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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트니스 리의 신인합일주의 사상과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은 무엇인가?
지상논쟁2-2 교회와신앙측
1996년 12월 01일 (일) 00:00:0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본지는 지난 8월호부터 윗트리스 리(지방교회·회복교회)씨측과 지상논쟁을 해오고 있다. 윗트니스 리씨측이 기존의 비판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해온 데 따른 것이다. 이번 호의 내용은 지난 번(10월호)에 게재된 윗트니스 리씨측의 글에 대한 본지 발행인 최삼경 목사의 변증이다. 이 논쟁은 상호간 6회 예정으로 매월 교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양측은 지금까지 각각 두 차례씩 변증을 했다.<편집자 주>

지방교회(회복교회) 측의 변증을 보고
지방교회 측에서는 전호(10월호)에서 필자가 쓴 본지 96년 9월호의 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질문과 함께 답변을 해왔다. 본호에서는 윗트니스 리의 신인합일주의 문제와 양태론적 삼위일체에 대하여 변증하려고 하는데 먼저 다음과 같은 형식적인 문제 몇 가지를 제시하며 글을 시작한다.

1. 윗트니스 리가 이단이 아니라면, 그가 옳아서 이단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면 정통교회가 그를 잘 몰라서 이단이 아니란 말인가? 또는 지방교회가 보는 정통교회는 이단인가 아닌가?

후론하겠지만 윗트니스 리는 정통교회의 예배도 부정하고, 침례(세례)의 의미도 부정하며, 교회의 직분도 다르기 때문에 목사를 부정하고, 장로의 개념도 다르며, 심지어 정통교회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저주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이단들처럼 정통교인들을 미혹하여 교회와 가정에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면서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이라는 정죄를 싫어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때로 이쪽에서 보는 저쪽은 틀렸다고 해도 저쪽에서 보는 이쪽은 틀렸다고 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런 경우는 어느 한 쪽이 객관적인 이해를 상실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양쪽이 객관적으로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이쪽에서 볼 때 저쪽이 틀렸다면 저쪽에서 보는 이쪽도 분명히 틀린 것이다. 분명히 윗트니스 리가 보는 정통교회가 바벨론이요 음녀라면 정통교회가 보는 그는 이단일 것이요, 반대로 정통교회가 보는 윗트니스 리가 이단이라면 그가 보는 정통교회 또한 바벨론이요 음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방교인들은 개신교회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저주하면서 웬일인지 개신교회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볼 때 개신교회는 바벨론이요 음녀임에 분명한데 개신교회에서 볼 때 지방교회가 이단일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자신들이 옳아서 이단일 수 없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들을 잘못 이해해서 이단일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그 동안 필자가 이런 형태의 이단논쟁을 할 때마다 발견한 바에 따르면 두 가지 의미가 다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 지방교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런데 대부분 이 두 가지가 선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들의 사상이 신인합일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나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라는 것은 필자가 지방교회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지방교회가 왜 이단이 아닌지 선명하게 밝혀가면서 본 논쟁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지방교회 측에서 자신들을 이단이라고 하는 말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물론 이단이란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상쾌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이 주문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이단이란 말은 교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를 볼 때 교회의 감독이나 교부들에게도 이단논쟁이 있었다. 따라서 이단이란 말을 자제해 달라고 하지 말고 교리적으로 왜 이단이 아닌지 밝혀 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 믿어진다.

둘째는 자신들은 정통교회를 향해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할 수 있고 정통교회는 자신들을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에 논리적인 평형은 물론 윤리적인 평형조차 없다. 자신은 남에게 온갖 욕설을 다 하면서 상대에게는 점잖게 말해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 동안 필자가 경험한 지방교인들은 품위있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런 요구는 필자를 실망시키는 일임을 인지하기 바란다.

