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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한호 교수의 기본이 안된 모순투성이 반박
1998년 03월 01일 (일) 00:00:0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필자가 윤석전 목사에게 이단성의 문제를 삼자 윤목사를 변호하고 나선 기침측 교수는 세 사람이었다. 최봉기 교수(침신대)와 근광현 교수(수도침신)와 도한호 교수(침신대)이다. 그러나  최봉기 교수와 근광현 교수의 글에 대해서는 별로 비판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는 따로 언급하지 않고 윤석전 목사에 대한 변증에서 소극적으로 비판하겠다. 그러나 도한호 교수의 글이 가장 구체적이고 또한 대표적이라 믿어 적극적인 비판을 하려고 한다. 물론 도교수에게도 다시 반론권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반드시 반론하리라 믿고 기다리겠다. 오히려 도교수와의 논쟁은 감정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또한 객관적인 논쟁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는 교수의 양심과 인격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 세 교수의 글은 너무나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거기다 서로 서로의 글에 모순된 윤리기준과 신학기준이 많았다. 다 변증할 수는 없으나 도교수에게서 필자가 찾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7가지로 나누어서 하나씩 살펴보고 대답하겠다.

1. 윤목사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고 이단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확신도 없는, 그리고 무책임한 말이라고 한 점에 대하여.
‘이단‘이란 말이나 ‘이단성‘이란 말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는 도교수의 말은 천번 만번 옳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도교수가 믿든 믿지 않든 필자는 지금까지 그렇게 사용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고, 윤석전 목사에게 문제를 제기할 때도 그러했다. 그런데 도교수는 이단이면 이단이라고 해야지 ‘이단성‘이 있다고 한 것은 필자에게 확신이 없고 책임성 없다는 것이다. 먼저 직접 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월간 <교회와신앙>의 발행인 및 편집인인 최삼경 목사는 동지 1997년 9월호에 ‘윤석전 목사의 구원론에 이단성 있다‘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였다. 필자는 우선 글의 제목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다. 이단이라고 확신되면 이단이라고 고발하거나 의심스러우면 확인하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이지, 이단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윤석전 목사가 이단이라는 확신도 없고 또 장본인을 직접 만나서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는 의미가 아닌가 하고 다소 의아한 마음으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 뿐만 아니라,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는 이런 이단논쟁에서 고발되는 당사자는 인격적으로나 목회에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본지 98년 2월호 155~156쪽, 국민일보 97년 12월 30일자 전면광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① 우선, 누구를 곧바로 이단이라고 하지 않고 이단성이 있다고 한 것은 오히려 사려 깊은 말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단이라고 하지 않고 이단성이 있다고 말하여, 이단이 되기 전에 빨리 회개하여 이단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뜻이 있다고 본다면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요, 그리고 “이단이다, 아니다“라는 평가는 얼마든지 개인도 할 수 있는 성경적·법률적 자유에 속한 것이지만 가능하면 개인은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에서 하고 교단에서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때 사려 깊은 처사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② 다음으로, 이 땅에는 이단과 정통만 있는가? 그렇지 않다. 병에도 보면 초기도, 중기도, 말기도 있다. “이단이 아니면 다 정통이고, 정통이 아니면 다 이단이다“는 기준이 맞다면 도교수의 지적이 맞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도교수의 지적은 윤석전  목사를 옹호하기 위하여 급조된 말이다.

객관적으로 살펴보자. 그 동안 여러 교단에서 이단을 규정할 때 ‘이단‘ 외에도 ‘이단성‘이란 말과, ‘사이비‘ 외에도 ‘사이비성‘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도교수가 각 교단의 이단연구 결과를 조금만 살펴봤다면 이렇게 객관적으로 모순된 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사이비‘란 말로 증명해 보겠다. 사이비란 말에 대하여 기독교 밖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기독교 안에서 사용하는 의미가 각각 다르다. 그런데 현재 예장 통합측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이비란 말의 의미는 이단성이란 말에 준하는 용어이다. 즉 현재 통합측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이비‘란 말의 의미는 ‘이단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교수의 입장에 의하면 정도의 측면에서 사용되는 사이비란 용어는 잘못된 것이 된다. 이단성이란 사이비란 말에 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교수의 지적은 객관적으로도 지지받을 길이 전혀 없다.

