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교계·선교 > 간증
       
박두헌 목사/ "기도만이 살 길이다"
1998년 04월 01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박두헌목사/ 한미교회 담임·부산신학대학 교수


 불신자들이, 전통 문화인 유교나 불교를 자연스레 따르듯이 나의 가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통의 가정보다 특히 불교에 대해 열성적인 가정이었다. 할아버지 동생 분이 스님으로 계시고 외할아버지께서도 부산 대각사절에서 평신도 회장으로 대각사 살림을 혼자서 맡아 열중하는 불교 집안이었다. 할머니께서도 늘 시간만 나면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면서 지내는 분이었다. 마치 교회 권사님들이 새벽기도를 다니시며 늘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듯 말이다.

 나의 출생도 이런 열성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할머니와 손자 하나를 얻기 위해 100일 불공 후에 태몽을 꾸었고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고 한다. 당연히 할머니께서는 부처님이 주신 아들이라고 기뻐하시며 절에다 이름을 올려놓았다. 내가 자라면서도 할머니의 정성은 변함이 없었다. 나를 절로 데려가 우상을 향하여 열심히 절을 하라고 가르치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부처를 향하여 절도 많이 했다. 더욱이 대각사라는 절과 1분 정도 거리인 국제시장 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학교 시절은 거의 절에서 살다시피 세월을 보냈을 것은 불문 가지의 일이다.

 그런 내게 교회에 갈 기회가 생겼다. 중 1때였다. 가정 형편상 양정으로 이사를 와서 살게 되었고 버스 통학을 했던 나의 눈을 끄는 곳이 있었다. 그곳의 이름은 양정중앙교회였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이상하게 '이제 절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가야 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때리기 시작했다. 결국 용기를 내어 중 2때 혼자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인도였음을 깨닫게 되지만 그 때는 단순하게 교회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친구들과 재미있게 진행하는 율동과 게임 때문에 더욱 나의 마음이 끌렸다.

 어느덧 큰 믿음은 없었지만 교회에 안 가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되었고 학생회 예배를 통하여 많은 깨달음을 얻고 인간의 참된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도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내가 주님을 더욱 깊게 알게 되는 것과는 반대로 절에 열심을 내시는 부모님들의 반대와 핍박은 커져 갔다. 이로 인해 교회 다니는 것을 숨기며 다니다가 나중에 발각이 되어 심하게 야단을 맞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결국 아버지께서도 더 이상 못 참으셨는지 초강수를 두셨다. 고등학교 입학을 한 그 해 4월에 부친께서 나를 조용히 부르신 것이다.

 "가정을 택하든지, 교회를 택하든지 양자간에 결정을 내려라!"

 엄한 말씀이 계셨다. 그 때 나는 아버지께는 생각할 여유를 청한 다음 처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하고 진실된 기도를 드렸다. 일 주일 동안 등하교시 교회에 들러서 "하나님, 누구를 택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가정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응답을 주세요" 라고 매달렸다.

 주님은 기도하는 나에게 확실한 응답을 주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이 말씀을 주시면서 주님이 내 손을 붙잡는 환상을 보게 되었고 그 때 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담대하게 집으로 돌아가서 부친에게 확실한 말씀을 드릴 수 있었다.

 "아버지, 가정을 버리더라도 교회와 하나님을 버릴 수 없습니다."

 부친은 몹시 화가 나셨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장 집을 나가라는 것이었다. 갈 곳도 없는 몸이지만 너무나 추상같은 말씀에 일단 가방을 싸서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교회로 향했다. 이때부터 교회에서 실컷 울며 하나님께 무거운 짐을 맡기고 기도하며 3년 동안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잠을 자고 청소도 하며 교회 생활에 열심을 다 했다.

 그러나 집을 나와서 교회 생활을 시작한 지 1개월 동안은 용돈도 없고 밥 사 먹을 돈도 없어서 겨우 하루 한 끼 정도만을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늘 허기가 지고 외로우니 자연히 마음도 약해지고 집으로 돌아갈까 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남자가 한 번 칼을 뽑았는데 무엇이든지 해결을 해야지, 내가 지금 들어가면 완전히 하나님과 이별이고 앞으로 내 인생은 실패한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배고픔으로 인해 집으로 가자는 유혹을 떨치기 위해 밤이면 기도를 했고 특히 일자리를 달라는 기도를 빠트리지 않았다.

며칠 후 기도는 응답되었다. 아는 분의 소개로 한 가정의 세 아이(국 1, 3, 6년)를 하루에 두 시간 가르치는 가정 교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학비와 생활비는 3년 동안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비록 신앙의 경험과 기간은 짧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을 가까이 하려고 노력할 때 은혜를 받게 되고, 어려운 생활을 극복하게 될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헤가 나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켰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고3 때 여름 수련회를 통해 나의 신앙은 더욱 성장하게 된다. 양산 감림산 기도원에서의 첫 날 저녁, 죄인이 회개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말씀을 믿는 마음으로 밤 10시쯤 십자산으로 기도하러 갔다. 산에는 안개가 가득하였다. 마치 그 안개가 성령처럼 느껴지는 신비한 기분이 들었고 이곳에서 기도하면 성령을 충만히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돌바위에 앉아서 기도를 시작했다.

도중에 회개 기도가 터져 나오고 죄씻음의 확신이 생겼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혀가 올라가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이런 소리가 계속되자 나중에는 '내가 계속 이렇게 하면 우리말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생겼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나는 더 큰소리로 방언 기도를 하게 되며 지금까지의 죄를 회개할 수 있었다. 밤늦게까지 눈물 콧물이 섞인 회개와 눈물의 기도를 했다. 특히 나를 핍박했던 부모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완전히 회개한 것과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어 그분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한 것은 성령의 선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날은 구원의 확신과 거듭남을 체험할 수 있었고 주를 위해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기로 결심하게 된 날이다.

 그 후로 나의 기도 생활은 더욱 뜨거워졌다. 특히 부모님의 구원을 위하여 교회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결국 3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부모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님의 자녀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기도와 결사적인 눈물만이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가정의 마귀를 쫓아내며 온 가정이 구원을 얻고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체득한 기간이었다.

 아버지의 회심도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것 그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모두 나누어 주고 항상 술을 좋아하셔서 가정 생활은 잘 돌보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나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반대하셨다.

 "예수 믿으려면 이 집에서 나가라, 니가 계속 예수 믿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호적에서 지워 버리겠다!"

 이렇게 핍박하시며 나를 쫓아냈던 아버지는 집안 제삿날이 되면 으레 교회로 찾아와 나를 집으로 끌고 가셨다. 제삿상 앞에 억지로 무릎을 꿇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일은 사춘기 시절의 나에게 많은 상처가 되곤 했다. 때문에 나는 늘 부친을 피해 고 3 졸업 때까지 거의 교회 예배실에서 철야 기도겸 피신처로 생활을 해야 했다. 잠자리로 삼은 교회의 긴 의자는 이력이 나서 지금도 그 자리는 편안하기만 하다. 그러나 추운 겨울에는 참기가 힘들었다. 1-2개월 마루 바닥 위 의자에서 담요 1장으로 밤을 세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갈 곳이 없으니 그곳이 안식처요 나의 생활 공간이었다. 기도하고 3-4시간 잔 후면 새벽기도 시간이 되었고 기도로 하루를 열었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성령 충만함을 받은 이후로 부모님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강렬해지기만 했다. 계속 밤마다 눈물 흘리면서 부모님과 할머니의 구원을 위한 기도가 되풀이 되었다. 그러나 3년이란 긴 세월의 기도에도 아랑곳없이 그분들의 마음에는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더욱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자 부모님은 "예수 믿는 결과가 그 꼴이냐"며 나의 가슴을 더욱 더 아프게 하셨다.

