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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목사 이야기
1999년 06월 01일 (화)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이요한 목사(가명)

한 사람이 육체의 질병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주 철저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는 많은 '믿는다' 하는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늘 안타까워했고 자신은 더욱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많은 사람에게 제시한 성경말씀은 이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그는 모든 사람 앞에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 받는다는 증거를 얻고 싶었고 나타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행위적으로 타인이 보기에 거룩하고 의롭고 겸손하고 오만하지 않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도와 선지자들이 행한 기사와 기적을 구했고 성경대로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고 나아가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사람 앞에 불경건한 말이나 부정적인 말들도 삼가고 경건한 말과 의로운 말, 단정한 옷차림과 모든 사람에게 공손하고 겸손한 사람이길 원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허물도 약점도 없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이나 아주 완전한 사람으로 신(神)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시작할 때 강단에서 그는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이 있었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계명대로 사십시오" 라고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렇게 살았고 떳떳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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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사가 이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었으나 무엇인지 모르게 만족이 없었고 기쁨도 없었으며 설교를 들어도 교훈적인 것이었고 세상을 어떻게 잘 살아 물질축복, 자녀축복, 사업축복이나 받으라는 설교가 그의 마음에 와 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이 교회를 나오게 되었는데 이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설교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고 마음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설교를 들어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고 일상적인 신앙생활이었고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목사의 설교에 "당신이나 말씀대로 지키고 나서 우리보고 그렇게 살라고 하시오" 라는 판단과 정죄가 앞섰으나 이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니 단호하고 자신 있게 계명대로 살아야 한다는 설교에 자신을 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죄를 버리시오. 성결되어야 합니다"(는 식의 설교를 들으면서) 성결 중에도 온전한 성결이 되어야 하고 성결의 정도에 따라 들어가는 천국의 종류가 다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예루살렘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소득의 1/10이 아닌 모든 삶에서 생기는 전체 소득의 1/10을 드린다는 온전한 십일조가 무엇인지 알았고 오락이나 물건매매도 안 되고 온종일 교회에서 지내는 온전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습니다.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들어도 안 들어도 그만이던 성경구절들의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오는 말씀이 되었고 기도하며 금식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사는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았고 구원을 받은 것 같았고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는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말씀대로 살았다는 간증을 하고 그에게 능력, 권세, 권능을 주셔서 많은 병자를 치료했던 이야기며 천기가 기도하면 움직인다는 간증과 더불어 주변의 사람들도 실제로 본 것 같이 말하는 간증을 듣고 이제는 자신도 전도할 때나 다른 사람에게 그때 그 현장에서 치료되어지고 천기가 움직이는 것을 직접 본 것처럼 간증을 하며 자기 목사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전도할 때면 예수 이름을 증거하고 성경구절을 들어서 전도하던 것이 이제는 목사를 선전하고 증명하기 바빴고 목사를 통해서 일어났다는 일들에 대하여 들은 것을 자신이 친히 보았던 것처럼 간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 진리와 비진리, 영과 육이 구분되어졌고 온전한 영, 온전한 성결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며 각종 모임에 열심히 모였고 주일은 절대로 빠지지 않고 하루 종일 교회에서 지냈으며 금요철야, 다니엘 철야, 기관모임, 구역모임 등 한 주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습니다. 전에 가끔 만나던 친구들은 다 멀어졌고 친척들과도 왕래가 뜸해졌으며 시간이 없어서 집안 일도 엉망이었으며 전에 가끔 읽던 성경을 읽어볼 새가 없고 그저 목사의 설교 테잎만 들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니 교회에서 인정도 받고 직분도 받아서 더욱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이제는 모두를 대할 때 단정한 옷차림과 교회 성도를 대할 때 늘 웃고 충만한 모습, 의롭고 거룩한 모습으로 대할 수가 있었고 입에서는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말과 선한 말, 듣기 좋은 말, 남을 칭찬하는 말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지 못한 성도를 향해서 "그것은 악입니다. 이것은 육입니다. 저것은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 안 하십니다. 목사님이 이랬대요. 목자가 기뻐 안 하십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만족을 하고 있었으며 이만큼 되었으니까 성결을 말하고 의와 진리의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살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목자의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자를 한 번만 만난다든가 눈길을 마주치던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칭찬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그 수많은 성도가 그를 볼 때 목자에게 인정받는 곧 영의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자라고 느낄 것이며 말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건축헌금을 작정할 때면 없는 형편에 누구보다 많이 작정하므로 믿음이 있음을 내보여 왔고 빚을 내어서라도 상당한 액수의 헌금을 준비하여 금식하고 기도한 끝에 목자를 단독으로 만날 수가 있었는데 선교회장과 함께 만나서 몇 마디 상담을 하게 되었고 목자의 너그러운 태도와 조용한 말씀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영이 무엇이고 하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무 감격하고 기뻐서 눈물이 나왔고 옆에서 같이 들은 선교회장과 함께 큰절을 올리고 나왔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 같았고 오직 목자를 위해 목숨도 바치리라는 감격 감격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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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회에서는 목자를 만난 일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고 목자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서 초대해 주었는가 까지 소문이 나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눈치였고 목자가 축복의 말씀을 해줬다는 것으로 그 사람은 목자가 인정하는 사람으로 은연중에 선교회원들에게 인식이 되었고 뿌듯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으며 항상 그의 입에서는 "우리 목자, 우리목자"를 말하므로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 받는 목자가 자신을 사랑하므로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가정생활은 늘 어려웠지만 상관이 없었습니다. 