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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슬러가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 (2)
[ 이단연구 / 김홍기 ] 지방교회(위트니스 리) 교리 비판 ⑧
2016년 03월 28일 (월) 10:42:35 김홍기 목사 yesusarang@shaw.ca

김홍기 목사 / 캐나다록키침례교회 담임, 글로벌기독교이단연구원장

   
▲ 김홍기 목사

2009년, CRI(크리스천연구소)는 70여 명의 세계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지방교회에 보낸 공개 항의서(An Open Letter To the Leadership of Living Stream Ministry and the "Local Churches")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지방교회를 철저하게 옹호한 글(We Were Wrong)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노먼 가이슬러 박사와 론 로즈 박사는 70여 명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을 대표하여 CRI의 입장을 철저하게 반박한 글(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을 발표하게 된다. 필자는 이 글을 세계 최초로 우리 말로 번역하여 한국교회에 앞에 제시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반박문의 두 저자는 이 글에서 지방교회를 ‘양태론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를 밝힌다. 또한 미국의 CRI (크리스천연구소)의 변증가들을 ‘이단 옹호자’요 ‘양태론 이단’으로 규정한 배경을 설명한다. 두 저자의 프로필은 아래와 같다.

노먼 가이슬러(Normal Geisler) 박사는 신학과 철학을 두루 전공한 미국의 탁월한 조직신학자요 기독교 철학자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변증학자이다. 그는 윌리엄 틴데일 대학(Th.B)과 휘튼 대학(M.A.)에서 신학을, 휘튼 대학(B.A.)과 미국의 여러 대학원 및 로욜라 대학에서 철학(Ph.D.)을 전공했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의 양대 명문인 트리니티 신학대학원과 댈러스 신학대학원에서 다년간 종교철학 교수 및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했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철학협회(The Evangelical Philosophical Society)의 설립자요 초대 회장이었고,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협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국제 기독교 변증학 협회(the International Society of Christian Apologetics)의 설립자요 현 회장이다. 그는 베리타스 복음주의 신학대학원(Veritas Evangelical Seminary) 및 남부 복음주의 신학대학원(Southern Evangelical Seminary )을 공동으로 설립했고 학장으로 섬겼다. 그는 100여 권의 책을 저술하고 편집했다. 실로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계의 거목이고 정통신학의 보루로서 평생을 미국과 세계의 복음주의 신학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해 온 대학자이다. 그는 미국에서 지방교회를 가장 강력히 비판해 온 용기 있는 학자요 변증가이고, 공개 항의서에 서명한 70여 명의 세계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실질적 대표로서 CRI가 지방교회를 옹호한 글(We Were Wrong)을 철저히 반박했다.

가이슬러와 함께 반박문을 저술한 론 로즈(Ron Rhodes) 역시 미국의 베테랑 이단 연구가이자 변증가이다. 그는 댈러스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Th.M.) 및 신학박사(Th.D.) 학위를 취득했고, 댈러스 신학대학원 및 미국의 여러 유명 신학대학원에서 이단 변증학을 교수하고 있으며, 70여 권의 책(이 가운데 셋은Silver Medallion winners)을 저술했고, 미국에서 전국적인 규모의 컨퍼런스 기조 연설자로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다.

아래의 글은 지난 글(1부)에 이어지는 글(2부)로서 반박문의 나머지 전부를 완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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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에 관한 크리스천연구소 저널의 최근의 방어에 대한 응답 (2)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노먼 가이슬러 론 로즈(Norm Geisler and Ron Rhodes)


이사야 9:6에 있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에 호소함

이사야 9:6에 호소하는 것은, 우리가 볼 때, 지방교회가 분명하게 바라는 견해를 위한 성경적인 지지를 제공하지 않는다(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첫째로, 삼위일체의 제1위격에 대하여 사용될 때, ‘아버지’라는 용어는 명백하게 신약적인 용어이다.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독자들에게 구약에 있는 ‘영원하신 아버지’라는 용어가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사야 9:6)에 대해 상이하고 독특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게다가 신약에서 아버지는 예수님에 의해서 자신이 아닌 다른 분으로 200번도 넘게 여겨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신약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구절 안에서 50번이나 넘게 구별된 분으로 보여진다. (다음의 예를 보라. 롬 15:6; 고후 1:4; 갈 1:2-3; 빌 2:10-11; 요일 2:1; 그리고 요이 3). 이러한 사실들은 사 9:6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관하여 해석적 한도(interpretive parameters)를 정한다.

