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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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계 신종교의 윤리성에 대한 비판적 접근(2)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을 중심으로
2008년 07월 04일 (금)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본 글은 임웅기 전도사(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 광주지부)가 전남대학교대학원 윤리학과 석사과정을 밟으며 금년 2월 논문으로 제출한 ‘한국 개신교계 신종교의 윤리성에 대한 비판적 접근 -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을 중심으로 -’을 저자의 허락에 의해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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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산 새주파와 원산 예수교회

1) 철산 새주파
(1) 새주파 김성도와 신비체험

(1) 새주파 김성도와 신비체험

먼저 ‘새주파’의 뜻은 ‘새로운 주님을 믿는 교파’ 또는 ‘분파’ 라는 뜻으로, 김성도라는 여인을 ‘구세주’(메시야) 또는 ‘재림예수’로 추종하던 사람들을 지칭하여 불렀던 이름이다. 새주파의 창교주 김성도(金聖道, 여)는 1882년 7월 1일(음력)에 태어나 만 17세가 되던 해 자신보다 23세 많은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장좌동 457번지의 정항준(鄭恒俊, 40세)과 결혼을 했다. 남편은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다섯 형제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으며, 평안북도 철산에서 벼슬을 하였다. 김성도(金聖道)와 결혼하기 전에 두 번의 결혼을 하였는데 첫째 부인에게서 딸 하나만을 낳았고 둘째 부인에게서는 아들 둘을 얻었다. 그러나 정실부인이 아님으로 삼촌과 친척의 강요에 의해 김성도와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김성도는 둘째부인에게서 모질게 시집살이를 살았다고 한다. 한국의 종교단체 실태조사연구에서는 정항준이 김성도에게 새 장가를 가게 된 계기가 둘째 부인에게서 난 2명의 아들이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김성도는 다행히 첫 번째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으나 태어난 지 약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첫째 아들이 죽은 후 그 이튿날에 둘째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또다시 딸 쌍둥이를 낳고 난 뒤에야 1906년 6월 25일에 대를 이을 둘째 아들 정석천(鄭錫天)을 낳게 된다. 그러나 김성도는 정석천을 낳고 난 후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각종 약을 먹어보았으나 별 다른 효험이 없자 급기야 무당을 불러 굿을 치러보았지만 그것도 효험이 없었다. 그때 마침 평안북도 철산군을 전도 순례하던 노권사(이름은 불명)는 김성도를 보고 ‘예수를 믿어야 낫는 병이다’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김성도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약 3개월 정도 되어서 정신이상 증세가 치료되었다. 아들 정석천은 모친 김성도의 나이가 33세였을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났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사건이 일어 난 지 1년 뒤에는 아들 정석천이 병을 앓게 되자 김성도는 자신의 기도를 통해 아들의 병이 치료되는 경험을 한 후 기독교회에 정식으로 입교(入敎)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 정항준은 전통적인 유교가문 출신인데다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인 김성도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심한 박해와 구박을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김성도는 정석천보다 다섯 살 아래인 셋째 아들 정석진을 낳았고, 남편 정항준은 결혼 17년만에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남편이 죽은 후 김성도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성서의 난해한 문제를 풀기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1923년 4월 2일(음력)에는 기도 중에 입신(入神)을 한 후 처음 예수를 만나 예수로부터 “인류의 죄가 음란에서 비롯되었으며, 사람들의 불신으로 예수 자신이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제거하라는 당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4월 12일(음력) 예수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재림주는 육신을 쓴 인간으로 한반도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

많은 사람들이 김성도의 계시방식을 토대로 자신을 ‘재림주’로 만들었으며 김성도가 받은 계시가 재림주 만드는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김성도는 계시의 내용을 길이 2m와 넓이 30cm가 되는 종이 12장에 기록한 후에 ‘세상에 알리라’는 예수의 지시대로 담임목사에게 말씀드렸더니, ‘사탄의 역사이니 자제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계시내용과 신비체험들을 교우들에게 알렸고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김성도의 집에 출입하게 되자, 장로교단에서는 1925년경에 김성도를 징계하였고 소속교회에서도 그녀를 출교시켰다.