③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도교수에게 있다.
필자는 어떤 사람이든 자기 모순이 없을 때 그를 존경하고 그를 진실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남에게 요구하는 기준과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다르다면 그에게는 객관적인 기준도 그리고 진실한 기준도 없는 사람이다.

기침 총회의 사이비이단대책위원회가 최근에 발족된 것을 알고 있다. 필자가 알기로는 이 위원회가 발족된 중요한 이유는 필자가 윤석전 목사의 이단성을 제기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고, 또한 다락방 류광수에 대하여 연구하기 위함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지난 97년 11월 14일에 사이비이단대책위원회(위원장 정인도)가 첫 회의를 열고 결의한 바가 바로 무엇이었는가? 출석한 윤석전 목사에게 <교회와신앙>에 나온 내용을 근거로 물었고, 윤목사로부터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필자에게 통보한 바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락방 집단 이단성 있다‘고 결의한 것이었다(침례회신문, 97년 11월 15일자). 분명히 기침 교단 사이비이단대책위원회의 공식 결의가 “다락방 집단에 이단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도한호 교수가 그 위원회의 위원이란 점이다. 더 놀라운 것은 류광수에 대하여 이단성이 있다고 하면서 그 이단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 내용은 아직까지 밝힌 바가 없다는 점이다. 필자에게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첫 모임에서 어떻게 이단성이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따로 연구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교수에게 묻고 싶다. 귀교단에서 다락방에 대하여 이단성이 있다고 한 말은 확신이 없어서 한 것인가? 아니면 이 다음에 혹 신학적으로나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때 그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인가? 이단이면 이단이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지 왜 이런 결정을 했는가? 교단의 결정이 잘못된 것인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교단은 그런 용어를 사용할 수 있고 개인은 사용할 수 없는가? 반드시 신앙인답게, 목사답게, 그리고 교수답게 대답해 주기 바란다.

2. 필자가 윤석전 목사에게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
우선 도교수의 말을 직집 인용해 보자.
“필자는 우선 글의 제목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다. 이단이라고 확신되면 이단이라고 고발하거나 의심스러우면 확인하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이지, 이단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윤석전 목사가 이단이라는 확신도 없고 또 장본인을 직접 만나서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는 의미가 아닌가 하고 다소 의아한 마음으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본지 98년 2월호 155~156쪽, 국민일보 97년 12월 30일자 전면광고). “나는 이 과정에서 윤목사가 최삼경 목사를 비롯해서 아무에게도 자신이 가르치는 교리나 설교에 대해서 질의를 받거나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같은 책 157쪽, 국민일보 광고).

필자는 지금까지 교단에서 공적으로 연구를 하던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연구를 하던지 연구를 위해서 교단이 다른 경우에 장본인을 만난 일이 없다. 그런데 항상 그 대상자들마다 이 점을 문제 삼았다. 도교수의 말을 듣고, 이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나, 비록 교단이 다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절차에 의해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특히 정통 교단 안에 있는 사람의 이단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때에 고려해 볼 문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필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겠다.
1) 도교수는 이런 점도 이해를 해야 한다. 먼저는 사람을 만나느냐 만나지 않느냐가 연구의 객관성과 꼭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오히려 대상자를 만났을 때 연구의 객관성이 흐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도교수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연구하여 그를 비판할 때(비록 이단논쟁은 아닐지라도) 그가 현존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만나보고 난 후에 비판하는가? 만나지 못하면 어떤 비판도 하지 않는가?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도교수의 이론을 따른다면 죽은 사람의 이단성은 어떻게 연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2) 그리고 직접 만나서 물어보지 않았다고 시비를 한다면 반대로 직접 만나서 물어 볼 때 그것도 시비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필자가 연구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을 가능하면 안 만나려고 한다. 만났을 때 유익이 없었다. 그들이 필자를 꼭 회유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윤석전 목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회개하겠다고 해서 만났고 그러한 그의 글이 회개문으로서는 부족감이 있어 보다 더 충족하게 작성할 것을 필자가 권면하자 그가 이에 동의하였고, 그 스스로 자신의 글을 충족하게 잘 고쳐서 보내달라고 필자에게 요청해서 회개문의 초안을 작성하여 보내주었는데,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필자가 일방적으로 회개문을 써주면서 회개를 강요했다고 사기를 치며 필자를 이루 말할 수 없이 매도하고 있는 자신의 사람들을 무책임하게 비양심적으로 묵과해 주고 있는 목사를 필자가 너무 순진하게 믿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바로 윤석전 목사의 경우가 상대방을 만나는 것보다 만나지 않는 편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대표적 케이스라고 본다.