히브리어 원어에 기초해서 보면 “영원하신 아버지”라는 구절은 영어로 “Father of eternity(영원의 아버지)”로 번역되는 것이 더 좋다.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들 중 하나를 뜻할 수 있다.

예수님은 영원하시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 이 구절은 어떤 것(a thing)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고 말하는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에 부합되게 사용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지식의 아버지(the father of knowledge)는 지성적인 것을 뜻하며, 영광의 아버지(the father of glory)는 영광스러운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용법에 의하면 사 9:6에 있는 영존하시는 아버지(Father of eternity)의 뜻은 “영원한(eternal)”이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서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이시다. 이것과 일치하여 고대 탈굼(고대 유대인들에 의해 활용된 구약성경의 간소화한 의역)은 사 9:6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예로부터 그의 이름은 놀라운 모사로, 영원히 살아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혹은 메시아)로 일컬어졌는데, 그의 시대에 우리에게 평강이 더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용어[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아들(삼위일체의 제2위격)은 아버지(삼위일체의 제1위격)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신적인 메시아의 영원함(the eternality of the divine Messiah)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강력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신다. 두 번째의 실행 가능한(viable) 견해는 6절의 처음 부분은 예수님의 강생(incarnation)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일컫는 이름들을 열거한 구절의 그 부분은 그분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관계를 표현한다. 그는 우리에게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시다. “아버지”라는 단어의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위한 영원한 삶의 공급자이시다. 그는 그의 죽음과 장사 지냄과 부활에 의해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가져 오셨다(딤후 1:10). 그러나, 한 번 더, 그 구절은 아들(삼위일체의 제2위격)은 아버지(삼위일체의 제1위격)라고 말하는 것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

고후 3:17의 “주는 영이시다”에 호소함

아들(삼위일체의 제2위격)은 또한 성령(삼위일체의 제3위격)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그 어떤 것도 고린도후서 3장 17절(“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에서 찾을 수 없다. 수많은 해설자들은 이 구절은 성령은 예수님이시라는 의미에서 “주”가 아니라, 성령은 여호와(주 하나님)(참조. 출 34:34을 인용하고 있는 16절)이시라는 의미에서 “주”이시라고 말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바로 전에 고린도후서 3장(3-6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성령(3-6절을 보라)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더 넓게, 성경 전체는 예수님은 성령이 아니시라는 것을 나타낸다. 실로 성령은 다른 보혜사로 언급된다(요 14:16; 참조. 요일 2:1).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셨다(요 10 15:26; 16:7). 성령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기를 추구하신다(요 16:13-14). 성령은 예수님이 세(침)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다(눅 3:22). 상호내주(coinherence)의 교리(아들과 성령이 서로 상호내주하신다고 확언함)를 주장하더라도, 그들[아들과 성령]은 여전히 구별된다. 그리고 아들(삼위일체의 제2위격)은 또한 성령(삼위일체의 제3위격)이라고 말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 상호내주의 교리를 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비정통적이며, 그것[상호내주의 교리]을 양태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요 14:10에 있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에 호소함

상호내주의 교리를 위한 지원을 종종 요한복음 14:10에서 찾는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이 구절에 기초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시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 이것이 만약 참된 말이라면, 요 14:20에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가? 즉 “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 17:21과 비교해 보라). 물론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부디 우리가 말하는 바를 오해하지 말아달라. 우리는 삼위일체의 위격들 사이에 친밀한 인격적 일치(intimate personal unity)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다(요 14:10)는 이유만으로 “아들(삼위일체의 제2위격)은 아버지(삼위일체의 제1위격)이시다 라고 말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논리의 비약(a leap in logic)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그것을 양태론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바처럼, 아들이 아버지이시다 혹은 아버지가 아들이시다 라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지방교회가 확언하는 다음과 같은 진술(위의 진술 #1을 보라)을 기억하라. “‘아들은 아버지로 일컬어지신다. 그렇다면 그는 아버지이심에 틀림없다. 그는 아버지로 일컬어지시지만, 참으로 아버지는 아니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로 일컬어지시는 그가 어찌 아버지가 되시지 않을 수 있는가?”(강조가 더해짐). 지방교회는 아들이 “참으로” 아버지이시며 그 반대로도 그렇다고 [아버지는 아들이시다] 주장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그는 단순히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방교회의 입장의 터무니 없음(absurdity)을 예증하기 위해서 위트니스 리의 말을 마지막으로 인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이심으로, 우리는 이제 삼일 하나님은 사위일체 하나님(‘four-in-one’ God)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넷은 아버지, 아들, 성령, 그리고 몸이다. 신적인 삼위일체의 셋은 혼동되거나 분리될 수 없고, 삼위일체도 분리되거나 혼동될 수 없다’(Lee, A Deeper Study, 203-204). 아무리 많은 해석학적 회전(hermeneutical gyrations)도 이 신학적 부조리(absurdity)를 풀 수 없다. 분명히, 리는 그리스도의 몸(교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어떤 피조물이나 피조물들일지라도 삼위일체의 구성원들과 하나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정통 삼위일체의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견해를 옹호하는 것은 비상식적이고 쓸모없는 짓이다(both senseless and useless).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차이 (The Distinction between the Ontological Trinity and the Economic Trinity)

