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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교 교리 분석 ] 재림교 구원론을 바로 세운다 ⑤
순종 헌신 굴복 희생… ‘행함’과 직결된 ‘산 믿음’
2017년 05월 01일 (월) 11:24:45 곽정환 목사 hosanna6408@hanmail.net

곽정환 목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진리지만 순종, 헌신, 굴복, 희생을 포함시킨 “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오류다. 순종, 헌신, 굴복, 희생에는 행위적 요소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산믿음”은 귀하고 꼭 필요하지만 “산믿음으로 칭의”는 고도로 위장된 율법주의이다. 구원의 결과를 구원의 원인으로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림교 ‘교회지남’ 2017년 4월호 이슈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재림전 심판의 관계(2)-칭의와 구원의 확신]을 비판한다.


[구원의 확신] ?

재림교인 10명 중 8-9명은 [구원의 확신]이 없다. 그 원인이 세 가지다. 첫째는 애초부터 재림교는 [구원의 확신]을 건방지고 교만한 생각이라고 터부시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신자라도 죽은 뒤 일생의 삶(행위)을 재조사 하여 율법을 기준으로 심판한다는 조사심판 사상을 믿는 이상 [구원의 확신]은 교리적으로 불가하다. 셋째는 구원 얻는데 ‘나의 행위’를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재림교인들은 “우리도 ‘오직 믿음으로’를 말하는데 누가 무슨 행위를 포함시키느냐?”고 묻겠지만 믿음 자체에 행위가 포함된 “믿음으로”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믿음을 행위적 개념으로 혼돈스럽게 가르치고 배우는 이상 재림교인들의 [구원의 확신]은 원천적으로 불가하다.

지남 칼럼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어디서 어떻게 빗나간 믿음이라는 것인지 핵심을 간파하기가 어렵게 숨겨져 있다. 생각 있는 교인들의 선명한 이해를 기도한다.


칭의의 근거(根據)와 시점(始點)에 대한 설명

임 소장은 그의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칭의는 행함과 상관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맞다. “행함과 상관없는 믿음”이란 행함이 안 섞인 믿음, 행함 없는 믿음으로 칭의된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이것은 바울이 너무 자주 주장해서 증거 구절 목록을 댈 필요가 없을 정도”라고 했다.

칭의의 근거“역사적으로 십자가에서 이뤄진 그리스도의 희생(피)”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칭의의 의미에 대해서는 양자됨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복된 경험이라고까지 설명했다. 옳은 말이다.

칭의의 시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았을 때(6절), 아직 죄인 되었을 때(8절), 원수 되었을 때(10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8절), 우리의 칭의(9절)와 화목(10절)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가 연약했었고, 원수였었고, 죄인이었을 때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을 때란 말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데 일조할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시점이란 말이다. 구구 절절 옳은 말이다. 여기까진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산 믿음”

그런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칭의의 근거와 의미, 칭의의 시점까지도 바르게 설명한 듯 한데 재림교 구원론의 문제점은 이를 뒤엎는 진술이 잇따른다는 데 있다. 즉 일관성을 상실한 구원론으로서 갈라디아서의 표현대로 하면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는 꼴이다.

쉽게 말하자면, 칭의는 행함과 상관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해 놓고 뒷부분에 가서는 ‘믿음’을 철저히 행함과 상관시켜 설명한다는 것이다.

   
▲ 구원이 무조건 은혜이고 선물인 이유는 “행함과 상관없는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구원이 무조건 은혜이고 선물인 이유는 “행함과 상관없는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믿음이 행함과 상관없다는 것은 이 둘이 섞임이 없으며 계통이 다르단 말이다(갈2/21; 갈5/4). 구원의 근거에 관한 한 인간 쪽에서 발원되는 자원(행함)을 믿음(은혜)과 끝까지 섞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재림교는 이내 섞어 버린다.

어떻게 섞는가? 아주 교묘하게 섞는다. 구원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해 놓고서 은근 슬쩍 덧붙이는 말이 있으니 바로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주장이다.

“산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얼마나 그럴듯한 말인가?

그러면서 “산 믿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곧 ‘헌신, 실천, 희생, 계명, 순종, 굴복의 믿음’이라고 한다. 이런 “산 믿음”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감히 누가 태클을 걸겠는가? 그러나 ‘산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은 사람 잡는(?) 구원관이다. 어째서 그럴까?

