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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이 흔들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1995년 04월 01일 (토)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말씀보존학회(이하 말보회)에 대해 지난 2월호에 보도된 본지 기사와 관련하여 독자들의 문의 전화가 쇄도, 이 문제가 한국교회의 주요 현안이 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 중 대부분은 '그런 단체가 우리 주변에 버젓이 존재해 있었다는 것에 놀랬다'는 반응과 함께 '말보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목회자와 신학생의 반응은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 '말보회'측 자료에 대한 신학적 판단을 원했던 것이다.

 본지는 '말보회'와 관련된 문제를 보다 정확히 밝히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말보회'측에 반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반론권의 보장은 본지가 창간 이래로 줄곧 지켜왔던 편집방침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말보회'측으로부터 아무런 이의가 제기된 바 없지만 원칙적으로 반론권 보장이 유효함을 말보회측에 밝혀둔다.

이번 호에서는 말씀보존학회와 관련된 두 편의 글을 싣는다. 전자의 것은 한때 '말보회'와 관계를 맺은 바 있는 박만수 씨(안티오크출판사 대표)의 주장이다. 그는 말보회에서 발행하고 있는 '한글킹제임스 성경'에 상당한 오류가 있기 때문에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후자의 것은 '말보회'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고 하는 내용에 관한 글이다. 장임칠 전도사는 '말보회'로 인해 기독 가정이 외해의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하는 실상을 한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고발하고 있다. <편집자 주>

 

박만수 도서출판 안티오크 대표

 한국교회 성경 논쟁의 발단

 한국교회에 성경 논쟁의 태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것은 작년 초, 대한성서공회에서 표준 새번역 성경을 내놓으면서부터였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교회의 든든한 초석으로 자리 잡아왔고, 신앙과 실천의 제반 문제에 대한 확고부동의 기준과 절대 권위로 신뢰받아온 우리의 성경이 한글 개역성경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던 한글 개역성경을 단기간에 표준 번역으로 대체시키려는 대한성서공회의 노력은, 아무리 각종 세마나와 홍보매체를 총동원해 한글 개역성경의 문제점과 오류를 밝히고 새로운 번역성경의 필요성을 인식,교육시켜 보려 안간힘을 다했지만, 역시 무리수였음이 현실로써 입증되고 말았다.

 표준새번역의 등장은 당장에 부작용과 반발과 분열의 회오리를 일으켰고, 급기야 한국교회에 성경 논쟁의 태풍을 몰고 오는 결과를 낳았으며, 지금까지도 논쟁의 불씨는 좀처럼 사그라들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성경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유일한 책이요,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무오류한 말씀이라는 전제가 모든 교회와 크리스천들의 보편타당한 진리가 되어 있는 반면, 역사를 통해 그 어디서든 성경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사실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의 성경 논쟁도 이러한 아이러니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실례가 되고 있다. 문제는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과연 이 땅에 존재하는가"하는 것과 "존재한다면 과연 어느 성경이 그러한 성경인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국교회의 대다수 평범한 크리스천들이 한글개역성경을 바로 그러한 성경이라고 믿어왔고, 그 성경이 오류가 많아 신뢰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해본 크리스천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만큼 한글개역성경을 번역한 학자들과 발행한 대한성서공회를 전적으로 신뢰했다고 볼 수 있다. 표준새번역의 등장과 함께 그 신뢰가 무너지면서 충격과 파급효과는 대한성서공회에 대한 불신과 보수 합동진영의 성경공회 출범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성경공회는 출범 초기부터 잡음을 일으키고, 모 교단의 반발로 분열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원인으로서 H교단의 입지강화라는 정치적 저의와 막대한 이권에 대한 이해의 대립 등 기득권 다툼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보수진영의 이 같은 신통치 않은 대반격에 대해 대한성서공회 측은 보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여 표준 새번역을 개정하겠다는 유화책을 내놓으며, 다시금 세규합의 물밑작업에 들어간 상태지만, 보수측에서 쉽게 양보하거나 물러설 것 같은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서 성경문제를 학자들과 지도자들의 소관으로 알아온 일반 크리스천들은 성경 논쟁의 핵심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관망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의 기초가 무너지고 근본이 흔들릴 때 그 엄청난 파급효과를 피부로 직접 느껴야 하는 것은 일반 크리스천들 모두의 몫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제는 평범한 일반 크리스천들도 왜 성경 논쟁이 야기되는지, 논쟁의 진정한 핵심이 무엇인가, 그리고 누가 어떻게 성경문제의 답을 찾아야 하는지를 규명하고 알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 문제가 한국교회 모든 크리스천들이 풀어야 할 필연적 당면과제일 뿐 아니라, 누구든 여기에 대해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 논쟁의 본질