CRI는 또한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서의 세 위격의 활동들과 본질적 삼위일체 안에서의 세 위격의 상호내주” 사이의 차이를 인용한다(16).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확언을 한 것으로 인용된다. 즉 영원 안에서(in eternity)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위격들이 혼동되어서는 안 되고 본질이 나뉘어져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에서 하나이시다.” 그러나 리는 다른 데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러한 주장을 부정한다.

“실제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설명하기 위해서 ‘삼위’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삼위(three Persons)’는 참으로 세 분(three persons)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인간의 언어처럼, 부적당한 것(inadequacy)으로 비난을 받기 쉬우며 심지어 긍정적인 오류(even positive error)로 비난을 받기 쉽다. 그것은 분명히 너무 멀리 밀어 내서는 안 된다(must not be pressed too far). 안 그러면 그것은 삼신론으로 인도할 것이다. ...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이시라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삼위가 아니시라고 감히 말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로 신비이기 때문이다”(21). 이에 응답해서 우리는 감히 모순되는 진술들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는 또한 양태론적인 비정통적 언어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 CRI조차 지방교회는 “강력하게 양태론적으로 들리는 언어"(21)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CRI는 그들이 처음부터 지방교회가 삼위일체에 관해서 모순되는 진술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인정한다(7). 이것이 CRI가 본래 지방교회를 “사이비 종교집단(cult)” 보다는 “일탈한(aberrant)” 것으로 간주했던 이유이다. 왜냐하면 지방교회가 “정통의 신앙 고백들(confessions of orthodoxy)을 부정하고(contradict) 타협하며(compromise) 약화시키는(undermine) 추가의 확언들을 정통의 신앙고백들에 더했기 때문이었다(16).

어떤 이상한 이유 때문에, CRI는 한때는 모순되는 진술들이라고 인정했던 그것들이 이제는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마음의 변화를 촉발했는가? 이 유명한 이단 변증가들(엘리옷 밀러나 그레첸 파산티노)은 “하나님은 오직 한 위격이시다”라는 진술과 “하나님은 구별된 세 위격”이시라는 진술이 이제는 모순이 아니라고 믿고 있단 말인가? 간단히 말해서, 이상하게도, 그 답은 ‘예’인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왜냐하면 지방교회는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에 차이를 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본질적” 삼위일체는 영원 전부터(from all eternity)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창조에서 운용되는 삼위일체이다(The “economic” Trinity is the Trinity in operation in creation). “본질적 삼위일체”에는 구별된 삼위가 계시지만, “경륜적 (운용적)” 삼위일체에는 삼위 사이에 구별이 전혀 없다(in the “economic” (operational) Trinity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m.). 삼위는 그들의 활동들 안에서 서로 너무 어우러져서 삼위일체의 한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으로 일컬어진다. 아버지는 아들이시고, 아들은 아버지이시며, 기타 등등.

이에 응하여, 두 가지 주장을 해야 한다. 첫째,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말한다면, 물론 삼위일체는 실제로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만약 둘이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을 부정하는 심각한 이단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껏해야,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차이는 존재론적인(ontological) 혹은 실제의(real) 차이가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오직 한 삼위일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륜적 삼위일체”는 기껏해야 오직 하나의 본질적인 삼위일체의 활동들에 관해서 말하는 방법일 뿐이지(only a way of speaking about the one and only essential Trinity’s activities), 그의 본질적인 존재(not His essential Being)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삼위일체의 한 구성원(member)이 세상에서 행동하실 때, 비록 그들이 그(Him)와 더불어 공동 작업을 하더라도, 그(He)는 여전히 다른 두 구성원들(members)과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같은 공동 저자들이 같은 책 안에서 같은 생각과 말을 공동 저술하는 것에 의해서 함께 우리의 마음을 어우르고 함께 행동할 때, 우리는 이 행위에 있어서 여전히 다른 두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 작업이 누구나 론을 “노먼,” 혹은 노먼을 “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참으로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 구별된(distinct) 사람들이다.1)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지방교회(그리고 CRI 변증가들)의 문제는 이것이다. 첫째로, “본질적인 삼위일체”(essential Trinity)에 있어서 그들은 a) 하나님 안의 참으로 구별된 세 위격들을 확언하지 않는 전통적인 양태론적 이단 교리를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b) 하나님은 한 위격(one Person)이신 것뿐 아니라 한 위격이 아닌 구별된 세 위격들(not one person but three distinct persons)이시기도 하다는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에 있어서 그들은 양태론의 새로운 하부 범주를 구성하는, 경륜적 양태론(operational modalism)이라 부를 수 있는, 이단 교리(heresy)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교리는 비정통적인 것으로 배척되어야 한다.”

