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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복 목사의 종말론은 비성경적이다
2001년 02월 01일 (목) 00:00:0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서론
 1. 이광복 목사의 사상을 다시 분석한다

 본지는 7년 전에(1994년 8-9월호) 본지 편집위원인 진용식 목사가 '이광복 목사의 종말론과 3세대론은 성경적인가'라는 제하의 글을 게재한 일이 있었고(118-123쪽), 그 후에 이광복 목사는 같은 해 11-12월호에 "진용식 목사님의 질문에 대답하며"(164-174쪽)라는 제하의 반론을 보내와 역시 게재한 일이 있었다. 그후 6-7년만에 필자가 다시 이광복 목사의 사상을 점검하게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다
 첫째, 정치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필자는 정치적 선이 영적 선보다 앞서면 안 된다고 믿고, 그렇게 살고 그렇게 목회하려고 늘 노력한다. 이단논쟁에도 영적 이유와 목적 외에도 정치적 이유와 목적이 개입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컨대 종교회의가 있을 때 신앙적 이유 외에 정치적 이유도 함께 얽혀 있었던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만일 오늘 날 '아리우스'가 살아 있다면 자신은 신학적으로 이단이 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단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정치적 상황도 하나님이 주장하신다고 믿지만 그러나 정치적 선이 영적 선보다 앞서지 말아야 한다는 본다.

 필자가 알기로 최근에 이광복 목사가 소속된 교단이 복잡하게 분열되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 따라서 이해관계가 복잡할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필자가 그 복잡한 내부 사정을 다 알지 못하고, 또 알 필요도 없다고 본다. 단지 필자의 소신에 의하여 재 비판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이광복 목사 반대편에 서 있는 분들은 신학적인 진실과 관계없이 필자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고, 반대로 이광복 목사 편에 서 있는 분들 역시 무조건 비난의 화살을 던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광복 목사 반대편에 있는 분들은 왜 그 동안 교단 내부에서 이광복 목사의 이단성을 구체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는가를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고, 이광복 목사 편에 서 있는 분들은 이목사의 이단성 자체를 따져 보지도 않고 무조건 그를 옹호하는 영적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둘째, 유형 무형의 어떤 이해관계와 상관이 없다
 이단 논쟁이 일어나면 어떤 형태로든 편가름이 시작되며 또 이해관계도 발생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광복 목사를 지지하는 목회자나 교인들은 필자를 성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광복 목사에게 사이비성 내지 이단성이 있다고 할 때 그가 교수로 있는 신학교에서나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나 그 교단 소속 목사들은 어떤 형태로든 피해 의식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광복 목사의 사상을 점검하는데 그런 손익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누가 손해를 보고 누가 이익을 보는지 모른다. 믿든 믿지 않든, 필자는 '이목사의 사상이 한국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유해한 것인가 유익한 것인가'만 계산하고 비판하는 것임을 밝히는 바이다.

 2).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광복 목사의 문제에 대하여 호소가 많기 때문이다
 이광복 목사는 지난 번 자신의 반증 글에서(본지 1994년 11-12월호) 자신에게 이단성이 없다는 이유 중에 하나를 10년 동안 1만여 명의 목회자들이 그의 세미나를 들었는데 아무도 문제를 들고 나온 일이 없다는 것을 여러 번 말하였다. 이 목사는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는 증거로 이 점을 얼마나 크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 편의 글에서 무려 이 말을 3번이나 했다(166쪽, 167쪽, 174쪽).

 그러나 그 말이 진실하다고 해도 그것이 이광복 목사에게 이단성이 없다는 객관적 논리가 아닌 주관적 논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많은 목회자들이 장본인인 이광복 목사에게 단 한 사람도 제기한 일이 없는 이단성인데 왜 필자에게는 많은 상담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목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든지, 필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음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이목사가 강의를 할 때 이단성에 대하여 노출시키지 않았든지, 아니면 그에게 강의를 들은 목회자들이 이단성을 느낄 만한 신학적 수준이 없었든지, 아니면 느꼈어도 말할 만한 용기가 없었든지, 아니면 맹종주의자들에게만 그가 강의를 했던지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침묵이 이목사의 말처럼 그에게 이단성이 없다는 의미의 적극적인 침묵이라면 이제 필자의 글에 거센 항의를 하게 될 것으로 본다. 그가 누구였든지 객관적인 비판을 필자도 받을 것을 약속하며 이 글을 쓴다.

 그런데 왜 이 목사에게는 단 한 번도 제기된 일이 없는 문제가 필자에게 많은가 하는 점이다. 이광복 목사가 강의를 하고 나면 그 강의를 들은 신학생들이나,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나, 또 이 목사의 테이프를 듣고 난 후 문제를 제기하는 목회자들이 많았다. 정말로 한국교회 다수의 목회자들에게 이광복 목사는 건전한 목사요 전혀 이단성이 없는 목사로 여기고 있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필자가 이단성이 없는 목사에게 이단시비를 걸었다는 말이 될 것이니, 이광복 목사는 본지의 비판에 하나도 신경쓸 일이 없을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이단성이 없는 목사에게 이단성이 있다고 한다면 한국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을 대상은 이광복 목사가 아니라 필자와 진용식 목사와 본지일 것이다.