 성경은 믿는 자들을 위해 주어진 믿음의 책이지 논쟁의 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논쟁이 야기된 것은 이성주의자들이 인간 이성이라는 조그만 그릇 속에다 이성보다 훨씬 큰 성경을 집어넣으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지식을 초월하는 계시가 있고, 이성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가 있다. 이 사실을 인간 학문이 인정하려들지 않는 것은, 학문이 초자연적 영역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가령 성경이 계시하는 창조의 신비를 진화론자는 믿기를 거부한다. 믿어지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거짓된 지식도 논리체계만 갖추면 이성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하다. 인간 이성이 진화론에 설득될 정도로 지극히 조그만 그릇임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 논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성경 논쟁은 지구상에 정확하고 완전한 성경이 지금도 있다고 믿는 자들과 완전한 성경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원본에 가까운 성경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믿는 자들 사이의 해묵은 논쟁이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완전한 성경'과 '가까운 성경'간의 논쟁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논쟁은 서기 3세기 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 신학자 오리겐에 의해 본격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안디옥(Antioch)교회 크리스천들은 완전한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유럽과 북아프리카 등지에 전해 주었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은 그들에게서 전달받은 성경을 철학적 비평으로 변개하여 헥사플라라는 비평가 성경을 만들어 냈으니, 그것이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효시였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 논쟁이 안디옥 계열과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두 계열 간 논쟁이 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훗날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유세비우스를 시켜 오리겐의 헥사플라를 전수시켜 로마 가톨릭 공인성경으로 선포했는데, 먼 훗날 이 성경이 바티칸 도서관과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발견되어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요컨대, 안디옥 교회로부터 전수되어 구라틴어 성경을 거쳐 킹 제임스 권위역 성경으로 이어지는 노선이 '완전한 성경'을 믿는 자들의 노선이라면, 오리겐의 알렉산드리아 성경에서 출발하여 세롬의 라틴벌게이트를 거쳐 오늘날 바티칸, 시내 사본에 기초해 나온 모든 현대 성경들로 이어지는 것이 '가까운 성경'을 믿는 자들의 노선이라 할 수 있다.

 성경 논쟁 혹은 성경 전쟁이란 바로 이 두 노선 간의 갈등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같은 갈등의 성경은 믿는 자들에 의해 전수된 성경과 학자들의 비평을 거친 성경들 사이의 갈등으로 특징지워진다.

 성경의 정확무오성 논쟁은 진화론 논쟁 이상으로 근본을 흔들어 놓은 논쟁으로서, 그 파급효과 또한 엄청나다. 일례로, 말씀을 가르치는 자나 듣는 자가 정확하고 완전한 성경의 기초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큰 혼란과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인용하는 성경이 100% 정확한 성경이 아니라, 단지 원문에 90%의 틀릴 확률이 항상 따라다니게 된다. 만일 여러분의 청중이 90% 정확하고 10%의 틀릴 확률을 가진 설교를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했다가, 훗날 주님 앞에서 불법 판정을 받는다면, 거기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주장한 대로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 언어의 불완정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성경만을 남겨주실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을까? 지구상에 완전한 성경원본은 더 이상 존재치 않으며, 불완전한 사본들이 학자들의 비평과정을 거쳐 점차 복원되고 있다는 학자들의 주장은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가?

 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학자들이 완전히 복원시킨 성경을 내놓을 때까지는 지구상에 완전한 성경이 있을 수 없고,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교회사와 하나님의 역사도 불완전한 성경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 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성경이 복원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학자들의 비평 장치에 맡기셨으며, 학자들에게 성경의 진위를 심판할 만큼 높은 권좌를 부여하셨는가?

반면, 지금까지 완전한 성경을 믿고 그대로 순종한 자들의 믿음은 마술 같은 기적을 믿는 비과학적, 미신적, 극단적 믿음이며, 그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는 무의미하고 헛된 죽음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결국 합리주의와 과학주의의 전성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초이성적 섭리와 권능의 역사보다는 고고학, 고문서학, 사본비평학의 과학적 논리와 화려한 업적에 더 신뢰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일까? 성경 논쟁의 본질과 핵심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논쟁의 발전과 새로운 국면

