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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에 흐르는 저주 이론’은 과연 성경적인가?
1999년 10월 01일 (금)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오광만 교수(장신신학원)

최근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는' 방법론이 한국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미 2년 전부터 기독교 서점가에서 베스트 셀러 상위 부분에 올라와 있는 이 문제에 관한 책은 그만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를 사로잡고 있는 듯이 보인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필요하다. 특이 그것이 양서(良書)인 경우에 그렇다. 그런데 만일 그러하지 못하다면, 우리의 영혼은 오염되기 시작하여, 결국 진리에서 멀어지게 된다.

베다니출판사는 '가계 치유 시리즈'란 이름으로 세 권의 책을 내었다. 메릴린 히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1997. 원서, 1988); 이윤호,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 (1999); 데렉 프린스, [축복이냐 저주냐 당신이 선택하라] (1999. 원서, 1999) 등 세 권이다(이후부터 이들 책은 각각, [가계에], [이렇게], [축복이냐]로 기록한다). 이 책들은 모두 2년 사이에 한국교회에 알려진 것들로서 소위 가정 치유 사역으로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해서(?) 최근에 갑자기 등장하였고,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책들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거기서 주장하는 요지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는 것과 그것을 '무효화' 시키든지 '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과 가정 문제의 만병통치약으로 인식되고 말았다.
과연, 이 이론이 성경적인가? 나는 위에 언급한 세 권의 책을 중심으로 소위 '가계 저주 주창'의 정체를 밝히고, 그 이론을 성경 해석학 입장에서 분석하려고 한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란 무엇인가?

위에 언급한 세 권의 책에 따르면, 한 가정에 대대로 똑같이 질병이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조상이 지은 죄가 유전적으로 그 가정에 흘러오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로 지금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만한 일을 행했으면, 그의 자손으로 그 저주는 전가된다. 우연히 발생하는 저주란 없다고 한다. "저주는 까닭 없이 임하지 않는다"([가계에], 103). 그러므로,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어느 순간에 이것을 끊는 행동, 저주를 돌려놓는 일을 해야 한다. 그 방법은 통상 회개를 통해 가능하지만([가계에], 106), 대부분 저주를 끊는 기도(주술이라고 해야 옳다)를 통해 이루어진다([가계에], 283-284; [이렇게], 156-187, 213-217). 이것이 '가계 저주 주창'의 내용 전부이다. 이 간단한 명제를 제공하기 위해 저자들은 저주와 관련된 성경 구절을 제시하면서 성경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사람들을 언급하고, 특히 그들이 가정 사역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고민과 문제를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한다. 사실은 순서상 그 역이다. 그들의 가정 사역과 상담을 통해 어떤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던 중 내담자의 가정에 비슷한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이 유전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 후에 이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성경에서 저주가 나오는 문장을 짜 맞춘 것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이론」무엇이 문제인가?

'가계 저주' 주창자들의 이론은 처음부터 성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담소를 찾아온 극단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나온, 임상적인 경험의 결과에서 내린 결론이다. 그 후에 그 결론을 지지하는 듯이 보이는 성경 구절을 그 증거로 제시하였는데, 상당히 많은 경우 성경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이론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이 된다. 임상 경험의 특수성을 일반화시켰다는 것과 자의적인 성경 해석의 문제이다.

특수한 상황을 일반화시킴에서 온 오류
세 책에 등장하는 내담자들이 상담자들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한 내용은 우리 주변에서 상당히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문제들이지만, 그 사례들은 얼른 수긍하기 힘든 것들이 많다. 히키의 책에 등장하는 '언제나 실패와 패배로 고통 당하는 가문'([가계에], 109-110), 자궁 외 임신과 유산, 그리고 농작물 피해가 다른 종류의 짐승을 교배하지 말라는 성경을 어겼기 때문에 그 가정이나 농사 짓는 땅에 내려진 저주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가계에], 26-50), 알콜 중독자의 가정의 계보 제시([가계에], 58) 등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예가 질병의 유전적 결함을 가진 가정들이다.

심지어 신명기 27-28장은 여러 종류의 저주의 목록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여 저주의 목록을 제시하였다([축복이냐], 41-66). 프린스는 약간은 겸손하게 "나는 어떤 특정한 병이 항상 혹은 대부분 저주로 말미암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신중하게 삼간다"고는 밝혔지만([축복이냐], 53), "이유 없는 저주는 없다"는 원칙에 따라 여전히 세대에서 세대로 되물림 되는 저주의 유전성을 옹호한다([축복이냐], 52). 월경 불순인 여자를 예를 들고는 그 원인이 그 여자가 어렸을 때 "월경을 저주야!"라고 말한 것에 있다는 설명([축복이냐], 56)은 자기의 이론을 주장하기 위한 대단히 극단적인 예이다. 이것은 이윤호의 "집단을 보면 개인이 보인다"에서 극명하게 천명되었다([이렇게], 108-110).