(2) 새주파의 창립, 통합, 분리
출교당한 김성도는 자신의 집을 집회소로 만들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나와 김성도의 집으로 찾아왔다. 이들 중에는 영적인 능력과 신유의 은사를 받은 김성도를 징계한 기성교회 목회자들에게 하늘에서 큰 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자 다시 기성교회로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김성도의 장손 정수원이 1930년 3월에 출생을 하게 되고 1931년 2월에는 딸 정석현에게 “새 주님이 오셨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계시에 따라 온 가족이 사흘 동안 금식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계시를 통해 받은 ‘감사의 노러를 부르면서 ‘새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찬양하였다. 이 감사의 노래는 후손들에 의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새주파는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자 원산 예수교회의 이용도, 백남주, 이호빈 등과의 연대를 통하여 살아남을 방도를 모색하게 된다. 이들은 1932년에 김성도 집에서 만난 후 1933년 10월경에 김성도의 새주파와 원산 예수교회가 통합하게 된다. 예수교회의 중앙선도원이 설립되기 전,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이 예수교회 전도사격인 복음사로 임명되었으며 당시의 새주파 교인은 130명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비주의적인 새주파와 정규 신학을 공부한 자들이 세운 예수교회는 쉽게 화합하지 못했고 1934년 5월호를 끝으로 예수교회의 소식지에 ‘새주파 장좌동 교회’에 대한 기사가 더 이상 실리지 않는다. 1935년 봄 무렵에 예수교회의 창립주역이었던 백남주가 ‘천국 결혼잔캄소동으로 원산 신학산에서 쫓겨나와 김백문과 김남조 그리고 가족들을 데리고 김성도의 ‘새주파’에 합류하게 된다. 이때부터 김성도 새주파는 예수교회와 단절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경찰의 간섭이 여전했기 때문에, 새주파는 백남주를 통하여 조선총독부의 종무과에 정식 종교단체로 등록하여 탄압을 피해보고자 한다. 과거 원산시절에 예수교회를 조선 총독부에 등록시킨 경험이 있는 백남주는 이 일을 맡기에 적임자였다.

(3) 백남주 새주파 합류와 성주교 창립 및 현황
시간이 조금 지난 1935년 10월경에 새주파는 조선총독부의 종무과로부터 ‘성주교(聖主敎)’라는 이름으로 종교단체 등록을 허락받았으며 대표자는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이었다. 성주교 창립예배 때 백남주의 제자 김백문이 사회를 담당했다. 김백문은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에서 1~2개월 정도 생활하였고, 스승 백남주를 따라 성주교에 들어와 신령한 체험을 했지만 대개 신비주의 단체들이 3년을 넘기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고민을 하였다. 김백문은 스승 백남주가 인도하는 부흥집회에 따라다녔으며, 때로는 직접 김백문이 부흥회 강사로 초청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 후에 성주교는 성장하여 장좌동 외에 ‘안주, 평양, 정주, 숙천, 해주, 서울, 원산 등을 포함한 약 20 여 군데에 집회소’를 가졌고, ‘한국 종교단체 실태조사 연구(2001)’에 보면 1940년경에 성주교의 교당 수효가 평남 8곳, 평북 5곳, 함남 2곳, 함북 3곳이며, 교직자 수는 평남 8명, 평북 3명, 함남 3명, 함북 4명, 신도 수는 평남 94명, 함남 2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성도는 다음와 같이 신도들에게 계시의 내용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① 죄의 뿌리는 선악과라는 과일을 따 먹은 것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남녀 관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 즉 음란이 타락의 동기가 되었다. ②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돌아가시지 않고 뜻을 이루어야 했다. ③ 하느님께서 2대 슬픔을 갖고 계시는데 그 첫째가 아담이 타락하는 순간을 아시면서도 간섭하시지 못하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으셨던 슬픔이었다. 둘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보시는 슬픔이었다. ④ 재림주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 ⑤ 재림주는 한국으로 오시며 만인이 한국을 신앙의 종주국으로 알고 찾아오게 된다.