 그런데 기도한지 4년째 되는 어느 날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부친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마음이 이상하게 교회로 나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했단다. 작은 신약 성경 한 권을 호주머니에 넣고 집에서 가까운 거성교회에 3주간이나 출석했지만 성가대에 있는 큰 딸을 지금까지 핍박했던 것이 미안하고 쑥스러워서 만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제사 때만 되면 교회에서 너를 집으로 끌고 갔었는데 목사님을 만나면 더욱 부끄러울 것 같아 축도시간에 항상 도망쳤단다."

 3주간이 되던 날 큰 동생이 성가대석에서 찬양을 하는 중에 아버지를 발견하였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필경 아버지가 맞다는 생각에 설교 후 기도중에 부친을 정확히 다시 확인하였다.

 교회에 나오신 이유를 묻자 울먹이시며 이유를 설명하셨던 것이다.

 우리 집에는 구원의 축복이 온 것이다. 그토록 나를 핍박하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된 것이다. 4년을 밤마다 눈물 흘리면서 기도한 그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렇게 주님을 영접하신 아버지는 그 후 10개월이 지났을 때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기도의 위력은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할머니의 사랑은 손자들에게 모두 다 쏟는다고 한다. 특히 외동인 손자에게 쏟는 사랑은 어느 손자에게보다 각별한 것이었다. 국민학교 때 점심시간이 되면 다른 사람들은 차가운 도시락을 먹지만 나는 수업 네 시간을 마치고 나면 교실밖에는 항상 따뜻한 점심을 만들어서 기다리는 할머니의 사랑을 수없이 체험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다 예수 믿기 전의 일이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후부터는 그런 사랑의 감정이 없어지고 오히려 모두가 핍박으로 바뀐 세월을 5년간 살아야 했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도 성령의 바람이 불었다.

 부친이 회심한 이 후 10개월만에 갑자기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셨지만 할머니에게는 이것보다 기막힌 일이 없었다. 외동 아들 하나를 바라보고 22살 때부터 청상과부로 70평생 살았는데 예수 믿고 1년이 못되어 세상을 떠났으니 할머니의 원망은 교회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를 더욱 더 미워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아들을 데려간 그 신에게 하나뿐인 손자도 미쳐 있으니 "내가 무엇을 믿고 살꼬!" 하는 한탄을 늘 입에 달고 계셨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나도 '내가 지금까지 부모, 할머니의 회심을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고 기다렸습니까? 겨우 아버지가 회심하셨는데 이런 불행을 주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라고 탄식하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계속 침륜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더 이상 물러 설 수 없기에 100일 철야 기도 작정을 한 후 매일 교회에 밤 11시에 나가서 새벽 3시까지 할머니의 구원을 위해 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성령의 역사는 작정 기일이 다 되가는 100일이 가까워지는 때에 일어났다. 어느 월요일 밤 할머니께서 주무시는데 하나님께서 꿈으로 역사하신 것이다. 그 꿈의 이야기는 이렇다.

 부친이 섬기는 교회가 불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끄느라고 야단인데 할머니는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가신 부친의 음성이 "어머니 왜 구경만 하세요? 빨리 불을 끄십시오" 라고 들리는 것이었다. 형체는 보지 못했지만 아들의 음성이 분명했다.

 그날 밤 그 꿈으로 할머니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이 똑같은 꿈을 3일 밤이나 연속으로 꾸게 되었다.

 살아 계신 성령께서 미신적이지만 옛날 노인들이 꿈에 대한 징조에는 마음이 약한 것을 아시고 꿈을 도구로 하셔서 결국 무릎을 꿇게 하신 것이다.

 할머니께서 나를 부르셨다.
 "얘야! 네가 믿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분명히 살아 계신데이! 나도 오늘부터 교회 나가서 하나님 믿기로 작정했다. 이제부터 나를 잘 가르쳐 주거라. 내가 이제까지 몰라서 너를 괴롭혔는데 나를 미워하지 말거라. 이제부터 내가 예수 믿기 시작하면 정말 잘 믿을 것이데이."

 이렇게 말씀하시며 약속까지 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할머니는 보수동에서 버스를 타고 거제동까지(약 1시간)의 먼 거리를 빠지지 않고 주일 . 삼일 기도회를 열심히 다니셨고 세례 받으시고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시다가 80세의 연세로 생을 마치셨다.

이중 잉크와 무색 잉크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사업에도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셨다.
 74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관학교에 지원하여 군인이 되겠다는 것이 나의 꿈이었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술이나 배워야 겠다는 생각에 친척 형님 밑에서 스크린 인쇄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인쇄 기술은 특히 많은 화학 약품을 배합하여 인쇄하는 기술이었다. 나에게는 적성도 맞고 경남공고 화공과를 졸업했기에 약품 배합이 재미도 있었다.

 이 생활에 익숙해져 갈 때쯤 어느 날 신문에 나온 위조지폐 사건이 눈길을 끌었다. 위조지폐 때문에 은행가에 소동이 일어나고 얼마 후에는 위조수표가 발견되어 또다시 사회에 큰 물의를 빚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 때 나의 머리에는 무엇인가 쏜살같이 지나가면서 위조 수표, 위조 지폐를 방지하는 "무색잉크"를 발명해야 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무색잉크는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감별기로 볼 수 있음). 이 때부터 바로 필요한 화학약품 몇 가지를 생각해 내어서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부산대학 도서관에 가서 관련되는 서적들을 펼쳐가며 깊이 연구하고 다시 실험실에서 실험을 계속했다. 이 실험에 6개월간 몰두한 결과 하나님께서 나에게 총명한 지혜를 주셔서 원래 계획한 무색잉크는 개발되지 아니했지만 이중 잉크라는 것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중잉크는 우리 육안으로는 빨간 색으로 식별되지만 감별기에서 감별하면 노란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용하는 주민등록증 하단에 부산시장인 직인이 우리 눈에는 빨간색으로 식별되지만 감별기 안에서는 노란색으로 색깔이 변하게 되는 이치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나에게 이런 지식과 재능은 없다. 늘 하나님께 기도한 결과 하나님의 지혜가 전달되어 이 일을 해 낼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계속 연구 실험 중에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제게 지혜를 주시어 이 약품이 발명 특허가 나고 세상에 알려지는 축복을 주시면 평생 주님을 위하여 이 물질을 사용할 것이며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주님의 역사로 축복을 받게 되었다고 간증하는 자료로 삼겠습니다." 

 이 기도가 그 때는 서원 기도였는지 몰랐지만 먼 훗날 깨달았을 때 하나님과의 약속의 기도임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3개월 후에는 이중 잉크만이 아니라 처음 계획하고 연구했던 무색 잉크도 개발되었다. 결국 기도한 대로 두 가지 잉크가 세상에 선을 보이고 인정을 받게 되었고 특히 조폐공사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나에게 좋은 조건으로 제의를 해 왔다. 모든 잉크 개발기술권을 조폐공사에 전달하고 잉크 개발부에 취업을 하면 많은 월급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반갑지 않았다. 왜냐하면 취업을 하면 시간적 제약으로 주의 일에 불참하게 되는 일이 마음에 걸렸고 부산에서 경산으로 이사를 하든지 또는 통근을 하는 일이라 수락을 하지 못하고 나의 개발품을 그곳과 수의 계약을 맺고 매달 납품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후 내가 발명한 무색 잉크를 이용하여 위조 수표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예를 들면 위조 수표는 자기앞 수표 백만원 권에 1자를 잘라 내고 그 자리에 '5', '8' 자로 붙이면 실제 백만 원 수표가 5백만 원, 8백만원으로 위조가 된다. 그래서 내가 발명한 무색잉크를 1자 밑에 1,000,000으로 기록을 한다. 그 후에 손님들이 사용시 이 수표를 은행에 가져가면 타자를 친 1,000,000원과 무색잉크 1,000,000원을 대조한 뒤에 현금결재를 하도록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이것을 은행 직원에게 훈련을 시키고 나의 아호를 따서 "제현상사"라는 회사를 개업하고 사장이 되었다.