3) 도교수의 말이 진실이라면 역시 도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더 큰 모순이 발생한다.
① 먼저, 기침 사이비이단대책위원회가 다락방 집단(류광수)에게 이단성이 있다고 규정하면서 류광수나 다락방에 속한 책임 있는 사람을 만나본 일이 있는가? 필자가 알기로는 없다. 단지 대책위원회가 발족하는 그 날 어떤 연구내용도 없이 류광수 씨를 이단성이 있다고 결의했다. 도교수가 위원으로 참여한 대책위원회에서 말이다. 도교수는 이 문제를 결의할 때 무엇을 했는가? 류광수씨를 만나서 조사한 후에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야 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필자에 대한 비판의 글은 지난 해 9월에 쓰여진 글이요, 이단대책위원회는 그 다음인 11월 14일에 소집됐으니 위의 생각이 도교수의 진실이라면 그는 마땅히 류광수씨를 만나서 조사해 보고 결의하자는 제의를 했었어야 옳았지 않은가?

혹시 기침 교단에서는 어떤 연구도 하지 않은 채 다른 교단의 결의를 따라 내린 결론은 아닌가? 또는 귀교단의 피해 사례가 있어서 쉽게 내린 결론은 아닌가? 그렇다면 필자에게도 윤석전 목사로 인하여 야기된 충분한 피해사례가 있음은 어떻게 하겠는가? 양심 있는 학자로서, 그것도 위원으로 참여한 한 책임자로서 자기 교단의 결의에 대하여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필자에게는 문제를 삼는 것을 볼 때 그의 진실도 그 진실을 실천하는 진실도 다 의심스럽다.

② 그리고 그 말이 진실이라면 도교수는 역시 필자를 비판하기 전에도 먼저 필자를 만났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필자에게는 한 마디도 묻지 않고 필자를 비판한 것은 무슨 모순인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사연이 필자에게도 있을 것 아니겠는가? 이런 자가당착적 행위는 어떻게 변명할 수 있는지 그의 말을 직접 듣고 싶다. 혹시 윤석전 목사는 같은 교단이니까 팔이 안으로 굽어 변호의 대상이 되었고, 필자는 다른 교단의 사람이라서 팔이 밖으로 굽은 것은 아닌가?

4) 더욱이 도교수를 볼 때, 상대방을 만나서 물어보고 그의 말을 순진하게 믿고 변증한다면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본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나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한 일이다. 만의 하나 이단이 아닌 자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도 큰 일이지만, 이단인 자를 이단이 아니라고 변증하는 것도 큰 일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도교수는 깊은 연구를 하지 않고 윤석전 목사를 만나 물어본 것으로 그에게 이단성이 없다고 하였고 그를 변증했다는 점이다. 그것을 직접 그의 말 가운데서 확인해 보자.

“나는 곧 윤목사와 연락하고 그의 부목사들과 함께 만난 자리에서 이단성이 있다고 지적된 (1) 마귀론, (2) 구원론, (3) 계시론에 대해서 그가 과연 성경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간단하게 확인하였으나 필자는 윤석전 목사에게서 이단이 된다거나 또는 이단성이 있을 만한 신학적 주장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같은 책 157쪽, 국민일보 광고).

