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에 오르기 위해서 성삼재 휴게소에 주차를 시켰다. 주차장은 만원이고, 많은 등산객과 특히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로 휴게소는 붐볐다.

해발 1천507m의 고산을 많은 어르신들이 오른다는 것이 의외였다. 등산로에 접어들자 완만하고 널찍한 길이 등산로라고 하기보다 산책로에 가까웠다. 이런 길을 두시간 남짓 올라가면 노고단 정상에 도달할 수 있으니 지리산 봉우리 중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대중적인 봉우리가 됐을 법도 하다.

▲ 노고단에 있는 옛 한국주재 선교사 수양관

노고단에는 ‘한국주재 선교사수양관’의 옛 흔적이 있다.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 변요한(Dr.Preston)선교사의 주도로 건설됐다. 당시 한국에는 미국, 영국, 호주, 프랑스 등 여러 나라 선교사들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이질과 말라리아 등의 풍토병이 유행해서 새로 태어난 선교사 자녀의 90%가 사망했다. 이런 풍토병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장소가 바로 지리산 노고단이었다. 당시 노고단 근처 숲 속에 수양관 건물이 무려 52동이나 세워졌다. 하지만 여순사태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완파되어 현재는 건물 잔해만 남아 있다.

노고단을 향해 걸어 오르다 보니 앞산 먼발치, 노고단 대피소 바로 옆에 폐허가 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정상부분이라 벌써 절정을 이룬 주변의 울긋불긋한 단풍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커먼 색의 앙상한 뼈대만 남은 건물 잔해였다. 대피소 가기 전 50m 지점에 이르자 수양관 바로 밑이었다.

진입로가 없었다. 수로를 따라 3미터 정도 올라가니 수양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고, 불에 그을린 건물 외곽 벽과 높은 굴뚝만 휑하니 있다. 하지만 벽돌이 아닌 석조건물이고, 벽난로의 흔적까지 볼 수 있어 당시에는 굉장히 크고 멋진 서양식 건물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동쪽으로 노고단을 끼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구례군의 전경과 굽이치는 섬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더 올라 노고단에 도착하면 전북, 전남, 경남의 삼도가 다 발아래 있다. 산신제를 드리는 곳인 노고단 옆에 수양관을 짓고 선교사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단지 풍토병을 피하고, 휴양을 위해 이곳에 자리잡진 않았을 것이다. 삼도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이 땅의 복음화를 꿈꿨을지도 모르겠다.

노고단에 오르는 수많은 사람들, 통계적으로 보면 이중 4명 중 한 명은 기독교인일 것이다. 노고단에 올라서 단풍이 절정인 지리산 자락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노고단은 의미가 있다. 게다가 기독교인이라면 이 땅에 복음을 뿌린 선교사들의 흔적을 돌아보고 그들의 노력에 감사하는 마음 또한 가질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노고단은 산신제를 드리는 무속신앙의 장소가 아닌 하나님 창조섭리와 복음의 기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기독교의 성지가 될 만도 하다.

현재 노고단 정상부는 식물군락 보호차원에서 일정시간에만 올라가게 통제하고 있다. 예약을 하거나 선착순으로 접수된 사람들만 들어간다. 노고단은 보호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이다. 그런데 수양관은 안내판 하나 없다. 관리사무소에 문의해 보니 지금 안내판 교체작업중이라고 한다. 수양관 복원계획은 없다고 한다. 단지 있는 그대로 보존만 할 계획이다. 진입로가 없는 이유를 물어보니 사람의 접근이 쉬우면 금방 훼손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넓은 터가 있어서 취사나 휴식장소로 사용되어버릴 경우 훼손은 불 보듯 뻔하다고 한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안내판이 입구에 있고, 깨끗하게 정돈돼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있게 하면 좋겠지만, 그러면 언젠가는 훼손되고, 쓰레기장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그냥 두는 것이 낫겠다. 이런 고즈넉한 느낌이라도 가질 수 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