새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소망에 견딜 수 없었고 교회성도들이 영의 사람으로 바라보아 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있었고 사는 보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목자가 설교할 때면 주위를 바라보고 선교회원들과 구역과 지역식구를 바라보며 주의 종들을 바라보며, 목자의 설교대로 영이 아닌 사람, 비진리에 사는 지역식구 등을 생각해 보며 "왜 그 사람들은 육일까, 영이 아닐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구나"를 생각하곤 했습니다. 무슨 사정 때문에 기도회나 모임에서 남보다 헌금을 많이 내지 못하면 저들보다 뒤떨어져 있는 것 같았고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그럴 때면 금식하며 더욱 열심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득문득 불안한 마음, 목자의 말을 어기면 두려운 마음,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저주받을까 하는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늘 앞다투어 경쟁하는 마음, 주변 사람들을 보면 설교말씀을 들은 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상대의 옳고 그름이 판단되어지는 마음, 자신의 속마음은 감추고 가장하는 마음, 외식하는 마음, 이중적인 마음 등을 느껴볼 때가 있으면 하나님이 악을 빼버리라고 하였으니 버리기 위해서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강단에서 목자의 설교가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왠지 수 년 동안 그 설교가 그 설교 같고 별다른 신선한 것도 없고 감동도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수 년 동안 "악을 버려 성결되라"고 들어온 설교의 반복일 뿐 별다른 감동이 없었고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었고 안식하는 안식일이 오히려 제일 고달픈 날인 것 같았고 무엇을 했나 하고 뒤돌아보면 별로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성전에서 헌금위원, 안내위원으로 봉사하는 것으로 보람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무언가 허탈하고 텅빈 마음의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게을러지는가 싶으면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사람은 열심히 달려가는데 이러면 안 되지 하며 다시 회개하고 더 열심히 교회봉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회 모임에서 성경을 보다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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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라는 것이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마음에 믿어야 하고 또 믿는 것을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때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가? 그리고 고린도전서 15:42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곧 신령한 몸으로 나도 부활할 것을 믿는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 볼 때 마음에서 자신 있게 시인이 되어지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자신에게 되물어보곤 했는데 결론은 자신이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럼 자신의 지금까지의 행한 것은 무엇인가? 의롭게 살기 위해, 선하게 살기 위해, 성결되기 위해,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온전한 주일과 온전한 십일조, 각종 모임을 앞 다투어 가고 열심히 전도하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뒤돌아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열심히 잘 믿은 것 같았고 또 한편에 내 자신만의 열심인 것 같기도 하고…. 열심히 충성은 하지만 성도들 앞에서는 웃어야 하고 상냥해야 하는 모습이지만 집에 돌아와 혼자 있을 때 속에서는 그렇지 않은 이중적이고 가식적이며 꾸며진 자신을 느끼면서 그는 아직도 성결되려면 멀었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가르침을 통해 그는 교양 있는 사람이요, 기쁨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을 자신은 압니다.  이것이 얼마나 외식으로 가식으로 꾸며진 모습인가를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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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해, 달 속에 목자를 보았다면 자신도 보았다고 해야 했고 천사를 보았다면 역시 그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른 주변 사람들 보다 항상 목자를 더 사랑하고 믿음이 있어 보여야 하고 영의 사람인 것을 가장하는 자신의 속을 들여다 볼 때 괴롭고 한편으로 우스웠습니다. 그래서 선교회원들에게 말할 때는 목자가 하였던 말씀들을 들어서 "우리 목자가 이렇게 이렇게 말씀했고 목자가 꿈에도 보여지고 이렇게 했다" 고 누구보다 앞서서 말했는데 왜 자신의 입에서는 예수님 이야기가 안 나올까 생각해 보았으나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종 목자가 있으니 그 목자만 자랑하고 믿으면 다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때라는 성경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럴 때면 그는 "내가 왜 안 믿어. 믿으니까 이렇게 열심히 충성하는 것이지" 하면서 이렇게 부인할 때면 자신의 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 있게 시인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믿음은 자신 스스로 믿고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음으로 믿게 하고 영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이 마음속에서 자신 있게 고백이 안 되어진다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교회에서 목자를 통해 간증되어지는 기사와 표적, 치료의 간증들을 들으면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았고 한편에서는 그 동안 수없이 들어왔지만 일어나는 일들을 자꾸 보고 싶어지고 보아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고 그래서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구약에 모세를 따라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그 많은 이적을 보고 매일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었는데 광야에서 다 죽은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참 불쌍하다. 내가 그 중 한 가지만 보았어도 단번에 믿을텐데" 라는 생각을 해보며 지나치다가 자기 자신을 떠올려보니 웬일입니까? 자신이 꼭 이스라엘 백성과 다름없이 구원이 자신 있게 믿어지지 않음을 또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주님은 모세가 뱀을 장대에 단 비유인 것이며 요나를 들어 말한 표적이 부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향해 우리로 보게 해서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표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떡, 참 양식인 자신, 곧 죽어 부활을 말씀했습니다.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0)