“필자가 직접 윤목사를 만나서 증인들 앞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윤목사는, 어떤 정신적 육체적 질병의 원인은 죄와 마귀일 수 있으나 결코 모든 질병의 원인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같은 책 158쪽, 국민일보 광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죄를 마귀에게 전가한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한 것 같다. 회개하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마귀는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이지 사람의 죄가 마귀에게 전가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윤석전 목사에게 질의한 결과, 그는 이것은 자신의 신학적 견해도 아니고, 교리공부 시간에 체계적으로 가르친 것도 아니며, 연합집회 때의 설교 중에 마귀의 역사(役事)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설명한 것이었다고 대답하였다“(같은 책 159쪽, 국민일보 광고).

도한호 교수가 필자와 전화를 할 때에도 분명히 자신은 윤석전 목사에 대하여 그의 책을 보거나 그의 테이프를 듣고 연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나씩 비판하겠다.

① 도교수는 “간단히 확인했다“고 했는데 간단히 확인하고 바르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렇게 간단히 확인하고도 용기 있게 그런 변증을 할 수 있는가? 그렇게 간단히 물어보고 이단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무슨 비밀이 있는지 모르겠다. 있다면 그것은 학문적인 비밀인가 영적 비밀인가? 필자는 지금까지 그의 책과 그의 테이프 300개를 분석해 가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윤석전 목사를 만나지 않았다고 문제가  되고, 도교수는 한 번 만나 봤다고 해서 문제가 없다면 그것은 능력의 차이인가 진실의 차이인가 묻고 싶다.

②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도교수에게 있다. 윤석전 목사를 한 번 만나서 물었던 것으로 그것은 진실이라고 다 믿고 변증하면서도, 웬일인지 필자의 글 속에 선명하게 명시된 부분에 대하여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선입견의 안경 때문인지 아니면 혹 글보다 말을 더 믿어야 한다는 학문적 기준을 가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먼저 도교수가 필자의 글에 대하여 한 큰 실수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비판하겠다.

필자가 윤석전 목사에게 구원관에 이단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윤목사가 성도들에게 예배에 불참하는 행위, 예배시간에 조는 행위, 교회 봉사 중에 불만 불평을 하는 행위, 여성도가 짧은 치마를 입음으로 남성도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 하는 행위, 십일조 및 철저한 헌금생활을 하지 않는 행위 등 성도의 성화적 삶과 관련된 자범죄를 구원과 연계시켜 이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을 율법주의적인 구원론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도교수는 이렇게 변증했다.

“최목사는, 윤목사가,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간다든가  교회에서의 설교에서 빈번히 지옥에 간다는 말을 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의 회개관이 정통교회의 회개관이 아니라 율법주의적 회개관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최목사는 윤목사의 교회의 구성원과 윤목사의 설교의 주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윤목사의 교회에는 매집회마다 전도대상자들이 수없이 몰려오며, 따라서 윤목사의 설교의 주제도 대부분 전도설교이다. 그가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간다고 외쳤을 때의 그 회개는 기도회에 빠졌다고 해서 지옥에 간다거나 줏은 돈지갑을 제 때에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지옥에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불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의미였다“(같은 책 159쪽, 국민일보 광고).

다시 설명하자면 윤목사가 입만 열면 쏟아붓고 있는 지옥에 대한 언급은 신자에게 한 설교가 아니라 불신자에게 한 전도설교라는 것이다.

두 가지로 나누어 대답을 하겠다.
첫째, 만일 윤목사의 소위 ‘지옥론‘이 불신자에게 한 설교라면 윤목사의 가르침은 복음이 아니다. 불신자에게 예배에 불참하면 지옥가고, 예배시간에 졸면 지옥가고, 교회 봉사중에 불만 불평을 하면 지옥에 가고, 여성도가 짧은 치마를 입음으로 남성도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 하면 지옥에 가고, 십일조 및 철저한 헌금생활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을 한다면 이는 복음이 아니다. 불신자는 예배 시간에 졸든 안 졸든, 교회에서 봉사를 하면서 불평을 하든 하지 않든, 십일조를 바치든 안 바치든 지옥에 간다. 오직 예수를 믿을 때에만 천국에 간다. 그렇지 않아도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종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행위 중심의 종교이다. 불신자는 믿음이란 말도 행위란 말로 이해를 하는 것이다. 바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무화과 나무로 그 수치를 가리려고 했던 것과 같다.