 둘째, 이광복 목사는 한국교회 지도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한 신학교의 교수이다. 초등학생을 중학생 수준에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고, 반대로 대학생이 유치원생처럼 비판받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보다 더 악한 일이다. 그는 교수답게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많은 책을 써서 출판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무려 170여권의 책을 썼다고 한다. 글이란 말보다 오래 깊게 영향이 미친다. 그리고 그 자신이 말했다. 자신이 10년 동안에 1만여 명의 목회자들을 가르쳤다고 말이다. 그 말을 한지 6-7년이 지났으니 이제 그 숫자는 크게 증가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그의 영향력이 계속 커지고 있다고 볼 때 마땅히 객관적으로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는 객관적으로 비판을 받는 점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영향력을 위해서는 자신의 몸체를 크게 부풀리고,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몸을 움츠린다면 그것은 신앙도 아니지만 인간적 진실도 아니라고 본다.
 필자는 정통교회 안에 있는 목회자요 교수인 이광복 목사에게 이단시비를 하는데 진심으로 인간적인 아픔이 있다. 그러나 같은 학교의 교수끼리도 이단논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목사가 진심으로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한 사람이라면 필자의 비판을 겸허하게 자기 변화와 성장의 기회를 삼아야 할 것이다.

 셋째, 그 동안 이광복 목사가 보인 대응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광목 목사는 6-7년 전 본지를 통하여 비판을 받은 후 끊임없이 필자는 물론 진용식 목사와 접촉을 시도하여 더 이상 자신의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최근 이광복 목사는 말로만이 아니라 글로도 사과(?) 내지는 변명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의 글을 보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가려야할 필요가 더욱 절박해 진다. 이광복 목사는 1994년 11-12월호의 변명으로 일관된 글 외에도, 2000년 9월호 월간 <흰돌선교>에서 <정정 및 보충설명>이라는 제목하에 "잘못된 점을 시정합니다"라는 항과 "이해를 바라는 내용에 대해 보충 설명합니다"라는 항을 만들어 자신의 잘못을 시인(?) 및 변명하였다(187-198쪽). 그러나 그 동안 이광복 목사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는 것이다.

 ① 이광복 목사가 잘못을 시인한 것은 두 가지 뿐이었으며 그것은 시인도 사과도 아니었으며 더욱이 회개도 아니었다.
 본지에서 진용식 목사가 지적한 내용에 대하여(1994년 7-8월호) 이 목사는 한 가지도 잘못을 시인하거나 사과한 일이 없었다(1994년 11-12월호). 그런데 왠지 6년이 지나서 2000년 9월호 <흰돌선교>에서는 1.5쪽도 못되는 짧은 말로((188-189쪽) 오직 두 가지 잘못만은 시인하였다. 그러나 오해라고 변명한 것은 7가지 문제인데 무려 9쪽이나 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그 "잘못된 점을 시정합니다"라는 글도 자신의 잘못에 대한 시인도 회개도 아니지만, 이광복 목사 스스로 두 가지 만은 잘못했다고 인정한 셈이다. 하나는 자신의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창세기 2:16에서 하나님께서 임의로 먹으라는 '각종 나무'를 '혼합주의'라고 했던 점이다.

 그러나 이광복 목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었다.
 먼저, 비록 "잘못된 점을 시정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지만, 그 내용에는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했다기보다 변명이라고 해야 맞다.

 다음으로는 그나마 잘못을 시인한다는 글은 고작 한 쪽도 채 되지 못하지만 변명은 길었다. 그것도 앞서 본지에서 글로 비판한 내용 중에 이 목사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아니 이광복 목사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이 있다고 한 본지가 잘못한 셈이 된다. 그러니 진정으로 누가 잘못했는가를 밝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광복 목사가 어설프게 잘못이라고 시인한 양태론적 삼위일체론과 '각종나무'를 '혼합주의 사상'으로 보는 점에 대하여는 본론에서 다시 깊이 있게 취급하도록 하겠다.

 ② 이목사는 본지가 지적한 내용들은 과거에 주장했던 것이라고 하였다
 이광복 목사는 말로나 글로 자신에게 문제 삼는 이단문제는 과거의 일처럼 하였다. "10여 년 전에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그와 같은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흰돌선교, 2000. 9. 190쪽)라고 하여 본지의 지적이 그의 현재 사상이 아닌 것처럼 하였다. 실제로 그의 삼세대론이 거론된 <감추인 만나의 비밀>이란 책은 1990년 10월 30일에 초판이 나온 책이며, 이단성이 더 농후하게 나타나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는 책은 1992년 7월 15일에 출판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무슨 이유로 출판이 중단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첫째, 과거에 주장하였어도 이단성이 있다면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공인의 자세요, 목사, 그것도 교수의 자세라고 본다. 적당히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이 사상이다. 하물며 이단사상을 가르쳤다면 과거라도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이 목사도 원칙적으로 그 점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이광복 목사는 회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제목은 '잘못된 점을 시정합니다'라고 되어 있지만 내용 중에는 잘못이란 단어조차 사용하지 않았고 오직 '오해'라고만 하였다. 그나마 필자와 본지가 지적한 내용들에 대하여는 모두 '오해'라고 하였다. 더욱이 1994년 변호의 글에서는 오히려 이 목사 자신에게는 잘못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삼세대론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진용식 목사에게 "세대주의에 대하여 올바르게 알고 비판을 가했으면 하는 마음이 일고 있다"고 하여 충고까지 하였다(본지, 1994년 11-12월호, 165쪽).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도 그의 사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이 필자가 그를 비판하는 이유이다. 자신의 사상이 겉으로는 과거의 사상인 것처럼 하는 것은 먼저 스스로도 이단사상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뜻이 되며, 그보다는 이단사상을 주장해 놓고 적당히 넘어가려는 의도이며, 더욱이 이단사상을 숨기려는 의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단 사상이기에 버린 과거의 사상이라면 회개를 해야한다.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과거에는 가르치고 지금은 가르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광복 목사가 '삼세대론'이란 말을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이광복 목사의 사상의 뿌리는 삼세대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설교나 강의 도처에 지금도 '삼세대'란 말이 수도 없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이광복 목사 자신이 잘 알 것이다.