 표준새번역의 등장과 함께 한껏 달아오른 한국교회의 성경 논쟁은 처음에는 '저승'같은 불교용어의 사용문제와 아가서의 저속한 표현 등을 주로 문제삼았고, 더 나아가 표준 새번역이 지나치게 의역인데다 번역상의 오류도 상당수에 달함을 지적하기도 했으며, 일부에선 '여호와'를'주'로 바꾼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원문 자체의 비평이나 번역대본의 문제를 본격 거론하지는 않고 있는데, 이는 한글개역성경이 사용한 네슬판원문에 대한 묵시적 동의로 이해될 수도 있고, 이른바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기초한 알렉산드리아 원문을 비판없이 수용하는 한국교회의 성경비평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한때 H교단측의 성경공회에서 안디옥계열의 전통원문인 수용원문(Textus Receptus)에서 번역하겠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흐지부지되고 있고, 지금은 1952년 판 개역성경을 일부 수정하여 출판할 의사만 밝히고 있는 상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교계 일각에선 성경 논쟁을 근본적으로 뒤엎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말씀보존학회의 예를 들 수 있다. 그들의 주장이 다소 과격하고 도전적인 성격을 띰으로 인해 경계심을 부축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전하는 자들이 과격하다고 해서 그 전하는 메시지까지 함께 매도해 버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

가령 한글개역 성경을 사탄 성경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과격하고 위험한 주장임에 틀림없지만, 전통 원문인 수용원문과 킹 제임스 권위역 성경을 한국 교회에 소개하는 것까지 잘못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더더욱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전하는 자가 잘못 전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바른 메시지를 잘 분별하여 취사선택할 줄 아는 지혜가 한국교회에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야기된 성경 논쟁은 다소 일방적인 면이 없지 않다. 외국의 경우나 본래 성경 논쟁의 진원지에서는 달랐다. 성경 논쟁이 본격적으로 야기된 곳은 영국이었고, 그 출발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한 개역작업이 이뤄진 1880년대부터였다.   킹 제임스 성경은 당시 가톨릭에 저항한 유일한 나라 영국에서 출간되었고, 출간된 이후 세월이 흐를수록 가톨릭 성경을 비롯한 모든 성경들의 명성을 뒤엎고 일반인들 가운데 가장 권위있는 성경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여기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 바티칸 사본과 시내사본을 들고 나온 원문비평학과 이 두 사본을 근간으로 번역된 현대 개역성경들이었다(그 효시가 영국의 RV와 미국의 ASV였고, 그 후 RSV, NASV, NIV, NRSV 등으로 이어졌다). 킹 제임스 성경이 나온 이후부터 원문비평학, 고고학, 고등비평, 진화론, 모더니즘 등이 눈부시게 발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성경 이슈는 미국으로 옮겨졌고, 급기야 세계 모든 나라들로 번져갔는데, 그 성격은 언제나 킹 제임스 성경과 그에 대항하는 현대 역본들 간의 싸움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킹 제임스 성경을 지키는 자들과 그 성경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알려진 전통원문 계열 사본들(다수사본 계열)을 지키려는 학자들이 한 편이 되고, 바티칸, 시내사본을 위시한 알렉산드리아 사본을 지지하는 학자들과 거기서 번역된 개역성경들을 지지하는 자들이 다른 한 편이 되어 대립된 양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는 달랐다. 우리 나라에서 야기된 성경 논쟁은 킹 제임스 성경 및 전통원문 대 다른 성경들 간의 대립이 아닌, 같은 바티칸 사본 계열 번역본들 간의 대립양상을 띤 것이었다. 즉 같은 알렉산드리아 사본 계열의 바티칸, 시내 사본을 근간으로 하되, 단지 번역상의 차이나 어법, 맞춤법상의 차이로 인해 야기된 갈등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최근 대한성서공회가 내놓은 표준새번역은 한글개역성경과 동일한 계열의 원문에서 번역한 것으로서, 단지 고어체를 현대체로 바꾸고, 어법이나 맞춤법을 바로잡은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고, 한국교회의 근본을 흔드는 대이슈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표준 새번역의 번역이 지나치게 의역인데다, 현대주의적이어서 보수세력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와중에 말씀보존학회나 안티오크(Antioch) 같은 작은 무리의 작은 목소리가 교계 일각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이 둘중의 공통점은 킹 제임스 성경을 한국 교계에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비록 이들의 목소리가 한쪽 구석에서, 그것도 저변으로부터 들려오는(bottom-up) 것이었지만, 성경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일깨우고, 한국교회의 성경 이슈를 본래의 성경 이슈로 바뀌주는 매개역할을 한 점에서 바르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그 접근 방법이 다소 치우치고 지혜롭지 못함으로 인해 물의를 빚고 오해를 살 소지가 있었던 점에 대해서는 분별과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필자와 안티오크는 한국교회에 킹 제임스 성경을 바르고 건전하게 정착시키기 위하여 그 동안의 흐려진 이미지를 바로잡고 참신하고 건전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킹 제임스 권위역 성경의 저력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영국과 미국과 세계를 변화시켰으며, 가장 많은 전도자를 배출했고, 가장 많은 영혼들을 구령했으며, 인류 초유의 베스트셀러로서 9억부 이상이 발행되었고, 근 400년 동안 온갖 비평과 공격을 막아내며 절대무오류한 성경으로 군림하고 있는 실로 인류 초유의 기적의 책인 것이다(최근의 NIV조차 발행된 지 불과 몇 십년도 안되어 그 오류가 속속 밝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라).