그런데 그런 불신자에게 미니스커트를 말하고, 십일조를 말하고, 헌금생활을 말하고, 예배시간의 조는 것을 말한다면 이는 율법주의적인 구원관을 가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말이다. 이는 절대로 복음이 아니다.

둘째, 윤석전 목사의 설교는 절대로 불신자에게 한 설교가 아니라, 절대로 신자에게 한 설교라는 점을 97년 9월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제 이 점을 지난 97년 9월호에서 필요한 부분만 다시 인용해 보겠다. 그리고 분명히 도교수는 9월호의 글만 보고 변증했기 때문에, 윤석전 목사의 지옥론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에게 한 말이 아니라 신자에게 한 말이란 점을 분명히 알리기 위하여 12월호에서도 필요한 만큼 다시 인용하겠다. 도교수는 이것을 9월호의 글만 보고도 알 수 있었지만, 도교수의 구원관에 문제가 있지 않는 한, 더욱이 12월호를 본다면 그런 소리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윤목사의 설교가 구원받은 성도에게 한 설교임이 분명하다면 도교수의 기준으로 윤목사의 구원관에 이단성이 있다는 필자의 지적이 옳음을 인정할 것으로 믿는다.

인용해 보자.
“우리는 신앙생활을 치열한 전투로 여겨야 합니다. 이 전쟁에서 진 사람은 여기에 못 왔습니다. 이 전쟁에서 진 사람들은 지옥에 갔습니다. 이긴 사람들만이 구원받습니다. ··· 싸움에서 진 사람은 여기에 못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겼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조는 사람은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이겨야 합니다. 진 사람이 가는 곳이 어디인 줄 압니까? 지옥입니다“(제천시 연합집회 7번 테이프, 본지 97년 9월호 140쪽).

마귀에게 지면 지옥에 간다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불신자에게도 신자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 그러나 예배시간에 조는 것이 마귀에게 지는 것이고 지면 지옥에 간다는 것은 불신자에게는 따질 문제가 못되고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우선 바른 구원관을 가진 자는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졸든 안 졸든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자는 지옥에 가고, 졸아도 예수를 영접했으면 천국에 간다. 복음이 가르치는 바는 존다고 마귀에게 진 것이 아니요 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책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에도 이런 사상은 많다. 하나만 이용해 보자. “우리 성도는 모두 자신의 신앙생활에 방해되는 모든 요소를 원수처럼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334쪽, 본지 97년 9월호 140~141쪽).

분명히 설교의 대상자는 불신자가 아니라 성도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방해되는 것이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윤 전도사는 평소에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했고, 남보다 겸손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에는 성경구절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말로만 믿었던 윤 전도사의 지난날이 죄 투성이임을 발견하고 너무나 많은 죄들이 하나하나 보여지는데 자신이 너무 더럽고 추하고 부끄럽고 창피했다. ‘주여! 이 더러운 죄인을 죽이지 아니하시고 회개한 후에 죽여 지옥에 보내지 않으시려고 오늘까지 살려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그렇게 계속해서 기도했다“(“와 보라!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53쪽, 본지 97년 9월호 142쪽).

윤석전 목사의 체험 자체가 구원과 회개의 관계를 혼돈케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입만 열면 지옥을 외치는 것 같다.

이제부터 12월호에서 인용해 보겠다. 절대로 불신자에게 한 말이 아니요, 불신자에게는 필요도 없는 지옥론과 회개론을 전개하고 있다. 도교수는 특별히 이 점에 유의하여 살펴보고 다음 글에서 대답해 주기 바란다.

먼저 96년 2월 19~22일에 흰돌산기도원에서 “영적 생활“이란 제목으로 열었던 구정축복성회에서 윤목사가 했던 설교들 중에 살펴 보자.