 ③ "잘못이 있으면 고치겠다"는 말과, "잘못이 없다"는 말이 서로 모순되는 말이다
 이광복 목사는 왜 그렇게도 본지의 글에 대하여 신경을 쓰는가? 이광복 목사 말처럼 많은 목회자들이 그를 건전한 목사로 보고 있고 그 견해가 옳다면 본지는 건전한 한국교회 목사로부터 외면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 목사는 왜 통일성이 없는 말과 자세를 취하는가? 이 목사의 말처럼 한국교회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눈먼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이 다 심판관이 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니 떳떳이 비판받고 비판하면 된다고 본다.

 이 목사는 여러 번 자신에게 성경적으로 잘못이 있으면 고치겠다고 말하였다. 심지어 그것을 필자에게 글로 써서 보냈다. 맞는 말이다. 성경적으로 잘못이 있는데 고치지 않겠다면 마귀의 자녀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가 보는 성경과 필자가 보는 성경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광복 목사는 필자의 본 글이 "성경적으로 잘못이 있으면 고치겠다"는 그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하고 고치게 하자는 의도의 일환으로 이해되기 바란다.

 2. 진용식 목사가 이광복 목사에게 제기한 문제들은 무엇이었는가?
 
진용식 목사가 이광복 목사에게 제기한 문제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의 삼세대론은 또 다른 의미의 세대주의가 아닌가라는 점이고, 그에 따라 세대마다 다른 구원이 요청된다는 점이고, 이광복 목사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음녀를 은연중에 정통교회로 본다는 점이고, 그리고 그의 성경에 대한 풍유적 해석의 문제점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예비처 문제도 나왔고, 70 이레의 마지막 한 이레 앞에 공백기 문제도 나왔으며, 70이레의 연대 기준점을 아닥사스다 7년 주전 457년으로 잡는 점이 안식교와 유사하다는 등의 문제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진용식 목사가 문제를 삼았던 이광복 목사의 이단성의 핵심은 그의 삼세대론에서 각각 다른 구원관이 요청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문제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음행의 포도주에 취했다는 말이 예수 십자가의 은혜에 취해서 구원 받았다고 안위하는 것이라는 말이 사실인가 아닌가의 문제일 것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밝혀두어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필자는 진용식 목사와 이광복 목사를 비판하는 입장이 유사하겠지만 그러나 그 내용과 비판 기준이 다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광복 목사는 만일 필자에 대하여 반박을 하려면 본 글에 제한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본론:  이광복의 종말론에 나타난 이단사상은 무엇인가?

 1. 이광복 목사의 삼위일체는 양태론이다

 삼위일체 문제는 난해한 교리이면서도 모든 신앙과 신학의 기초이다. 그래서 삼위일체가 난해한 교리이면서도, 종교회의의 대부분은 삼위일체 논쟁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난해성을 고려할 때 평신도나 일반 목회자가 삼위일체를 오해하거나 모를 때 그것을 가지고 바로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가장 엄해야 하면서도 가장 너그러워야 할 교리가 삼위일체라고 본다. 그러나 누구든 삼위일체관에 있어서 잘못했다가 바른 삼위일체관을 알게 되었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쳐야 한다. 그런데 이광복 목사는 교수로 그것도 한국교회에 영향력이 큰 목사로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지난 1994년 11-12월호 반증의 글에서 예비처 문제에 대하여 변호할 때에 '목회자적 입장'과 '신학자적인 입장'을 나누어서 말하는 것을 보았다. 직접 인용해 보겠다. "필자는 진 목사님의 비판을 접하면서 계속 의아심이 가는 것은 자신이 목회자적인 입장에서 비판인지 아니면 신학자적인 입장에서 비판인지 명확하지 않으면서 필자를 이단 내지는 세대주의로 매도하고 있어 안타깝게 여겨진다"라고 했다(169쪽). 이것이 이광복 목사의 진실이라면 그는 보수주의를 말하지만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이는 이원론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역으로 이 목사에게 묻고 싶다. 위의 그 말은 목회자로서의 말인지 교수로서 말인지 말이다.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말과 교수로서의 말은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그렇다면 필자를 목회자로서 이단연구가로 보는가, 교수로서 이단연구가로 보는가? 분명한 것은 목사로서 그것도 보수적인 교수로서 할 말이 아니다. 목회자로서 한 잘못은 그 죄가 경하고, 교수로서 한 잘못은 그 죄가 중하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목회자가 오히려 교수보다 더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신학생들은 적어도 평신도보다 비판능력이 크다는 점에서 볼 때 실제적으로 목회자의 책임이 교수의 책임보다 더 클 것이라고 본다. 그것도 이 목사는 목회자요 교수로서 목회자들에게 세미나를 많이 하는 사람으로 그에게 이단성이 있다면 그 미혹성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광복 목사의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고 이 목사의 변증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1) 이광복 목사의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은 무엇인가?
 "성령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의 인격이십니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구약은 주로 하나님이 사역하셨습니다. 음성으로 또는 기적의 역사로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그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성자의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 그랬습니다. 주님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하나님이 영으로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설교테이프, 92년 6월 7일 보혜사 성령).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을 하자면 이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는 한 나무지만 뿌리가 있고 또 줄기가 있고 또한 열매가 있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나 예수님이나 성령의 주나 다 한 분이십니다"(설교테이프, 92년 6월 7일 보혜사 성령).

 쉽게 설명을 해보자. 이광복 목사의 삼위일체관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이란 말이요,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성자의 몸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는 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 예화에 의하면 나무는 한 나무지만 뿌리가 있고 또 줄기가 있고 또한 열매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같다는 주장이다.

 2) 무엇이 문제인가?
 먼저 그의 변증의 글이 짧기 때문에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긴다. "설명: 본인은 양태론이란 '성부, 성자, 성령은 상호 다른 3인격체가 아니라, 현현의 상호 다른 3양식이라는 사벨리우스의 주장'이며,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절대로 양태론을 주장하지 않으며, 다만 설교 도중 이해를 돕기 위해 부가적으로 설명을 더한 것이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위 내용은 결코 신학적 주장이나 이론이 아니라 설교 중에 이해를 돕기 위한 내용이라는 것을 밝히며 이를 바로 잡습니다"라고 하였다(188쪽).