김성도가 계시 받았다는 이와 같은 내용은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는데, 그 가운데 스스로를 말세에 ‘타락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로 자칭하며, 성서에서 약속한 재림주’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자신을 재림주로 선포하는 사람들은 김성도의 주장과 똑같이,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형태부터 계시를 받은 내용까지 모두 동일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예를 들어, ①번의 죄의 뿌리는 ‘선악과를 따 먹음이 아니라 남녀 관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고 하는 주장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교주 문선명과 ‘기독교 복음 선교회’의 창교주 정명석의 실낙원의 내용과 일치한다. ②번과 ③번의 내용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교리인 ‘원리강론’의 내용과 유사하다. ④번에서 ‘재림주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라고 하는 주장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교리서인 ‘원리강론’의 내용과 일치한다. 또한 ⑤번의 재림주는 한국으로 오시며 만인이 한국을 신앙의 종주국으로 알고 찾아오게 된다는 계시내용도 한국에서 자신을 메시야 및 재림주로 주장하는 창교주들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교리이다. 심지어는 외국에서 1904년경에 한국으로 들어와 정착한 제 칠일 안식일 재림예수교회에서 출교당한 안상홍이 세운 ‘안상홍 증인회’에서도 ‘성서에서 예언한 재림주는 한국에서 나오며 바로 안상홍 자신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김성도가 ‘죄의 뿌리는 음란’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은, 그녀가 출석한 교회 담임목사가 남녀 간의 연정문제로 구속이 된 후, 이 문제로 고심하고 깊이 기도하던 중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는 환청을 듣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이 교리는 삼각산 기도원 정득은의 『生의 원리』,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문선명의 교리서인『원리강론』, 변찬린의『성경의 원리』의 내용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4) 성주교 김성도의 투옥과 몰락 그리고 재건
일제의 총독부는 한반도에서 자생한 유사종교에 끊임없이 탄압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 전남 강진 출신인 김영수라는 청년이 성주교에 입교한다. 그는 1943년 어느 날에 전도활동을 하다가 한 남자를 만나 성주교인들 사이에만 비밀스럽게 오고가던 ‘일본의 패망과 한민족의 독립’을 말해버리는 실수를 범한다. 김영수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은 이 남자는 일본 경찰 고등계 형사라는 신분을 숨기고 장좌동에 있는 성주교 교회 집회를 약 1주일 동안 참석하고 돌아가 들은 내용을 도경(道警)에 보고한다.

그 결과 1943년 가을, 김성도와 두 아들 정석천과 정석진 그리고 신도 10여 명이 함께 구속되었다. 김성도는 심한 고문과 육체적 고통을 당한 뒤 3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투옥기간 중의 고문으로 1944년 4월 만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음을 맞이할 때 김성도는 가족들에게, “하느님께서 다른 구원자를 보내 뜻을 이룰 것이며, 이 구원자는 음란집단으로 오해를 받아 핍박을 당하고 옥고를 치를 것이니 이 교회를 찾아가라”는 유언을 남긴다.

맏아들 정석천은 모친의 유언을 마음에 품은 채, 고향인 평안북도 장좌동을 떠나서, 1944년 6월에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에 있는 광산 하나를 인수하여 광산업에 뛰어 들었다. 김성도의 죽음과 장좌동 집회소의 방치로 성주교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지만 신앙적 열기는 평양에 위치하고 있는 성주교 평양교회로 이어지게 된다. 성주교 평양교회는 장좌동 성주교회의 지교회로, 이일덕과 허호빈 부부가 책임지고 있었다. 이 부부는 자신의 집에 방이 2개가 있었는데 하나를 성주교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하나는 살림하는 방으로 사용하였다. 김성도의 장손 정수원이 평양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바로 이 집에서 숙식을 하였다. 평양 집회소는 1944년부터 공산당에 의해 와해되는 1950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여러 가지이지만 평양 사람들은 주로 ‘복중교’라고 불렀다. 그 외에 성주교의 지교회이기 때문에 ‘성주교 평양교회’ 또는 ‘성주교단 복중파’ 등으로 호칭되기도 하였다.