“그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고, 죄를 그의 명령에 복종할 때 바로 예수의 피에 효력이 있지 않냐 이거요. 하나님의 말씀을 개떡같이 안 지키고도 당신들이 영생이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요. 그렇기 때문에 영생에 이만큼이라도 위험수위가 올라오는 짓은 할 필요가 없어요“(2번 테잎, 본지 97년 12월호 154쪽).
말씀을 지킬 때 피의 효력이 있다면 예수님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소리는 들으면서 죄 지으면 죽는다는 소리는 안 들어? 왜 그건 안 들어 그건.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소리는 들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안 지키면 지옥간다는 소리는 안 들어. 이런 등신들 아녀? 이것도 믿으면 이것도 믿어야 돼요. 그래서 하나의 계명을 범했으면 다 범했다고 말하잖아요. 영생을 하려면 영생에 방해되는 원수를 모조리 멸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영생하기로 결심하는 사람은 오른손 들어 아멘 합시다.(아멘) 감사해요“(2번 테잎, 위의 책 155쪽).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소리는 맞지만 죄 지으면 죽는다는 말은 틀리다.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해야 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새벽기도 나오쇼.‘ 못해 봐. 안 나오는 거요. ‘십일조 하쇼.‘ 못해 봐, 않는 거요. ‘첫 열매 드리쇼.‘ 안해, 못해, 해볼 재간이 없소. ‘기도하쇼.‘ 하나님이 해볼래야 해볼 수가 없소. 지옥이지 뭐요. 목사가 강단에서, 주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무리 말해도 해볼래야 해볼 재간이 없는 거요. 지옥이요“(3번 테잎, 위의 책 155쪽).
새벽기도를 해야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지옥과 천국의 조건이 된다는 말인가? 이 말이 윤목사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고 하더라도 모순된 소리요, 구속의 권능을 거스르는 사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운영하는 교회 와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자기 마음대로 까불어 보세요. 당신의 육신이 끝나는 순간 당신은 그냥 지옥으로 ··· 이보다 더 불행한 자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법대로 사느냐 안 사느냐 하는 것은 천국이냐 지옥이냐이기 때문에 당신은 심각하게 생각하고 예수 믿어야 되요. ··· 내 영생에 부도가 나는 일은 않기로 결심했어요. 여러분 모두가 다 영생하려고 예수를 믿거든 영생에 금이 가고, 영생에 상처가 나고, 영생이 썩고, 영생에 부도가 나고, 영생에 문제가 있고, 영생에 헛점이 있고, 영생에 오류를 남기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5번 테잎, 위의 책 155쪽).
절대로 불신자에게 한 전도설교가 아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고, 예수 그렇게 잘 믿고, 잘 믿는다고 사람들이 전부 다 말하는데, 여러분 보세요. 그렇게 잘 믿는다고 그가 그렇게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지옥 가 있다면 이해가 되겠어요? 사람들이 잘 믿는다고 말하는데 지옥갔다면 이해가 되겠어요? 어저께 지옥에 대한 간증 보셨을 거예요.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하느냐.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교계에서 아주 훌륭한 분 3분이 있었데요. 여러분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거요. 목사님들 앞에서만 공개되는 거에요. 그런데 목사요, 총회장이 둘이나 되고요, 감독이 하나 있고요, 아주 유명한 사람이오.

그 분들은 얼마나 훌륭하게 되었을까 봤더니요, 회개않고 죽었다고 지옥 가 있더래요. 난 그분의 말 그대로 한 거요. 여러분 정신 바짝 차려요. 교회 신앙생활은 나 나타낼려고 하는 것 아니오, 죽게 된 나 살려고 하는 거요. 죽을 때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이와 같은 죄인입니다.‘ 이 말 한 마디 못하고 꼴까닥하고 죽어서 지옥간다면 억울하고 분하잖아. 여러분 교회에서 나 자랑하고, 자랑하고, 교회에서 그냥 수라장 만들고, 내 고집대로 할려고 들고, 내 마음대로 안 되면 속상하고, 시험들고, 이리 저리 전화질해서 많은 사람 같이 시험들게 하고, 당신 죽으면 꼭 지옥가! 까불지마! 얼른 회개해. 아멘해!“(10번 테잎,  위의 책 156쪽).