 이광복 목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모순과 문제가 있다.
 ① 먼저, 삼위 하나님이 '하나의 인격'이란 말은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을 가진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세 인격의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에 있어서 '인격'이란 말은 동방신학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신 '위격'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인격이란 단어는 서방신학에서만 사용한 단어로서 삼위일체의 단일성을 말할 때는 '본질'이란 말을 사용하였고 인격이란 말은 그 분리성을 말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즉 서방신학에 의하면 삼위일체는 "세 인격의 한 본질의 하나님"이다. 그런데 이광복 목사의 삼위일체관에 의하면 하나의 인격으로 하나님이 되고 만다. 이는 양태론적 삼위일체이다.

 ② 이광복 목사의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정의도 양태론적이지만 구체적 설명은 더욱 그의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을 선명하게 드러내었다고 본다. 먼저는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이 되었다는 설명이며 다른 하나는 나무 비유이다. 그것도 나무 비유는 동정의 여지가 있다.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들이 나무 비유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광복 목사는 그렇게 동정을 받을 수 있는 목회자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심으로 그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성자의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 그랬습니다. 주님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하나님이 영으로 임재하신 것입니다"라는 말은 완벽한 양태론이다. 이 말에 의하면 성부수난설도 가능하게 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하늘 보좌는 비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③ 그리고 이목사 자신도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은 잘못이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인은 양태론이란 '성부, 성자, 성령은 상호 다른 3인격체가 아니라, 현현의 상호 다른 3양식이라는 사벨리우스의 주장'이며,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점이 더욱 자신의 양태론적 주장이 스스로 이단사상이란 점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본다. 차라리 "삼위일체를 모르고 그렇게 말하였다"고 했다거나, 아니면 "내가 잘못했다"고 했다면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또 사과도 잘못에 대한 시인도 없다는 점이 더욱 문제가 아닐 수 없다.

  ④ 그리고 이목사가 한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라고 한 말이나, "이는 신학적 주장이나 이론이 아니라 설교 중에 이해를 돕기 위한 내용이라는 것을 밝히며 이를 바로 잡습니다"라는 말은 교수로서 그것도 보수주의 신학교 교수라고 하는 이로서 할 말이 아니다.

 누가 무엇을 오해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단 한 마디도 "잘못이다", "잘못했다"는 말도 없이 '오해'라는 말로 변명만 하였다. 그리고 "신학적 주장이나 이론이 아니라 설교 중에 이해를 돕기 위한 내용"이라는 말도 정직한 목회자로서, 양식 있는 교수로서, 더욱이 보수주의 신학자로 자처하는 사람으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역시 이원론이다. 신학과 설교를 구별하는 것도 큰 잘못이다. 이 목사의 말에 의하면 설교 시간에는 무슨 말을 해도 이단논쟁을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이 목사의 신학관이요, 신앙관이며, 그리고 설교관인가? 그렇다면 이광복 목사는 그것이 자신이 속한 교단 교리와 일치하는지 살펴야 한다. 또한 자신의 글이나 설교 중에 어떤 것은 목회자로서 설교이고 어떤 책과 어떤 글은 교수로서 설교인지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⑤ 필자가 보기에 위의 글은 이 목사가 자신의 삼위일체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과를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고민 끝에 취한 임기응변적 행위로 보인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양태론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하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오해라는 말과 설교 중에 나온 말이라는 말로 얼버무리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차라리 "삼위일체를 잘 몰랐다"고 하거나 아니면 "잘못했다"고 하여 정직한 편이 그에게 나을 뻔하였다.

 2. 이광복 목사의 삼세대론에 근거하여 종말시대에는 은혜 시대와 다른 구원관이 요청된다

 이광복 목사는 "10여 년 전에 말한 적이 있습니다"(흰돌선교, 2000년 9월호, 190쪽)라고 하여, 마치 그 후에는 '삼세대론'이란 말을 쓰지 않은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 말도 정직하지 않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1994년 변증에서도 그렇게 말하였어야 했다. 그런데 그 때는 그런 말이 없었다. 오히려 삼세대론이  옳고 자신은 삼세대론자임을 더 확실하게 굳게 했다(165-166쪽).

 그리고 그가 쓴 책들은 모두 삼세대론적 종말신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의 삼세대론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이 점이 선명해 진다고 본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삼세대론'이란 말이 젖어 나오고 있으며, 그의 종말관은 삼세대론에 근거하여 주장되고 가르쳐지고 있다.

 1) 먼저 이광복 목사의 삼세대론은 무엇인가?
 이 목사의 삼세대론이 무엇인지 앞서 잘 밝혔다고 보지만, 그러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조금 더 요약적으로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이광복 목사는 시대를 셋으로 나누고 있다. 어떻게 보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구약시대, 신약시대, 그리고 재림시대가 그것이다. 율법시대·은혜시대·신천지시대라고도 하고, 구약·신약·계시록으로 나누기도 하고, 구약 율법시대·초림 예수시대·종말 재림시대라고도 하고, 초세종말·중세종말·말세종말이라고도 하며, 구약·초림·1000년왕국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끝에 있는 종말시대에 있다. 이를 환난시대라고도 하는데 그가 말하는 삼세대는 그 초점이 바로 마지막 시대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1000년 왕국시대, 재림시대, 신천지시대, 요한계시록시대, 종말 재림시대, 환란시대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종말시대의 특성이 무엇이며, 이 시대의 성도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며, 이 시대의 구원을 위하여 성도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사실 이광복 목사의 삼세대론 중에 마지막 시대를 1000년 왕국시대라고 하지만 엄격히 주의 재림 후에 이루어질 1000년 왕국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그 1000년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시대 즉 현재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삼세대론이라고 하지만 그 세 번째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시대인 신약시대 중에 그 끝 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조금 살펴보자.