 바로 이 성경을 한국교회에 바르고 건전하게 소개하여, 한국교회가 정확하고 권능 있는 말씀의 기초 위에 바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이 안티오크의 한결같은 염원이기에, 성경 논쟁의 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바른 시각에서 최근의 성경 이슈에 대처해 나가도록 돕고자 필을 든 것이다.

 말씀보존학회와 안티오크

 한국교회에 바른 성경을 알려온 지난 5년 동안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말씀보존학회와 안티오크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 동안 말씀의 간증을 지키고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이 목사와 필자의 관계에 대해 공개하기를 자제해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또 독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도 차제에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우선 <교회와신앙>지가 본인이 말씀보존학회의 창단 멤버로 활동했다가 탈퇴했다고 보도한 것은 이송오 목사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 필자는 이송오 목사의 성경번역을 도운 적은 있어도 이 목사 밑에서 일한 적은 없다. 1988년 여름, 그러니까 필자가 기독교한국침례회 교회진흥원의 침례회출판사 편집부장으로 재직 중일 때 이 목사가 처음으로 필자를 찾아와 성경번역을 위한 도움을 요청했고, 그로부터 약 2년 간 신약전체를 헬라어 원문과 대조하여 오역을 바로잡고 우리말 표현을 다듬는 교열 작업을 해 주었다.

 물론 아무런 대가 없이 무상으로 도와주었고, 당시 이 목사가 우리 나라에 아는 사람도 없고(한국 국적이 없었음) 혼자서 외롭게 고군 분투한다 해서, 많은 사람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참고로 당시 필자는 바른 신약교회의 답을 찾느라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었고, 경제여건상 원서를 직접 구입치 못하고 복사해서 읽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이 목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복사해서 읽도록 허락해 주었고, 필자는 경제여건상 이 목사의 자료들을 복사해서 읽곤 했으며, 때로는 외국에서 직접 구입하기도 했다. 최근 말씀보존학회에서 주장하듯이 필자가 이 목사의 자료들을 빼돌린 적은 결코 없으며, 오히려 이 목사와의 결별 후에도 그와의 화해를 위해 직접 구할 수도 있는 럭크만의 자료들을 대신 구입해 달라고 선불을 주고 부탁하기도 했다(아직까지 주문한 것의 절반도 못했지만). 그리고 필자는 성경연구가들이 공개적인 자료들을 서로 나누는 것은 하나의 미덕이라고 믿고 있다).

 당시 이 목사는 나와 손잡고 일하기 위해 많은 제의를 했고, 많은 계획들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필자는 의욕에 불타는 그를 조용히 지켜보면서 도울 것만 돕고 있었다. 때론 성서문화사란 출판사를 만들어 필자를 대표로 등록시키기도 했고, 말씀보존학회 총무라 부르기도 했지만, 항상 그랬듯이 그의 일방적 조치였고, 필자는 큰 지장이 없는 한 묵인하고 따라주며 그냥 대가 없이 도와주는 관계일 뿐이었다.

 당시 필자가 이 목사의 일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은 마음에 충분한 확신이 서지 않은 때문도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필자의 추구하는 바가 바른 신약교회였고, 성경 이슈와는 다소 거리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 동안은 이 목사와의 만남을 자체하기도 했는데, 혼자 고군분투하는데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여 다시 돕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필자는 바른 신약교회의 실천을 위해 침례교 진흥원을 나와 인천에서 교회를 개척하였는데(기독교한국침례회 산곡침례교회), 얼마 후 이 목사는 필자가 개척한 교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가 산곡교회의 다른 형제와 둘이서 성경을 공부하다가 다수사본 계열의 수용원문(TR, Textus Receptus)의 완전치 않음과 킹 제임스 성경의 최종 권위를 깨닫고는 다음 일요일 모임에 이 목사와 그 사실을 나누었는데, 예상 밖으로 이 목사는 화를 내며 산곡교회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자신이 수용원문(표준원문)에서 번역한 새성경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음 주간 필자와 그 다른 형제가 함께 이목사의 집을 찾아가 우리의 믿음을 견해로만이라도 받아주면, 계속 돕겠다고 제의했으나 단호히 거절했고, 심지어 적대시까지 했다. 그후 다시 찾아가 화해를 모색했으나 대화가 불가능했고, 그리하여 결국 이 목사와 결별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단지 킹 제임스 성경의 최종권위에 대한 믿음을 겸손히 나눈 것 외에는 이 목사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배반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사랑으로 조건없이 모든 것을 도와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목사는 필자에 대한 수많은 약속들과 신의를 저버렸고, 2년 간 조건없이 도와준 은혜를 오히려 온갖 욕설과 비난과 적대로 되돌려 주었다.