 잉크들이 전국 은행에 알려지자 많은 호평을 받았다. 사업은 점점 확장이 되고 나에게는 무척이나 바쁜 일과가 시작되었다. 전국 은행에서 위조 수표만 발생하면 나를 찾는 사례가 많아져서 서울, 광주, 대전 등 대도시, 소도시 할 것 없이 열심히 달려가 위조수표를 감정을 해 주고 잉크를 공급했다.

 1년이 지난 후에 사업은 더욱 커졌다. 서울 대리점을 내고 이제는 서너 군데 대리점으로 지역을 나누게 되었고 제현상사는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지역만 구역으로 맡아 무려 9년이란 세월 동안 축복을 받게 되었다. 계속 사업을 확장하여 인쇄소도 개업을 하게 되었고 그 후 부산 기독교 백화점에 운동구점도 열게 돼 3개 사업체의 사장이 되었다. 이 때 재정적인 기반을 마련, 작은 집도 구입하고 승용차도 사는 등 최고의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사업은 날로 번창되어 비록 20대 초반의 나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남에게 어려운 일도 당하지 않았고 항상 돕는 사람 만나서 좋은 일이 생겼다. 나이에 비해 너무 한량없이 물질의 축복을 받은 것 같았다. 비록 작은 사업체이지만 세 곳이나 되니까 장점이 있었다. 한 곳의 경기가 부진하면 다른 두 곳이 호황을 이루고 다른 한 곳이 부진하면 또 다른 두 곳이 호황을 이루어 불경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개인기도와 직원 전체 기도를 빠트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항상 새벽 기도회를 통해 교회와 사업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직장에서는 하루 일과를 마치면 전 직원이 연합하여 매일 예배를 드렸다. 사업도 열심히 했지만 항상 주의 일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주일을 성수하면서 전 직원(약 20여 명) 복음화, 정확한 십일조 생활, 교회 일 충성, 주님 제일주의로 열심히 사업을 꾸려 나갈 때 주님 사업에는 불경기가 없었다.

 사업은 날로 확장되어 갔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고민이 있었다. 바로 교회 생활을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가르치는 자리에 서게 될 때 걱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이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성경을 배우고 나중에 전도인으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신학 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했다. 목사님과 이 일을 놓고 상의하였지만 사업이나 열심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신학 공부를 사실상 반대하는 권면이셨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는 도중에 꼭 해야겠다는 확신을 갖고 부산 신학교에 입학시험을 치고 등록을 하여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교회 일에 열중하고 시간 나는 대로 사업에도 열심히 뛰었다. 3학년이 되자 본 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본 교회 목사님은 사업하는 신학생은 일자리를 줄 수 없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계속 하나님께 일할 자리를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예비해 두신 수정동에 있는 수정교회에 교육 전도사로 부임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이곳에서 신학 졸업 직전까지 열심히 봉사할 기회를 주셨고 학생회 기관을 맡아서 몸 바쳐 열심히 일하면서 헌신하였다. 학생회는 점점 부흥되어 배가 전도되었고 많은 분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첫 목회지에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축복을 체험했다.

목회자로 부르시는 하나님
 5년 넘도록 열심히 사업에 몰두하는 어린 사업가로서, 또 신학 공부하면서 교회 일에 충성하는 전도사로서 점점 자리를 잡아가는 길목에 있던 1979년 10월 의 어느 날이었다. 자동차를 몰고 혼자서 부산에서 부마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마산을 가는 도중 가을비가 조금씩 내리는데 차 속에는 복음 송 테이프가 조용히 흘러 나왔다. 그런데 차 안에는 분명히 아무도 없고 노래만이 흘러나왔는데 갑자기 차 안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깜짝 놀라 뒤를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또 잠시 후에 "나는 너와 약속을 지켰는데 너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 라는 음성이 가슴 속에 똑똑하게 들려 왔다. 그 때 나는 속으로 하나님과 무슨 약속을 했는가 하고 깊이 생각을 해야 했다. 잠시 후, 5년 전에 무색 잉크 개발하는 도중에 서원 기도한 내용인 "주님이 개발시켜 주셔서 물질 축복 받아 성공하면 주의 일꾼이 되어서 전국으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종이 되겠다" 고 한 약속의 기도가 떠올랐다.

 그 때 나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외면하여 지금이라도 교통사고가 나서 병신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주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셨는데 내 몸을 위해 치료비로 사용한다면 무슨 망신인가? 나의 결론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래, 매 맞기 전에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돌아가자'

 마음을 굳히고 마산에서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나의 결심을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물론 반대 의사이셨다. 특히 혼자서 미국으로 유학 간다는 말씀에는 더욱 반대를 하셨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줄 믿고 미국 유학을 가자는 마음이 굳게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당시에 미국에 나를 도와줄 친척, 친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없었다.

 시작이 반이었다. 지금까지 성공을 위해 몰두했던 마음이 주님의 음성을 들은 그 날 이후로는 사업에 머물지 않았다. 번창하던 사업을 차례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빨리 목회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인쇄소를 정리했다. 그 후 4개월 후에 운동구점을 정리했고 제현상사는 적당한 인수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기도했다. 기도는 미국으로 출발하기 3개월 전에 응답되었다. 선명상사라는 곳에서 인수하였는데 이 사업은 현재까지도 잘 진행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잘 되나가던 사업을 정리하다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잘 되가던 사업을 정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심이었다. 더욱이 사업 실패의 경험을 맛보지 아니하고 성공한 가운데 주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종으로 가는 길에 동참하게 된 것은 얼마나 감사한지 이것이 은혜의 간증이요, 축복의 간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업을 정리하고 나서부터 진로에 대해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의 갈 길이 어디입니까? 개척 교회입니까, 미국 유학입니까?' 많은 망설임 속에 두 가지 꿈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결국 개척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으니 지금은 좀 더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유학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주변 여러 나라 중에 미국을 소개할 만한 사람도 없고 미국에서 초청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주위에 계시는 몇몇 분 목사님들을 찾아가서 유학계획을 말하면서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어느 목사님께서는 친구 중에 시카고에 계시는 분이 있다고 하였다. 그분에게 편지를 쓰고 난 얼마 후에 한국에 잠시 귀국하니 한번 만나 보자는 답을 받았다. 벌써 미국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분을 만났을 때 부탁을 드리고 식사 대접과 선물도 정성껏 대접했다. 그리고는 열심히 기도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나를 만난 후에 점점 소식이 뜸해지고 연락이 없어서 그 루트는 정리하고 또다시 다른 분들을 통해서 연락을 하고 또다시 만나서 대접을 하고 기대해 보았다.