또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 하면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셨는데 장차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을 염두에 두고 아들을 살리며 표적이라 했던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에 일상적인 병치료와 기사가 참표적이었다면 그것을 보고 좇았던 제자들이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 후에 그 부활을 보고 제자들은 믿고 죽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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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참 표적은 부활 외에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습니다. 이 부활을 듣고 자신이 믿어 하나님께 구할 때 주님 대신 성령을 보내서 그 부활이 사실임을 믿게 해주는 것이지 이 세상의 어느 기적과 기사를 보았다고 예수의 구원과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누가 예수 이름으로 기사와 표적을 행해도 그것이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며 성령은 예수의 부활을 인정할 때에 예수 대신 오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치료나 신기한 역사를 보아도 그 사람을 경외하고 두려워지고 무서운 마음뿐입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알게는 해도 예수의 부활을 믿어지게는 못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아도 마음에서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원은 예수의 부활이 자신의 마음에서 믿어야만 하는 것인데 성령이 자신 속에서 믿어지게 확증하는 것이요, 이 믿음이 있으면 사람의 말과 누구를 두려워하거나 누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의 말과 상관없이 속에서 들려지는 성령의 증거를 받으며 앞만 보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 그 목자는 죽은 자를 살리고 물위를 걸어 보이고 싶을까요? 그가 말한 대로 기사와 이적을 보지 아니하면 믿지 않기 때문인가요? 만약 죽은 자를 살린다 해도 그것은 소생일 뿐이요, 부활이 아닙니다.  물위를 걸었다 해도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무협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여겨질 뿐 사람들의 마음에서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믿어지게 하는 것은 성령인데 이 성령은 예수 부활로 예수께서 대신 보내주는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누가 표적을 보여서 예수를 믿게 하려는 것은 자신의 교만이요, 예수가 부활로 이룬 구원을 자신이 이뤄보려는 행위밖에 되지 않습니다. 

목자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을 계명과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했고 그 증거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증표로 자기가 한 말이 이뤄져야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기도하면 나아야 하고 단에서 선포하면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병자 중에 하나가 치료되면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고 예를 들어 후두염이 변해서 후두암을 고쳤다고 하는 등 과대선전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물질이 생기거나 성도 중에 회사에서 승진하거나 유명하다는 인사가 방문하면 대대적으로 광고합니다. 언론매체에 글이나 성도가 나오게 되면 얼마나 선전을 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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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리를 듣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목자가 있는 교회에 다니는 것에 대한 뿌듯함과 만족감으로 더욱 열심이고 어디에 가나 "우리 목사님 최고. 우리 교회 최고" 가 되어 다른 목사님은 주의 종 같이 보이지 않고 다른 교회는 시시하게 보이지요. 하나님의 사랑 받고 보장받는 종이 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으면 앞의 일을 예언해야 하고 교회적인 어떤 문제가 생기면 성도나 아래 있는 종들이 다 잘못했고 자신은 흠과 티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드나요? 