이런 경향은 히키([가계에], 12-13)와 이윤호([이렇게], 111-112)의 책에서 맥스 죽스와 죠나단 에드워드의 가문을 분석한 것에 이르면, 가히 놀랄 만하고, 아연실색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두 사람 모두 Gibson의 책에서 인용했다는 것인데, 죽스라는 사람은 불신자로서 자기처럼 불신자인 여성과 결혼했는데(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은 부지기수다), 그의 가문 516명이 그야말로 세상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청교도 중 가장 알려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조나단 에드워드의 가문 1,394명은 모두 출세하여 하나님께 복 받은 가문의 표본이 되었다고 한다. 이 통계는 우선 그것을 조사한 사람이 각각의 가문을 적어도 5대와 6대를 어떻게 찾아 분석을 했으며, 왜 하필 이 극단적인 예에 속하는 두 사람을 표본으로 선택했는지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는 것 이외에, 참으로 우리 주변에서 대단히 희귀한 상황을 묘사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지극히 특수한 경우의 통계를 가계를 통하여 저주와 축복이 흐른다고 일반화시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문제가 있다. 실제로 무신론자들 중에서 좋은 조건을 가진 가문이거나 아무런 고통과 저주(?)를 받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경건한 가정에서 질병이 있거나 어려움이 많은 사람이 있다. 요한 칼빈은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시편 73편의 시편 기자는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이런 문제를 문제 삼았다(필자의 책 [시편 강설]<여수룬> 37-45쪽에 실린 '시편 73:1-28/ 여호와로 인하여 만족하리로다'를 보라).

자의적인 성경 해석
가계 저주 주창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인용하든지,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많이 열거한다. 그런데, 그들 모두 자기들이 인용한 성경 구절에 대한 주석학적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이윤호만 단 한 번 주석학자 카일 델리취를 언급할 뿐이다([이렇게], 60). 그런데, 그것도 자기가 필요한 것만 인용하였고 델리취의 원래 의도를 곡해하였다. 이윤호는 시편 51:5의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의 뜻을 "다윗 어머니의 성적 범죄의 가능성"을 주장했다고 델리취를 들먹이더니, 신디 야곱스를 인용하여 다윗 조상 중의 라합이 기생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다윗이 잉태할 때 죄인이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이렇게], 60). 그러나, 델리취(Delitsch, Psalms, 136-137)를 자세히 읽어보면, 델리취는 이 구절을 다윗이 자기가 범죄한 사실 자체만 아니라 죄의식을 표현한 것이고(Delitsch, 135), "자기 어머니가 죄인이며, 이 죄의 상태에서 그의 출생, 그의 잉태가 이루어져 자기의 죄인됨이 출생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철저한 자기 성찰을 가리키는 고백이라고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시편 51편이나 델리취 누구에게서도 다윗의 범죄가 조상 탓이라는 암시조차 찾아볼 수 없다.

히키는 어떤 부부가 저주를 깨뜨리는 기도를 하기 위해 금식을 하였는데, 21일째에야 비로소 하나님에게서 응답을 받은 것은 그것이 다니엘 10:12, 13의 "바사국(페르시아) 군이 이십일일 동안 나를 막았다"는 성경과 관련있다고 설명한다([가계에], 40). 데렉 프린스는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회에서 물질을 공급받아 선교 사역에 도움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구절을 "'너희 쓸 것' 속에는 당신이 찾고 있는 저주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하고 있는" 말씀으로 설명한다([축복이냐], 199). 대부분의 경우 위의 세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 '저주를 끊는 법' 등을 주장하려고 성경을 견강부회(牽强附會)로 해석한다. 그 대표적인 예를 보면서, 이 이론의 허구성과 성경에서 벗어난 것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① 잠언 26:2
주석학적 배경이 없는 성경해석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오류는 본문을 그것이 등장하는 문맥과 상관없이 읽고 해석한 데서 발생한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저주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기 때문"([가계에], 43)이라고 생각하여, 까닭 없는 저주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절로 인용한 잠언 26:2이다. "까닭 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하느니라"([가계에], 57; [축복이냐], 43-44). 이들에 따르면, "저주는 원인이 없는 한 작용할 수 없다"는 것과 "저주가 역사하는 곳은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축복이냐], 44). 이들 책에서 18세 난 소녀가 18개월 동안 같은 다리가 세 번 부러진 것을 가정에 저주가 깃들인 것이라고 단정한다거나([축복이냐], 25), 가정의 병력(病歷)을 저주로([가계에], 101-119), '유전적인 것'으로 소개하는 것과 같은 원인-결과식의 설명을 자주 만나게 된다([축복이냐], 52).

그러나, 잠언 26:2은 가정에 닥친 저주의 근거를 제시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 구절은 26:1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한다. 잠언의 주제인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다루면서, 본문은 미련한 자에게 영예(높임 받는 것)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이치이듯이, 그 사람에게 닥친 저주도 이유가 없이 닥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 사람이 미련하게 된 것은 그가 잠언에서 말하는 미련한 짓을 했기 때문이다. 잠언의 교훈에 따르면 미련한 자는 이미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미련한 자이다(잠 26:9-11). 그것이 조상 때문에 임한 것이라거나, 자기가 미련한 짓을 하지 않았는데 닥치는 것이 아니다. 저주는 공중의 새들이 마구잡이로 떠도는 것처럼 부당하게 임한 것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은 미련한 자로서 저주를 초래할 만한 짓을 했기 때문에 받는 자업 자득이다(특히, 잠 26:11을 보라). 그러므로,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저주란 결코 일어나는 법이 없다(McKane, Proverbs. OTL, 600; F. Delitsch, Proverbs of Solomon, 175). 여기에 조상의 죄 문제나, 죄의 유전적인 전가 사상은 전혀 없다.

