엘로이즈는 과거 한때 그들이 나눈 에로틱한 사랑에 대한 회고에 여실하게 침잠했다. "나의 경우 우리가 서로 나눈 그 쾌락들이 너무나 달콤했다. 그것이 나를 불쾌하게 하거나 기억에서 옮겨 나간 적이 드물었다." 아벨라르와 나눈 성적 쾌감의 추억들은 수녀답게 경건해야 할 순간에도 그녀의 뇌리를 끈끈히 감돌았다. "심지어 나의 기도가 순수해야 할 미사 시간에도, 그 쾌락의 경박한 환상들이 나의 불행한 혼을 사로잡아, 기도 대신 외설스러운 상상이 내 마음 속을 맴돌아요...우리가 했던 모든 것들과 우리가 그것을 나눈 모든 시간과 장소가 그대의 이미지와 함께 내 가슴에 박혀, 그대와 더불어 다시 그 때를 살아가게 만드네요."

엘로이즈의 편지의 다음 대목은 그야말로 솔로몬의 아가를 연상시킨다!
"저는 자주 목이 바짝 마른 상태로 그대의 감미로운 입 속의 넥타르로 적셔지길, 그리고 그대 마음 속에 뿌려진 풍요로움을 허겁지겁 들이키길 갈망하곤 해요. 무슨 말들이 더 필요할까요? 하느님이 나의 증인이시니, 나는 생명을 주는 공기를 마시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당신보다 더 내가 사랑하길 바라는 대상은 없어요."

이런 유의 실제적 정황에 대해선 전혀 아무 말이 없는 바르트와 샬로테에 비해선 얼마나 솔직하고 진솔한가! 그러나 엘로이즈가 수녀원에 들어가고 난 이래 아벨라르의 무심함을 원망하면서, 급기야 그의 관심은 오로지 육체적 열망만이 아니었나 의심하기도 했다.

"우리가 그대의 결정만으로 종교생활에 들어간 뒤, 왜 그대는 제 곁에 있을 때 힘을 주던 말 한 마디도, 한 통의 위로 편지도 없이, 그처럼 저를 소홀히 여기고 잊어버리셨나요?...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그대와 나를 묶어둔 것은 애정이 아닌 욕구였어요—사랑보다는 쾌락의 불꽃이었다고요."

바르트와 샬로테의 경우는, 이 모두를 초월한 것이었을까? 육체의 쾌락 대신 달콤한 신학의 기쁨에 묶여서? 버지는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관계가 지성과 우아함, 사랑과 우정을 모두 결합한 성격이었다고 통찰했다. 바르트와 샬로테 사이도 대동소이하지 않았을까? 다만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경우는 후자보다 더 진솔하고 순수했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불행히도 아벨라르는 1140년 이단 판정을 받아 1142년 죽었고, 소식을 들은 엘로이즈는 그의 유해를 보내줄 것을 요청해 자신의 수도원에 안치했으며, 20여년 후 자신도 잠들면서 그 곁에 함께 누웠다! 아벨라르는 그녀에게 "나는 가혹한 운명을 그대와 함께 모두 견디어 냈다오...이제 함께 잠들게 해 주!"라고 절규했고, 엘로이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전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내게 청혼하면서 세계를 내게 주겠다 해도, 나는 황후가 되기보다 그대의 창녀로 불리렵니다"라는 내용의, 충격적인 사랑을 고백했다.

이런 수사와 수녀가 나란히 누운 채 남긴 사랑의 현장과 흔적을, 사제와 수사/수녀들의 절대 독신을 강요해온 가톨릭은 어떻게 방치해 두고 있을까? 일대 모순이 아닐까?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학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사랑의 '영감'으로 온통 그의 삶을 휩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또한 훗날의 수사인 마르틴 루터와 수녀였던 폰 보라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밖에도 둘의 사랑은 십자군 시대에 귀부인을 사랑하는 기사도 연애 시대를 예견케 했다.

바르트는 혹시 내심, 아벨라르-엘로이즈처럼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과 둘이서만 나란히 묻히고 싶지 않았을까? 아내와 함께 셋이 묻혔으니,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득의했지만 말이다.