김성도에 의해 복락원이 실현될 줄 알았던 성주교 평양교회 사람들은, 새주님 김성도가 사망하자 그녀의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일덕의 부인 허호빈이 3개월 째 기도하던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배에서 움직임이 일어 벌떡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때 주님이 나타나 허호빈을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허호빈이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부인을 했으나, 주님이 허호빈의 몸에 임하였고 직접 말씀을 해주셨다는 것이다. 허호빈은 하루에 사과 세 개만 먹고 40일 동안 기도만 했으며 신도들은 손을 잡고 빙 둘러 앉아 ‘새 주님 역사’를 외쳤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우는 성주교 평양교회 신도들을 가리켜 ‘복중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5) 허호빈이 받은 계시 및 평양교회의 몰락
이일덕과 허호빈 부부를 중심으로 평양 성주교 신도들의 신앙생활이 시작되었고, 장좌동 성주교에는 없던 다른 계시들이 허호빈에게 임하기 시작했는데, ‘철산의 김성도 할머니가 재림주가 아니라, 재림주는 남자’이며 ‘주님은 한국인으로 오셨기 때문에 재림주의 옷을 만들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재림주의 옷, 갓과 바지저고리 등을 만들었다. 재료들은 명주와 무명을 사용하였고, 명주를 한 필 사오면 숫자를 맞추어서 12번씩 세탁하고 나서 12번 씩 다듬었다. 또한 ‘잔치를 준비하라’는 계시를 받고 정성껏 12번씩 쓸고 씻었으며, ‘사탄들의 방앗간에 가서 갈지 말고 집에서 갈아서 하라’고 해서 집에 있는 맷돌에다 갈아서 절편과 찰떡을 만들어 상을 차려놓고 경배를 드렸다. 평양의 복중교는 기도 대신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경배만 드렸다. 1946년경에 허호빈은 흩어진 성주교(聖主敎) 교인들을 3-4백 명 모아서 그들과 함께 재림주의 옷을 뒤주에 꽉 채울 정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허호빈은 1946년 6월 2일에 재림의 주님이 오신다는 계시를 받지만 내부고발이 공산당 내무서원들에 접수되어 신도들과 함께 구속된다. 공산당원들은 허호빈과 신도들이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은 옷을 전부 압수하지만 복중교 신도들은 다시 1년 간 정성을 들여서 재림주 옷을 예전만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복중교 신도들은 ‘재림주가 평양에 오신다’는 계시를 확고히 믿었기 때문에 해방 후의 공산치하가 되었을 때나 6.25전쟁이 터지고 유엔 공군기의 폭격이 있었을 때에도 상당수가 평양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 당시에 출감한 허호빈과 신도들은 병사했거나 전쟁 중에 희생당했다는 소식만 무성한 채 그 후의 소식은 없다.

(6) 6.25 전쟁 후에 새주파의 행적
6.25전쟁이 발발하자 평안북도 철산에 거주하고 있던 새주파 사람들은 거의 남한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김성도의 딸 정석현과 정경옥(정수원의 누이동생)은 처녀의 몸으로 모친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고향에 남았다. 그러나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은 1944년에 경북 칠곡군에서 광산업에 손을 댄 후 대구에서 그의 가족들과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김성도 모친의 유언을 가슴에 간직 한 채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다.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구원자’를 기다리던 김성도의 큰아들 정석천과 셋째아들 정석진 그리고 월남하여 부산에서 살고 있었던 맏딸 정석온은 일간신문에 난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기사를 보고, 통일교를 찾아가 어머니의 유언과 일치한다고 생각하여, 1955년 6월 25일에 통일교에 입교하게 된다. 김성도의 자녀들보다 먼저 통일교에 등록한 새주파 평양교회 교인들도 있었고, 김성도 자녀들의 입교소식을 듣고 뒤를 따라 통일교에 들어 온 새주파 신도들도 있었다. 그러나 정석진은 자신의 집(대구 봉산동 22번지)을 통일교 대구 집회소로 제공할 정도로 열심이었지만, 문선명의 첫째 부인 최선길이 비난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달라졌으며 결국 모친 김성도가 남긴 유언이 통일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어 제주도로 떠난다.