 먼저 그의 삼세대론에 대한 설명을 보자. 이 목사의 경우 구약(시대)과 신약(시대)과 계시록(시대)에 해당되는 성구가 다르다. 구약은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에 해당되고, 신약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에 해당되고, 계시록 새대는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9-12)에 해당되는 것이다(이광복, 감추어진 만나의 비밀, 목양선교연구원, 1990년 10월 30일, 13쪽).

 그리고 율법시대는 그림자 시대요 메시야 대망시대요 육의 시대인데 반하여, 초림시대는 실체시대요 메시야 초림시대요 영의 시대이며, 재림시대는 완성시대이며 메시야 재림시대이며 영육완성시대라고 하였다(위의 책, 12쪽). 그리고 재림시대는 "①재림 직전에 종말의 대환난이 있음을 말한다. ②영과 육의 완전 성화된 첫째 부활, 휴거되는 자를 성도라고 부른다. ③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는 것을 축복으로 의미 부여한다. ④순교적인 신앙으로 승리하는 믿음의 선진들을 푯대 삼는다. ⑤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위의 책, 14쪽)라고 했다. 독자들은 왜 그가 말하는 종말시대는 신약시대에 포함되지 않고 따로 종말시대라고 해야하는지 거기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광복 목사는 각 시대마다 그 특성이 다르다고 하는데(위의 책, 15쪽) 한 마디로 이는 엉터리이다. 그 중에 하나만 살펴보자. 관계성에 있어서 구약(율법)시대는 주인과 종의 관계(창 18:1-3)라고 하고, 초림 예수시대는 아버지와 아들관계(요 17:25-26)라고 하고, 종말 재림시대는 남편 아내의 관계(계 19:7)라고 하였다. 이상하게도 이는 통일교나 JMS의 정명석 교주의 사상과 같다는 것이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한 곳이 얼마든지 있다(아가서, 사 54:5, 렘 3:14). 그리고 신약시대에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묘사한 곳은 얼마든지 있으며(마 25장, 눅 12장, 14장, 16장 등), 또한 종말 시대에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 묘사한 곳이 얼마든지 있다(계 1:6, 2:27, 3:5, 21, 14:1). 이것만으로도 이광복 목사의 삼세대론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종말신앙을 강조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종말신앙이다. 그런 점에서 종말신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이광복 목사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삼세대론이 맞느냐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시대마다 구원의 방법이 달라지느냐 같으냐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광복 목사의 종말론에 의하면 신약시대의 구원의 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목사는 그것을 부정하였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삼세대론 자체도, 성경에 대한 영해도, 다 엉터리라고 본다. 그러나 그의 종말시대의 구원관이 다르지 않았다면 그에게 이단시비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것을 증명하겠다. 이것이 필자의 본 글의 핵심이요 본론 중에 본론일 것이다.

 2) 이광복 목사의 종말시대에는 다른 시대와 다른 구원관이 요청되고 있다
 이광복 목사는 드러내 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오직 예수'를 누구보다 더 많이 외치는 목사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종말신앙을 가지고 종말시대에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부족하게 된다. 심지어 예수 피로 구원 얻은 줄 알고 종말을 대비하지 않는 자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점을 그의 말로 직접 하나씩 살펴보겠으며, 필요하면 비판하겠다. 이에 관한 그의 글이 많지만 다음의 내용만 살펴보자.

 ① "가을의 비료가 다름을(봄과 여름과) 주시하시길 바랍니다. 가을엔 칼륨을 줌으로써 탐스러운 열매가 맺힐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4의 은혜복음은 은혜시대에 잘 자라도록 보호해주시고, 요한계시록 14:6의 영원한 복음은 마지막 환난시대에 결실맺게 하는 칼륨과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이광복,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도서출판 흰돌, 1992년 7월 15일, p28)"

 <비판>
 이 비유에 의하면 분명히 은혜시대에(봄과 여름) 필요한 말씀과 종말 시대에(가을) 필요한 말씀이 다르다는 말이다. 즉 종말시대에는 은혜시대와 다른 말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② "결실케 할 칼륨을 먹지 못한 탓입니다. 즉 종말인 이 시대에 주님재림준비, 혼인잔치준비를 망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만나가 두 가지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밤이슬 중에 내린 만나(민 11:9)는 은혜시대의 말씀의 모형이고 이슬이 마른 후 서리 가운데 내린 만나(출 16:14)가 있는데 이 서리는 가을을 의미하므로 추수에 필요한 말씀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수의 말씀은 성도들을 더욱 굳건하게 하며 원숙한 믿음에 이르도록 합니다"(위의 책, p29).

 <비판>
 역시 종말시대에는 은혜시대의 만나와 다른 만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③ "우리 믿음의 행위 역시 주일에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또한 믿음의 생활이 장구한 역사가 흘렀을지라도 만일 벌레가 먹었다면 하나님이 수확하고자 하실 때 그 열매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탈락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평생동안 예수를 믿었지만 구원은 받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벌레를 조심하셔야 합니다"(위의 책, 30쪽).

 <비판>
 평생에 예수를 믿고도 말세에 벌레를 조심하지 않으면 헛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연히 이광복 목사에게 예수 믿어 얻은 성도의 구원은 불완전하게 되어 있다. 더 살펴보면 이 점이 더욱 선명해 질 것이다.

 ④ "말씀은 뿌리는 종과 추수의 종이 다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포도농사도 추수 때, 주인은 추수에 적합한 종들을 볼러모아 추수를 합니다. 은혜시대는 열두 사도들을 계승한 종들의 교회를 통해 농사를 짓지만 마지막 환난시대에는 강력하게 추수하는 종들을 주께서 모으셔서 그들을 통해 추수를 하게 합니다"(위의 책, 31쪽).