   
 

 

기사도 사랑과 문학

아벨라르의 위 이야기에 잇댄 담론이지만, 십자군 전쟁 전에 발달한 후중세초의 기사 시대는 소위 궁정연애, 또는 기사도적 연애(courtly love)14의 관행과 풍조를 몰고 왔다. 이것은 십자군 전쟁 등 당대의 전쟁터에 나서는 기사 또는 구혼남이 흠모하는 귀족 부인 또는 미래의 결혼 대상에게 사랑을 지원받거나 확약받는 대신,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전쟁터에서 한결같이 기억하고 기리며 거의 여신으로서 숭배하는 형태로 전개되곤 했다. '로맨스', '로맨틱', '낭만주의' 등의 어휘가 여기서 비롯됐다. 귀공녀가 긴 검을 기사의 어깨 위에 놓는 관례도 이와 연계돼 있다.

그런데 초기에 이 연애는 대체로 귀족 기혼녀와의 통간을 배경으로 했다. 즉 기사도에서의 '충절' 내지 '정절'이란, 사실상의 간음자나 다름없는 기사와 여인이 서로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실천하는 마음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 기사도 연애담은 후중세 서구의 트루바도르(troubador=음유시인)나 민스트렐(유랑악사)의 노래의 주류를 이루는 민화 등의 이야기들과 인문주의 시대, 르네상스 문학의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기사도 연애와 연애문학은 사회적, 성적, 종교적, 철학적인 복합요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세르반테스의 공상소설 '라만차의 돈퀴호테'에서 주인공인, 상상 속의 '기사' 알론소 퀴하노가 읽은 수많은 소설책들이 그런 문학이다.

유부남인 바르트와 미혼녀 샬로테의 사랑의 결합적 산물인 '교의학'은 이 기사도적 사랑과 그 후기문학을 충분히 연상시킨다.

그런데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지만, 묘하게도 우리의 바르트는 늘 음악을 즐겼건만, 수시로 곁에 있어 쓰임받았을(available) 여성 민스트렐, 곧 아내인 넬리를 별로 반기지 않은 대신, 학문적 무사(musa)인 샬로테를 사랑했다. 하나의 기이한 모순이고 역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니체, 릴케와 루 살로메

철학자 니체15 및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을 도운 러시아 출신의 독일 여성작가 겸 정신분석학자인 루 안드레아스-살로메(본명 루이자 구스타보나 살로메)도 있다. 니체는 제자 겸 친구인 유대계 독일 작가/철학자인 파울 레를 통해 처음으로 살로메를 알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레와 니체의 친구였던 스위스의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 남작부인이 취리히 대학교의 교수들에게 부탁을 받고 살로메 모녀를 돌보다가 레와 니체를 초청하면서 모두들 서로 알게 된 것. 루는 러시아에 있을 당시 종교학을 배우러 찾아갔던 네덜란드 출신의 루터교 사제이자 기혼자였던 하인리히 길로트 목사에게 배움을 받으면서도, 그의 '연인'과 심지어 (아내와 이혼한 뒤 결혼할 계획을 하는 등의) 대상으로까지 취급받자, 깊이 상처를 받고 21세의 혈혈단신으로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에 유학을 왔다가 결핵을 앓던 중이었다.

급히 도착한 그녀의 어머니는 루를 데리고 이탈리아 로마로 휴양을 가던 길에, 취리히 교수들이 소개한 말비다를 만났다. 이 때 레와 니체를 만나게 된다. 레는 부유한 유대계 독일 가정 출신이면서 22세 나이에 철학저서까지 낸 상당한 학자였지만, 도박중독자로 몬테카를로에서 도박을 하다 가진 돈을 몽땅 날린 뒤 말비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루를 만났다. 

