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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 예수님 의도와 이만희 씨의 곡해
장운철 목사의 신천지 교리서 <요한계시록의 실상> 분석⑦
2007년 05월 21일 (월) 00:00:00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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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은 ‘신천지’(교주 이만희) 문제로 꽤 시끄럽다. 5월 8일 MBC PD수첩에서 ‘신천지의 수상한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그곳의 문제점들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후 각종 신문 매체를 비롯해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 등을 통해 그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갔다. ‘신천지가 또 뭐냐’는 식의 처음 접하는 이들의 질문에서부터 ‘이단 종교 피해에 대해 철저히 대처해야 한다’는 보다 구체적인 의견까지 다양했다.

 

   
 
   ▲ 송일준 PD가 '사이비'라는 단어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번 PD수첩 사건으로 인해 필자의 이만희 씨의 교리 분석 글도 조금 더 유명(?)해진 것 같다. 필자의 분석 글은 <교회와신앙>을 통해 발표되자마나 순식간에 이곳저곳의 인터넷 블로그(blog)나 카페(cafe)에 항상 복사되고 인용되어 왔다. 이단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다수의 유저(인터넷 사용자)들이 복음을 지키고자 그렇게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조금의 변화가 생겼다. 댓글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독자들이 신천지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관심이 여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바라기는 이번과 같은 이단 문제에 대한 관심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복음의 수호와 적극적인 전파를 위해서 이단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될까? 이단 문제 전문 강사를 초빙해서 특강의 시간을 갖는 것이나 또는 전문 자료를 활용하여 교육시키는 것이 대표적이다. 교회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보다 깊이 있는 성경공부가 바로 그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사실 올바른 성경공부가 가장 바람직한 대안책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이단 문제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단에 빠지는 원인 중 하나는 ‘성경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것이 지나친 ‘욕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정말 주변에 그러한 모임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성교회 성도들이 이만희측 단체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좋게 표현해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성경공부 제대로 하자

이만희도 그것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그는 자신은 ‘성경대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성경대로 성경을 본다는 것은 옳은 일이다. 정말 그래야 한다. 이 씨가 정말 자신의 소망대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을까? 이 씨가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하는 성경구절이 있다. 바로 마 13:34이다. 이 씨는 이 구절을 인용해 요한계시록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설하는 데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 구절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 하셨으니”(마13:34).

이 성경구절에 대한 이 씨의 해설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예언 속에 인명과 지명을 주로 빙자하여 기록하셨으며(호 12:10, 마 13:34~35) 때가 되면 다시는 비사로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밝히 일러주신다고 약속하셨다(요 16:25). 본문의 사도 요한과 아시아는 인명과 지명을 빙자한 것이다. 계시록을 비유할 당시는 그 성취 때가 아니므로 실상을 비유로 대신하여 예언했다 ”(이만희, 천국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 도서출판 신천지, 2005, p.52).

위의 글은 이 씨의 요한계시록 1장 4-6절 해설 중 일부다. 이 씨는 성경 속에 나타나는 많은 인명과 지명의 이름은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른 의미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인명과 지명은 실제 의미를 빙자한 가상의 이름이라는 뜻이다. 이 씨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옳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마 13:34’을 인용했다. 자신의 주장이 소위 ‘성경적’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 씨의 다른 해설서도 살펴보자. <계시록의 진상2>(도서출판 신천지, 1988)이다. 이 책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이 씨의 주장들이 나타난다.

“구약이 유치원 시대라면, 예수님 때는 비유 비사로 말씀하신 중학교 과정을 배우는 시대요, 오늘날의 계시록 때는 대학의 과정을 마치는 완전한 시대이다(마 13:34~35, 요 16:25)”(위의 책, p.26).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서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셨으니(요 3:11~13), 그의 증거는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마 13:34~35)”(위의 책, p.28).

“성경 말씀은 영적인 말씀이요, 육적인 말씀이 아니다. 다만 육계를 빙자한 비유 비사인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때와 장소와 용도에 따라 빙자하여 비유 비사로 기록된 영적 말씀이다”(위의 책, p.512).