이것을 안중(眼中)에 두고, 우리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존재론적” 삼위일체 사이의 차이는 모순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과 정통을 보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방교회는 하나님 안의 차이(“경륜적” 그리고 “본질적” 같은)를 말하지만, 하나님 안에는 실재하는 그러한 구별이 전혀 없다(there are no such real differences in Him). 이 말은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들(His actions)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차이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실 때 그분이 행하시기 (prior to His actions)과 그분이 행하시는 동안(during His actions)과 그분이 행하신 (after His actions)에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차이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의 글 혹은 하나의 책을 공동으로 저술하는 행위를 할 때 우리의 구별된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행동하실 때 그분이 소유하신 한 본질과 구별된 삼위의 참된 정체성(identity)을 잃지 않으신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을 “세 번의 나타나심” 안에 있는 한 위격이라고 말했을 때(when he spoke of God being one person in “three appearances), 그는 삼위일체를 위한 전통적인 양태론적 비유(a traditional modalistic analogy)를 사용했다. 그는 말하기를, “당신이 그[그의 예증에 있는 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에 아침 일찍 찾아 간다면 당신은 그가 아버지 혹은 남편인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교수의 신분으로 대학으로 갈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은 오후에 병원에서 그를 하얀 유니폼을 입은 의사로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왜 이와 같이 세 종류의 사람인가? . . . [하나님 안에] 세 인격이 계시다. 그러나 오직 한 이름) . . . . [이와 같이] 집에서는 아버지, 대학에서는 교수, 병원에서는 의사인 이 남자는 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세 사람이다”(Witness Lee, The Practical Expression of the Church, Living Stream Ministry, 1970, p. 8, 설명을 위해 삽입한 부분들이 추가됨). 이러한 언어는 분명히 양태론적이다. 왜냐하면 오직 한 사람이 세 가지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는 이것을 “세 사람(three persons)”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적인 견해 안에 있는 바와 같이, 참으로 뚜렷하게 다른 세 위격이 아니다(not really three distinctly different persons). 도리어 이것은 세 가지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유일한 한 위격(only one Person)이다. 양태론에 관해 이것보다 더 좋은 예화는 거의 없다.

게다가 지방교회는, 한 분의 하나님이 세 가지 단계 혹은 세 가지 연속적인 단계로 자신을 표현하시는, 진행적인 형태의 양태론(a progressive form of modalism)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없는 하늘에서는 아버지이시고, 사람들 가운데 표현되실 때는 아들이시며, 사람들 안으로 오실 때는 성령이시다” (Witnes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 Living Stream Ministry, n.d., pp. 8-9). 리는 또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하나님은 삼일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안으로 분여(分與)되시기 위해 진행되었다. ... 수박이 주스로 진행되었을 때 그것은 쉽사리 우리 안으로 취해져서 참으로 우리의 요소가 된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진행되었고, 지금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 . . 이와 같이 우리는 진행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궁극적인 완성(the ultimate consummation of the processed Triune God)인 성령을 마실 수 있다. 우리의 하나님은 ‘주스 하나님’이시다. . .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행되었고,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Witness Lee, The History of the Church and Local Churches, p. 10). 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영원 전에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셨다. ... 역사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 이 창조하시는 하나님, 모든 사람들의 창조주는 사람이 되셨다. ...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 그리스도는 무덤에 장사되셨다. ... 삼일 후에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하셨다. 부활을 통하여 또한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생명을 주는 영[성령]이 되셨다. ...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마치신 후에 성육신과 사람으로서의 삶과 십자가에 못박힘과 부활과 승천과 강림을 통과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진행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What is the Process of God’s Economy?” The Hearing of Faith: Living Stream Ministry Radio Newsletter, Number 34, Feb. 2001, p. 2, insert added for clarification). 그러므로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는 기도하시는 아들이시다. 또한 기도하시는 아들은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Witnes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 p. 27).