 <비판>
 은혜 시대에 사도와 대칭되는 말세의 추수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말은 이 목사의 글에 자주 나타난다. 그는 누구일까? 이 목사 내지는 이 목사처럼 종말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⑤ "이 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피가 주는 의미가 내 속에서 열매맺지 못할 때, 다시 말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내 믿음 생활이 잘못돼도 다 구원받아 버린 줄 알고, 이 피로 내 죄를 씻지 아니하고, 이 피를 감당치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이 포도주에 취한다는 의미로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아야 합니다"(위의 책, 128쪽).
 <비판>
 즉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만 믿고 종말의 믿음을 가지지 않는 것은 음행의 포도주에 취했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이 목사의 핵심 사상으로 자주 나타난다. 즉 "이 피를 감당치 못하는 것"은 피만 믿고 종말신앙을 가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음을 더 살펴보자.

 ⑥ "하나님이 언약했지만 언약 안에 있지 아니했기 때문에 멸망 받았다고 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십자가는 언약입니다. 피로 죄사함을 얻게 해서 구원시키겠다는 언약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을 아직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멸망 받았다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 무슨 문제입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셨기 때문에 그만 여기에 도취되어 중생없이 교회에 다니기만 해도 완전히 해결된다는 일부 잘못된 신앙풍조가 한국교회, 한국강단에 넘쳐 있습니다."

 ⑦ "계시록이 은혜시대에는 완전히 열리지 아니했기 때문에 계시록을 안했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계시록을 보아야 할 때에 못 보면 큰일입니다. 지금은 바뀌어져 계시록을 철저히 보아야 할 때입니다"(위의 책, 144쪽).
 <비판>
 분명히 은혜시대에는 계시록을 몰라도 괜찮지만 그러나 종말시대에는 계시록을 모르면 안 된다는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종말시대라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계시록은 신약시대의 말씀이 아니라 종말시대의 말씀인데 이는 시대관에는 물론 성서관에도 문제가 생기지만 나아가 구원관에도 문제가 생긴다. 요한계시록은 다른 복음이 아니라 다른 성경과 같이 똑같은 복음인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도 중세교회 성도도 계시록을 알아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⑧  "초림 때에는 율법을 예언하면 죽습니다. 율법은 구약시대의 말씀입니다. 열두 제자가(율법을: 필자 주) 예언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성취인 예수를 다시 증거했고 다시 예언했습니다.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잘못 은혜에 도취하여 있으면 안됩니다. 이것을 살려주는 재림을 다시 예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위의 책, 146쪽).
 <비판>
 종말에는 새로운 복음과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즉 신약에 사도들이 예수를 증거한 것처럼 종말 시대에도 재림을 다시 예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래도 그가 신약시대와 종말 시대를 구별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우리는 마땅히 종말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의지하는 것으로 종말시대의 구원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다.

 ⑨ "요즈음 먹는 것을 굉장히 찾습니다. 먹는 것은 복음적으로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계속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누룩 없는 떡, 예수님의 죄 없는 몸, 다시 말하면 교훈이나 다른 바벨사상이 섞이지 않은 것을 먹어야 합니다. 누룩은 죄를 말합니다. 세상지식을 말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누룩이 섞이지 않는 것 곧,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떡이 나타난 것은 마지막시대이며 어느 시대나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세 광주리(창세기 떡 맡은 자의 광주리를 말한다: 필자 주)를 율법시대 은혜시대, 마지막 환난시대를 상징합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율법도 선한 말씀이요 은혜의 복음도 천국복음입니다. 모두 귀한 말씀입니다. 마지막 환난시대를 위해 작은책, 영원한 복음을 주었다고 했습니다(계14:6)"(위의 책, 164쪽).

 <비판>
 마지막 시대에는 '작은 책', '영원한 복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떡 세 광주리를 말씀으로 비유한다고 하는 것은 구약과 신약과(계시록을 제하고) 그리고 계시록의 말씀으로 나누어진다는 말이요, 종말시대의 '작은 책, 영원한 복음'은 계시록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⑩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율법은 아브라함 때부터 초림 때까지 이천 년 동안 지속됐지만 예수님께서는 삼년반 동안 새복음을 주심으로 율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은혜복음이 초림부터 지금까지 이천 년 동안 왔지 않습니까? 이젠 장차될 일, 계시의 말씀이 열리고 있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무기력하나 우리를 구원하고자 마지막 주시는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하시기 위해서, 영생을 주시시 위해서, 상속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흰떡같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위의 책, 166쪽).
 <비판>
 종말시대에 종말 복음의 필요를 이렇게 완벽하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제 열린다고 하는 '장차될 일, 계시의 말씀'은 바로 이광복 복음이 아니겠는가?

 ⑪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빼내시고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초림 때 주님께서 12제자를 통해 은혜복음을 주셨고 이 복음은 율법을 완성시켰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추수의 종들을 통해서 장차 될 일을 선포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계1:1) 장차 될 사건이므로 미리 열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때가 되지 않았는데 열고자 했던 이단들은 전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만 이제는 때가 되었기 때문에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위의 책, 196쪽).

 <비판>
 후론하겠지만 이광복 목사는 시한부종말론자이다. 그래서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결론을 얻게 한다. 그런데 마지막 때는 이광복 같은 종이 나타나서 말세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앞선 시대에 때가 오지 않았는데 종말 복음을 전하다가 이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추수할 종들을 통하여(그 추수할 종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필자 주) 장차될 일을 말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3) 이광복 목사의 종말론에 의하면 말세에는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행과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된다.
 이광복 목사는 이 점을 가장 강력하게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필자도 처음에는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을 반신반의하였다. 상식 있는 목사로서 그것도 교수로서 그런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해 본 결과 이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광복 목사도 십자가를 말한다. 오직 예수도 말한다. 그리고 믿음도 말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말세에는 말세의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광복 목사의 구원관은 안식교의 구원관과 같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씩 열거하고 비판해 보자.