이 씨가 정말 주장하고 싶은 바는 무엇일까? 성경의 내용이 ‘비유’라는 형식으로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다는 것과 그 의미가 밝혀지기 위해서는 특별한 존재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서 특별한 존재는 이만희 자신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앞선 분석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와 같은 논리를 사용하는 이들이 이만희 씨 외에 여러 명 있다는 것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아마도 더 많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아무튼 이러한 이 씨의 소망이 옳은지 그른지를 그가 즐겨 사용한 성경구절(마 13:34)과 ‘비유’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분석해 보자.

   
 
   ▲ 이만희 씨가 단상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비유란 무엇인가?

비유란 무엇인가?

 

먼저 ‘비유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만희 씨를 포함해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비유라는 형식을 이용해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고 있다. 흔히들 비유를 ‘천상적인 의미를 지닌 세상 이야기’라는 관점으로 보곤 한다. 이만희 씨도 마찬가지다. 즉, 신비한 의미를 지닌 하늘의 그 무엇을 오늘 우리들 세상의 이야기로 표현한 것쯤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를 그렇게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그 천상의 의미를 풀어줄 사람이 등장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 때 이만희 씨는 바로 자신이 ‘그 사람’이라고 주장했고, 비유의 의미를 잘 몰랐던 기성교회 성도들이 이에 ‘맞다’고 손바닥을 친 것이다.

비유가 과연 그런 의미인가? 비유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사용한 여러 가지 형태들 중 하나의 교수법이다(Robert H. Stein, An Introductio to the PARABLES OF JESUS, 오광만 역, <비유해석학>, 엠마오, 1996, p.15). ‘비유’에 해당되는 구약 용어는 ‘마샬’(לשמ)이고 신약 용어는 ‘파라볼레’(παραβολή)이다. 구약의 마샬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식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단순한 ‘속담’을 의미한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마샬)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겔 18:2~3) 등의 성구들이 그 예다. 또한 마샬은 ‘웃음거리의 말’(byword), ‘풍자’(satire), ‘비웃음’(taunt) 또는 ‘조소의 말’(word of derision) 등을 언급하기도 한다. ‘수수께끼’(riddle)로 나타나기도 한다(Robert H. Stein, p.17~20).

신약의 파라볼레도 위와 비슷하다. 특히 은유법(metaphor)과 직유법(simile)의 사용은 신약성경에서 매우 빈번하다. 은유는 두 상이한 것들 사이의 은근한 비교를 행하는 데 반해, 직유는 ‘~처럼’, ‘~같이’, ‘마치 ~인 것인 양’ 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명백한 비교를 행하는 데 있다. 이 모든 것이 ‘비유’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이야기식 비유도 신약 성경의 특징 중 하나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눅 15:4)나 “너희 중에 누갚(눅 11:5) 등과 같이 시작하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내용은 풍부하고 다양하다. 공관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교훈 중 비유형태를 띈 것이 무려 약 35%에 해당할 정도다(Robert H Stein, The Method and Message of Jesus' Teachings , 오광만 역,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여수룬, 1991, p.95).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그 제자들에게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비유’라는 형식도 취하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성경공부를 시작하려고 할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권면해 줄 수 있다. “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잖아, 배우고 싶은 욕망이 큰 것은 알지만 천천히 정도를 걸어가면서 시작하자”라고 말이다. 이때 ‘천리길···’은 잘 알려진 격언이다. 그것을 사용함으로 권면의 말을 보다 실감있게 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유적인 설명이라는 것이다. 이만희 씨가 즐겨 사용하려는 하늘에 감추어진 비밀을 자신을 통해서 풀어준다는 형식과 얼마나 다른가?