 2년이란 세월이 미국 유학을 기대하며 이십여 명 이상을 만나고 부탁하고 대접하는 식으로 흘렀다. 사람들은 아무런 연락도 관심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한 때였다. 그 때도 내게 관심을 보이신 분은 한 분밖에 없었다. 언제나 동일한 분이었다.

 이 문제를 놓고 새벽 제단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였다. 그 때 나에게 주신 주님의 응답은 "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보내 줄 사람을 믿는다" 란 말씀이었다. 그 때서야 나는 나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두 시간 교회 제단에 엎드려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2년 동안 미국 보내 줄 사람만을 기다리며 찾아다니고 선물하고 대접한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제부터는 인간을 믿지 않으련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자!'.

 며칠 간 새벽기도를 하며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어떻게 해야 갈 수 있습니까?" 라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며칠 후에 성령님께서 미국 신학교에 직접 편지를 하면 어떨까? 하는 지혜를 떠올려 주셨다. 성령이 주신 음성대로 하기로 결정한 후 선배들에게 물어 봤다. 미국 영사관 내의 도서관에 가면 미국 대학교들의 주소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즉시 그 곳을 방문하여 31개 학교의 주소를 기록해서 그 곳으로 편지와 이력서를 보내었다. 놀랍게도 며칠 후 30개 학교에서 편지가 왔다. 정말 놀랄 일이었다. 미국인들의 정성에 감동되었다. 첫째는 나 같은 "한국인에게도 이렇게 정성을 들이는가? 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부족한 나이지만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일의 결과는 풍성하다는 점이었다(나중 미국에 가서 왜 한 학교는 회답이 없었는가를 알아본 결과 그 학교는 폐교 되었다고 했다).

 그 후 6개 학교에 다시 편지를 보내고 또 회답을 받아 결론적으로 아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는 사우스 웨스턴 성서대학으로 결정하고 초청장을 받아 유학의 길에 올랐다.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함을 새삼 체험한 때였다.

'여호와 이레'
 80년도 초에 미국 유학 비자는 쉽지 않았고, 특히 신학을 전공하는 목사나 전도사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웠던 때다. 미국에 유력한 보증인이나 토플 시험 성적을 많이 보유해도 비자 신청에서 거절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80년 12월 22일 몇 개월 동안 서류 준비를 해서 서울 미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연말이라 무척이나 추운 날씨였는데도 새벽 4시부터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그들 중에는 신학생 동기들도 몇 명이 있었다. 비자 받는 어려움은 그들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가 두세 번 인터뷰에서 낙제하였기에 오늘도 걱정이라고 말하면서 당신도 몇 번 낙제해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오직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미국 영사 앞에 서류를 내어 놓고 짧은 영어로 질문에 대답하려고 영어 단어를 생각하는데 "45분 후에 비자 받아 가셔요" 하는 한국말이 들렸다. 너무 당황하여 한국 말 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무슨 말을 했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왜 나에게는 아무 인터뷰도 없이 이렇게 쉽게 비자를 주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도움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할 뿐이다. 여호와 이레라는 신앙고백은 미국에서도 계속 되었다.

 미국의 L. A 공항에 내렸을 때 안내해 주는 사람도 없고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참으로 난감했다. 겨우 후배 친구 유학생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공중 전화를 거는데도 한국 전화와 달라 번호를 누르면 '돈 얼마를 넣으셔요' 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옆 사람이 전화를 돌려주어 후배 친구와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배는 미국에 유학 온지 6개월 정도라 자동차도 없고 영어도 서툴고 나에게 도움을 줄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런데 이 통화 중에 후배 룸에 윤선생이라는 사람이 그 방으로 놀러 와서 나와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전화를 받아서 "나, 윤이요" 하는 것이었다. 얼른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 후 그의 음성은 1년 전에 서울에서 여권을 만들기 위해 소양 교육을 받을 때 내 곁에 앉았던 바로 그 윤선생임을 알게 되었다. 윤선생은 나의 어려움에 해결사가 되어서 며칠 동안 나를 도와주었다. L.A에서 피닉스로 갈 때도 역시 아무 아는 사람 없이 피닉스 한인 전화 번호부에서 아리조나 한인 장로교회 전화번호를 알아서 목사님께 전화했고 목사님과 집사님 한 가정이 공항에 나와서 나를 인도하여 주었다. 참으로 "여호와 이레" 이다. 비록 나 혼자서 이곳 저곳 다니지만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항상 나아갈 길을 예비해 주셨음을 지금까지 느끼며 감사하면서 살아간다.

 이 때부터 도미한 지 5년 동안 밤잠 자지 않고 갖가지 고생하며 조국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주야간 뛰어 다니며 공부한 결과로 1987년 5월에는 목회학 박사 학위 논문이 교수회의에서 통과되어 학위 수여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학위 논문제목은 "미국 장로교회와 한국 이민 교회 행정학의 고찰"이었다. 현대 교회의 발전에는 목회자들의 행정 방향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행정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 교회를 살펴보아도 교인들의 행정으로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목사가 어떤 목회 행정 방침으로 목회하느냐에 따라서 부흥하고 발전하는 사례는 많았다. 즉 무디, 로버트 슐러 목사 등 개성있는 목회자들의 훌륭한 목회행정 방침으로 교회는 부흥되고 발전되었다. 이 중 내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미국 장로교 행정과 이민 목회 행정이었고 '우리 이민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깊이 관찰한 것이 다행히 교수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어 실천신학 부분에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가족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못한 학위 수여식이었지만 하나님의 축복과 교우들의 축하로 눈시울이 뜨거웠다.

 학위식을 마친 뒤에는 빨리 조국의 가족들에게로 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가끔 미국생활 5년 동안 영어도 익숙해지고 생활 환경도 익숙해 졌으니 미국에 영주하자는 생각도 들었으나 하나님은 나에게 한 번도 이곳을 허락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 항상 공부가 끝나면 조국으로 간다는 생각만 허락해 주셨다. 조국에 돌아가서 젊을 때 고생하면서 열심히 일해야 겠다는 생각이 항상 나의 마음을 지배했다. 결국 학위 수여식을 마친 뒤 20여 일 동안 그 곳 생활을 정리하고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때 많은 교인들의 눈물의 환송과 공항에 나와서 드린 환송 예배는 나에게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되었다.

조국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돌아왔지만 조국의 일터는 냉담했다. 몇몇 교회에 이력서를 내보아도 나이로는 부목사의 위치가 적격이었으나 공부는 부목사의 위치를 넘어섰고 그렇다고 학교 교수나 교목 자리의 문이 넓은 것도 아니었다.

 부산 모 교회에서 7개월 간 강단 설교 목사로 일했지만 몇 장로님들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환영하지 않는 눈치를 보여 강단 설교도 그만두었다. 사실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하기 몇 달 전부터 한국가서는 개척교회를 할 계획으로 기도를 했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나와서 보니 개척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위 분들도 이를 알고는 '공부는 개척하려고 했느냐'며 만류를 했다. 그러나 고심한 결과 작은 교회지만 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하나님께, '늦었지만 이제부터 개척할테니 장소만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한 주간 계획하고 기도하는 중에 계속 기도하기로 결정하여 20여 일 금식기도 하면서 응답을 기다렸다.