 ① "구약에 포도주에 취한 사건 속의 포도주는 예수의 피를 의미합니다.(마26:28) 즉 십자가의 피의 복음을 잘못 받아 다시 타락하는 것을 뜻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사실인지 모릅니다. 포도주에 취하면 다시 문둥병 환자가 된다는 것이며 계시록 17:2에 음녀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했습니다"(위의 책, 289쪽).
 <비판>
 예수의 피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하는 말이다. 즉 예수 피만 의지하고 종말신앙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음행의 포도주라는 말이다. 이광복 목사 편에서는 위의 말에 변증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앞으로 더 살펴보면 필자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②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며, 구원 받은 성도가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성화되는 구원의 삶'이라고 증거해 준다. …성화가 없는 칭의는 존재할 수 없다"(이광복,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 흰돌선교센타, 1996년 6월 1일, 29쪽).
 <비판>
 위의 말만으로는 복종과 성화를 구원의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는 변명이 가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목사는 말세의 성도는 노력하여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그러기에 성화가 없는 칭의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다음을 더 살펴보자.

 ③ "궁극적인 성도의 구원과 성도의 견인교리: '성도의 견인'은, 오직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참된 성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매우 힘 있게 말해주는 말씀이다. …견인(Perseverence)이란,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원하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정해 놓으신 그 수단들을 위하여 최대의 열심과 성의로 헌신할 것을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약속임을 의미한다. <견인의 교리>는 신자들이 '견딘다'(Persevere)는 교리이다. 성도의 견인에 있어서 <견딤>이란 점을 강조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사항이 아니다"(위의 책, 77쪽).

 <비판>
 우선 이 목사는 칼빈주의를 오해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성도의 견인이란 장로교의 5대 사상 중에 하나로서 성도가 참고 견디고 인내하여 우리의 구원이 온전해 진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참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고 이룬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목사가 이렇게 반대로 해석하는 것은 그의 사상이 말세의 성도는 구원을 위하여 참아야 하고 견뎌야 하고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목사의 뿌리에 자리 잡은 사상이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견인관'을 가진 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다음을 보면 이 점이 확실해 진다.

 ④ "구원론에 대한 오해의 소견들: 4)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영원 구원까지 지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함/ 죄악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지워버리신다고 경고하셨음(출32:33, 겔3:20, 수24:20)"(위의 책, 74쪽).

 <비판>
 이보다 이광복 목사의 구원관이 잘 나타난 말은 없을 것이다. 우선 그의 말에 의하면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영원 구원까지 지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구원관이라는 말이다. 즉 구원은 얼마든지 취소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선 이는 그가 속한 장로교 교리를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그가 이런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의 종말의 구원관 때문이다. 예수 피로만 구원 얻는 줄 알고 종말의 감추어진 만나를 먹지 않으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⑤ "다 구원받아 버린 줄 알고, 이 피로 내 죄를 씻지 아니하고, 이 피를 감당치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이 포도주에 취한다는 의미로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아야 합니다. ‥‥ 십자가는 언약입니다. 피로 죄 사함을 얻게 해서 구원시키겠다는 언약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을 아직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멸망받는다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 무슨 문제입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셨기 때문에 그만 여기에 도취되어 중생 없이 교회에 다니기만 해도 완전히 해결된다는 일부 잘못된 신앙풍조가 한국교회, 한국 강단에 넘쳐있습니다"(이광복,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128쪽).

 <비판>
 앞에서 살펴본 내용이지만 다시 살펴보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말이다. 즉 구약의 성도들이 우리가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을 아직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멸망받은 것처럼 비록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말세의 만나 내지는 복음을 얻지 못하면 이 종말에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⑥ "계시록17장12절에 보면 음녀도 술에 취했다 그랬죠? 이 음녀는 타락한 교회죠? 이 포도주에 취했다 이 말은 우리가 공부한대로 비진리, 잘못된 은혜에 취했다, 포도주가 피로 인한 것, 그것을 잘못 곡해해서 취해 버려서 다 구원받아 버리고 이런 진리에 취해 가지고, 구약의 선민사상,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백성이, 선민이라는 사상에 취해 가지고 전부 그리스도 죽였어, 마지막 때도 잘못 취했어"(이광복 설교, 92년 6월 7일, 보혜사 성령).

 <비판>
 이광복 목사는 이 말에 대하여 변증하기를 정통교회나 구원의 확신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비진리, 잘못된 은혜에 취'한 교회 즉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를 비판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비진리 잘못된 은혜에 취했다고 하는 것은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비진리, 잘못된 은혜'는 이 삼세대 중에 은혜시대의 성도들이 예수 피에 취해서 그것만으로 족한 줄로 알고 말세의 만나를 먹으려고 하지 않고 말세 복음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⑦ "아침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간다는 말은 새벽기도회 하는 것의 그림자입니다. 밤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한다는 것은 철야기도회 하는 것의 그림자입니다. 그들의 연회에 비파와 수금과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춘 것은 예배의 훌륭한 찬양대가 있다는 것의 그림자입니다"(이광복,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131-132쪽). 

 <비판>
 이사야 5:11-14 말씀을 가지고 은연 중에 정통교회의 새벽기도도, 철야기도도, 성가대도 비판하고 있다.

 4) 이광복 목사는 시한부 종말론자이다
 이광복 목사는 몇년 몇월 몇일 몇시에 주님이 오신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시한부종말론자라고 하는 말을 강력하게 부인한다. 그러나 년과 시를 말하면 시한부종말론자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한부종말론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광복 목사는 시한부종말론자가 아니다. 그러나 날자와 시를 말하지 않았어도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면 시한부종말론자이다. 그가 말하는 종말은 지금 이 시대인 것이다. 살펴보자.