 이 목사와의 결별 후에 필자는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보다 깊이 연구하고 성경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안티오크도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최종권위」,「두 뿌리」,「증거1」등의 책이 다소 과격하게 비쳐진 것도 무리가 아니라 본다. 말씀을 함부로 취급한 학자들과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본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 대한 분노가 강한 어조로 표현되어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본인의 미숙과 덕이 부족한 때문으로 돌리고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그 동안 한국교회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에 대해선 주님께서 친히 치리하시리라 믿고 맡기기로 했으며,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역사하신 만큼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본인에 대한 편견 없이 읽었다면 오해 없이 진실을 바로 알 수 있었으리란 아쉬움도 있지만, 어쨌든 이제부터는 긍휼과 사랑으로 온유하고 겸손하게 접근하고자 하며, 그런 의미에서 위의 세 책을 재판 시에는 전면 수개정하여 출간할 계획이다.

 말씀보존하회에 대해선 그 동안 안티오크가 화해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고, 최소한의 확인된 사실 외에는 덕을 위해 가급적 언급조차 자제해 온 사실 외에는 덕을 위해 가급적 언급조차 자제해 온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비록 그동안 여러 차례 말씀보존학회로부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온갖 비난과 공격과 욕설을 들어 왔지만, 오로지 말씀 자체가 손상을 입을세라 대응치 않기로 하고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해 왔다. 온유함과 사랑이 없이는 진리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오류와 시행착오를 범했을 지라도, 믿음의 형제이기만 하다면, 온유의 영으로 바로잡아 주고 회복시키려는 마음 자세가 거듭난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요구된다고 믿는다(갈 6:1). 물론 성경과 진리에 대해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가까운 형제일지라도 진리를 거스리거나 위험한 오류를 범할 때는 직언해 주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인은 말씀보존학회의 과격성이나 독선 외에도 몇 가지 오류에 대해 지적해 주기 원한다.

 먼저 한글개역성경을 사탄 성경이니 그 성경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느니 하는 주장을 제발 삼가 주시기 바란다. 개역성경이 사탄에 의해 변개된 사본에서 번역된 성경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해서 사탄의 성경은 아니다. 가령 20%가 변개되었을지라도 나머지 80%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물론 변개된 부분과 변개되지 않은 부분을 일일이 구분하기가 어렵지만 말이다.

 필자도 그러하거니와 이목사도 사실 한글개역성경으로 복음을 듣고 구원받지 않았았던가. 필자는 오히려 한글개역성경 속에도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가 있었다고 믿는다. 지면 관계상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개역성경의 전신인 구역(舊譯)성경에는 중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을 통한 킹 제임스 성경의 간접적 영향이 적지 않았다. 장중한 권위체도 그러하거니와, 킹 제임스 성경과 비교해 볼 때 상당부분 정확하고 훌륭한 번역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가령 구역에는 개역에 누락되어 있는 사도행전 8장 37절도 본문에 들어가 있다).

 비록 대한성서공회에서 구역을 개역할 때 킹 제임스 성경의 본문이 많이 누락되고, 그 영향도 상당 부분 제거되긴 했지만, 여전히 개역성경 안에 킹 제임스 성경의 영향이 상당 부분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보수성이 강한 것도 구역성경 및 개역성경에 나타난 킹 제임스 성경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성서공회가 개역성경을 폐기하려고 아무리 공동번역을 내놓고 표준 새번역을 내놓아도 개역성경의 위력이 쉽게 꺾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라 본다.

 그 동안 한국교회가 불완전한 개역성경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킹 제임스 성경의 최종 귄위를 믿음과 동시에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눈이 뜨였다고 해서 그 동안의 하나님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인해 버린다면, 그 같은 영적 교만과 독선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까 두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 이상으로 함부로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10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바른 성경에 대해 눈이 뜨이게 하신 것도 긍휼의 역사요, 다 뜻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바른 성경을 붙잡을 때가 되었기에, 성경 이슈를 야기시키신 것이라 본다. 그런즉 지금까지의 긍휼의 역사에 감사하면서, 지금부터의 긍휼의 역사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밖에 종말론을 비롯한 치우친 교리적 문제와 피터 럭크만(Peter S. Ruckman)의 일부 독특한 주장들(외국의 킹 제임스 성경지지자들조차 그의 독선과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음, 데이빗 클라우드(David W. Cloud의 "What about Ruckman"참조)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것 등 말씀보존학회에 대한 많은 우려가 있지만, 훗날 기회가 주어질 때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일단 안티오크는 성경 외에 여하한 신학적 이데올로기의 틀도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혀 둔다.