실로 리는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적인 견해로부터 그의 주장을 구별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정통적인 견해를 다음과 같이 불렀다. “삼위일체에 관한 전통적인 가르침(the traditional teaching) . ... 이제 우리는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는 또한 성령이시라는 것을 믿는다” (Witness Lee, Young People’s Training, Living Stream Ministry, 1989, p. 110). 리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의 신학을 불쾌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말하는 근거로서 순결한 말씀으로부터 몇 구절을 가지고 있다.” (Witness Lee, The Wonderful Christ, Living Stream Ministry, 1989, pp. 23-24). 그리고 그는 이사야 9:6과 요한복음 14장(위에서 논의된)을 인용한다.

외견상의 모순에서, 리는 다음을 진술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삼일 하나님의 다른 면을 믿는다. 즉 삼위의 하나님은 동시에 존재하시며 그들 가운데에는 영원히 실재하는 상호내주가 있다.” 그는 다음을 덧붙인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이 두 가지 면을 조화시킬 수 없지만, 이 둘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Witness Lee, Young People’s Training, Living Stream Ministry, 1989, p. 110). 여기서 한 번 더, 리는 그 자신이 “신비”라고 부르는 것을 논리적 모순으로부터 실제로 구별시키지 않는다.

지방교회 저널의 편집장인 론 캥거스는, 하나님의 구성원들(the Members of the Godhead)은 “구별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분이라고 주장할 때, 동일한 기본적인 견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하나이시나, 경륜적으로 하나님은 셋이시다. ....” (Affirmation and Critique, vol. x111, No 1, April 2008, p. 5).

게다가 캥거스는 하나님은 영원 안에서 (그의 영원한 상태 안에서) 변치 않으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그의 경륜적 양태 안에서-in his economical mode) 변하신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나님은 아버지(구약에 있는)에서 아들(성육신 안에서)로, 그리고 성령(부활 후)으로 연속적으로 변하신다. 캥거스는 이것을 “진행된 하나님-성육신의 과정을 통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이라 부른다 (ibid., p. 6). 하나님이 겪으시는 이런 과정에서, 캥거스는 “변화되다(changed),” “되다(became)” 그리고 “새로운 존재 상태로 들어가다(entered upon a new stage existence)”와 같은 말들을 사용한다(ibid., p.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든 이 모든 것을 통해서 그분의 본성에 있어서 변치 않으신다. 여기에서 분명한 모순을 인식한 캥거스는 여기에서도 리의 “진리의 이중성(Twofoldness of Truth)”의 불가사의한(mysterious) 교리에 호소한다.

지방교회를 방어함에 “진리의 이중성”을 사용함 (The Use of “Twofoldness of Truth” in Defense of the LC)

CRI 변증가들은 “진리의 이중성”에 대한 믿음을 방어함으로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성령이시라는 리의 선언은 어떠한가?” 라고 묻는다(21). 그러면 하나님은 본성에 있어서 변치 않으시나 성육신 안에서 변하신다는 지방교회의 주장은 어떠한가? 이러한 것들은 모순되지 않은가? “이러한 선언을 하지 말도록 지방교회에 조언을 했다”(21)고 그들이 인정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위트니스 리]가 삼위일체는 한 인격이라고 확언했을 때 그는 뻔뻔한 자기 모순(boldfaced self-contradiction)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21)고 주장한다.

이에 응하여, 분명히 해야 할 것들이 있다. 모순에 정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든지 혹은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뻔뻔한 자기 모순이 아닌 것(non-boldfaced contradictions)도 여전히 모순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CRI가 그렇게 시도하는 바와 같이, “서구적인(Western)”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류의(Aristotelian)”(21) 사고를 핑계 삼아 모순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를 창안한 것이 아니며, 모순의 법칙(the law of noncontradiction)은 서양인들의 마음(Western minds)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동양인들의 마음도 논리의 법칙(the laws of logic)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모순의 법칙을 포기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intelligible) 확언 혹은 부정, 정통 혹은 비정통을 위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 위격이시며, 동시에 또한 동일한 의미에서, 세 위격도 되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하다(It is simply not possible for God to be both only one Person and also three Persons at the same time and in the same sense.). 그러나 리는 하나님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서 오직 한 위격이시며 또한 삼 위격이시라고(God is both only one Person and three Persons in the ontological Trinity) 주장함에 있어서 아무런 다른 의미를 구별하지 않는다. 지방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하나님은 그분의 본질적인 존재 안에서 하나님은 삼위이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위격이시라(God is three Persons and yet only one Person in His essential Being)는 그들의 주장 사이에 아무런 실제의 다른(any real difference) 구별을 두지 않는다.