따져 보자. 어디까지가 “산 믿음”인가? 그리고 이 “산 믿음”의 경지란 피나는 노력의 고행 수행자라도(?) 감히 정복했다 말하기 힘든 고결한 지점이다. 그리고 “산 믿음”상태란 것도 사람 따라 상대적이다. “산 믿음”이 구원의 근거라면 결코 구원은 은혜도 선물도 아니고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산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좋은 말 같지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 즉 행함과 상관없는 믿음을 교묘하게 행함과 직결시킨 믿음의미로 변질 시킨 말이라는 것을 간파해야 한다.

“산 믿음”은 귀하고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을 연장시켜 “산믿음”으로 칭의된다는 주장은 독버섯 섭취하는 것 같은 오류이다. 결과를 원인으로 놓기 때문이다.


“산 믿음”은 구원의 결과이지 구원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살아 있는 믿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받은 이후의 양상이지 구원받기 위한 조건은 아니다. 은혜의 결과로 놓아야 할 것을 은혜의 조건으로 놓는 것은 구원론의 독소이다. 이 둘에 대한 혼돈(混沌)은 구원의 혼동(混同)을 초래한다.

“산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개념은 분명 독약인데 많은 사람들이 보약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마도 “산믿음”이라는 말이 갖는 긍정성과 윤리성 때문일 것이다. 고결한 윤리성과 헌신의 삶은 누구에게다 공감되기 때문이다. 살신성인은 산 믿음이다. 정말 귀한 덕목이다. 그래서 이런 사랑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포장지는 믿음이지만 내용물은 행위인 믿음

아래는 믿음으로 칭의 된다고 한 임 소장이 그 “믿음의 기본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믿음의 진정한 요소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힌다면서 언급한 진술들이다. 이런 “믿음으로라야 칭의 된다”는 의미다.

1)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믿음이란 하나님을 참으로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이라 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보여준 아브라함의 강인한 소신(所信)과 집념(執念)을 영광돌림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2) “믿음의 역동적인 요소를 강조해야 한다”면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제 행동과 약속에 대한 반응이다.”

3) “믿음이란 .... 말씀을 받는 자가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4) “믿음이라는 순종을 의미한다.”

5) “믿음, 소망, 사랑은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따르면, 하나님이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서는 것은 “사랑으로 역사라는 믿음”이다.

6) “믿음에 관한 바울의 총체적 신학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판단과 선물과 요구에 전폭적으로 굴복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에 굴복한다.”

믿음에 대한 위의 설명들 자체는 좋은 내용들이다. 무엇이 문젠가? 연결이 오류다. 전적신뢰, 의존, 반응, 실행, 순종, 신자에게 요구 받는 것을 이행하는 것, 사랑으로 역사(役事)하는 믿음, 전폭적인 굴복 이 모든 것들은 신자들에게 필요한 신앙상 덕목이고 목표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받은 신자에게 요구되는 결과물들이지 (칭의)구원 받기 위한 조건들로써의 덕목이 아니다. 즉 구원의 결과로 놓아야 할 “산 믿음”을 구원의 원인으로 놓는 것이 문제란 말이다.

분명히 처음엔 행함과 상관없는 믿음으로 칭의(구원)된다고 시작해 놓고 마무리는 “역동적인 믿음”이니, “영광 돌리는 믿음”을 운운하며 실행, 실천, 전적굴복 헌신의 믿음으로 칭의된다는 논리는 비록 “믿음”으로 포장을 씌웠지만 실제는 “행함과 범벅된 믿음의 칭의론”으로써 이것이 곧 율법주의 구원론이라는 것이다.

이런 믿음의 장엄한 묘사는 히11장에 영웅적으로 펼쳐져 있다. 이것은 결과들이고 신자의 목표이지 이런 “믿음이어야 구원 받는다”는 아니다. 이는 구원의 자격(신분) 얻음과 구원의 상태(수준)됨, 구원 자체와 상급을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류이다.

이는 마치 어떤 아버지가 아들 보고 학급에서 일등을 해야 내가 너를 아들로 낳아 주겠다는 모순이고, 영안실에서 시체를 보고 움직이면 살려 주겠다는 모순이다.