2. 본 논쟁은 성경적인 논쟁이 되어야 한다.
지방교회 편에서 말하기를 이단이냐 정통이냐의 기준은 성경 자체이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이는 정통교회로부터 정죄된 이단들마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지방교회 편의 논쟁을 보면 자신들이 이단이 아님을 성경적으로 변증하기보다 학자들의 이론들을 더 많이 열거한 감이 있다. 물론 학자들의 이론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학자 누가 뭐라고 했느냐보다 성경이 뭐라고 했느냐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그래서 다시 환기시키는  점은 성경적으로 변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3. 지방교회 편에서는 윗트니스 리가 쓴 책에 의해서 변증해야 한다.
전호에 보면 윗트니스 리 편에서 여러 가지 주장을 하면서 하나도 윗트니스 리의 주장에 의하여 고증하고 변증하지 않았다. 마땅히 그의 글에 의해서 변증해야 할 것이다. Daniel이나 조동욱 씨는 윗트니스 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동안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이런 논쟁을 하다가 불리해지면 대리논쟁자의 실수로 돌려버리는 예가 많았다. 지방교회 편에서는 그렇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 논쟁은 Daniel이나 조동욱 씨의 이단성을 논하는 장이 아니다. 대상은 윗트니스 리이다. 그리고 때로는 윗트니스 리의 사상과 Daniel이나 조동욱 씨의 사상이 다를 수 있고, 또 Daniel이나 조동욱 씨마저도 윗트니스 리의 사상을 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방교회 측은 반드시 윗트니스 리의 책의 고증을 들어가며 변증에 임해야 할 것이다.

본론 : 윗트니스 리의 신인합일주의 사상과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은 무엇인가?
1. 왜 윗트니스 리의 사상의 핵심을 신인합일주의로 볼 수밖에 없는가?
지방교회 편에서 자신들의 사상은 신인합일주의가 아니라고 하고 양태론적 신관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니 형식적으로나마 다행스런 일이라 여긴다.

그러나 필자가 그의 사상의 핵심을 신인합일주의로 보고 양태론적 신관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다. 어떤 한 사람의 사상은 한두 마디로 설명되기 어렵도록 여러 가지 구조 속에서 얽혀 있는 것이 상례이다. 윗트니스 리의 이단성도 여러 교리들이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신인합일주의 사상이나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관도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후에 밝히겠지만 필자가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교리는 바로 그의 인간관이다. 그의 인간관에 나타난 이단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구속의 의미를 제한하고 바꾸어 놓고 만다.

그렇다면 본인들이 부정하고 있는데도 윗트니스 리의 사상을 신인합일주의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불필요한 내용은 그만 두고 핵심만 밝히겠다. Daniel과 조동욱 씨가 전호에서 7가지 질문을 했다. 어떤 것은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다. 예를 들어 누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부인하겠는가? 그리고 윗트니스 리 식으로 하나님과 연합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한 가지 통합측의 결의에 필자도 참여했다는 사실은 밝혀둔다. 그 결의를 중심으로 이 논쟁을 하고 있는데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밝혀주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전호에서 밝힌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이유가 바로 자신과 같은 제품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윗트니스 리는 주장했다. 보다 정확히 하기 위하여 다시 인용해 보자면,

“하나님의 경륜이란 `하나님 자신을 사람 속에 공급해 주는' 하나님 자신의 계획임을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 속에 공급하시는 것이다.···그 분 자신이 곧 그 분의 모든 자본이다. 그 자본을 가지고 하나님은 자신을 대량으로 `생산'할 것을 계획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사업가도 되고, 자본도 되고, 생산품도 되신다. 그 분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많은 사람에게 대량으로, 값없이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pp.9~10, 1987)고 하였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에 공급하는 것이다. 이 계획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와 뜻의 중심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 자신을 분배받는 그릇이 되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셨다. 온 우주 가운데 시간과 우주와 영원에서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은 하나님 자신을 사람 안에 공급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변화의 최후 완성은 하나님과 사람의 우주적인 연합이다“(위의 책, p.244)고 하였다.

지방교회 편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사상'을 부정한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다(본지 10월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즉 윗트니스 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도 인간과 하나님의 연합을 위한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 안에 공급하기 위한  첫 단계는 성육신 되심으로 자신을 사람으로 나타내는 것이다“(위의 책, p.12)라고 한 것이다.