코르넬리우스 반 틸을 사용함 (The Use of Cornelius Van Til)

하나님에 관한 지방교회의 사고에 내포된 모순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코르넬리우스 반 틸을 사용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심스럽다. 첫째로, 반 틸은 하나님을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을 가지신 분으로 정의한 초대 그리스도인의 신조들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했던 것은 하나님은 구별된 세 위격(three distinct Persons)으로 정의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한 위격(a Person)으로도 일컬어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반 틸에 대해 미심쩍은 점을 선의로 해석한다면, 한 위격으로서의 하나님(God as a Person)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전반적으로 삼위를 가지신 한 존재(overall as a tri-personal being)를 가리킨 것으로 취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격(Person)”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셋(three)으로 말할 때 그것이 뜻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하나(one)로 말할 때 정확히 동일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반 틸이 모순에 빠졌든지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오직 한 위격이시며, 동시에 또한 동일한 의미에서, 세 위격도 되신다고 주장하는), 아니면 그것은 이단 교리(heretical)가 될 것이다. 반 틸이 여기서 정통적이라면, 지방교회의 비정통적인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그가 사용되어져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비정통적이라면, 다른 비정통적인 견해를 옹호하기 위해 같은 비정통적인 견해를 사용하는 것은 정통을 방어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신학자 아우구스투스 스트롱을 사용함 (The Use of Theologian Augustus Strong)

CRI는 지방교회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고명한 침례교 신학자인 아우구스투스 스트롱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인용조차, 아버지는 아들이시고 아들은 아버지이시며 또한 아버지라는 명칭이 아들에게 사용될 수 있으며 아들의 명칭이 아버지에게 사용될 수 있다는, 지방교회의 믿음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트롱은 “위격들의 의사소통과 다른 위격 안에 한 위격의 내재함이 있는데, 이는 한 위격의 특별한 역사를 다른 두 위격들 중 한 위격에게 돌릴 수 있게 해 준다. ... (there is intercommunication of persons and an immanence of one person in another which permits the peculiar work of one to be ascribed…to either of the other….)”(22, 강조가 더해짐)고 바르게(rightly)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한 위격이 다른 위격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한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내주(indwelling)를 말하는 것이지 정체(identity)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 안에 계시다. 그러나 하나님과 믿는 자들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실로 스트롱은 “그들의 위격에 관해서는 [그들은] 구별된 존재들이시다(as respects their personalities, [they] are distinct subsistences)”(22)라고 단호히 확언한다. 이것은 CRI에 의해 이제 승인된, 양태론적으로 들리는 지방교회의 견해를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결론적 논평 (Concluding Comments)

CRI는 지방교회를 신학적으로 혹은 사회학적으로 이단(cult)이라 칭하는 합헌성에 관한 텍사스 주 항소법원의 결정을 거부한다. 사실 그 판결은 모든 정통적이고 보수적이며 복음주의적인(all orthodox, conservative, and evangelical)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큰 승리였다. 우리가 (텍사스 주 항소법원의 결정을 인정했던) 텍사스 주 대법원에 보낸 우리의 법정 의견서에서 지적했듯이, 이것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정통적인 신앙으로부터 그들[이단]을 구별하는 것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정통의 범위를 정의하는 우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방교회는 바르게(rightly) 그러나 마지못해서 다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지방교회는 신학적인 의미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종교적인 자유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 이것은 국교설립금지조항에 의하여 당연히 보호되는 종교적인 의견의 한 유형이다. ...” (p. 9, 강조가 더해짐).

앵커버그와 웰든 및 하비스트 하우스가 지방교회를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중상모략적으로 딱지를 붙였다는 그들의 나머지 고소에 대하여, 응당 그래야 했었던 것처럼, 법정은 이것 역시 거부했다. 그들[앵커버그와 웰든]은 지방교회에 대해 거짓된 혹은 중상모략적인 고소를 어디에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CRI가 그들[지방교회]의 주장을 지지하여 말할 수 있는 최선은 앵커버그와 웰든이 지방교회를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정확한” 진술들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부정확한 주장들이 인격 살인과 따라서 명예를 훼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43). 그러나 이러한 근거 위에서라면 내가 아는(수많은 찬송가 작사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이 감옥에 들어가야만 한다!