어떤 사람이 미련하게 된 것은 그가 뿌린 씨 때문이다. 각 사람은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둔다(갈 6:7-8).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잠언 26:2을 설명하는 내용을 극명하게 증거하는 예는 다윗의 경우일 것이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달아나는 중에 시므이의 저주를 받는다. 시므이의 저주는 다분히 욕의 성격이 있는데, 그가 저주한 내용이 소개되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처하였느니라"(삼하 16:7, 8). 시므이는 다윗이 현재 겪고 있는 상황이 그가 피의 복수를 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상황을 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윗은 자기가 전에 한 행동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겸손하게 자기의 현재 당하는 마음 아픈 경험을 받아들였으나(삼하 16:10, 11), 이것은 그가 당할 일보다 과하다고 생각하여, 그가 당하는 이 원통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선으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삼하 16:12. Hans Hertzberg, I & II Samuel. OTL, 345-346).

② 예레미야 31:29; 에스겔 18:1-32
죄의 유전적인 전승을 주장하기 위해 든 성경 중에 많이 사용되는 것이 위의 두 구절이다. 먼저 히키는 예레미야 31:29인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는 부분만을 인용하여 "에서가 야곱과 그의 자손들에게 원망과 분노의 쓴 뿌리를 품게 되었을 때, 그의 자녀들과 야곱의 자손들에게 쓴 뿌리를 품게 되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가계에], 182). 히키는 계속해서 쓴 뿌리라는 유전적인 저주를 설명하면서, "쓴 뿌리가 자손들에게 전달되는" 예를 에서와 헤롯 가문을 들어 설명한다([가계에], 183-186). 그리고는 섬뜻한 결론을 내린다. "신 포도를 먹음으로써(즉, 쓴 뿌리를 품음으로써), 그의 모든 자손들을 더럽힌(그의 모든 자손들에게까지 쓴 뿌리를 남겨준) 에서처럼, 만일 당신이 과거 조상의 저주들을 지금 당장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며, 당신의 모든 가족들은 멸절 당하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섬뜻한 결론인가? 이 모든 주장과 결론이 예레미야 31:29의 인용구에 의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예레미야 31:29이 이런 섬뜻한 경고의 말씀을 주는 것일까? 미안하지만, 아니다! 히키는 자기의 주장을 위해 본문에서 자기가 필요한 부분만을 따와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고 그들을 협박하고 있다. 이는 본문의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의 성경해석의 위험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부흥시킬 것을 약속하신 본문이다.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죄로 인하여 뽑으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다시 씨를 뿌려 그들을 세우고 심으실 것이라는 소망을 주는 맥락이다(31:27, 28).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으셔서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게 될 것이다(31:31-34). 이런 맥락에서, 본문은 그 동안 이스라엘 사이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여 자기들이 당하는 환난을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 즉 자기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런 속담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예레미야 애가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속담이 아니라 직접적인 말로써 표현하였다.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들이 범한)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애 5:7).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아버지(원인) 때문에 아들(결과)이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음 구절(31:30)에 있다시피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담을 이용하여 원망하는 것과는 달리 정당한 이유 없이 그들을 가혹하게 다루지 않으셨다. 역사를 통해 그렇게 다루어 오신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은혜로써 그들을 대우해 오셨다(Calvin, Jeremiah, Vol. IV, 123-124). 죄에 대한 책임은 각자에게 있지 대물림이란 없다!(R. P. Carrol, Jeremiah 26-52. OTL, 609). 예레미야 애가는 5:7에 이어, 그들이 당하는 수모를 묘사하고 난 후에 결국 그들이 당하는 애통이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라는 고백으로 나아간다(5:16). 그렇다면, 히키는 본문과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예레미야 31:29과 같은 속담을 담고 있으면서 훨씬 더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에스겔 18장이다. 이윤호는 그의 책에서 이 부분을 장황하게 설명하였다([이렇게], 123-128, 143). 이윤호는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에스겔의 의취를 어느 정도 지적한다. "범죄하는 영혼이 죽으리라"(123, 124)는 것이나, "에스겔 선지자의 의도는 자신들의 죄악의 모든 책임을 조상에게 전가시키는 오류를 지적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는 지적(125)이나, "자식들은 아버지의 죄로 인해 죽지 않는다"(143)는 언급은 본문을 그나마 자세히 보려는 흔적을 볼 수 있게 하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윤호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죄의 대물림이다. 그래서 이런 언급을 한 바로 다음에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렇다고, 본문은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예화에서 '가령'(suppose)이라는 단어를 세 번 사용했다"(125). 결론적으로 "예레미야 31:29-30 및 에스겔 18:1-4의 본문은 부모의 죄에 대한 죄책(guilt) 및 심판에 대한 말씀이지 부모의 죄로 인해 자녀들이 받는 죄의 결과를 부정하는 말씀은 결코 아니다"고 단정한다. 조금 지나 "자식들은 아버지의 죄로 인해 죽지 않는다"는 언급을 다시 하고는 계속해서 "그러나, 죄의 열매를 먹고 있는 자녀들은 죄의 결과에 대한 윤리적/영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면서 세계 제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책임에 대해 일본이 조상들이 지은 죄의 대가를 후손이 지는 경우를 들어 설명한다.

이런 결론이 나오게 된 배경은 어디 있을까? 이것은 물론 이윤호의 책에 풀러 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인 피터 와그너의 죄와 허물을 구분하여 허물(iniquity)이 "가계를 통해 대물림 된 죄로 인한 죄책(guilt)을 의미한다"는 견해에 호소한 것도 있지만([이렇게], 128), 사실은 히키가 주장한 것을 되풀이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가 에스겔 18장 본문을 본 첫 인상을 그만 떨쳐버리고 "가계의 죄 대물림"을 주장하려는 선입견 때문이다. 즉, 성경 저자가 무엇을 말하는 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저자의 견해를 곡해해가면서까지 자기 주장을 말하는 것이다.

