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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바리데기>
소설가 황석영이 찾고자 한 '생명수'
2007년 09월 20일 (목) 00:00:00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황석영 씨의 신작 소설 <바리데기>를 만났다. 제목에서부터 얼핏 느낄 수 있듯이 기구한 생으로 태어난 한 소녀의 삶의 역경과 희망을 그려주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 저변에 깔려 있는 사상적 배경은 ‘바리공주’라는 전승되는 작자 미상의 무속신화다. 왕가에 일곱 번째 공주로 태어나 왕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버림을 받은 바리공주가 죽어가는 왕을 위해 저승에 가서 불사약을 구해온다는 효녀담의 이야기다.

필자는 일반 소설에 대해 그리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 ‘소설의 내용이 다 그렇지 뭐’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바리데기>를 손에 잡은 이유는 그 내용보다도 먼저 저자 때문이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이후로 <객지>, <삼포로 가는 길>, <장길산> 등으로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아왔다.

그가 4년 만에 굵고 날렵한 필력을 휘두르는 작품을 내놓았다는 데에 흥미를 느꼈다. 사실 그의 작품을 통해 글쓰기에 대해 한 수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지난 주 금요일 아침 일찍 서점에 들러 주위도 둘러보지 않고 곧장 <바리데기>를 손에 잡았다. 이후 책장을 넘기면서 한 발 한 발 황석영의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6시간 만에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중간에 점심 먹은 시간을 빼면 조금 덜 걸린 셈이다.

<바리데기>는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들며 인간의 삶이 어떠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잘 표현해 준다. 그 삶은 ‘고통’이다. ‘바리’라는 한 소녀의 인생을 통해 그 모습이 잘 그려진다. 저자는 그 소녀의 삶으로 오늘 전 세계에 처한 현실의 모습을 표현해 보려고 했다. 그 현실을 이길 해결책으로 저승에서 가져올 수 있는 ‘불사약’을 제시했다. 인간의 힘이 아닌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려고 한 것이다.

현실의 <바리데기>

‘우리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던 때에 나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어려서는 청진에서 살았다.’는 말로 <바리데기>는 시작한다. 북한 땅 청진의 한 바닷가 마을을 그려준다. 언덕 위에 작은 집, 푸른 풀밭, 아침 저녁 노을로 붉게 타오르는 태양 등 지극히 평온한 모습이다.

바리는 일곱째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남아를 선호하는 가정에서 바리의 탄생은 말 그대로 저주였다. 바리의 어미는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핏덩이를 자신의 옷자락으로 감싸 길 건너 소나무 숲에 버리게 된다. 죽든지 말든지.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고통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저자는 바리의 고통을 고향에서 세계의 현실로 내몰아간다. 남북분단의 현실과 북한 기근, 고향인 북한 탈출과 중국에서의 탈북자 생활, 그리고 9.11테러, 이라크 전쟁, 런던테러, 쿠바 콴타나모 수용서 등의 오늘의 역사 속으로 말이다.

   
 
   ▲ 저자 황석영
 
저자는 북한의 기근 상황과 중국으로의 탈북의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 남북분단이라는 우리네 현실 속에서 마치 일급비밀의 서류를 넘기는 듯한 긴장감을 갖게 해 준다. 저자는 북한을 잘 알고 있다. 지난 1989년 북한을 방문한 이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방북기를 발표한 그의 이력이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바리는 이후 수차례 삶의 터전을 옮겨 다닌다. 그것도 언어, 문화, 관습이 전혀 다른 외국 땅으로 말이다. 단지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닌다는 바리의 삶을 통해 우리네 고통을 설명해 주려는 것은 아니다. 헤어짐이다. 모든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가장 큰 고통을 표현하고 한 것이다.

탈북 과정에서 바리는 아비, 어미 그리고 언니들과 헤어진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다. 오직 할머니와 한 명의 언니 그리고 칠성이(강아지)만 남게 된다. 그나마 중국 땅에서 잠시 만난 아버지도 식구들 찾으러 나간다며 소식이 끊긴다. 백두산 자락의 겨울은 아름답지만 혹독했다. 그 겨울을 넘기면서 할머니와 언니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

바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떠나갔다. 저자는 바리의 고통을 영국행 밀항선 맨 밑바닥에 실려있는 그녀의 모습으로 굵고 빠르게 표현하고 있다.

‘저 아득한 아래쪽에 어릴 적 보았던 연극의 장면처럼 흰 저고리에 검정 몽당치마 차림의 내 육신이 반듯이 누워 있는 게 보인다. 검은 옷차림에 얼굴도 짙은 그늘에 가려진 악령들이 내 옷을 벗긴다. 여기서 보면 살덩이는 한줌도 안 되어 보인다. 그들은 칼을 들고 내 몸을 대번에 잘라낸다. 아악, 분리된 넋이 놀라서 한껏 비명을 내지른다. 두 팔을 떼고, 두 다리를 떼고, 머리를 떼어 던진다. 그들의 뒷전에도 검은 영들이 무리를 이루어 몰려서 있다. 그들은 떼어낸 사지를 집어던져준다. 요란하게 낄낄대는 웃음소리와 더불어 검은 영들은 내 살을 먹기 시작한다. 몸통을 맡은 영들은 나의 뇌를 가르고 창자와 간 따위의 내장들을 집어들고 먹는다.’