그곳에서 정석진은 생식(生食) 생활과 함께 40일 금식기도를 시작한다. 기도 중에 예수가 나타나 “내가 마신 잔을 너도 마시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정석진은 “마시겠습니다”라고 응답을 했더니 “내가 마시던 잔을 너도 마셔 보라”고 하여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과 같이 정석진 스스로 십자가에 손을 대고 못을 박았으며 가시면류관을 썼다. 정석진이 썼던 가시 면류관을 파묻어 둔 장소에서 “나는 하늘의 선발대로 나선다”는 쪽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과장 되거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양쪽 손에 못을 박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건 후에 정석온의 아들인 조카 장경균(1943년 출생)이 정석진을 추종하였고, 제주도에서도 수도(修道)에 동참하려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이북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몇몇 사람들도 합세하게 되었다. 후에 정석진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과 소백산의 ‘가멜 기도원’에서 각각 약 3년 정도 수도에 정진하였으며, 다시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우라리에 있는 ‘히리미기산(구일산)’으로 옮겨, 생식(生食)하는 마을을 형성하고 살다가 1994년에 세상을 떠났다. ···

지금까지 김성도의 새주파(성주교)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김성도의 사망이후에 나타난 성주교 평양교회(복중교)와 김성도의 유언을 따라 나선 자녀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들은 후손의 출산 및 교세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아 지금은 거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김성도의 새주파 교리가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을 거쳐 통일교 문선명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원산 예수교회
초원(初園) 김백문의 스승이 되는 백남주는 함경남도 갑산군 출신으로 출생날짜가 1901년 1월 3일이라고 이용도의 제자 변종호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용도 목사가 소천하자, 흑괴(黑怪: 백남주를 지칭함)가 순진한 성도들을 이용하여 교단을 조직하여「XX교회」라는 것을 만들고, 교회 기관지로 「XX」라는 것을 발행하고 교회의 성탄일을 1월 3일로 지키게 하였는바, 1월 3일은 흑괴(黑怪)의 생일(生日)이었다.…(중략) 우연한 기회에 흑괴(黑怪)의 호적을 보았더니, 분명히 그는 1월 3일생이었다. 이 한 가지 1월 3일을 주께서 알려주신 예수의 탄일이라고 믿게 한 것만으로도 그가 구세주, 주님, 예수님 행세를 하려고 연극을 꾸민 것이 분명하다.

1월 3일은 성주교회, 원산교회, 이스라엘 수도원 등에서 예수의 탄생일로 지키는 날짜인데, 백남주의 생일과 일치한다고 하니 논란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남주는 26세에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 뒤인 1930년 3월 12일에 동기 22명과 함께 제25회 졸업생이 된다. 신학교를 졸업한 백남주는 목회보다는 함경남도 원산으로 가서 ‘루씨 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다. 원산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과 일제시대에 가장 큰 노동쟁의로 유명한 곳이다. 루씨 여학교와 원산 여자 성경학교가 동일한 곳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원산에 있던 이 학교는 중등교육을 담당한 개신교 미션학교로 의료시설 등도 갖추고 있었다. 백남주와 한준명은 처남매부지간으로 한준명의 누이 한인자가 백남주의 부인이므로 백남주와 한준명의 관계는 신앙을 넘어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이다.

(1) 원산 예수교회의 탄생
원산에서 백남주가 어떻게 강신녀(降神女) 유명화를 만나게 되었는지는 두 가지의 주장이 있다. 그 하나는 유명화가 마르다 윌슨 여(女)신학교 학생이던 시기에 백남주가 신학교 교수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유명화와 백남주의 부인 한인자 및 한준명이 먼저 기도모임을 시작하였고, 나중에 백남주가 이 모임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유명화의 강신극은 백남주가 원산에 오기 전 1927년부터 있었고, 그녀는 원산 감리교회 평신도였으며 남편의 이름이 이태길이라는 주장과 박승환 장로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그녀가 전(前) 서울시장 김태선의 형수라는 주장도 있다.