세대주의가 상당 부분 성경적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성경적인 것은 아니라 본다. 가령 종말론에 있어서 세대주의의 최후의 마지노 선인2000년과 7년대환란을 감안한 1993년의 데드라인은 이미 지났다. 더디 오심을 감안한 해롤드 캠핑(Harold Camping)의 1994년 주장도 물거품이 됐다. 안티오크는 세대주의의 기회주의적 종말론을 거부하며, 차라리 루터의 "그리스도께서 어제 나를 위해 죽으시고, 오늘 다시 사시고,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라"는 권면을 보다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때와 기한은 우리의 알 바가 아니며, 다만 항상 깨어서 말씀 위에 사는 것이 주님이 오심을 대비하는 지혜라 믿는다. 또한 칼빈주의가 다 맞는 것도, 다 틀린 것도 아니라 본다. 우리는 다만 성경에서 확인되면 받아들이고, 확인되지 않은 것은 거부하거나 보류하기를 원할 뿐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고치고, 바꾸고, 돌이킬 용의가 있음도 분명히 해 둔다.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하여 말씀보존학회가 한국교회에 나름대로 기여한 바가 있다면, 바로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 성경 출간일 것이다. 다만 바르지 못한 접근으로 인해 바른 말씀에 대한 이미지가 상쇄되어 스스로 자신들의 공헌을 가려버린 점이 안타까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부터라도 바르게, 신실하게 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객관적 비평을 가하고자 한다.

 먼저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히브리 마소라 원문 및 그리스 수용원문에서 직역한 역본과 영어에서 직역한 번역본을 구분해 주어야 독자들이 혼돈하지 않게 된다. 가령,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 제임스성경의 전신인 새성경의 경우는 분명 헬라어 표준원문(수용원문)에서 직역하였다고 밝혀주고 있는데, 이번에 출간된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의 신약부분은 본문을 비교해 보면 이전의 새성경을 약간의 수정만 가한 채 거의 그대로 실은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약의 경우 그 성경이 매우 모호해진다. 명칭은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지만, 신약의 경우 실상은 번역본이라기보다 역본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새성경을 표준원문에서 직역하고 킹 제임스 성경을 투영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한국인의 킹 제임스 성경이라 선전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번에는 그 새성경을 수정보완하여 신약으로 넣어준 성경을 아예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라 명명한 것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유죄로 판명될 때까지 무죄"(<교회와신앙>)95년2월호,131쪽)라는 논리는 현행살인범조차 유죄로 판명될 때까지는 무죄라는 반도덕적 논리로서, 감히 성경에다 적용할 수 있는 말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 성경이 최종 권위인지는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사용하여 역사하시고,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그것을 인식할 때에 진위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본문 비평에 있어서,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 과연 영어 킹 제임스 성경에서 충실하게 번역한 것인지를 몇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번역의 일관성 문제에 대한 실례로서 킹 제임스 성경의 'hell(지옥)'과 'grave'(무덤)에 대한 번역을 살펴보자(이 문제를 먼저 언급하는 것은 <교회와신앙>2월호 127쪽에 실린 필자의 기사가 다소 오도되었기 때문이다).

 킹 제임스 성경은 구약의 경우, 히브리어 'bei','qeber','shachath'등을 모두'grave'로 번역하였고, 'sheol' 중 31단어는 'grave'로 그 나머지는 모두 'hell'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은 이 원칙을 따르지 않고, 'sheol' 중에서 'grave'에 해당하는 31번을 모두 '무덤'이 아닌 '음부'로 번역하였다(다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교회와신앙>지 기자가 이 부분에서 실수한 것 같다).

 또한 신약의 경우 킹 제임스 성경은, 'mnema'혹은 'mnemeion'을 'grave'로 번역하였고, 'hades'중에서는 단 한 번 고전 15:33만 'grave'로 번역하고 나머지는 모두 'hell'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은 이 경우에도 고린도전서 15장 33절을 '무덤' 대신 '음부'로 번역해 놓았다. 참고로 새성경 초판에서 3판까지 'hades'는 '음부'로, 'tatar-us'와 'gehinna'는 '지옥'으로 번역했다가, 새성경 4판에서는 마태복음 16장 18절만 음부로 남겨 놓고 나머지는 고쳤다가, 한글 킹 제임스 성경에 와서는 마태복음 16장 18절까지 지옥으로 고친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의 예에서,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은 번역의 일관된 원칙이 결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 원칙에 따르지 않고 다시 원어로 가서 자신들의 판단대로 바꾸어 번역하였으면서도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라 주장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사료된다.