 금식 15일째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셔서 큰 은혜를 받았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환상 중에 이 말씀을 받고 나니 얼마나 감사하며 기쁜지 금식하면서도 힘이 나고 더욱 기도에 열중하게 되었다. 계속 기도하는 중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려 네 자신을 동방에서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서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서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 43:6-7)

 금식 20일을 하는 동안 교회 개척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집으로 귀가하여 부산 모 교회 헌신 예배 인도 부탁을 받아 주일 날 오후 헌신 예배에 참석한 뒤에 그 교회를 나오다가 수영로 건너편 아파트 대단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지역같이 눈에 크게 보였다. 그 때는 그 지역이 무슨 동네인지 몰라서 모교회 목사님께 여쭈었더니 토곡 주공 아파트라고 말씀하였다.

 그 다음날 그 지역을 찾아가서 이곳 저곳 보았지만 교회를 세울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로도 며칠간 동네를 찾아 다녔지만 마찬가지였다. 보름이 지나서야 전화 한 통이 망미동 효광교회 목사님으로부터 걸려 왔다. 우리 교회가 이사 갈 계획인데 그 장소를 와서 보라는 내용이었다. 망미동은 토곡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이기 때문에 다음날 교회에 가기로 약속을 하고 그 다음날 만나서 교회를 보았는데 벌써 8년째 예배드린 교회였기에 아름다웠고 최목사님께서 처음 시작하는 나에게 선배로써 많이 협조하여 준 덕분에 1개월간 개척 준비를 하여 87년 5월 3일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한미교회란 이름을 지을 때 첫째는 한국에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자는 뜻이었고, 둘째는 한국 . 미국 두 나라의 좋은 장점을 살려서 세계적인 교회의 성장을 이루자는 의미였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개척 교회 창립한 뒤 한 달이 되었다. 개척 식구가 어른 7명, 아이 5명의 얼굴뿐이었다. 마음에 걱정이 생겼다. '이렇게 앉아서 기도만 해서는 안될 일이구나.'전도에 전력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이 생겼다. 이 때부터 전도지를 연구하여 평범한 전도지 대신에 성인용 전도지와 학생용 전도지를 구분하여 성인용은 "당신은 지금 압박을 받고 있습니까?" 하는 제목으로, 학생용은 "무거운 책가방"이란 제목을 붙여서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2시간 정도 시장이나 신호등, 건널목에서 전도하기로 작정하고 주 4일 정도를 열심히 전도했다. 한 주간이 지나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늘지 않았지만 전도는 주님의 명령이요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열심히 하였다. 한 달쯤 지났을 때부터 전도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 명씩 교회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부흥되기 시작하더니 학생회도 2-3명으로 시작하여 학생회를 조직하고 예배를 드릴 정도로 배가되었다. 학생용 전도지를 가까운 중 . 고등학교 등하교 시간에 열심히 전하고 외친 결과였다.

 노방 전도를 두고 어떤 이들은 이런 전도 방법은 옳지 않다 생활로 전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전도는 어떤 모습으로 하든지 주님이 기뻐하시고 전도지 한 장으로 뿌린 씨앗은 반드시 열매로 돌아온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개척 1주년 예배 때 교인 수가 30여 명으로 성장되고 점점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갈 수 있었던 것은 전도의 결과였다.

 87년 가을, 교회를 개척한 지 8개월쯤 되었을 때는 교회의 재정이나 일꾼이 모두 부족하여 어렵고 힘들 때였다. 이겨낼 길은 기도밖에 없었다. 밤 11시가 되면 늘 교회에 와서 목회와 교인들의 생활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계속해서 가졌다. 사실 개척한 후 8개월 동안에는 교회에서 받는 생활비는 전혀 없고 교통비 이만 원을 받아서 사용했기에 실제 생활은 미혼인 여동생의 박봉으로 함께 살아가는 터였다. 그래도 모든 것이 감사하고 마음이 은혜스러우니까 어떤 괴로움이나 빈곤도 어렵거나 힘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모든 것이 풍성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은 양식이 떨어진 적도 있었다. 아침에는 남아있는 빵, 우유로 끼니를 때우고는 저녁부터는 양식을 빌리지 않으면 굶어야 될 형편까지 되었다. 그 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약국을 경영하는 처형댁에서 조금씩 생활비를 보조 받아 겨우 생계를 이어 나갔기 때문에 기도 중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그리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급한 사정이 되자 "쌀 독에 쌀이 떨어졌습니다" 라는 기도가 자연히 흘러 나왔다.

 저녁을 굶은 상태에서 다음날 새벽기도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 날 따라 두 달 전 철야에 참석한 서울에서 사신다는 어떤 할머니가 참석하셨다. 5명이 모여서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눈을 뜨니 내 곁에는 책 보따리 하나와 편지가 있었다. 서울 할머니께서 종교서적 3권, 설교 테이프 2개 그리고 생활비 십만 원을 편지와 함께 그 속에 넣고 간 것이었다. 내 생전 처음으로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였고 그렇게 빠른 응답의 경험도 처음이었다.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응답은 이후로도 계속 되었다.

 개척한 뒤 1년이 되자 멀리서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 생겼다. 버스 노선을 두 번이나 바꿔 타는 분들도 계셨는데 이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소리도 들려 왔다. 그리고 매달 1회 산상기도회로 모여서 양산 쪽으로 갈 때는 다른 교회 차를 빌려 타고 가야 했고 때로는 대여가 되지 않아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때로 모 집사님의 베스타 6인승을 빌렸는데 여섯 사람은 의자에 앉았지만 7-8명은 짐 싣는 뒤칸에 앉아서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 날 밤 우리 교인들은 모두가 12인승 차를 구입하자는 것을 자연스럽게 기도의 제목으로 삼았다.

모 집사는 한 대보다 두 대를 달라고 기도하자는 제의를 했다. 내 마음은 '한 대도 없는데 무슨 두 대를 달라는 기도냐' 하는 마음이었지만 그 집사의 음성이 하도 간절하여서 목사인 나도 못 이긴 체하고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 주일 날 교인들에게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해 광고를 하고 헌금을 했는데 약 2백만 원 헌금이 되었다. 그런데 부설 탁아원에서도 자동차 구입을 꼭 해야 겠다고 의논이 되어 그 기관에서 15인승 토픽 새 차를 사게 되었고 그 후에 교회에서 베스타 중고를 구입하게 되어 우리의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 되었다. 때로는 목사의 믿음보다 교인들의 믿음이 클 때도 있고 교인들이 더욱 더 진실된 기도를 드릴 때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개척 3년 후에는 교회 건축을 해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계속 기도하면서 90년도 교회 표어로 "장막터를 넓히라" 라는 주제로 년 초부터 열심히 기도했다. 처음 건물주와의 계약이 3년이었고 89년부터 전세금이 상승하여 계약 3년이 끝날 때는 몇 배 올릴 것이 당연했다. 이 때는 전세금이 폭등하던 때였다.

 망미동 주위에 이사할 교회 건물 몇 곳을 알아보았지만 8천 - 1억 사이의 전세금이었고 정말 앞으로 교회는 어디로 이사해야 할 지 앞이 막막했다. 늘 밤마다 교회에서 철야하면서 "하나님, 우리의 장막터는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는 불신자의 건물은 수없이 많은데 성전 터는 어디 있습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90년 4월에 현재 연산 9동 488-13번지 88평의 작은 터가 교회에서 구입하면 팔겠다는 이야기를 건네 받고 계속 기도하면서 터를 보러 다녀왔는데 평수는 적지만 우리 형편에 맞을 것 같았다.