그리고 급기야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정말 사랑을 가장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에 대해 "눈물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마음 아프다" 하면서 "저주받는다"는 말을 밥먹듯이 하지 않나요? 엘리사가 저주하니 곰이 나와 어린이를 죽였다는 비유를 자신의 경우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누가 병들었고 하면서 일상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들어 불순종하니 일어난 것처럼 성도를 몰아 부치지 않나요(99.4/9.11.금요철야 주일예배 설교).

 예수는 70번씩 7번씩이라도 용서하라 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저들을 용서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참으려면 끝까지 참든가 하시지 저주받는다는 말을 밥먹듯이 해 데니 뭐가 이상하지 않는지요?  목사가 애매히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참아야 하거늘 애매하지도 않고 자신의 신변에서 일어난 윤리적인 일들이 모두 사실인데 회개는 안 하고 도리어 적반하장 격이니 누가 참일까요? 듣는 성도들은 떠나면 저주받는다고 설교하여 두렵게 하는 것이 사랑인가요? 교회를 수년간 다니며 충성하던 종들과 열심이던 성도가 두려움을 감수하면서도 교회를 떠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누구를 미혹한단 말입니까? 

 생선과 손님은 3일만 지나면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도 목자 가까이 있어보지 않고 최 측근에 있던 사람들이 나갔을 때에는 목자의 개인적인 불합리하고 모순된 냄새를 맡았고 그 냄새를 견디지 못하여 나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주일 내내 기도한다는 핑계 아닌 이유로 수 년 동안 성도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몇몇 사람만이 일상적인 만남 외에 목자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누가 알고 있겠습니까? 한국교회 어느 목사가 자기의 생활을 철저히 비밀로 하는 종이 어디 있는지요?  목사는 성도들에게 늘 투명하게 생활이 보여져야 하고 성도들과 교회 속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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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여러분. 여러분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 훼방하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요? 이것은 당연한 말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고 성령이 마음에 오셨다면 그 성령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인데 성령을 훼방하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아닌 악한 영을 통한 치료의 역사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이요, 교회 안이라 해서 모두 다 성령의 역사는 아니지요. 우리는 교회 안에 일어나는 일들의 역사에 연연할 필요 없이 가타부타 논할 것 없이 마음에 믿게 하시는 성령의 확증과 기준을 증거 삼고 나아가는 것이지요.

구원은 어느 특정 집단이 집단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지요. 구원은 어느 집단이나 교회에 있든지 간에 나와 예수 사이에서 성령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어느 신령한 목사나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죄가 있으면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셔서 사해주시는 것이지 어떤 죄를 위해서 '화목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식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값없이 십자가에서 용서하셨거늘 헌금 운운하는 것은 여러분이 참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두렵던가요? 진리 안에서 온전한 사랑되신 예수의 부활의 구원이 그 두려움을 몰아내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회를 다니고 안 다니고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보고 누가 그런다고 하기 때문에 따라가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믿는다는 믿음이 율법적이고 행위적인 믿음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나요? 자신의 마음을 보면 압니다. 마음에는 무언가 모르는 답답함이 있고 가장해지는 가식과 외식, 위선입니다. 남에게 보여지고 알려지고자 하는데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내 자신이 영생을 얻었다면 모든 일에 개의치 않습니다. 자신이 알아서 나아가지 누구나 무엇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 가운데, 물 가운데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이 교회 저 교회 이목사 저 목사가 문제되지 않고 나와 하나님 사이 예수로 말미암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나갈 뿐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이 교회를 나온다 해도 더 방황하게 됩니다. 이미 습관 되어 버린 교회생활이 다른 교회 가서 설교를 들어도 판단만 하게 되고 교회 가는 것이 싱겁고 맹숭맹숭 하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게 됩니다. 이 교회처럼 다른 사람과 견주어 자신을 볼 수 있는 경쟁적인 신앙생활에 습관이 되었고 늘 분주하고 활기찬 모습 같은 생활에서 떠나 보니 맥없고 재미가 없지요. 그래서 더욱 방황합니다. 

이 교회는 참 좋은 교회입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머리(목사)가 깨닫고 돌이킨다면은요! 이 교회는 여러분의 모든 몸과 마음과 재물과 시간 바쳐서 이룬 교회이지 목사 한 사람의 교회가 아니니 이 교회를 지키십시오. 그리고 교회를 개혁하십시오. 저는 이 교회에서 말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이가

(월간<교회와신앙> 199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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