에스겔 18:1-32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를 경험하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들은 포로 경험이 "조상들의 죄를 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시기에 유행하던 "철 이른 포도를 아버지가 먹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이가 이처럼 시게 된 것이다"(18:2)는 속담을 인용하여 모든 탓을 조상들에게 돌렸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속담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리셔야 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어서 조상의 죄의 대물림이 있다면 그것은 곧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공평치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엄연한 죄악이다!(18:25, 29) 그들의 속담은 곧 하나님을 힐문하는 것이며, 그것 자체가 악이었다.

직접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조상 대대로 쌓여온 죄악 때문에 자기가 불행을 겪게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연대적인 책임, 집단적인 책임으로 돌리는 불신앙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 이런 문제이다(W. Eichrodt, Ezekiel, OTL, 237).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짊어지는 일이란 없다. "범죄하는 영혼이 죽는다"(겔 18;4). 에스겔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간의 의와 범죄의 문제를 다룬다(겔 18:5-18). 어떤 경우든지 자기의 의는 자기 혼자서, 자기의 범죄는 자기 혼자서 당하는 것이지 대물림이란 없다는 것이 본문이 명백히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당대에도, 오늘날 '가계 저주의 대물림'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망각한 것이 악이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지적하려는 것이 에스겔의 의도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지금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냐?"고 주장하고 있다(18:19). 이것을 답답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보다 명쾌하게 직언적으로 말씀을 하셔야 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18:20). 이것은 세대가 서로 결속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의와 불의에 대한 것이 각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말씀이다(W. Zimmerli, Ezekiel 1, Hermeneia, 385). 지금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시드기야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겔 17:19-21).

에스겔은 조상의 죄나 의와 상관없이 악인이 의를 행하면 살고, 의인이 가증한 일을 행하면 죽으리라고 선언한다(18:21-24).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사람이 죄로 인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18:32). 그런 하나님을 향해 가계에 저주를 내리신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③ 출애굽기 20:4, 5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성경이 이 본문이다. 가계 저주 주창자들의 모든 이론이 이 구절을 축으로 형성되어 있다. 히키는 이 구절을 중심으로 "아들이 이미 그 죄에 대한 약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죄에 대한 그 옛 본성이 자식에게까지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가계에], 61). 이 본문은 가나안의 죄가 어떻게 이어져 내려 왔는가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가문에 똑같은 죄가 있는 것은(가문에서 똑같은 죄만 골라 찾은 히키의 노력이 가상하기만 하다) 바로 이처럼 3, 4대까지 하나님께서 조상의 죄를 후손에 대해 갚는다고 선언한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가계에], 131). 그렇게 되면 누구든지 적어도 고조 할아버지의 죄에 대해서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현상을 히키는 세상에 통용되는 '과실 책임의 법칙'을 가지고 설명한다([가계에], 102).

이윤호도 "하나님은 아비의 죄를 자손에게서 찾는다"는 제하에서 출애굽기 20:4, 5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유전적 복과 저주의 법칙을 선포하시고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이런 진리를 확인하셨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조상의 삶이 자손에게 반드시 어떤 종류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영적 법칙을 설정하셨다"고 지적한다([이렇게], 92). 그러나, 그의 책 전반적인 경향이 저주 주도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데, 가계 저주 주창자들은 조상의 죄에 대한 문자적인 계승은 인정하지만 이와 짝을 이루며 등장하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에 대해서는 별반 강조를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이윤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부모의 자손들에게 향한 복의 기간을 문자적으로보다는,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고 얼버무릴 뿐이다([이렇게], 91). 왜 유전적인 복은 강조하지 않으면서 유전적인 저주만 부각시키는가? 그것은 그들의 가정 사역에서 이런 예가 없어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면 출애굽기 20:4, 5이 유전적인 죄와 저주의 계승을 지지하는 구절인가?

앞에서 설명한 성경 구절에서도 보았듯이 죄에 대한 책임과 의를 행한 공로는 항상 개인이 하나님과 관계한다. 그러면, 출애굽기 20:4, 5에서 말하는 아비의 죄를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구절은 반드시 그 앞에 조건으로 달려 있는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라는 말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 이 두 문구는 서로 동떨어져 생각할 수가 없는 말들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카일은 이 본문을 에스겔 18장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비의 죄를 자녀에게 찾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녀이다. 그러므로, 자동적이지 않다. 즉, 아버지의 죄의 발자취를 따라 행하는 자녀이다. 그러나, 아비가 어떻든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수천 대까지 계속된다"(Keil, Ezekiel, 248).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을 미워하여 아비의 죄를 자식이 그대로 답습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한 말씀이다. "하나님을 미워하여"라는 전제가 자식의 죄가 자연스럽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가항력적으로 짓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을 경멸하고 우상을 섬긴 것이다(John Durham, Exodus, WBC. 287). 자손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한다면, 그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셔서 그들의 죄를 꼭 갚으실 것이다(W. H. Gispen, Exodus, Bible Student's Commentary, 191).