 땅 주인은 우리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시기적으로 돈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에 어떻게 결정해야 할 지 걱정이 되었다. 그 때 건축 위원 중에 찬성하시는 분은 1명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찬성하시는 건축 위원 김집사님은 신앙생활 년 수는 짧은 분이지만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자신이 병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를 받고 난 후 하나님께서 주신 "성전을 지으라" 고 환상 중에 말씀을 받았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분명히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라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나도 판단이 어려웠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시고 그 말씀에 책임지는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믿게 되었고 나머지 건축위원들을 설득시켜서 결국은 가결되어 은행 융자 2천만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더욱이 여기에 교인들의 눈물어린 헌금이 2천만여 원이 보태지게 되었다. 어려운 고비 때마다 힘들고 눈물 겨운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잘 넘겼다.

 8월말에 설계와 건축 허가를 받아서 9월초부터 건축을 시작했다. 주위 환경이 주택이 가득한 곳이라 교회를 건축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건축하다 주민들과 마찰이 생기면 그 고통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일체 교인들도 현장에 오지 못하게 권하고 몇 분만 다니면서 건축 감독을 하게 했는데 처음에는 주위 사람들이 일반 주택인 줄 알고 먼지와 소음 공해로만 불평을 했다.

 건축을 맡은 전도 건설 회사측에서 시작하는 날 수박 100여 개를 준비하여 공사장 주위의 집 집 마다 2개씩 50여 집으로 다니면서 인사를 했다. 주민들의 불평은 이 때부터 줄어들기 시작하여 공사를 마치고 준공 검사를 받는 날까지 한번도 소란 없이 무사히 교회가 서게 되었다. 준공 검사를 마치고 교회 간판을 달 때서야 몇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불평을 가지고 찾아왔기에 그분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계속 협조해 달라는 부탁을 드렸는데 이미 준공검사가 나왔기에 그들도 더 이상 소요없이 잘 마무리 되었다. 현재 본당 반지하 60평 150여 명의 좌석과 1층은 교육관 친교실로 사용하고 주 중에는 선교원, 탁아원으로 이용되고 2, 3층 사택 4세대가 아름답게 지어져서 교인들이 잘 이용하고 있다. 교회 설립 역사는 짧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하신 것은 기도의 응답이며 하나님의 은총임을 확실히 믿는다.
 
건축헌금을 주옵소서!
 91년 1월초에 교회 건물이 완공되고 준공 검사를 마친 후 1월 20일 입당 예배를 드렸다. 모두 기쁨과 감격에 가득 차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매월 육백여만 원의 원금 및 이자를 갚아야 하는데 정말 어떻게 해야 할런지 인간인지라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개척 교회 때 교인 수는 50명이 넘었는데 이사하는 이유로 10명이 나갔고 겨우 40여 명을 앉혀 놓고 "건축 헌금합시다" 라는 광고는 정말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불과 8개월 전에 땅을 구입하면서 그들은 힘겹게 헌금을 했고 지금도 매주 정성을 쏟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또 매달 육백 만원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정말 이 때 기도해야 할 때이구나.

기도라도 해야 살지. 그렇지 않으면 쓰러진다.' 금융기관에서는 연체 전화가 오고 빚 독촉 전화 때문에 나에게는 전화 공포증이 생길 정도였다. 4개월이 어느덧 지났다. 나에게는 아무런 대책도 없어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었다. 주위 몇 사람들은 교회를 팔아서 빚을 갚자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솔직히 머리를 망치로 얻어 맞아 정신이 없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격한 감정을 갖지 말고 하나님과 대화하자고 마음으로 다짐하였다.

 어느 날 김집사가 와서 "목사님, 이렇게 기도만 하면 해결이 됩니까? 우리 건축위원 7명을 중심으로 힘써 건축헌금을 작정을 한 번 더 해봅시다" 라고 제의를 했다. 그 말씀에 힘을 내게 되었고 건축위원들을 소집하여 한 번 의논 해보자는 생각에 어느 때보다 힘이 생겼다. 건축위원회를 소집해서 몇 시간 의논을 했는데 교회 매매 소리는 없어지고 "우리는 모두 힘을 내어서 3년 동안 열심히 건축 헌금을 하도록 작정하여 하나님께 바쳐 봅시다" 라고 어느 집사의 말이 있었다. 김집사가 매월 약 2백만 원, 이집사가 오십만 원, 박집사는 91년 말까지 3천만 원, 서집사 20만원 등 어느덧 7명이 매월 3백 5십만원 정도로 작정이 됐다. 모두들 서로 놀란 듯하였다. 그리고 3주일 후에 교인 중에 협조할 분을 찾아보니 교인들도 건축위원회에서 연합하여 작정한 대로 낸 것에 그들도 감격하였고 그들도 힘껏 헌금하는데 협조를 하였다.

 그 후 작정한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갑절의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사업하시는 분들은 불경기가 없이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업이 번창되어가며 월급받는 집사님들은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과 또한 임금 인상으로 갑절의 축복을 받아 늘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물론 교회 1차 건축 헌금을 할 때 몇 교인들이 시험에 드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이 교회를 떠난 사랑하는 교인들 중에 신앙생활을 중단하든지 믿음이 약해지고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를 들을 때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축복의 기회를 놓친 자들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참 허전하고 종종 그들을 위하여 축복의 기회를 달라고 기도를 드리곤 한다.

죽음에서의 승리
 내가 친구들과 갖는 모임 중에 숙맥들의 모임이라는 것이 있다. 원래 석맥죽근이란 이름인데 사내들 10명이 모두 숙맥같고 바보같은 사내들의 모임이라 숙맥 또는 바보들의 모임이라고 불렀다. 모두 국민학교 때 동창인 한 반 친구들이었다. 그 중에 4명은 전도하여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다. 나의 소원 중 하나는 친구 10명 모두가 한미교회로 나와서 믿음 생활하는 것이다.

 이 중 임길성이란 친구가 예수를 믿는 과정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다. 그 친구 집은 대대로 불교 가정이었다. 어머니는 처녀 시절에 세례받고 시골 교회에서 처녀로서 집사직을 받은 적이 있지만 임씨 가문에 시집와서 결국에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는데 열중하게 되었다. 더욱이 그 집 할머니께서는 신이 내려 우상을 모시고 미신에 열중하였는데 그의 어머님도 여전히 신이 내려 그 신을 섬기지 않으면 병으로 고생하는 일이 많아서 그 신을 버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그의 어머니는 내가 전도사 시절에 그 친구 집에 가면 같이 갔던 친구 중에 나를 가장 싫어하는 눈치였다. 악령과 성령의 싸움의 현실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항상 내 생각에는 이 가정은 택한 가정인데 언젠가는 주님 앞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종종 기도를 드렸다.

 1989년 봄에 친구의 모친은 폐암이라고 침례 병원에서 진단을 내렸고 6개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어느 날 나는 친구 어머니의 병문안을 목적으로 방문하였다. 병원에서 나를 만났지만 여전히 반가워하는 모습은 아니었고 나에게 "바쁠 텐데 빨리 가라"고 종용하였다. 그 때 내 친구 6명 정도가 함께 있었는데 나에게만 계속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후에 그 방을 빠져나와 그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드렸다.

 며칠이 지났는데 친구한테서 뜻밖의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서 너를 찾는데 와서 기도를 부탁한다."