영국 땅에 도착한 바리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중국에 있을 때 배웠던 발 마사지가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유용했다. 바리는 9.11테러의 후폭풍을 만나게 된다. 미국 땅에서 발생한 그 사건이 영국 땅에까지 미친 것이다. 불법체류자에 대한 경계심이 증오심로 발전하면서 바리는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녀를 잘 돌봐주었던 파키스탄 출신 압둘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었다. 바리는 그의 손자 알리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때 나이 열여덟 살이었다. 알리의 동생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쟁에 연루되면서 남편 알리도 동생을 찾으러 떠나게 된다. 그때 바리는 임신중이었다.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낳고 키우게 되는 바리의 고통이 여기에서 또 끝난 것도 아니다. 영국행 밀항선에 같이 동행했던 샹언니를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되었는데 결국 그녀로 인해 갓 태어난 아이가 사고로 죽게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바리의 고통은 쿠바 콴타나모 수용소에 갇혔던 남편 알리가 돌아오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게 된다. 바리가 다시 만난 알리와 런던시내를 거닐다가 런던 지하철 폭탄테러를 경험하는 것으로 소설은 종료된다. 우리네 삶에서 고통은 중단되지 않음을 설명하려는 것일까?

   
 
   ▲ 황석영 씨의 필력이 살아있다
 
초현실의 <바리데기>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질 때마다 바리는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바리공주’ 이야기를 되새긴다. 그럴 때마다 바리는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초현실의 세계로 말이다. 저자는 바리의 고통을 초현실의 세계에서 위로하고 그 삶의 해법을 찾으려고 한다. ‘바리공주’라는 무속설화의 내용과 바리의 삶을 교차시킨다.

바리는 종종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세계로 들어간다. 이미 죽인 이들의 혼을 보기도 하고 또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바리의 초현실적인 삶은 발 마사지를 할 때 잘 나타난다. 손님들의 발을 보기만 해도 상대의 지나간 과거의 모습을 마치 동영상을 보듯 훤히 알아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바리는 이것을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과거가 한결같이 고통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리는 결국 ‘생명수’를 찾으러 초현실 세계로 떠난다. 핏덩이가 죽은 직후다. 그 생명수를 통해 자신은 물론 모든 이들의 고통을 치료하고자 하려는 것이다. 그곳은 서천의 끝 곧 저승, 지옥이다.

바리는 이미 죽은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가며 지옥의 길을 걸어간다. 그 길은 불바다, 피바다, 모래바다를 지나가는 곳이다. 그곳을 통과하면서 바리는 많은 죽은 이들을 만난다. 그들로부터 고통에 대한 여러 가지 삶의 질문들을 접하게 된다.

‘얼른 대답해 다오.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바리, 어째서 악한 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지 알려줘요. 우리가 왜 여기서 적들과 함께 있는지도.’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
‘여긴 네가 가장 미워하는 것들이 타고 있는 배다. 우리는 언제 풀려나게 될까?’

지옥에 도착한 바리는 우여곡절 끝에 ‘생명수’를 마시게 된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내 실망하게 된다. 이야기가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바리도 물을 마신 후 어이없어 한다.

생명수는 어디에?

부드럽고 고요하게, 마치 잔잔한 호수를 쳐다보고 있다가도 갑자기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만나는 듯한 황석영 씨의 필력에 수시로 무릎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인간의 삶의 고통을 북한 땅 청진의 바닷가에서 영국 워털루 다리까지 이어지는 한 소녀의 인생길을 통해 그려내는 안목에도 박수를 보낸다.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해답을 초현실의 세계, 그것도 ‘바리공주’라는 무속설화에서 찾으려고 했던 시도에 대해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죽은 이들을 만나고 또 그들과 대화를 하며 지옥에서 생명수를 찾는다는 비기독교적인 사상도 역시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들이다.

저자는 인간 삶의 해답을 종교에 기대어서 풀어보려고 했다. 바리가 샤먼(무당)의 삶속에서 생명수를 찾아 나선 것이나, 또한 이슬람가(家)의 사람이 되어 그들의 종교 풍습을 따르며 의지하려고 했던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저자가 말하려고 했던 삶의 고통에 대한 그 해답은 무엇인가? 바리는 그가 소원했던 ‘생명수’를 만난다. 그러나 그 물은 그저 평범한 물, 그 자체일 뿐이다. 생명수를 지키던 마왕도 ‘그것은 밥해 먹는 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지극히 ‘평범한 것’이 해답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바리는 그가 찾으려고 했던 생명수를 제대로 찾기나 한 것인가? 혹시 잘못 찾은 것은 아닌가?

   
 
   ▲ '생명수'는 무엇일까? 독자의 몫이란다
 
이런 애매한 결론은 저자 황석영 씨가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잘 나타난다(2007년 6월 21일자, <바리데기> 후반부에 첨부되어 있다). 저자는 위 질문에 대해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을 뿐이다.

‘기자: 설화에서는 바리가 약수를 구해 죽은 부모를 살립니다. 소설<바리데기>에서 바리가 구한 생명수는 어떤 것일까요? 분열과 증오와 죽음의 21세기 지구촌에서 생명의 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황석영: 숨은그림찾기입니다. 글쎄요. 이 작품에서 생명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바리는 그것을 찾기라도 했을까요? 이는 독자들께 던지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소설의 한계인가? 아니면 비그리스도인의 삶의 철학에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역시 ‘소설의 내용이 다 그렇지 뭐’라는 선입견을 떨쳐버리기가 힘들다. 그래서 성경의 교훈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 가시던 예수님께서 물을 길러 우물가에 온 여인에게 “내게 마실 물을 좀 주시오”(요 4:7, 쉬운성경)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상종하지 않는 관습을 언급하면서 거절 아닌 거절을 했다. 그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내게 마실 것을 달라’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당신이 그 사람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생명의 물을 주었을 것이요”(요 4:10, 쉬운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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