지방교회의 소송들에 대한 CRI의 옹호에 관하여 마지막 언급을 하나 해야 한다. 앵커버그에 대한 지방교회의 수억 불 고소는 “실수”(44)였다고 동의하고 있으면서도, 그들[CRI]은 “지방교회는 항상 상대방이 그리스도인 형제들로서 그들을 만나기를 절대적으로 거부했을 때 최후의 방편으로 법적 행동을 취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지방교회의 고소를 정당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다. 앵커버그와 하비스트 하우스에 의해 제공된 (상급 법원들을 확신시켰던) 그 반대되는 사실에 기반을 둔 증거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근거 위에서 이러한 종류의 고소를 정당화시키는 일은 매우 어렵다. 고린도전서 6장은 이러한 종류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쟁에 관하여 분명하다. 마태복음 18장은 우리가 따라야 할 유형을 설정한다. 그리고 이 유형 안에서 최후의 수단은 그 분쟁을 세상 법정이 아닌 “교회”로 가져가는 것이다(17절). 고린도전서 6장에서 결론은 이것이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7절). 게다가 CRI는 이러한 종류의 신학적 혹은 도덕적 쟁점과, 한 회사가 정당한 재정적 차용을 취할 수 있는 다른 우호적인 혹은 재정적인 고소 사이에 존재하는, 도덕적(혹은 성경적) 동등성을 보여주려고 헛되이 시도한다.

“우리는 가볍게 혹은 이유 없이 하지 않았다”(46)고 주장함으로, 또한 다른 길이 없을 때 미국에서 고소를 하도록 강요 받았다고 설득력 없이 주장함으로 자신들의 고소를 정당화시키려는 지방교회의 시도는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사실은 아무도 지방교회가 고소를 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자유 의지로 고소를 한 것이다.

CRI가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포함했던 거짓된 고소에 대해 그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이사에게 호소한 경우(46)를 이용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을 정당화시키려는 필사적인 시도이다. 지방교회가 취하기를 거부했던 다른 대안이 항상 있었다. 말하자면, 고소를 중단하는 것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고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중단하고,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거짓된 진술들을 인정하고 수정하며, 다른 그리스도인 단체들을 향해 “영적 음행”이니 “사탄적”이니 하는 가혹한 진술들을 사용한 것을 사과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CRI는 저렇게 일탈한, 회개할 줄 모르는 단체를 “견고하게 정통적”(47)이며 많은 점에서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 단체”(29)라고 말하면서 [지방교회를] 거의 전면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일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실로 그들의 모든 노력은 자기 고백(self-confession)이라기 보다는 자기 정당화(self-justification)인 것이다. 나의 친구들이자 그렇지 않았다면 좋은 이단 대항 연구가들(엘리옷 밀러와 그레첸 파산티노 콜번)이 자신들이 한 때는 비정통적이라고 믿었던, 그리고 대부분의 이단 대항 학자들(most countercult scholars)이 여전히 그렇게 [비정통적인 것으로] 믿고 있는 한 무리를 과도하게 방어하는 일에 그들의 훌륭한 재능들을 사용하도록 어떻게 설득이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수수께끼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 나라[미국]의 이단 대항 단체들 중 가장 유명한 단체 하나가 이 일탈한(aberrant) 또한 이단적인(cultic) 단체를 거의 절대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그 단체의 이전의 높은 신뢰성을 희생시킬 수 있음을 지켜보며 매우 실망하고 있다.


부록 (Appendix)

다음과 같은 편지가 지방교회 저널의 편집장인 캥거스 씨에게 보내졌다. 그는 확언과 비평: 그리스도인 사상 저널이라 일컬어지는 지방교회 저널에 게재된 그의 글인 “하나님의 경륜: 그의 경륜 안의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나의 이름(Norm)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대화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그릇되게) 추정했다. 만약 그가 나의 질문들에 답을 했더라면, 그는 지방교회의 견해들을 명확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질문들에 답을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입장에 그림자를 남겼다. 그는 “. . . 우리는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이실 뿐 아니라 영원히 아버지, 아들, 성령, 구별된 그러나 분리되지 않는 삼이심을 믿는다”를 확언했던 글 옆에 “믿음의 진술”을 포함했다. 다른 것들 중에서, 그가 구별된 삼위에 관해 말하는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적인 진술을 사용하기를 거부한 것을 주목하면서, 나는 결코 답장을 받은 적이 없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그에게 보냈다.