그러니까, 가계 저주 주창자들이 열거한 여러 종류의 예에서 볼 수 있다시피 자기도 모르게 조상이 가지고 있는 유전적인 죄와 거기서 나오는 저주를 자기가 안고 있는 경우란 없다! 이런 사실을 조금이나마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성경은 신자가 저주 아래 살 수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이렇게], 63)는 말이나, "후손은 조상 때문에 이런 저주를 받고 있었다"([이렇게], 66)는 망발을 삼가야 한다. 이것은 전제가 잘못되었다.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후의 진전되는 "조상의 죄와 저주가 후손에게 전가되는 통로"([이렇게], 112-120)나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꾸려는 방법론적 제시 역시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상관이 없는 방법론이다. 오히려 이윤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 받은 것을 폭로하는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면서([이렇게], 89-91),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한 것은 조상들의 죄악뿐만 아니라 현 자손의 죄 때문임을 명백히 하셨다"(91)는 말에서 후반부의 견해를 강조하고 거기서 그쳤어야 했다. 해당 본문에 언급된 현 자손들이 지은 죄는 그 조상들과 비교하기 위한 것이다. 문맥을 좀 자세히 읽어 보라.

④ 그밖에 저주의 가계 계승을 옹호하기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경우
a. "집"이라는 단어를 "세대"라고 이해한 경우
히키는 가계에 흐르는 죄성과 저주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에, 성경에 나오는 "집"(오이코스, 오이키아)를 "세대"(generation)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가계에], 74, 113). 한 경우는 마태복음 10:6의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언급에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태복음 12:29에 있는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하지 않겠느냐"에 있는 경우이다. 그래서 저주 끊기를 위한 선포에 "나의 자녀들은 너(마귀)의 소유가 아니야 "라고 외쳐 그 저주를 끊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가계에], 113-114, 75).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사전적으로나 주경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개인적인 견해이다. 바우어-안트-깅그리취가 만든 헬라어 사전에는 오이코스 의 뜻을 dwelling, house, city, household, family, descendants, nation, possessions, property 등과 같이 공간적인 개념이나, 가족 등으로는 열거해 놓았어도 어디를 보아도 '세대'라는 의미의 generation의 의미는 찾을 수 없다(Bauer, A Greek-English Lexicon, 560-561;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41). 오이키아 역시 마찬가지이다(Bauer, 557). 그렇다면, 히브리어는 어떤가? 히키는 "집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세대' 가문 가정이라고 번역된다"고 하였다([가계에], 113). 헬라어 오이코스와 오이키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이트이다. 브라운-드라이버-브릭스가 지은 히브리어 사전에 열거된 바이트의 뜻은 "house, receptacle, household, family, household affairs"라는 것 이외에는 없다(Brown,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108-110). 그렇다면, 이것은 히키가 자기의 생각을 성경에 집어넣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성경 언어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도 없고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이런 엄청난 내용을 교리화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여 히키는 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주었고, 그들을 진리에서 벗어나게 했다.

주경학적으로는 어떠한가?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의 사역을 우선은 이방인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으로 제한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주셨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0:6의 '이스라엘 집'이란 단순히 이방인과 구별하여 이스라엘 사람을 의미한다(D. A. Carson, Matthew. Expositor's Bible Commentary, 244; Donald Hagner, Matthew 1-13. WBC., 270-271). 모리스는 '이스라엘 집'이란 용어는 '국가'(nation)를 언급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라고 지적하면서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의미와 같다고 지적한다(Leon Morris, 246).

마태복음 12:29은 예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준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데 있다. 그 증거로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쫓은 것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귀신보다 더 강하신 분으로서 사단의 집, 즉 사단의 나라와 권세를 약화시킨 것이다. 이것은 바벨론보다도 하나님께서 강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든 이사야 49:24-26에 있는 비유적 표현에서 온 것이다. 예수님은 사단의 세력보다 크시다. 그러므로 여기서 '집'은 비유적인 표현으로(D. A. Carson, 290), 믿는 사람의 가계가 아니라 사단의 권세나 사단의 나라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Hagner, 344; 리델보스, [마태복음 상], 372). 이제 사단의 나라가 역사하는 옛 시대는 분쇄되었고, 새 시대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

b. 성경에 등장하는 병자들의 병이 조상들의 저주가 당사자에게 나타난 것이라는 설명에 대하여.
이윤호는 조상의 죄와 저주가 후손에게 전가되는 통로를 다섯 가지를 제시하였다. 모두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두 가지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유전 인자를 통한 전가이다([이렇게], 113-114). 여기에 제시된 두 성경 구절은 유전 인자 이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특히 히브리서 7:9, 10에 대한 해석은 이윤호가 성경 해석학적인 훈련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성경 읽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을 드러낸 것이다(사실, 히키의 책은 거의 대부분, 이윤호의 책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들이다).

히브리서 7:9, 10은 이렇다.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이 본문은 예수님이 아론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 아니신 것 즉, 레위 지파 출신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므로 뛰어난 제사장인 것을 증명하는 구절이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이스라엘 지파에서도 높임을 받는 레위보다도 뛰어난 제사장이 되신다. 그것은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높으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도 명확히 있다시피, 레위가 자기의 증조 할아버지 되시는 아브라함이 대표로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 때문이다. 레위는 십일조를 드린 사람으로서 멜기세덱보다 낮은 자이고, 멜기세덱은 그것을 받은 사람으로서 레위보다 높은 자이다. 여기서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표성의 원리를 이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윤호는 이 본문에서 유전 인자를 이야기하고 싶어, 이 "말씀은 레위가 아브라함의 한 행동 즉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로 인해 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자손임을 설명해준다"(114)라고 썼다. 본문과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죄의 유전 인자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둘째, 이윤호가 지적한 네 번째 통로인 '악한 영들을 통한 전래'([이렇게], 117-118)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축사 사역자들의 말을 빌어, "악한 영들은 부모들의 죄를 통해 많은 신생아들에게 침입한다.   성경에서 '어릴 때부터' 귀신들린 아이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마태복음 17:14-21, 마가복음 9:7-29, 누가복음 9:37-43을 인용하였다.