목사도 총회장도 지옥에 갈 수 있다. 그리고 회개는 해야 하는 것이지만 회개하지 않았다고 지옥에 간다면 지옥에 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죄를 짓고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 죄가 반드시 있을 것이요 또한 회개를 하지 못하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옥갈 것들은 삼일예배 안 나와요. 자기 영혼의 때가 귀한 사람은 벌써, 벌써 지옥갈 것과 하늘나라 갈 사람이 딱 구분되잖어. 예배의 날은 심판의 날이여. 지옥이냐, 천국이냐, 심판의 날이여. 다 같이! ‘예배의 날은?‘ (심판의 날이다). 심판의 날. 새벽기도 가서 앉았어요. 장로도 안 나오고 다 안 나왔어. 나 혼자 나왔어. 정말로 주님이 지금 교회 나온 사람들 데리러 온다면 너는 탈락, 나는 천국 간다“(11번 테잎, 위의 책 156쪽).
예배 참석을 강조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삼일 예배나 새벽기도가 구원의 조건이란 말인가? 이런 복음도 있었는가? 기독교가 삼일 예배에 안 나가고 새벽기도 안하면 지옥에 보내는 종교인가? 윤석전의 구원관은 이런 구원관인가?

이제 다음은 96년 12월 30일~97년 1월 2일에 흰돌산기도원에서 열었던 “영혼을 위하여“란 제목의 신년축복성회에서 한 설교들이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몸된 성전을 짓기 위하여,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몸된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몸된 교회 빚을 갚기 위하여 목사가 강단에서 헌금하자고 하니 부담스러워 떠난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사람이 마지막 주님 오시는 날 들림받거든 내 손에 장을 지저.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고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이 사람이 무슨 주님 사랑, 이 사람이! 부담스러워 그 교회 못 나가겠데요. ··· 교회 짓는데 헌금하는 게 부담스럽소, 지옥가는 게 부담스럽소? 말해 보소! 어느 것이 부담스럽소? 자, 교회 짓는데 헌금하는 게 부담스럽소, 지옥가는 게 부담 스럽소? 빨리 한 번 말해보세요“(2번 테잎, 위의 책 157쪽).

헌금하지 않으려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날에 들림 받지 못하는 조건이란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라 윤석전 복음이다. 건축헌금과 지옥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느 복음인가? 도교수는 이것을 전도설교로 보는가? 불신자에게 건축헌금부터 말하고 건축헌금 안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여 전도하는가?

다음은 97년 6월 23~25일에 부여논산에서 열었던 “영혼의 때를 위하여“란 주제의 연합성회에서 한 설교들이다.
“교회에도 보면 허다한 무리들이 얼마나 많소. ··· 가서 조금만 기분 나빠서 무슨 일을 하다가 서로 집사끼리 서로 성도끼리 부딪힙니다. ‘맘 안 맞아서 못하겠구만, 기분 나빠서 못하겠구만.‘ 이것 다 허다한 무리여. 주님 일은 기분과 아무 상관 없어. 사람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보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상관 없어. 그것 때문에 시험들어서 교회 못 나오겠데. 그것 땜에 시험들어서, 기분 나빠서 교회 못 가겠데. 그러면 지옥은 상당히 기분이 좋은 줄 아냐? 안 나오면 틀림없이 지옥 갈텐데“(1번 테잎, 위의 책 158쪽).
불신자는 시험에 안 들어도 지옥에 가고 성도는 시험에 든다고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다. 이래도 불신자에게 한 설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필자의 논리의 유추를 문제 삼은 도교수께서 논리적 유추 없이 보면 불신자에게 한 설교인가?

“지난 토요일날 저녁에 한 청년한테 전화를 했어요. ‘너 요새 주일날 낮에만 코빼기처럼 삐쭉 나오고, 왜 요새 너 기도 안해?‘ ‘목사님! 난 목사님이 전화하면 부담돼요.‘ ‘이런 죽일 년 봤나. 나는 너가 부담스럽다.‘ ‘내가 언제 목사님 부담스럽게 했나요?‘ ‘너가 그렇게 신앙생활하다가 지옥가는 것이 부담스럽다.‘ ··· ‘너는 내가 너 신앙생활 잘하라고 하는 이것이 부담스러우냐?