2008년 6월 1일
론 캥거스 편집장
확언과 비평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

친애하는 캥거스 씨:
당신의 저널의 기사를 감사합니다. 당신의 글에 나를 언급했으므로, 나는 이 기회에 당신의 견해를 아주 명확하게 할 수 있도록 질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당신이 당신의 “믿음의 진술”에서 정통적이 되기를 원했다면, 왜 당신은 삼위일체의 세 구성원들의 “위격”(“person” of the three members of the Trinity)이라는 말을 뺐습니까? 정통적이 되려면 당신은 “구별된 삼[위]”( three [persons] being distinct”)를 말했어야 했고 “우리는 삼위일체의 제3[위]를 고백한다”(we confess the third [person] of the Trinity)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한 본질 안의 세 위격들의 하나됨이 아니라면 “삼”은 과연 무엇입니까?( If it is not a triunity of persons in one essence, then what are the

“three”?) 당신은 그들이 “세 분리된 신들”(three separate gods)이 아니라고 바르게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들[삼위]이 단지 한 위격의 세 “양태”( three “modes” of one person)라는 것을 부인합니다. 그렇다면 셋은 무엇(혹은 누구)입니까?

둘째, 당신은 “본질적 삼위일체”에 관해 말합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이 본질적 삼-하나됨(this essential tri-unity) 안에 있는 삼은 누구(혹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인정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라는 말은 하나 안의 셋(three in one)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가 본질이라면(if the one is the essence), 셋은 누구(혹은 무엇)입니까? 한 본질 안에 세 본질(three essences)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셋째, 당신은 당신의 견해가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양태론과 구별하여 삼위일체 안에 세 구별된 위격들이 있다(in distinction from modalism there are three distinct persons in the Trinity in distinction from modalism)고 결코 분명히 확언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위격이 있다면, 그러면 이것은 양태론입니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세 구별된 위격들이 있다면(당신은 이것을 확언하지 않고 있는데), 그러면 이것이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적인 견해입니다.

넷째, 진리의 “이중성(twofoldness)”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논리적으로 정반대가 되는 둘이 모두 참된 것일 수 있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가 한 본질 안에서 신적이자 인간적(both divine and human in one nature)이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그가 “무한하신 하나님이시자 제한된 사람”(infinite God and a finite man)이라고 확언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사람은 유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둘이 하나가 되었다”(God is infinite, and man is finite, yet in Christ the two became one.)고 말합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정통 교리는 하나님(무한하신 분-the infinite)이 사람(제한된 존재-the finite)이 되었다고 결코 확언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통 교리는 제2위격의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주장합니다. 틀림없이, 아버지와 성령은 사람이 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하자면, 그분(영원 전부터 제2위의 하나님이셨던)이 또 하나의 구별되게 다른 본성(another distinctly different nature)을 취하셨고,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이 (한 본성 안에서가 아니라-not in one

nature) 한 위격 혹은 한 인격(one person) 안에서 연합되셨습니다.

다섯 번째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 “살과 뼈”로 된 영광스러운 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성령”(the Spirit of reality.”)이라고 당신이 말할 때 그건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 물질적이며 또한 동시에 비물질적(무형의-im-material)이 될 수 있습니까?

여섯 번째로,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을 혼합했던 단성론(monophysitism)으로 일컬어지는 이단과 당신의 견해를 어떻게 구별하기 원합니까? 그리스도가 어떻게 유한하시며 동시에 동일한 의미에서 무한(not-finite 혹은 in-finite)하실 수 있습니까?

일곱 번째로, 궁극적 실제는 참과 거짓처럼 구별되지 않는다는, 또한 정반대인 둘이 하나일 수 있다는 도교의 음양설(the Yin-Yang of Taoism)과 당신의 견해를 어떻게 구별하기 원합니까? “상호내재”와 “어우러짐”에 관한 당신의 견해는 모순이 없음의 법칙(the Law of Non-contradiction)이 하나님께 적용되는 것을 마치 부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당신은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진술들이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모순이 없어야 한다고 믿습니까(must be non-contradictory in order to be true)?

여덟 번째로, 당신은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진행되신 하나님(processed God)”이라 부르며, 하나님은 진행 중에 계시다(yet is in process)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만고불변이 실제로는 변하는, 모순 같이 들립니다(This, too, sounds like a contradiction where the unchangeable actually changes.).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당신의 답장을 고대하며,

노먼 엘. 가이슬러 (Norman L. Geis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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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대부분의 비유처럼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로서 구별된 사람들(distinct persons)일 뿐 아니라 서로 분리된 존재들(we are also separate beings from each other)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적하는 바는 공동 작업이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흐릿하게(blur)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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