말씀보존학회는 여기에 대해 'tomb'은 무덤이지만.'grave'에는 '음부'란 뜻도 있다고 해명했는데, 필자가 알기로는 'tomb'이나 'grave'나 'sepulcher'는 무덤의 종류일 뿐이다. 가령, 'tomb'은 쌓아올린 무덤이나 묘비요, 'grave'는 파서 만든 묘요, 'sepulcher'는 바위를 파서 만든 묘실로 알고 있는데, 과연 'grave'에 '음부'와 같은 심오한 불교적, 헬라적, 샤머니즘적 개념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 하나의 예로 고린도전서 6장 9절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할 자들 중에 킹 제임스 성경은 'effeminate'(여성화된 자들)을 들고 있는데,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은 이 부분을 ''여성 동성 연애자''라고 번역해 놓았다. 이 목사가 사용한 스테판 TR의 헬라어 '말라코이'(malakoi)는 분명 주격 남성 복수 대명사이고, 킹 제임스 성경의 'effeminate'역시 여성화된 남자를 의미하는데, 무슨 근거로 남성을 여성으로 바꾸어 "여성 동성 연애자"라 번역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목사가 번역할 때 사용한 Inter linear Greek-English New Testamant by George Ricker Berry(Baker Book House,1982) 444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말라코이'란 헬라어 단어 밑에 리커 베리가 영어로 풀이해 놓은 "abusers of themselves as women"이 눈에 띄었고, 그 옆의 '아르세노코이타이'(arsenokoitai)란 단어 밑에는 "abusers of themselves as men"으로 풀이되어 있었다. 이 두 단어를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 "여성 동성 연애자"와 "남성동성연애자"로 번역했지만 "여성 동성 연애자"에 해당하는 "abusers of themselves as women"은 "자신들을 여자들과(with women) 남용하는 자" 란 뜻이 아니고, 자신들을 여자인 것처럼(as women) 남용하는 자" 란 뜻이다. 조그마한 부주의가 남성을 여성으로 바꿔 놓은 결과가 되었다.

사실에 있어, 헬라어를 바로 알았더라면 이런 실수를 범치 않았을 것이고, 킹 제임스 영어에 충실히 번역했더라도 이런 실수는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헬라어에도 남성명사로 되어 있고, 영어의 뜻도 남성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시편 10편 5절의 예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악한 자의 길에 대하여 킹 제임스 성경은 "His ways are always grievous,"(그의 길들을 항상 고통스럽고;)라 말씀하고 있는데,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 성경에는 정반대로 "그의 길들이 항상 번창하고"로 번역해 놓았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번역했는지 알아보기 의해 마소라 원문의 크홀(chuwl) 혹은 크힐(chiyl)의 뜻을 찾아보았으나, '뒤틀리다'는 어근에서 나온 단어로서 대부분 '고통으로 뒤틀리다', '고통스러워하다', '흔들리다', '두려워하다'란 뜻임을 알 수 있었다. '번창하다'(prosper)로 번역될 수 '없는' 단어를 어떻게 그렇게 번역했는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RSV를 비롯한 알렉산드리아 계열 성경들은 '번창하다', '견고하다', '형통하다'로 번역되어 있어 킹 제임스 성경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 도저히 킹 제임스 성경에서 번역한 것으로 보기 어려운 단적인 사례라 아니할 수 없다.

 그밖에 베드로후서 1:20절의 "성경 기록의 어떤 것도 사적 해석으로 된 것이 아니니"(no prophecy of the scripture is of any private interpretation)를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이 되어서는 안되나니"로 오역하였다. 즉, "성경에는 사적 해석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씀을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로 오역하여 개인적 성경해석을 금지하는 로마 가톨릭에게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격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롬 16장 1절에서 "교회의 섬기는 자"(a servant of the church)인 뵈뵈 자매를 "교회의 일꾼"이라 번역하여 여자 직제에 대한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그 외에도 '양시장'(sheep marker, 요 5:2)을 '양문'으로 오역하고, '아이'(child)를 '아들'(son, god 4:27)로 오역하고, '장로'(elders, 히 11:2)를 '원로'로 오역하고, '세대'(generation, 창 2:4)를 '내력'으로 오역하고, '혼인만찬'(marriage supper, 계 19:9)을 '혼인잔치'로 오역하고, 이사야 52장 14절에서는 2인칭(thee, 너)을 3인칭(him, 그)으로 바꿔 번역하기도 하고, 욥기 22장 14절에서는 '궤도'(circuit)를 '길'(way)로 오역하는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오역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심지어 신명기 32장 5절처럼 'not'을 빠뜨려 번역함으로 뜻이 정반대가 되어버린 곳도 있다. 즉 "그들의 흠은 그의 자손들의 흠이 아니니라"(their spot is not the spot of his children)인데, "그들의 흠은 그의 자손들의 흠이니라"로 오역한 것이다. 사소한 오역이나 뜻이 통하지 않는 어색한 표현이나 본문과 상관없는 의역이나 흐름의 연결이 서투른 졸역 등등 일일이 지적하자면 한이 없지만, 일단 본고에서는 이 정도의 제시로 충분하리라 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은 영어의 킹 제임스 성경에서 충실히 번역한 성경으로 보기 어렵다. 보다 구체적이고도 객관적인 평가는 독자 여러분께서 직접 비교 검토함으로써 확인하실 수 있으리라 믿기에 이 정도로 줄인다.