   
▲ 루 살로메와 폴 레, 프리드리히 니체


당시 32세였던 레는, 맑고 파란 눈과 오똑한 콧날, 육감적인 입술을 갖고도 고상한 지적 정신을 지닌 이 처녀에게 금새 빠져들기 시작했다. 루는 레를 좋아하면서도 이성(異性)으로보다 학적 공동체로 지내자고 제안했고, 레는 방식이야 어쨌든 관계를 지속하고 싶었다. 두 달 후 니체가 합류해, 셋이서 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셋은 루의 어머니와 함께 수개월간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고 다니다 함께 겨울 나기 계획을 세웠는데, 정작 루와 레 둘만 독일 라이프치히에 자리잡게 된다.

셋이 함께 지내던 5개월 동안 니체 역시 루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친구이자 경쟁자인 레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그녀를 갈구했으나, 정작 루는 아직 남성을 육체적으로 사랑할 상태까지는 아니었다. 거기에다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벳까지 개입하면서 모두의 관계가 더욱 위기로 치달았다. 레와 니체의 우정은 1882년 늦가을 즈음 균열되기 시작했는데, 루 살로메 때문이었다.

니체는 결국 저주로써 결별을 고하고 만다. "작고 나약하고 더럽고 간교한 여자, 가짜 유방이나 걸치고 다니는 역겨운 운명!" 가녀린 허리 등 날씬한 몸매였지만 가슴이 낮았던 루를 모독한 것. 그러자 루는 "당신이 내게 준 행복은 어느 결엔가 가버렸군요. 하지만 당신은 여태도 값진 고통은 지니고 있지 않나요?"라고 응수했다.

루는 뛰어난 직관적 감응력으로 니체의 미래를 정확하게 내짚었다. "우리는 니체가 새 종교의 예언자로 등장하는 것을 볼 것이고, 그는 많은 영웅들을 제자로 둘 것이다." 실제로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 아래, 허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 철학, 초인 사상으로 서구계 일각을 휘어잡을 것이었다. 루는 실로 뭇 남성의 속을 뒤흔들다 못해, 뒤엎어 절망하게 만드는 신화 속의 여신과도 같았다.

니체는 루와 결별한 절망감 속에서, 오히려 역설의 힘으로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부를 열흘만에 완성한 얼마 후, 역시 비슷한 페이스로 2부도 끝내는 괴력을 발휘했다. 한편 루는 레와 함께 베를린으로 이사를 하는 등 여러 해 동거생활을 계속하면서 계속 저작으로 이름이 알려지지만, 레는 실패를 거듭한 끝에 둘 사이에 파경을 맞게 된다. 

그즈음 루는 베를린대 언어학과의 칼 안드레아스 교수와 전격 결혼하게 되는데, 그 동기 역시 기묘했다. 안드레아스는 자연을 사랑해 채식을 고집했고 맨발로 풀밭을 누비기도 하는 등 괴짜였다. 정서가 불안하고 발작적이었다. 그는 루와 만난 얼마 후 청혼을 했다가 거절 당하자, 가슴에 칼을 꽂고 쓰러졌다. 당시 루의 나이 26세였다.

이에 놀라버린 루는 성생활은 없이 그녀와 딴 남자와의 교제도 이해한다는 '독신결혼'의 조건 하에 청혼을 받아들였다. 안드레아스는 루가 작은 가슴에 불안해 하는 등 육체적으로 덜 성숙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잠든 루에게 성적으로 접근했다가 자칫 죽음 당할 뻔한 일을 겪고서야 뭔가 깨달았다. 그후 둘의 결혼생활은 43년간 그 상태로 지속됐다.

아무튼 루와 안드레아스의 이 결혼으로 파울 레와의 관계도 중단됐고, 레는 니체처럼 나름의 절망 속에 뒹굴어야 했다. 니체는 계속 자신의 명저를 써냈지만 가난과 편두통에 시달리던 나머지, 루의 결혼 이듬해 길에서 발작을 일으켜 쓰러졌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니체의 명성은 드높아져 갔지만 그는 11년간 고통 끝에 죽어갔다. 그의 판권과 책 판매 수입은 누이 엘리자벳이 다 차지했다. 레는 루와 헤어진 뒤 상속받은 재산으로 자선사업을 하다 스위스 첼레리나 부근의 산 위 절벽 아래 떨어져 죽었다. 자살인지는 확실치 않다.