성도(왕자신분)가 되는 것과 성도(왕자수준)답게 사는 것은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도(왕자 신분)답게 살아 위상을 입증해야 하지만 그렇게 살아야만 성도(왕자신분)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재림교의 이신칭의는 정말 헷갈린다

처음에 행함과 상관없는 믿음으로 칭의 된다고 한 임 소장의 [믿음] 설명은 온통 행함(위) 일색이다. 롬10/9-10절 인용을 전후로 하면서 믿음이란 .... “받아들이고” ...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이라면서 전적헌신, 희생, 적폭 굴복의 믿음, 즉 행함(행위)에 포커스를 맞춰 “믿음”의 뜻을 설명해 나갔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믿음도 행함의 한 종류일 뿐이란 생각뿐이다.

이런 어지러운데 설명에 이어 다음과 같은 언급에 독자들은 더 혼돈스러워 할 수 밖에 없다.

믿음을 공로적인 행함으로 여기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되고, 믿음이 그리스도께 향해질 때만 의미를 지닌다.

자 보자, 믿음에 대하여 1)행함과 상관없다고 했다가 2)믿음은 곧 순종(행함), 헌신 굴복이라고 했다가 3)그러나 공로적 행함은 아니고 했다가 또 믿음과 행함은 같이 간다고 하니 듣고 들어도 헷갈리는 이신칭의 개념일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믿음“의 발원지를 묻는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남의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는다는 개념은 성경에 없다. 나의 구원을 위해선 내게 믿음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임 소장은 효력 있는 행위 일색의 믿음의 내용을 말했는데 이 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아서 그렇다.

믿음의 정의 이전에 믿음의 발원지(출처)가 어디냐는 것이다. 구원 받는 믿음의 최초 생성이 ①인간 자력으로 인가? ②하나님 쪽의 은혜(선물)로 인가? 아니면 ③사람과 하나님의 협동으로 구원의 믿음이 발생되는 것이냐?

필자는 구원의 자격은 ②으로이고 구원의 수준은 ③으로 믿음이 성장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재림교는 ③번 내지는 ①번으로 구원의 자격을 결정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에 믿음을 행위 일색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 시체 같은 인간에게서 구원 가능한 믿음이 생산될 수 없다. 다음의 진술들은 역시 다분히 ①번, ③번 쪽에 기운 믿음관이다.

바울의 가르침은 믿음(faith)으로 말미암는 의이지 운수(運數,fate)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을 개인이 받아들여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이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으로 효력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칭의는 행함과 상관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은 칭의의 믿음의 발원지가 인간 쪽이 아니란 은혜란 말이다. 인간 쪽에서 발원된 믿음이라면 그것은 더러운 인간의 의(사 64/6), 행함의 한 조각일 뿐이다.

다음의 진술들은 노골적으로 하나님 쪽에서 발원된 선물로서의 믿음②은 격하 시키고 사람 쪽에서 발원된 행위적 믿음①을 격상시켜 칭의의 근거로 제시함으로 사실상 성경의 복음을 허물고 있다.

“성경적 정보가 믿음의 의미에 대해 주는 이런 개념에 비추어 볼 때,어떤 이들이 발하는 것처럼 믿음을 단지 수동적인 방편으로 일컫는 것은 일면에서 맞자만 온전한 의미는 못 된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미암지만(17), 그 말씀을 받는 자가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발원지가 하나님 쪽인 믿음만이 깨끗한 의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믿음이고 수동적이고 은혜의 믿음, 이것만이 칭의의 근거이다.

임 소장은 롬1:5; 16:26절의 “믿어 순종케”를 인용하면서 믿음이란 곧 순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순종으로 말미암는 의”도 정상인가? 요5:29절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 말씀이 있는데 이는 선행이 부활의 조건이란 말인가?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재 행동약속에 대한 반응이다.” 이라고 했는데 칭의 말하면서 이렇게 믿음을 섞으면 안된다. 칭의는 하나님의 선재 행동에 대하여 듣고 “믿어지는 것”으로 말미암고 약속에 대한 “반응”은 믿음은 결과이다. “반응”은 살아난 자의 생태(生態)이지 살아난 원인은 아니다.

칭의의 근거는 오직 과거에 일어난(완료된)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믿음에만 근거한다. 이것에 현재나 장래에 내가 쏟아 붓는 헌신과 굴복, 품성 변화의 믿음을 플러스 한 곳에서 구원의 확신을 찾으려는 것은 허망한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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