 ① "예수님의 탄생도 다니엘 9:27에 보면 62 이레 후에 기름 부은 자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62' 이레는 우리가 70이레를 공부했을 때에 AD 26년(역사상 4년의 오차가 있음)에 예수가 30세 되던 해 이 땅에 기름 부은 자로서 공생애가 시작된다는 기간이 정해진 것을 배워 알았습니다. 그런데 1년도 틀리지 아니하고 예수님은 모든 예언 그대로 요단강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유대인의 왕으로 정확히 오셨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외쳤습니까? 세례요한을 통해서 외쳤습니다. 이 세례 요한의 외침이 징조인 것입니다. 표적을 통하여 아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처참한 멸망을 받았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초림도 예언된 그 시기에, 약속된 시기에 오셨듯이 재림도 반드시 정해져 있습니다"(이광복,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53쪽).

 ②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국화입니다. 마태복음 1:18~22에서 예수께서 무화가 나무를 저주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예언했던 것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싹이 나서 독립을 하면 내가 오겠다.' 이것이야말로 최대의 징조요 최대의 싸인인 것입니다. 2000년 동안 국가 없이 전 세계에 흩어졌던 민족이 1948년에 독립을 했던 나라는 한 국가도 없었습니다. 이 예언은 1915년만에 정확히 이루어 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하였습니다"(이광복,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56쪽).

 ③ "프랑스 왕궁 예언가며 의사인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거의 다 이루어졌는데, 알고보니 전부 성경계시록 말씀을 인용하여 미리 보았다는 것입니다"(이광복,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116쪽).

 ④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가 표상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에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의 표징으로 최대의 징조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즉 성경 속에서 무화과나무의 저주와 회복을 통한 비유는 초림으로 인한 구약교회(이스라엘)의 심판과 재림으로 인한 신약교회의 최후의 모습을 밝히는 비밀스러운 진리의 표징(그림자적인 예언)이라는 것이다"(이광복, 재림의 징조, 12쪽).

 ⑤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고 주의 재림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후에 인자의 재림은 무화과나무의 회복이 되는 이 세대에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회복 독립이 무화과나무 회복의 모습을 비유로 실현된 역사적인, 이 현실 속에서 주님의 재림사건이 곧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실현된다는 의미이다"(위의 책, 112쪽).

 <비판>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고 싶지 않다. 이 무화과나무가 연하여지고 다시 싹이 나는 것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르키는지 그것도 따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 목사는 1948년의 이스라엘독립 후 이 세대 안에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그리고 한 세대를 50년으로 주장하였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예언했던 이 세대가(마 23:36, 눅 11:29,30, 눅 17:25) 모두 50년 내에 성취되었고 희년이 50년만에 오는 것으로 보아서 한 세대는 50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위의 책, 112-116쪽).

그러나 그는 "'이 세대'를 시간적 개념 곧 연수로 보는 견해를 반대한다"고도 한다(이광복, 무화과나무로 본 재임의 징조, 도서출판 흰돌, 1999년 6월 23일). 이는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가 다미선교회의 1992년 10월 22일 휴거설을 비판하는 것도 자가당착일 뿐이다. 그러니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점으로 보는 것도 일종의 시한부종말론이며, 또 한 세대 50년 안에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시한부재림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는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있다는 다미선교회와 차이가 없는 시한부종말론이다.

이 목사의 말에 의하면, 앞선 신앙인들은 종말이 아닌데도 장래 일을 알 수 없는데 그것을 말하려다가 이단이 되었다고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제 장래를 말할 때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지금이 바로 종말시대로 장래를 말할 때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시한부종말론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이나 알고보니 전부 성경계시록 말씀을 인용하여 미리 보았다는 망언은 보수주의자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불신자 노스트라다무스도 이광복 목사처럼 이 시대에 종말을 외칠 선지자격의 사람이라고 보는 것인가? 말세는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의 것이다. 요한계시록도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의 것이다. 종말신앙이 2000년대 전후의 성도들의 전유물이 절대로 아니다. 이광복 목사는 '그 날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나(이광복, 성경종말론, 흰돌선교센타, 1998년 6월 30일, 110쪽) 그 말은 사탄의 소리이다. 그렇게 되면 2000년 전후에 성도들에게는 종말신앙이 필요 없다는 말이고 필요하다면 속임일 뿐이다. 그 날을 모르니까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결론

 이광복 목사에게는 위에서 비판한 것 외에도 비판받아야 할 것들이 많다. 그 중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그의 성경 영해이다. 그의 이단성은 바로 그의 영해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나 그에게 성경을 영해하는 것이 습관화되었으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각종 과일을 먹으라고 한 것을 가지고 그 '각종 과일'을 "혼합주의"라고 했겠는가? 그는 스스로 혼합주의와 싸우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그 혼합주의의 열매를 따먹으라고 했다는 말을 실수라도 하기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영해가 젖어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본호에서는 지면상 그의 영해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교리가 영해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영해는 그냥 동정하고 이해할 수준의 것이 아니다. 비유에서 교리를 찾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영해에 의하여 교리를 만들면 안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광복 목사의 영해가 얼마나 엉터리이며 그것이 이단성에 미친 부분을 다음에 밝히겠다. 본 호에서는 지면상 생략하고, 이 목사의 반응을 보고 다음에 취급하겠다.

 그리고 우리 한국민족을 성경의 욕단 자손이라고 하는 주장도, 그리고 그가 다니엘서 70이레 문제의 기산점을 안식교의 창시자 화잇처럼 아닥사스다 7년(주전 457년)으로 잡은 엉터리 근거도,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보는 것과 한 세대를 50년으로 보는 사상도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어느 누구를 비판할 때보다 이광복 목사를 비판할 때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나 이 목사도 성숙한 사람이라면 필자의 비판을 아파하지만 말고 그의 말처럼 회개의 기회를 삼고 자신을 돌이켜 새로 태어나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하며 글을 썼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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