루를 사랑한 남자는 또 있었다. 작가 게오르크 레데부어는 루와의 사랑을 느꼈지만 안드레아스와 청산하고 자기와 결혼하자고 청한 그를 루는 거부했다.

낭만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그녀에게 반했다. 루가 릴케를 만날 당시 자신은 36살인 반면, 릴케는 열 네 살이나 손아래였다. 그즈음 루는 처음으로 소녀 차원에서 탈피한 성숙기에 접어 들어, 릴케를 몸과 맘으로 받아들였다. 릴케는 환희에 차서 "그 길은 어떤 이도 나보다 먼저 밟지 못했을 터. 난 그대 안에 있네. 서른 여섯 살의 숫처녀."라고 읊었다.

릴케는 열정을 담은 수 십 편의 시를 그녀에게 보냈고, 루는 행여 남편이 볼세라 그 시를 모두 찢어버렸다. 그렇게 루와 릴케의 관계는 약 3년 지속됐다가 릴케 역시 그녀에게 절망하고 떠나 여류 조각가와 결혼을 하면서, 루와 친구 관계로 전환된다. 이후 릴케는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가 스위스에서 백혈병과 종양 합병증으로 죽었다.

루는 그후에도 수많은 남성들과 편력을 가졌다가 60세 즈음 비로소 성적 욕구에서 벗어나, 말년에야 남편 안드레아스의 기품을 깨닫고 서로 이해하는 반려자가 되어, 죽기 전 몇달 동안 진심으로 남편으로 존중했다. 루는 나치들이 활개를 치던 무렵인 1937년 독일 괴팅엔에서 요독증으로 죽어 갔다. 루는 여성 해방론자는 아니었으나 조용한 페미니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루는 답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을 매우 감사한다"고. 이러한 루를 바르트와 키르쉬바움이 몰랐을 리가 없다고 본다.

여태 이런 변두리적인 방담(放談)을 주저리주저리 해온 것은 바로 폰 키르쉬바움이 바르트의 '뮤즈'와 영감녀 역을 했다는 것을 에둘러 입증하려는 뜻에서다. 바르트가 성령의 영감에 충만하여 대 저작을 남겼다고 하기 보다 말이다.

 

사르트르와 보부아

이제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본명: Simone Lucie Ernestine Marie Bertrand de Beauvoir) 얘기를 해 보자. 초기의 바르트처럼, 사르트르도 실존철학인이었다. 사르트르는 한 매거진과의 대담에서 "여성들은 내 삶에서 외려 큰 역할을 했지, 내 책에선 작은 역이었다"고 말했다. (이하 https://keithstache.wordpress.com/2011/07/01/jean-paul-sartres-thoughts-on-women/ 참조)

     
   
▲계약부부였던 사르트르와 보부아가 발자크의 묘비 앞에서.  


사르트르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엮임은 성적 시사성을 갖는다"며 미학의 논자답게 추녀의 한계성을 말했다. 그는 자신이 늘 여성들에게 둘러싸임은 남자들 무리보다 그들을 선호하기 때문이라면서 남자들을 "지루한 대상"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또 여성의 범주에서 비롯되는 여성의 품격은 "그녀가 노예인 동시에 공범자라는 사실에서 온다"는 식의 말을 했다.

풀이하기에 따라서는 바르트와 상통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비록 '나-너' 관계 상 돕는 배필로서의 여성의 "종속적" 입장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여권주의자들이 싫어할 말들을 신학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뮤즈는 시몬 보부아 여인이었다. 당대의 대표적인 지성녀에다 페미니스트 작가였던 보부아는 사르트르보다 키가 컸고, 사르트르는 선천적으로 심한 사시(斜視)에다 근시였다. 보부아는 소르본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21세 때 철학교사 자격고시 준비 과정에서 만났는데, 고시 성적은 사르트르가 1위, 보부아가 2위일 정도로 남녀 지성을 대표했다.