이 세 구절은 동일한 시기에 발생한 동일한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산에서 용모가 변화되신 후 내려오는 길에 간질병을 앓고 있는 아이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 아이는 귀신이 들려 간질로 고생하고 있었다. 마태와 누가는 이 아이가 언제부터 그 병을 앓게 되었는지 언급을 하지 않지만, 마가는 이 아이가 "어릴 때부터" 그 병을 앓게 되었다고 전한다(막 9:21).

그렇다면, 이 아이가 어릴 때부터 간질에 걸린 것이, 이윤호의 말대로 신생아 때를 의미하는지, 또 그 병이 부모(에게 있던) 죄와 저주가 악령을 통해 그에게 전수된 것인지를 알아보자. 예수께서 간질을 앓고 있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자 아이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에크 파이디오뗀 )"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의 물음과 아이 아버지의 대답은 이 병자의 상태가 심각하고 오래되었다는 것, 그래서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께서는 그를 고쳐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것이 이 질문과 대답에서 가르치려는 것이고, 이 외에 아무런 정보나 언급을 여기서 얻어낼 수가 없다(R. Gundry, Mark, 490; W. Lane, Mark. NIC, 332; J. 그닐카, [마르코복음 II], 67).

본문 자체에서 이윤호가 얻고 싶은 결론을 얻지 못하였으니, "어릴 때부터"라는 말에서 얻을 수 있을까? 류와 나이다(Louw & Nida)는 이 아이(child), 심지어 사춘기의 아이(puberty)를 가리킨다고 하면서, 어엿이 남성으로 대접받을 소년(boy)으로 번역될 수 있다고 한다(Louw & Nida, Greek-English Lexicon, 110). 아이(파이디온)는 예수께서 장터에서 노는 아이 비유에 나오는 아이이며(마 11:16), 예수님께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린 아이에 사용된 아이와 동일한 아이다(요 6:9). 가장 어린 경우가 예수께서 갓 태어나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경우이다(마 2:11). 그러므로, 이 본문에 아이가 그렇게 된 데에는 유전적인 원인이 있다는 의미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신생아에게 악령이 침입했다는 이윤호의 말은 성경 본문에서도 단어의 뜻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견(私見)이다.

이 문제와 가장 관련 있는 다른 본문은 요한복음 9장에 언급된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의 경우이다. 요한복음 9장에 언급된 맹인의 경우는 어떤가? 실제로 조상들의 죄의 유전으로 그 사람이 맹인이 되었는가? 정말 죄가 가계에 전승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문에서는 그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

요한복음 9장은 분명히 "날 때부터"(에크 게네테스. 신약에서 이곳에서만 사용되었음. C. K. Barrett, John, 356)(요 9:1)라는 말을 하고 있는 반면, 마가복음은 그 정도까지는 이른 시기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윤호가 이 주제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의 경우를 언급하지 않고 마가복음의 본문을 언급한 것은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명백하게 부모의 유전적인 언급을 부인하는 말씀이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요 9:2,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호는 이것을 해명하려고 한다. 그는 그의 책([이렇게], 138)에서 제자들의 질문이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믿고 있는 자신 혹은 부모의 죄와 징벌에 관한 상관 관계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외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당하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를, 가계 저주 주창자들이 즐겨하는 방식대로, 자기들의 임상 경험에 둔다. 아프리카에서, 요한복음 9장과 같은, 거지 맹인을 목격한 의사 맥밀랜의 말을 인용하여 "아마도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일 것이다"고 대답한다. 그 이유와 근거가 무엇일까? "왜냐하면, 산모의 임질은 미개국 나라의 사람들 중에서 출생시 소경이 되는 가장 보편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이렇게], 138). 이것이 가계 치유를 향한 영적 순례([이렇게], 137)가 될 수 있는가? 아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에 대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다. 이들은 사람의 질병이 어떤 직접적인 원인, 특히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렇다면 원인이 된 죄의 장본인은 누구냐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당대 랍비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죄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생기는 법이라는 논리에 의거해, 날 때부터 지체 장애아인 경우에는 부모가 죄를 지어 자녀가 질병에 걸렸든지, 또는 아예 태아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태아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경우가 있었다(C. K. Barrett, John, 356; 레온 모리스, [요한복음 하], 62; G. Beasley-Murray, John. WBC, 155). 그러나, 이러한 의견이 유대주의에 널리 유포되고 수용된 것이 아니었다(D. A. Carson, John, 361; H. Ridderbos, John, 333. 각주 247; 모리스, 62; F. F, 브루스, [요한복음], 367). 더욱이 예수께서는 이러한 의견을 결정적으로 부인하셨다(요 9:2, 3).

어떤 특별한 고난이나 질병은 구체적인 죄의 직접적인 결과일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한센 씨 병에 걸린 것(민 12장)과 같은 경우와, 특별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질병을 죄와 연결시킨 경우가 있다(눅 13:2-5; 요 5:14). 그러나, 많은 성경 본문들은 질병을 직접 죄와 연결시키는 것을 부인한다(Carson, 361). 바울이 그러하고(고후 12:7; 갈 4:13) 욥이 그러하다. 욥기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 하에 욥의 가정에 닥친 재앙을 사람의 논리에 의해 원인-결과식으로, 결과를 보고 원인을 추적하며 욥을 훈계하는 욥의 친구들의 어리석음과 인간 지식의 한계를 꾸짖으셨다(욥 38, 39장; 42:7-9). 하나님께서는 욥을 기쁘시게 받으셨다. 그래서 욥은 어리석은 친구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욥 42:9, 10).