유명화의 강신극이 주목을 받게 된 시점은 1932년 2월쯤으로 감리교 출신 백남주가 이용도에게 유명화를 소개시켜 준 것이다. 이용도가 유명화를 만나기 전에 백남주와 한준명이 이미 유명화와 함께 기도모임에 참석하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유명화는 이때 백남주와 한준명 그리고 박승걸의 아들들이 성자(聖者)로 특별한 종교적 사명을 여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또한 백남주와 한준명이 스베덴보리(Swedenberg)의 저서를 읽고 여러 해를 기도하던 중 신(神)이 유명화에게 친히 임(臨)하여 대언하기를 “백남주와 한준명 그리고 박승걸이 1933년에 새 교회를 세울 것을 명(命)하셨다”고 한다. 유명화의 예언에 따라 백남주와 한준명이 먼저 나서서 기성교회와는 구별되는 새 교회를 창립하자는 움직임을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이호빈, 이용도, 이종현이 합류를 하게 된다. 1932년에는 한준명이 이용도의 소개장을 받아 평양을 방문하였고, 함께 동행했던 여인 이유신을 집회 가운데 세워 강신행사를 하였다. 평양교계에서는 이 행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어, 결국 1932년 11월 28일에 임시회의를 열어 한준명, 백남주, 황국주를 각각 그 소속 노회에서 조사하기로 하였고, 한준명을 소개시켜 준 이용도 목사도 감리회 경성 지방회에서 조사하기로 결의를 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기성교단 측에서 이단으로 결의되어 제명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유명화를 필두로 기도모임을 계속하였고, 1933년 1월 3일 새벽에 모든 신도들에게 흰옷을 입고 백남주 자택으로 모이라는 전갈이 내려졌다. 그 날 새벽 3시쯤에 50-60명의 신도가 흰 옷을 입고 모였으며, 예배가 시작되었다. 백남주의 설교가 끝날 즈음에 유명화에게 주의 성령이 임재하여 영계(靈界)의 심판이 눈에 볼 수 있도록 모든 신도들에게 연출되었다. 그 자리에 흰 옷을 입은 신도들은 오른쪽으로 불려갔고, 그렇지 않은 신도들은 왼편으로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오른편과 왼편으로 분리된 신도들은 희비가 엇갈렸고, 대성통곡하고 있는 왼편에 있는 신도들을, 모두 흰옷으로 갈아입히고 왼쪽으로 합류시킨 후 회개와 구원에 대해 각인을 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교회’의 설립이 공표되었으며, ‘예수교회’라는 글씨는 ‘푸른 바탕에 흰 글씨로 쓸 것’과 가운데 ‘+(십자가) 표시는 붉은 색으로 하라’는 신탁이 있었다.

또한 1933년 1월 3일에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의 이름으로 “새 생명의 길”이란 제목의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새 생명의 길이라는 선언문을 통해,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이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구원의 과정을 ‘삼시대’로 구분하는 것이다. 제1시대는 구약시대, 제2시대는 신약시대, 제3시대는 새 생명의 길이라는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이 삼시대론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와, 문선명의 원리강론에서 말한 성약시대, 복귀섭리완성시대, 부활완성섭리시대 그리고 정명석의 30개론에 나오는 실체시대와 애인시대, 더불어 이만희의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에서 가르치는 실상시대, 말씀시대, 계시록시대에 영향을 준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32년 11월 28일에 평양노회로부터 이단으로 단정된 백남주, 한준명과 이용도는 더 이상 기성교단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용도는 감리교 연회에 목사 사직서를 제출하게 되고, 이즈음에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던 백남주는 장로교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감리교 출신 목사인 이용도에게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1933년 6월 3일에 이용도, 백남주, 이종현의 이름으로 ‘새 교회 창립 선언서’가 발표된다. 6월 6일에서 6월 8일까지 새 교회 창립을 위한 모임이 평양교회에서 있었는데 명칭이 ‘예수교회의 창립공의회’였다. 이 자리에는 116명이 참석했는데 여기서 총회장격인 선도감(宣道監)에 이용도를 선출하고 예수교회 헌장 및 그 세칙의 기초위원으로 이용도, 이호빈, 백남주를 선출하였다.