둘은 사르트르의 제안으로 결혼식도 자녀출산도 하지 않고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전제 아래 계약결혼을 한 뒤, 51년간 각각 자유연애와 "지독한 혼외정사"를 하면서도 '부부'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그런데 바르트와 샬로테는 개신교 신자였다는 것 외에 사르트르-보부아 부부와 큰 차이가 있을까? 어차피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점에서라면 말이다.

이밖에도 작가 알렉산드르 게르첸, 작곡가 리히하르트 바그너의 영감이 된 독일 귀족녀 (이미 전술한) 폰 마이젠부크, 작곡가 쇼팽을 일시 돌보며 그의 창작열을 부추겼던 조르주 상드16 등등 수많은 영감녀들의 케이스를 더 들 수도 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풍부한 문화역사관과 예술관을 갖춘 우리의 칼 바르트가 이런 역사 속의 영감녀들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바르트의 애매모호한 결혼관과 파트너십이 우리의 결혼관과 남녀관에 끼쳐 주는 의미성은 뭘까? 생각하기에 따라 자유분방한 이성관/결혼관 또는 정절을 위한 경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각주>

1. 유령작가, 대필자, 대작자 등의 번역어도 있다.

2. 'Ich weiss, was es heisst, eine Hilfe zu haben.'
3. 이 표현을 Gesamtausgabe.: Karl Barth - Charlotte von Kirschbaum: 1925-1935 Band I: 45 Gebundenes Buch – 11. November 2008 책 소개 글에서 빌렸다.
4. 교의학 저작상 두 사람의 역할에 관한 몇 가지 학설 관련 각주를 추후 본난에 추가하겠다.
5. Femme inspiratris. '뮤즈'(muse)와도 비슷한 개념이다.
6. 그리스 신화에서 주신 제우스(Ζεύς)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Μνημοσύνη) 사이의 아홉 딸들 중 하나를 무사(μούσα, 영어 'muse(뮤즈)', 그 전부를 τις εννέα μούσες(9 Muses)라고 한다. 영어 낱말 amuse, museum 등의 어원이기도 하다. 9 뮤즈 여신들 : Καλλιόπη(칼리오페/서사시), Κλειώ(클레이오/역사), Ερατώ(에라토/서정시), Oυρανία(우라니아/천문학), Eὐτέρπη(유테르페/음악), Πολυύμνια(폴리힘니아/성가), Θάλεια(탈리아/희극), Μελπομένη(멜포메네/비극), Τερψιχόρη(테르프시코레/무용). 따라서 뮤즈라면, 문학적 영감의 힘과 범위가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7. 그렇지 않은가? 만약 아니라면, 어떤 점에서 아닌가? 추정 내지 억측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아니라는 추정도 추정 아닌가?
8. '영적 합일'이라고 하기엔 여러 모로 난감하기에! 그렇지 않은가?
9. 영어로는 unconsummated(?). 'consummate'는 정신적 또는 과업적인 달성, 성취 내지 창달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신혼부부가 첫날밤 첫 성교로써 행복감의 절정에 이른다는 의미도 있다. 결혼한 숱한 커플들이 다양한 이유로 득의하지 못한 사례들이 더러 있다. 바르트와 샬로테는 consummation 사건이 있었을까? 있었어도 문제이고, 없었어도 '문제'였다고 해야 하나?
10. 이하 여러 커플들의 이야기는 위키피디어 등 다양한 자료를 참고해야 했다. 일부는 Rob Yule의 Terrifying Grace: Sexuality, Romance and Marriage in Christian History의 관련 항목을 참조하라.
11. 일설에는, 결혼해야 한다고 밀었다.
12. 수녀원에서 출산했다는 설도 있음.
13. 일설엔, 페니스까지 절단해 버렸단다.
14. 프랑스어 amour courtois.
15. 니체는 우리의 바르트에 앞서,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교수로 활약한 바 있다는 점에서 선배였다!
16. 그녀는 동성애적 성향이 있었고, 이 이름도 남자 이름이다. 본명은 아망틴 뤼실 오르르 뒤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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