많은 경우 비유는 성경을 ‘잘’ 읽기만 해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복음을 보다 명확하게 알려주려고 한 예수님의 의지다. 예를 들어 보자. 예수님의 비유 중 소위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알려진 눅 10:30~35이 있다. 이 비유 본문은 종종 곡해되어 왔다. 비유의 전후 문맥과의 연결을 단절시킨 결과다. 본문 앞의 내용은 이 비유의 배경을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한 율법사와 대화를 하는 중, ‘내 이웃이 누구인가?’(29)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비유를 예를 든 것이다. 본문 뒤의 내용은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이다’는 율법사의 대답에 예수님께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Go and do likewise)”(37)는 교훈으로 마치게 된다. 그것이 그 비유의 핵심 내용이다. 성경을 문맥에 따라 읽기만 하면 누구나 정확히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특별한 존재의 ‘희한한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는 그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직접 손수 풀어주신 경우도 있다. ‘씨 뿌리는 비유’로 알려진 마 13:1~9이 그 좋은 예다(막 4:1~9, 눅 8:4~8에도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의 뜻을 친히 자세히 해설해 주셨다. 마 13:18~23이 그것이다. 문맥을 따라 잘 읽기만 하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성경의 본 의미를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만희 씨도 마태복음 13장을 중요하게 취급했다. 그의 책(<천국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에서 4번이나 참고 성경구절로 사용했다(p.316, 373, 422, 465). 즉 자신의 사상이 성경적으로 정당함을 입증한다며 마 13장을 사용한 것이다.

이만희 씨는 마 13장의 비유에 나오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와 좋지 않은 땅에 뿌려진 씨’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 등의 비유를 ‘자신(또는 자신의 단체)과 자신의 반대 세력(예전의 장막성전을 포함)’으로 이해하고 있다. 성경 자체의 본뜻보다는 자기중심적인 해석에 관심을 더 기울인 듯하다. 직접 살펴보자.

“본문의 포도에서 난 피가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지게 된 것은 배도한 장막 성전과 멸망자 짐승의 교단에 속한 교회가 약 천 리나 되는 지방에 골고루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본 장을 상고한 성도가 깨달아야 할 것은, 세상 끝에 알곡과 가라지를 추수하여 가르시겠다고 하는 마태복음 13장 말씀이 바로 본장 성취 때에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알곡 성도(계 15:2, 14:1~5)는 생명의 부활로, 들포도가 된 배도한 장막 성도는 심판의 부활 로 나오게 된다”(이 씨의 책, p.315).

위의 내용은 이만희 씨가 요한계시록 14:17~20을 해설한다면서 주장한 내용이다. 마태복음 13장(특히 24~30절)의 내용까지 인용하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성경을 곡해한 것이다. 그 해설의 결론은 더욱 황당하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한 그의 결론은 ‘특별한 존재를 찾아와야 한다’는 것으로 맺는다. 그 특별한 존재는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어렵지 않은 질문이다.

“그러므로 지상 모든 목자와 성도는 약속한 본장의 말씀을 시인해야 하며 구원의 처소로 추수되어 갈 수 있도록 추수꾼 목자를 찾아야 한다. ···잠자는 신앙인이 되지 말고 성경을 통달한 약속한 목자를 만나 이 모든 것을 증거받기 바란다 ”(계 10:8~11).

예수님의 비유의 특징 중 하나는 반대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는 ‘한 쌍’ 형식의 비유다. 예수님은 이러한 형식을 자주 사용하셨다. 예를 들어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 생선과 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하나님과 재물, 개와 거룩한 것, 진주와 돼지, 좁은 문과 넓은 문, 양과 염소, 알곡과 잡초’ 등이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도 여기에 속한다. 이렇듯 ‘한 쌍’으로 이루어진 문맥이 의미하는 바는 심판이 올 것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강하게 권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알곡과 가라지 비유’(마 13:24~30)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 일어날 최종적인 분리(the definitive separation)를 의미하고 있다(홍창표, 하나님 나라와 비유, 합동신학대학원출판사, 2004, p.132-133).

물론 비유가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다. 성경을 읽기만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예수님을 따르던 당시의 제자들도 비유를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그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비유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 친히 말씀하셨다.

처음에 이만희 씨가 인용했던 마 13:34과 그 다음 구절을 문맥의 흐름을 따라 계속해서 읽어보자.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4~35) ‘이는’ 으로 시작한 이 구절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한다. 예수님께서는 35절에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구약성경의 시편 78:2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구약 때부터 감추어져 왔던 그것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비유라는 형식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감추어져 왔던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만희 씨나 또는 그가 말하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교리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성경에 귀를 기울여 보자.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맨 마지막에 그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살펴보자.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롬16:25~27).