백남주는 예수교회의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사흘에 걸친 창립공의회가 끝나고 6월 9일에 평양 시내의 회중교회당에서 낮에는 한준명이 밤에는 박승걸이 각각 결혼식을 이용도 목사의 주례로 거행하였다. 유명화가 신탁하였던 그 결혼식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8월 중순에 전도에 관한 신고서류를 일제 총독부에 제출하였고, 포교소가 하나 둘 씩 생겨난다.

(2)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 설립과 백남주의 천국 결혼잔치
예수교회가 설립된 후 1933년 9월 9일을 전후로 해서 백남주를 책임자로 하는 부설 수도원인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이 세워졌다. 그것은 60-70평 정도 되는 한 동의 단층건물이었으며 지붕은 양철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1933년 10월 2일에 이용도가 지병으로 사망하였고 10월 5일에 임시공의회가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 강당에서 열려 후임 선도감으로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하고 예수교회로 들어온 이호빈이 선출된다. 그리고 1933년 11월 1일에는 중앙선도원(中央宣道院)이 평양에 세워졌으며, 오후 8시에 ‘예수교회 설립 선포식’을 거행한다.

백남주는 1934년 1월에 창간되는 기관지 『예수』의 편집책임을 맡게 된다. 신학산에서 생활하는 수도생들은 남자 5명, 여자 6명 정도였고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 교수진은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이었으며 신학산의 목적은 예수교회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호칭은 기성교회의 ‘전도사(傳道師)’와 ‘목사(牧師)’ 대신에 목회자가 평신도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한다는 의미로 ‘복음사(福音使)’와 ‘목사(牧使)’로 각각 불리어졌다.

1934년에 백남주는 매일 아침 2~3시가 되면 새벽기도를 한다는 명목 하에 여(女) 신학생 방에 들어가서 날이 밝도록 나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1934년 겨울에 백남주는 처녀와 새벽 3시에 눈길을 걸으며 천국결혼을 미리 연습하였다. 이런 일이 지나고 3~4개월 정도 될 즈음에 처녀는 임신을 하였다. 처녀 이름에 대해 혼선이 있는데 김인서는 처녀조필(處女助筆) ‘이필녀’라 하고, 민경배는 ‘김정일’이라고 하며 변종호는 성첩(聖妾) 김O숙(김정숙)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결혼 잔치를 미리 흉내 낸 것은 백남주가 첩살림을 정당화하려고 연극을 미리 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3년에는 유명화가 ‘삼성자(三聖者)’를 예언했지만 모두 빗나갔다. 한준명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지만, 딸을 출산하였고 백남주는 사생아를 낳았다. 이 천국결혼 잔치 사건으로 인해 백남주를 경계하는 세력들이 신학산에 생겨났다. 어느 날 백남주는 가족기도회를 마친 후 부인 한인자에게 주님이 ‘부인을 괴로운 세상에서 불러내어 주님 곁으로 데리고 가서 영광의 생활을 해 주겠다’라고 하면서 ‘40일 금식기도를 부인에게 주님께서 지시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한인자는 극구 부인했으나 남편이 받은 주님의 말씀이므로 순종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40일 금식기도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인 1934년 7월경에 죽게 된다. 그 뒤 2개월이 지난 9월경에 백남주는 처녀조필과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청첩장을 돌렸고 11월경에 딸이 태어났다.