이런 의미에서 본문 요한복음 9장을 근거로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의 경우, 그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운운하는 것은 스스로 욥의 친구들과 같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Carson, 362; Ridderbos, 333; 브루스, 367). 하물며,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도 않고, 예수께서 잘못된 생각을 정죄하신 요한복음 9장을 가지고 '가계 저주의 유전적 대물림'을 논한다는 것은 본문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 아니다. 본문은 비록 그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중병일지라도 예수께서 그를 낫게 하심으로써 예수님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이 보도록 하셨으며,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참 빛이신 예수님께 나오도록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브루스, 368).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과 마찬가지로(요 11:4), 그 사람이 맹인 된 것도 동일한 목적이 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선한 신자의 경우 원인이 없는데 병든 사람이 많이 있고, 병들 만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사는 악인도 많다. 이것이 비단 시편 기자만의 고민이겠는가?(시 73:3-14).

지금까지 살펴본 것만 보더라도 '가계 저주 주창자'들은 정당한 성경해석이나 이해 없이 그들이 임상 경험에서 얻은 극단적인 예를 교리화 하여 성경을 곡해해가면서까지 그들의 주장을 펴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끊는 법'의 문제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끊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그들은 제안한다. 이윤호의 책([이렇게])은 제목부터가 방법론에 초점을 맞추었다. 원인 추적(87-106), 걸림돌 제거(121-136),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방법(적용편 1, 2)(149-187), 자유를 향한 전진(189-202) 등이다. 데렉 프린스도 '저주에서 해방되는 일곱 단계'를 소개한다([축복이냐], 215-230).

전제가 잘못되었으므로 방법론 문제도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계 저주론'이 지니는 문제점과 그것을 끊기 위해 제안한 방법의 무속 신앙적 성격과 비판은 [교회와 신앙] 1999년 8월호에 실린 김철홍의 "이윤호 목사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에 대한 비판"(124-137쪽, 특히 132-133, 135쪽을 보라)을 참조하라. 필자는 여기서 한 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그들이 제안하는 저주 끊기의 실제적인 방법은 기독교의 경건의 방법인 기도를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내용과 혼합시켜 경건한 기도를 다른 종교의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가계 저주 주창자들 모두가 제안하는 기도([가계에], 283-284와 그밖에 본문 여러 곳; [이렇게], 213-217과 그밖에 본문 여러 곳; [축복이냐], 221-230)는 주술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일례로, 이윤호의 [이렇게] 182쪽에는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동시에 죄 용서를 구하고, 조상의 저주에서 해방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린 후, "사술과 사탄적인 어떤 것과 접촉된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끊어버리노라"고 선언하고, 자기가 의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예방 차원(?)에서 "만약 내가   를 갖고 있다면 나 자신이 그것을 파기할 것을 결심하노라"는 결단을 표출하고, 심지어 자기가 하나님도 아닌데, "사탄이 나와 나의 가정을 공격할 수 있는 사탄의 권한을 박탈한다"고 선언하고, 스스로 저주의 쇠사슬을 끊어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을 선포"까지 한다. 거기다가 기도 중에 귀신이나 사탄을 꾸짖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마 6:9-13; 7장). 이런 터 위에서 [소요리문답] 제 98문에 언급된 기도의 의미와 정신을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어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자비를 감사한 마음으로 승인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정신은 '주기도문'과 시편에 잘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기도에 주술적인 요소가 들어가 축귀용 주문도 들어 있고, 자기가 의식하지 못한 일에 대한 저지라는, 흡사 부적과 같은 요소나 자기의 해방을 선언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도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그 기도가 의로운 기도인지 아닌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신다(눅 18:14). 기도 중에 자신이 가계의 저주에서 풀려났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cf. 롬 8:33). 기도를 주술적으로 사용한다면, 이미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기도의 본연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며, 기독교의 고유한 특성을 왜곡한 것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어떻게 교정할 것인가? - '이미'와 '아직'의 긴장 상황에 있는 저주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성경 역사에서 아담의 타락이 가져온 결과가 온 피조물에 여전히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데서 온 오류이다. 비교적 신학적 기초가 있는 데렉 프린스는 기본적으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주창하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을 잘 견지하려고 하고 있어, 이들의 견해도 그들이 깨달음만 있다면 교정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점을 시사하기는 한다. 프린스가 인간을 영, 혼, 육으로 구분하는 전형적인 삼분설에 입각하여 인간 삶을 뚜렷한 이원론적인 경향으로 몰고 간 점([축복이냐], 170-172)은 이와 유사한 사이비적인 교리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프린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혼(魂)적인 말, 혼적인 기도'라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여 상당히 멀리 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169, 179-190).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신자의 '맞교환' 원리이다. 맞교환이란 "우리로 말미암은 악은 예수님에게로 가고, 대신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좋은 것은 우리에게 공급된다"는 것으로서(202), 이것은 영적으로는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프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육체적으로도 저주에서 해방을 얻었다는 것이다(203). 예수께서 우리의 질고와 아픔을 당하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상처를 통해 치유함을 받았기 때문에, 프린스가 볼 때 현재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물질적인 궁핍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저주의 표시"라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닥친 고난을 완전히 부인한다(62).

프린스를 위시한 가계 저주 주창자들이 "저주로부터의 구속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완성되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졌던 모든 저주를 다 포함한다"(295)고 생각하는 것은 현재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을 주장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훈과 비슷한 면을 주장하면서도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긴장이 가져오는 구원사의 원리를 오해한 것이다.