 전화를 받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영혼은 택한 백성이라는 마음으로 침례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때 이미 친구의 어머니께는 완전히 변화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웃 침대에 있는 할머니에게 전도를 하고 혼자서 입술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의 소리가 나왔다. 너무나 신기하여 어떻게 이처럼 변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어머니께서는 자기 자신이 이제 얼마 못 사신다는 것을 깨달았고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혼자서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불교를 믿으니깐 자비하신 석가모니의 품인 극락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아무런 느낌도 감격도 없었다. 그런데 머리 속에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섬겼던 생각이 나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붙들고 어린양을 찾은 것처럼 반갑게 맞이하는 환상을 보았다. 이때 나의 갈 곳은 나의 본향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품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 확신이 생긴 즉시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빨리 친구인 박목사를 불러와라. 어서 나를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불러 달라"는 부탁을 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그분의 고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다. 암의 말기는 거의 고통의 시절이고 그 고통을 참지 못하여 진통제, 마약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어머니는 이상하게도 그 후부터는 마음에 평안이 생기고 하나님께서 고통을 덜어 주셔서 평안을 찾기 시작하였는데 혹시 병이 낫는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보름 후에 병원에서 퇴원하여 집으로 모셔와서 3개월 투병 속에 매일 심방하고 예배를 통해 회개기도와 눈물과 신앙고백으로 제단을 쌓았다.

 돌아가시기 전 구원의 확신을 점검해 보아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꿈을 꾸고 자신이 천국으로 갈 것이라는 확신이 분명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전도를 많이 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주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의 나라로 가셨다. 비록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분의 죽음은 승리의 인생을 확실히 우리에게 보여 주었고 친구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열심히 믿음의 가정을 만들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친구는 어느덧 세례를 받고 전 가정이 주님을 의지하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하여 91년 가을에는 안수 집사의 직분을 받아 장립식을 드리게 되었다.

 우리 교회 성도 중 30대 초에는 사업이 번창하여 물질적으로 사치스럽게 살다가 결국 사업에 실패한 김사장의 얘기이다. 그 동안 몇 차례 하나님께서 불렀지만 그 때마다 부인하고 전도하는 자들을 향하여 못된 말들로 불신하며 세상의 온갖 방탕한 생활은 남에게 뒤지지 않게 열심히 쫓아가서 마약(히로뽕)에 손을 댐으로 사업은 완전히 실패하고 육신의 건강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사람이다. 부인도 견디다 못해 어린 딸을 데리고 나가 버려서 빈털터리가 된 김사장은 말이 좋아 사장이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나이가 되어 버렸다.

 문득 돈이 없어 불을 떼지 못한 냉방에 누워서 생각나는 것이 "하나님 날 살려 주세요" 하는 회개의 마음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이웃에 한미교회에 다닌다는 이 선생에게 찾아가서 신세한탄을 하였다. "이 형, 교회 다닌지 2개월 되었는데 얼굴빛이 많이 좋아졌소. 나도 예수 믿고 싶은데 날 인도해 주소." 이 선생은 마음 속으로 기뻐하면서 그 주간부터 철야 기도회에 김사장 얘기를 하며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여 15명 철야 기도 성도들이 얼굴은 모르지만 열심히 기도했다.

그 후 금요 산상기도회를 가기 위해 준비하는데 그분이 나의 사택으로 왔다. 얼굴은 형편없이 죄악에 시달려서 고통 중에 있는 모습이었고 죄악에 살던 사람이라 많은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모습이어서 나의 느낌에 저 분이 얼마나 교회에 다니겠나 하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 분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큰 일꾼 삼을런지 모르니 오늘 밤에는 저 분을 위하여 기도의 초점을 맞추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20여 명이 감림산 기도원으로 향하였다.

 김선생은 눈을 감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후에 고백해서 알게 되었지만 당시 그의 마음은 '내가 잘못 왔구나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는데....' 하는 사탄의 생각이 자신을 흔들었다고 한다.

 20여 명이 찬송을 부르며 어느 때보다 국가와 교회와 개인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중보 기도 시간에는 김선생을 위해 우리 전체가 통성기도를 하며 필자는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신 확신의 믿음을 주셨고 예수 믿는 이 길이 사는 길이라는 새생명에 대한 소망과 함께 회개의 눈물이 순간적으로 마약의 사탄을 뛰쳐 나가게 하였다.

 기도 후에 자신이 새 사람이 되어 은혜 받았다고 해서 아직 교회도 한 번 오지 않은 사람이 이런 간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뜨거운 충격 속에 확실한 은혜를 받고 돌아와서 그 주일에 교회에 등록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 첫 발을 시작하였다. 몇 개월 후에 이선생과 김선생 두 사람과 함께 기도원에 올라가서 3박 4일 동안 기독교 입문을 위해 처음으로 성경 공부를 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김선생은 4일 동안 기도하는 도중에 더욱 더 큰 은혜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버스 표가 없으면 이웃 사람에게 빌려서 매일 교회를 나오는 열성을 보였다.

 "수요 예배가 기다려지며 금요 철야와 주일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성령 충만의 생활이 바로 이런 것인가 봅니다."

 김씨는 변화되었다. 이 사실을 3개월이 지난 후에 처가에 있던 부인과 딸에게 전했지만 믿지 않았다. 사실 그 동안 죄인의 괴수처럼 살았던 삶 속에 부인에게 신용 잃는 짓을 해 왔기에 믿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 부인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부인에게 "남편이 예수 때문에 변화되었다"며 "이제 당신도 예수 믿고 가정을 합하여 행복하게 살도록 하라"고 권하는 말에 부인은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고 그 후 1개월 동안 점점 남편이 변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그분들은 믿음의 가정을 시작하고 모두 예수 믿고 그 때부터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작은 돈으로 다시 새롭게 주택 사업을 시작했다. 89년도의 한참 좋은 주택 경기는 바람을 탔고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도 그들에게로 뻗어 갔다. 90년도에는 (주) OO 주택도 설립하여 대표이사로서 열심히 일하게 되었고 사업은 차츰 번창해 갔지만 자신들은 아직도 단칸방에서 무척 어렵게 살고 있었다. 이 때 맞은 편 아파트를 보면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에게도 저 아파트 하나 주십시오" 하는 기도와 함께 열심히 믿음의 생활을 한 결과 1년 후에는 기도 제목이 이루어져 그들이 원하는 그 아파트에 좋은 주택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입주하는 날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간증 예배를 드렸다.

이제는 한미교회의 서리집사로서 확실한 믿음을 갖고 전 직원을 복음화하여 직장예배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 한평생 주님 나라를 위하여 교회에 헌신 봉사를 다짐하고 애쓰는 아들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죄인의 괴수가 저처럼 변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늘 주님 앞에 감사한다.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합천 해인사 부근 작은 마을에서 30년간 점쟁이와 무당 노릇을 하던 허씨 할머니 얘기다. 허씨 할머니는 89년 가을에 부산 친척집에 놀러 오셨다가 마침 친척인 김집사님께서 밤새 열심히 전도한 결과로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고 오후예배에도 참석하였다. 이것만도 놀라운 일인데 허씨 할머니는 특별 기도까지 받기를 원했다.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예배를 마친 후 전 교인에게 기도시킨 후에 내가 가서 두 손을 머리에 얹고는 기도를 했다. 이 때 하나님 은혜로 점치는 귀신이 나갔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런데 할머니는 기도 받은 후에 오히려 울상이 되었다. "목사님 큰 일 났습니다. 제가 오늘 한미교회에 와서 오후 예배 기도 받기 전만 하더라도 조상(점치는 귀신)이 있었는데 이제는 나갔기 때문에 내일부터 합천에서 점쟁이 노릇을 못하게 됐으니 어떻게 하면 좋소?"

 할머니의 걱정은 대단했다. 용기를 줄 필요가 있었다.

 "할머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제 그런 일은 모두 집어 치우고 부산와서 예수님 믿고 행복하게 삽시다."