 다만 바라는 것은, 앞으로 보다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보다 신실하게 번역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믿고 사용할 수 있는 킹 제임스 권위역 한글판 성경이 하루속히 나와 주길 학수고대한다.

 첨언: 여기서 한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선 킹 제임스 성경과 수용원문(TR)의 관계에 대한 안티오크의 입장을 묻는 분들이 많아서, 간략히 답하고자 한다. 필자와 안티오크는 수용원문 혹은 전통원문(혹은 다수사본, 동방사본, 비잔틴 사본, 안디옥 사본)이 킹 제임스 성경과 같은 계열이며, 변개되지 않은 사본들로 편집, 교정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킹 제임스 성경과 수용원문의 차이가 있다면, 킹 제임스 성경은 완전한 성경이요, 수용원문은 불완전한 성경이란 점이다. 학자들이 킹 제임스 성경이 수용원문 베자 5판에서 번역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말하자, 킹 제임스 성경을 수용원문의 직역으로 오인하는 분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킹 제임스 역자들이 수용원문에서 100% 직역한 것이 아니라, 수용원문을 비롯한 이전의 모든 영어 번역본들, 그리고 심지어는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사본들을 총망라하여 참조하고 대조하며 연구하였을 뿐이란 사실이다. 물론 킹 제임스 성경이 수용원문과 대다수 일치하는 것은 사실이나, 차이도 적지 않으며, 오히려 어떤 학자들은 킹 제임스 성경이 수용원문보다는 구 라틴어 성경(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와 다르며,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음)과 일치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킹 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로 완전히 보존된 성경으로서 일반인들로부터 권위역본(A.V.,the Authhorixed Version of the Bible)이란 칭호를 얻었으나, 수용원문은 원본주의 학자인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것을 스테판, 베자, 엘지버 등을 거치며 교정된 것으로서 아직도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제 우리는 학자들의 업적에 지나치게 의뢰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느 성경을 사용하셨는지와 그분의 섭리의 손길을 유심히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근본이 흔들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비롯해 기초들이 무너지는 사고가 빈발하는 요즈음, 우리는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깊이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필자는 한글 구역 성경을 개역한 한글 개역성경이 완성되어 갈 무렵,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 터진 것이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성경 이슈의 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결정적 위기의 순간을 맞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낮추고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할 때이다. 주님의 긍휼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장이요, 허사가 될 것이다. 성경에 관한 한, 그 동안 바른 성경을 알리는 말씀보존학회와 안티오크의 사역은 잘한 면도 많았으나 잘 못한 점도 적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사역을 위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한국교회는 이들의 잘못한 면 때문에 잘한 면까지 매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산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루터가 반(反)유대주의자였다 해서 그의 업적을 과소평가하지 않으며, 칼빈이 쎄르베투스를 시기심으로 화형시키고, 자기와 반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처형하였을지라도 그의 업적을 과소평가 하지 않는 다.

 마찬가지로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성경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지키다가 가톨릭에 의해 화형당한 수천만 명의 순교자들의 피의 증거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도 안될 것이다. 성경은 피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피로 적셔진 의복을 입고 있다(계19:13). 어느 서경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지를 분별하려 할 때, 이성과 학문의 증거보다는 피의 증거가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향후 한국교회의 성경 논쟁은 잠복기를 지나, 서서히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숱한 논쟁과 혼란을 동반한 엄청난 진통이 한국교회의 피할 수 없는 해산 과정이 될지도 모른다. 일단 한국교회에 안겨진 이 엄청난 숙제를 풀어야 할 당사자는 몇몇 학자들이나 지도자들이나 기관이 아닌, 모든 거듭난 크리스천들임을 우리는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가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의 기본 의무요, 책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소수 학자들이나 지도자들이 아닌, 거듭난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만인 제사장의 교리는 성경말씀을 맡아 보존하는 성직자의 의무에 일차적으로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필자는 앞으로 성경 이슈에 대한 소모전보다는 건전한 탐구가 있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직접 확인하고 충분히 알기 전에는 속단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많은 말들이나 장황한 이론보다는 직접 성경을 확인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살피는 지혜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때이다. 말씀 자체의 증거와 성도들의 피의 증거만한 것이 없음을 깊이 명심하자.

 이제 말씀을 위해 주님 앞에서 각자 해야 할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일들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하나님의 긍휼의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한국교회는 반드시 성경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한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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