아담 이후 인간이 받은 저주를 제거하시고 다시 우리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상태로 되돌리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뿐이시다. 이 일을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문제의 해결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라는 말씀처럼 말이다. 프린스는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가계 저주 주창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인간이 당하는 모든 저주는 그것의 "완전하며 최종적인 폐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기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축복이냐], 297).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가계 저주 주창자들이 생각하는 저주는 신명기 27, 28장에 요약된 저주(사실은 언약적 저주로서 구약 질서인 이스라엘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내용들임)로 표현된 각종 질병과 인간 역사에 일어나는 전반적인 불행한 일들에 해당하며([가계에], 251-281; [이렇게], 218-230; [축복이냐], 49-66, 148-149),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이것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언급된 저주의 내용이 하나라도 있게 될 경우, 그들은 신자도 "저주 아래 있을 수 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느니([이렇게], 63), "실제로 저주의 영이 나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다"느니([축복이냐], 134), "하나님께서도 그의 백성을 저주에서 보호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자신에게 말한 저주들이다"라는 말들을 하게 되었다([축복이냐], 146). 이것은 저주가 "사탄의 수종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사용하는 주요 무기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축복이냐], 159).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이 주장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 29)는 예수님의 말씀과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과 정면으로 반대된다는 사실이다(롬 8:9). 또한 이 주장은 하나님의 저주를 물리적으로 이해하고, 이것이 현재에도 완전히 없어질 수 있다는 완전주의적으로 생각한 데 문제가 있다.

피조물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은 태초에 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왔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온 상황 속에 있다. 그 이전의 인간의 상황은 어떠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상황은 또 어떤가? 이것을 위해 우리는 처음 에덴 동산의 상황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처음 창조된 에덴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 교제를 나누던 하나님의 임재의 터였다(창 3;8-9). 창조주요 생명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기에 에덴은 생명과 구원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생명수가 있고(창 2:10-14), 아름다움과 부를 상징하는 금이 있는, 하늘과 같은 낙원이었다(겔 28:12-19). 사람들은 한 동안 복의 결정체인 에덴에서 살았으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 모든 상황은 뒤바뀌어 버렸다. 아담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선 것이며, 대표자로 하나님과 순종의 시험을 받았다(창 2:16, 17). 그러므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타락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롬 5:12, 14). 타락으로 말미암아 피조물 위에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인, 땅은 저주를 받아 사람들에게 형극을 내고, 여자는 해산의 수고를 겪게 되고, 남자는 수고의 떡을 먹게 된 것이다(창 3:16-18). 이 저주의 극치는 모든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창 3:19).

역사가 흐르는 동안 이 저주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임한다. 사람은 수고로이 일하고, 땅도 저주를 받아 사람들을 여러 가지로 해롭게 한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되는가? 요한계시록 14;13에 의하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에도 그들은 전쟁과 핍박과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지만(cf. 계 6:1-11; 8:7-12; 11:3-9; 14:12), 결국 이 세상을 이별할 때 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비로소 땅에서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이 때가 되어야 땅에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않게 된다"(계 22:3)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온갖 종류의 고난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고 곡하고 아픈 것을 경험한다(계 21:3, 4). 주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때, 즉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되어야 비로소 그들은 창세기 3장에 선언된 저주에서 해방된다. 그날이 오는 것을 피조물은 지금 학수고대하고 있다(롬 8:19-21). 그러는 동안 우리나 피조물들은 고난을 당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cf. 행 14:22). 현재 우리는 안식의 상황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상황에 있다(히 4:11).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기를 바라면서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롬 8:23)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초림의 중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죄로 인한 오염과 하나님의 저주에서 완벽한 해방을 얻도록 하기 위해 그분이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신 것에 예수님의 초림의 의의가 있다(막 10:38, 39).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는 죽음이었다(갈 3;13). 그분이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우리는 의인이 되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는 말씀 대로다(롬 5:18, 19).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저주의 고통에서 현재 완전히 해방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주시는 데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저주가 없이 영광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여전히 죄의 오염으로 인한 고난과 성결케 되기 위한 고난을 받는다(약 1:2-4; 벧전 1:6, 7; 히 12:1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든 저주에서 구속하셨다는 현재적 사실 때문에 여전히 우리가 죄의 오염으로 인한 온갖 악한 상황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롬 5:2-5; 8:24).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현재 실존이다.

글을 맺으며

'가계 저주 주창자'들의 이론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에서 그 생각이 출발한 것이 아니라 사역지에서 나온 특수한 경험에 그 근거를 둔 것이다. 성경에 명백한 언급도 없고, 성경을 곡해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부당함을 주창하게 되고, 현재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의를 망각하게 하였다. 한국에 이런 이론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최근 기독교가 행복 지상주의로 나가고 있고, 조그마한 고난도 이겨내지 못해 신앙이 나약해져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전 피조물이 지금까지 고통 당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저주는 우리가 저주 끊기를 한다고 해서 없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 우리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아담의 저주 아래서, 또 우리가 지은 여러 가지 죄로 인해 육신적, 환경적 고난을 당한다. 그것이 우리를 인내하게 하고 연단하여 더욱 성숙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끈다는 생각으로 고난을 기쁨으로 감수해야 한다. 바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이 저주스런 일들(?, 고후 11:18-30)을 열거하고, 자기 육체의 여러 질병들을 언급한 후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고 선언했다. 이것이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저주를 받은 자가 아니라 의롭다고 선언을 받았으나. 아직 저주의 환경 속에 있으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의 적극적인 삶의 이해인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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