 반가운 이야기였는지 "목사님, 날 먹여 살게 해 주실래요, 자신있습니까?" 하고 다짐을 받는 것이었다.

 갑자기 성령께서 내게 담대한 마음을 주셨다.

 "그래요, 우리가 책임지지요!"

 이렇게 해서 할머니는 30년 정든 고향을 등지고 부산으로 이사오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합천으로 가서 이삿짐을 준비하기로 했다. 가기 전에는 "목사님, 오셔서 내가 섬겼던 신주 단지를 없애 주셔요" 하고 부탁을 하기에 약속을 해 놓은 상태였다. 며칠 후에 나는 김집사와 함께 합천 해인사 쪽으로 갔다. 도착하니 오후 1시경이 되었고 동네 노인들이 벌써 소식을 들었는지 우리를 기다리면서 수근수근 대고 있었다. 여러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젊은 목사가 저 집을 망하게 하는구나"라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고 "예수 믿으면 좋은 일이 생길런지 모르지" 하며 신기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집에 도착하자 동네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나와 김집사 등 세 명은 큰 소리로 기도하고 그 집으로 들어가 망치로 신주 단지 모셔 놓은 부처, 밥그릇, 빨강종이, 노란 종이, 부적 등을 모조리 부수고 뜯어내어 밖으로 옮겨 놓고 마당 한 가운데서 불을 질렀다. 동네 사람들은 "저렇게 하면 벌받을 텐데 젊은 목사가 겁도 없구나" 우려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감사 예배를 드렸다. 신주를 모두 불태운 후에 할머니는 청소를 하고 그 집에서 몇 가지의 짐을 챙겨서 차에 싣고 부산으로 이사를 해서는 그물 공장에 가서 일을 해서 생활을 이끌고 나갔다.

 그런데 그 가정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30세 되는 철없는 아들 한 명이 문제였다. 27세 때 합천에서 살 때 아버지는 늘 술먹고 개망나니였고 아들은 조금 병적인 싸움꾼이었다. 어느 날 아들이 낫을 가지고 술 먹고 자는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동네방네를 다니면서 "우리 집에 개구리 잡았다"고 말하길래 동네 사람들이 방에 가서 문을 열고 보니 그의 부친이 죽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경찰에 잡혀 갔고 재판을 받아 정신병자로 판명이 되어 공주 감호소에 수감 중이었던 것이다. 그 동안 부모 형제들이 한 번도 면회를 가지 않아서 소외감에 빠져 있던 사람이었다.

김집사가 기도하는 중에 그를 도와주라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고 내게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도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우리 교회에서는 금요 철야 때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면회를 가서 복음을 전했다. 당신 어머니도 예수를 믿게 되고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당 아들에서 벗어났음을 반가워 하면서 자신도 예수를 믿겠다며 영접을 했다. 김집사는 이 때부터 1주일 1회 이상 부산에서 대전(공주) 감호소에 2년 동안 면회를 다녔고 우리 교회는 계속 그를 위해 기도했다.

 우리의 기도와 김집사의 정성으로 법무부에서는 2년만에 퇴사를 결정해 주었다. 그 아들과 어머니는 부산에서 만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지금은 직업 때문에 시골에 가서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고 있다.

결혼
 결혼은 인생의 가장 귀중한 제2의 출발이다. 어떤 사람과 결혼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은 대단히 달라지게 된다. 내가 결혼에 대하여 생각하며 기도한 것은 24세 때부터였다. 주위 여러 교인들이 나이는 어리지만 목회자는 결혼을 일찍하는 것이 좋다는 권유가 많이 있었고 스스로도 생각한 바가 있어서 가정적 결혼관에 대하여 몇 가지 기준을 만들어서 기도했다.

 첫째는 3대째 믿음의 가정의 규수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짧은 목회 경험에 가정 대대로의 영적 축복은 대단히 귀중했기에 부인 쪽에 물질적 도움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영적인 축복은 함께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둘째는 어릴 때부터 목회자 사모가 되기를 원하고 기도하던 사람을 원했다. 목사의 사명도 대단히 귀중한 일이지만 목회자 사모의 사명도 목사만큼 귀중한 것을 깨달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의료인 직업을 갖고 일하는 사모를 원했다. 그 이유는 성경에 바울 곁에는 의사인 누가가 따라 다니면서 바울을 도왔던 흔적이 많고 또 하나는 농어촌 어느 지역에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에 가서 일을 할 경우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위해서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위 세 가지 제목을 두고 구체적으로 새벽 기도회 때 기도했다. 어느 날 큰 여동생이 거성교회 청년회원이며 성가대원이라고 소개를 해서 보았는데 처음에는 관심을 별로 갖지 못했다. 그런데 한 달 후 또 우연히 만나게 되어 두 사람이 앞으로의 삶에 대하여 몇 시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 때 바로 이 사람이 이제까지 내가 3가지 기도제목을 갖고 기도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 후 다시 한 번 만나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나에게는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결혼 청혼까지 했는데 처가 쪽에서 반대 의사가 왔다. 나는 그쯤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서 장인될 분을 만나서 담판을 짓기로 작정했다. 어느 날 약속된 시간에 장인될 분을 찾아가서 나의 현 상황과 비전에 대하여 소상히 말씀을 드렸다.

 "아직도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3-5년 정도 시간이 필요하고 현재는 보잘 것 없지만 학벌을 갖추고 성숙한 목회자의 자질을 갖추게 될 10년 후를 생각하셔서 혼인을 승락해 주십시오."

 직접적인 청혼에 마음이 움직인 장인은 그 다음날 혼인을 승락했고 그 후 1979년 2월 6일 거성 교회당에서 전도식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벌써 13년 결혼 생활을 하면서 신앙의 유산을 대대로 받은 축복이 가정에 임하여, 아내가 목회자의 십자가 길을 잘 참는 모습을 보며 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제 간증을 정리하고자 한다.
 1973년에 하나님께서 내게 좋은 아이디어를 허락해 주셔서 무색 잉크와 이중 잉크를 발명하여 나라와 사회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다. 그 때의 서원 기도가 오늘날의 주의 종의 자리에 설 수 있게 하였다. 그 때 또 기도한 것이 가정 구원을 이루어 달라는 것이었는데 이 기도도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이 후에도 많은 기도 응답과 함께 좋은 아이디어도 허락하셨다. 1993년도에 일본의 어느 가정에서 '소변 소음 방지기' 라는 기계를 보고는 이에 착안하여 비슷한 기계를 개발했다. 결국 한국 특허청에 실용신안 특허 및 의장등록 특허도 받게 되어 또 한 번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 교회 교우 한 분이 교회 이름을 따서 한미산업을 설립하여 한국 내수 생산과 일본, 동남아 수출을 하려고 열심히 생산하고 있다. 그 수익금의 일부는 선교 사업, 장학 사업, 교회 건축 헌금 등으로 귀하게 사용하려고 한다.

 지금도 나의 머리 속에는 좋은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고 있다. 그 원천은 내가 아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우리에게 교훈하신다. <잠언 1:7>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4월호).

교회와신앙의 다른기사 보기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정명석의 범행에 대한 구체적 사
자유통일당, 22대 총선에도 '3
김노아, “오늘날 기독교의 구원관
JMS 신도들, 정명석 교주 재판
동국대학 캠퍼스, 신천지 포교로
신천지인의 스토킹 행위에 대한 법
JMS 교주 정명석, 여신도 추행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호 : 교회와신앙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이용약관 / 발행인 : 최삼경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12125)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 도제원로 32-2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