 

   
 
   ▲ 신천지측 홍보용 동영상에 등장한 이만희 씨.
 
한 곳만 더 살펴보자.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이러한 성경구절을 볼 때 위에서 언급된 ‘감추어져 왔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닌가? 성경의 중심인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증거에 어느 누가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어려운 비유를 사용하셨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의 첫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교훈을 이방인들에게는 감추고자 했기 때문이다. 복음을 선포하면서 당시에 받을 수 있는 정치적, 군사적 위협과 외인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또한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그의 메시지를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계시하시고 또 그것을 밝히시기 위하여 사용하신 것이다. 셋째는 청중들의 불필요한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다(Robert H. Stein, <예수님께서는···>, p.111~113). 

‘아시아’란?

이만희 씨는 성경을 해설하면서 ‘A는 B라는 뜻이 아니고 C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A는 실제가 아니고 비유이기 때문이다’는 식을 사용한다. 그러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이라도 하려고 마 13:34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희 씨는 계 1:4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를 해설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이기를 소망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마 13:34의 구절을 앞에 기록하기도 했다.

“본문에 기록한 아시아는 계시록이 응하는 어느 지역을 비유한 곳으로 실제 소아시아가 아니다”(이 씨의 책, p. 53).

계 1:4의 ‘아시아’가 정말 이만희 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가 아닌 비유된 장소일까? 이 씨는 이전에 낸 해설집에서 위 내용에 대해 보다 재미있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살펴보자.

“아시아는 오대양 육대주 중의 하나요, 일곱 교회의 지명은 문자 그대로 본다면 소아시아에 있었던 교회들이다. ···지금은 그곳에 이 교회들이 없다. 또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라면 맞지 않는 것이 첫째 예수님께서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들을 비유 비사로 드러낸다고 하신 말씀(마13:34~35)과···”(<계시록의 진상 2>, p.49).

종합해 보면 ‘아시아’에 대한 이만희 씨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아시아에 일곱 교회가 그 당시에는 존재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그 교회들은 지금 다른 지역을 뜻하는 비유의 의미다. 그 비유는 오늘날의 오대양 육대주에 속하는 아시아를 가리키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씨의 말대로 ‘아시아’가 비유인가? 아무 단어나 이 씨가 비유라고 하면 비유가 되는가? 그렇다면 계 1:4에 나오는 ‘편지’도 ‘영’도 ‘보좌’도 모두 비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니 아예 성경 자체도 비유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는 말이다.

계 1:4의 ‘아시아’가 비유인지 아닌지 살펴보자. 요한계시록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 형태의 글이다. 이것이 1:4절과 11절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일곱 교회는 실제 존재하는 교회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 ‘일곱 교회’(1:4)은 앞 절(1:3)의 ‘듣는 자들’과 연결된다. ‘듣는 자들’은 일차적으로 일곱 교회를 지칭하며, 넓게는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교회에도 해당된다.

일곱 교회들이 겪는 많은 영적인 문제들은 그래서 오늘날 우리네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일곱 교회 각 교회에 대한 말씀이 있은 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이 항상 뒤따른다. 의미심장한 구절이다. 일곱 교회가 오늘날의 교회를 대표한다는 면에서 그 말씀은 요한 당시의 교회에 적용될 뿐 아니라 계속되는 모든 세대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원리다. 요한계시록이 현재적인 호소력을 지닌 것도 이 때문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아시아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을 때 지방 정치의 한 도였던, 로마제국의 플로빈티아(provintia)로, 소아시아의 서쪽에 반 이상의 넓은 영토를 차지한 주를 가리킨다. 로마제국이 소아시아와 근동을 정복하기 전, 아시아는 헬라인의 왕국인 세르싣(the Seleucids)의 제국에 속해 있었다(홍창표, p.135). 즉 본문에 언급된 아시아 지역은 오늘날의 터키 영토로서 당시(주후 1세기) 지도에는 로마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문맥에 따라 읽으면 이만희 씨와 같이 곡해를 하지 않게 된다. 계 1:4의 ‘아시아’를 비유의 용어로 보아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차라리 성경을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것보다 자신의 인생 자체를 ‘비유’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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