이것을 필자 편에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자신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입고 있는 육신을 입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을 이루었다는 말이요, 또한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이신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룬 첫 번째 제품이 예수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받아 바로 그의 경륜을 이루고 있는 제품들이란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우리와 예수님은 그 신성이나 인성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우리 속에 들어오신 성령 하나님이나 예수님 하나님이나 하나님으로서 차이가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면 결국 예수님이 입은 육체나 우리의 육체는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육체도 부활을 통하여 신령한 육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입으신 육체나 우리의 육체는 다르지 않을 것이 아닌가? 만일 천국에서도 예수님이 입으신 육체와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가 다르다면 성육신의 의미가 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인성을 다르게 보는 아볼로나리우스나 일성론을 주장한 유디키안과 같게 되는 것이다.

우리 육체는 하나님이신 성령을 받아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육체를 입어 육체와 연합을 이루었으니 결국 무엇이 다를 수 있는가? 어디에서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를 찾을 수가 있는가? 한 마디로 없다.

이 점을 더 선명하게 밝혀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맏아들이 됨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먼저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해 보자.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는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독생자에게는 신성만 있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인성이 없었다. 그런 부활 안에서 그는 신성과 인성을 다 지닌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독생자의 많은 형제들이 아닌 맏아들의 많은 형제들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독생자라면 그에게는 형제들이 있을 수 없다. 많은 형제들을 얻기 위하여 그는 맏아들이 되어야 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맏아들이 된 것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없다. 더우기 많은 사람들이, 독생자인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인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맏아들인 그는 신성과 그러한 인성을 다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그 영과 몸, pp.73~74)라고 하였다.

위의 글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와 맏아들을 구별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맏아들이 된 것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없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판하고 싶으나 뒤로 미루겠다. 그러나 이 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몸을 입음으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고 하는 윗트니스 리의 주장이다. 결국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님은 우리의 형님이시니 예수님과 우리는 형제의 차이 외에는 다른 차이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지방교회 편에서 윗트니스 리의 사상이 신인합일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예장 통합측의 많은 신학자와 필자가 그를 신인합일주의자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점이다.

2. 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은 양태론인가?
이것도 위의 문제와 상통한다. 지방교회에서 양태론을 배격한다면  그 말을 믿어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신학과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이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깊은 동정을 할 수 있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먼저는 삼위일체 문제가 다분히 이론적인 면이 강한 교리라고 보기 때문이다(그것이 실제적인 교리이지만). 그리고 둘째는 한국교회 안에도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양태론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바른 삼위일체 교리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윗트니스 리도 동정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와 통합측에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을 변형된 양태론으로 보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하나님의 경륜, p. 16)으로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는 `삼일(三一)하나님'이 되었다고 하는 말이 그렇다. 그는 비록 인격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는 `셋'이란 말을 쓰고 있지만, 영을 말할 때는 `한' 영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아버지 하나님도 `한' 영이시요 성령님도 `한' 영이신데 어떻게 이 둘이 하나라고 하는가?

두 번째는 `삼일 하나님'이란 하나님은 성육신의 과정을 거치는 단계를 통해 세 인격이 하나로 발전된 것이라는 말이다(같은 책, p. 110). 여기 `셋'이 `하나'로 발전되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세 인격이 하나로 발전되었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인정하지 않는 말이요 결국 한 인격이 된다는 말이 아닌가?

세 번째는 그가 설명한 예화이다. 윗트니스 리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수박 비유를 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수박 덩어리요, 아들은 조각난 수박 조각이요, 마지막으로 성령은 우리 몸에  들어가는 수박즙이라는 것이다. 전호(10월호)에서 지방교회가 믿는 `아버지, 아들, 성령은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고 했는데, 이 말에 의하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위의 예화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위의 말에 의하면 덩어리 수박이 조각이 나고 결국 그 조각은 즙으로 우리 몸 속에 들어와 버린 후에 그 수박 덩어리는 없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는 절대로 정통적인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예화가 될 수 없지 않는가?
(월간<교회와신앙> 199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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