이 사건을 지켜본 예수교회 교직자들은 천국결혼잔치 사건의 장본인인 백남주와 처녀조필을 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백남주는 『예수』지의 편집장과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의 수도감(修道感) 자리를 사임하고 원산을 떠나게 된다. 이 때 따라나선 이가 있으니 초원 김백문이다. 당시 나이가 17세로 신앙의 어머니격인 김남조 여사의 소개로 신학산을 찾아와 백남주의 가르침을 받았다. 백남주가 떠난 후 한준명은 강신행사를 하지 않고, 예수교회에 있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다. 그리고 귀국한 후 1950년대 까지 원산 예수교회를 책임지고 있다가 중앙신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한 다음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강신녀(降神女) 유명화는 1935년 6월 이전에 장로교회로 귀의하게 되고, 6.25 전쟁 뒤에 서울에 이주하여 살다가 1970년대에 사망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3) 김성도 ‘새주파’와 백남주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을 떠난 백남주와 처녀조필은 1935년 봄 즈음에 김성도 ‘새주파’가 있는 평안북도 철산을 향하여 맨발로 걸어갔다. 또한 백남주는 김백문과 함께 새주파의 지교회를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강사가 되었으며 일제 탄압으로 곤혹을 치르던 ‘새주파’를 조선 총독부 종무과에 등록시키는 일에 앞장을 섰다. 백남주는 자신이 일으킨 ‘천국결혼잔캄에 대해 뉘우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는『혈명(血命)』,『천주일련(天珠一聯)』등의 저서를 펴낸다.

또 하나 충격적인 일화가 전해내려 오는데, 백남주는 성주교단을 조종하여 평안남도 숙천에서 총회를 소집하게 한 후에 거기에 모인 참석자 49명에게 목사 안수식을 거행하였으며, 참석자들의 숙소를 지정하는 데 부부가 아닌 일남일녀(一男一女)가 혼숙(混宿)하도록 침실을 배정했다. 그런 후에 범간(犯姦)하지 않으면 천당에 간다고 하였다. 또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25세의 총각 박○길과 42세의 과부 전도사 김○신과의 ‘거룩한 성교’를 지시했으며, 둘의 관계로 인해 딸을 출산하는 사건이 있었다.

1944년 4월경에 성주교는 김성도의 사망으로 장좌동 집회소가 방치되었고, 신도들은 사실상 뿔뿔이 흩어졌으며 김백문은 1940년대 초반에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서울로 이주해 와 있었다. 백남주와 처녀조필은 월남하여 서울에 도착했는데 ‘천국결혼잔캄로 얻은 딸이 아니라 ‘명세(明世)’라고 이름 하는 어린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있었다. 그리고 1995년 4월 13일 경기도 안산시에서 처녀조필은 사망을 한다. 이후에 백남주는 예수교회의 지인들을 찾아 나섰고 1947년 5월에 이호빈은 이용도를 기리기 위해 전영택 및 변종호와 함께 세운 중앙신학교 문을 두드린다. 이호빈은 가르치고 싶다고 의사를 피력한 백남주를 교수요원으로 채용하려고 하지만 백남주를 위험 인사로 간주하는 변종호의 반대로 무산된다.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백남주는 원산의 루씨 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만난 유증소(柳曾韶)의 도움으로 충남 공주에 있는 공주 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유증소(柳曾韶)의 조카 유동식의 증언에 의하면, 백남주는 이름을 백상조(白祥朝)로 바꾸고 어린 아들과 단 둘이 자취생활을 하면서 문화사를 강의했다. 또한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었는데 동료교사인 유희세, 유동식이 참여를 했다. 유동식은 백남주에 대해 ‘동료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몸은 가냘프고 자주 병고에 시달렸다’고 기억했다. 또한 ‘그의 사상과 지식의 깊이는 알 수 없었으며’, 해외에 유학하여 신학박사(Th. D.) 학위를 취득한 이가 고작 2~3명밖에 없던 시절에 유학파가 아닌 백남주가 ‘영어와 히브리어, 그리스어(헬라어) 그리고 기타 고전어 뿐만 아니라, 한문에도 능통한 것에 대해 놀라웠다’고 밝히고 있다.

백남주는 1949년 한 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어린 아들만을 남겨 둔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백남주의 상여를 멘 사람들은 공주사범학교 학생들이었으며, 그의 아들 명세(明世)는 어디로 갔는지 전혀 행방을 알 수 없다. 또한 이스라엘 수도원을 만든 김백문은 스승 백남주의 죽음을 애절하게 여겼으며 평생토록 스승을 존경하면서 살았다. 백남주는 이용도의 제자 변종호를 비롯한 기성교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지만 이스라엘 수도원 신도들은 백남주를 추앙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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