너가 그러다 오늘 육신이 팍 뒤지면  분명히 지옥갈텐데, 지옥가는 네 영혼을 보고 너무나도 부담스러워서 오늘밤 전화했다. 우리 교인이 몇 명이냐? 너같은 거 하나 기억 안해도 상관 없어. 내가 먹고 살려고 너 오라 그러느냐? 네가 십일조를 많이 내냐 헌금을 많이 내냐. 이 건방진 년아 이 년아!‘ ··· 주의 종들이,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잘못할 때마다 지옥갈까봐 부담스러워. 못 먹고 살아서 그러는 거 아니여. 지옥갈까봐 부담스러워서 그렇게 신앙생활 잘하라고 그러는데, 그것이 부담스럽고 힘들어서 예수 믿기 어려운 사람, 지옥가야지 뭐“(1번 테잎, 위의 책 158~159쪽).

“여자들이 허벅다리를 요만큼 내놓은 거 입었어. 젊은 총각들이 바라보면 속에서 음욕을 품지 않겠어? 음욕을 품으면 그것이 뭐라 그랬어? 간음. 그러면 죄값이 뭐라? 사망. 그냥 죽이는 거여. 길바닥의 수많은 영혼을 모조리 작두질하는 거여 이거. 모조리 작두질하는 거 요거 가만 놔두겠어? 짧은 바지 입고 짧은 치마 입고 이것 내놓고. 국물도 없어 우리 교회는. 이것들 왔다가는 맞아죽어 그건 나한테. ···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보고 음욕을 품으면 그것이 간음이라 그 말이여. 죄값은 사망이라 말했으니 예수가 피흘려 죽으시고 구원한 영혼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지 않느냐 그 말이여“(3번 테잎, 위의 책 159쪽)

윤석전 목사는 여자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교회에 나오면 음욕이 생기는가? 그렇다면 여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음욕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면 억지 주장인가? 남녀가 만나는 것만으로도 내 의지와 상관이 없이 상대로 죄를 짓게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는가? 그렇다면 여자가 예쁘기만 해도 죄가 되지 않겠는가?

“벌써 우리 청년들,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들은 삼일예배 못 드리는 직장은 집어치워버려. 대기업이든 보너스가 1,200%가 나오든 집어치워버립니다. 왜? 고까짓것 받아서 뭘하게. 내 영혼 죽으면(지옥가면) 뭘하게. 자기 영혼이 사는 것이 목적이여“(4번 테잎, 위의 책 159쪽).
역시 삼일예배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면 못할 소리이다.

이제 말이 아닌 그의 책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윤석전, 요단출판사 97년 5월 26일 발행)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자.

“성경에서도 보면, 다윗은 자기의 양을 원수인 이리가 먹으라고 할 때 불꽃과 같은 눈으로 양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리가 혹여라도 자기의 양을 물면 쫓아가서 입을 찢고 자기의 양을 꺼내어 구출했습니다. 다윗은 바로 자기의 적을 알았습니다.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들은 이미 마음이 이리에게 물려서 조는 것입니다. 이리에게 생각이 물려서 정신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졸리면 이미 물린 것이나 다름없고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17쪽, 본지 97년 12월호 160쪽).
육적 졸음이 영적 졸음은 아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졸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지옥 천국의 문제는 아니다. 윤목사는 모든 것을 지옥에다 걸고 설교하는 것이 그의 구원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몰라서 자살을 하는 성도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훈련시키는 조교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살기 위한 전투의 실전을 위해서 악한 영들과 싸우는 전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은 자살입니다. 주의 종을 오해하는 것도 자살입니다. 오해는 마음과 생각이 빗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살하는 군사는 천만 명이 있다고 해도 유익이 없습니다“(41쪽, 위의 책 160쪽).

“누가 지옥에 갑니까? 자살하는 사람입니다. 타살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자살해서 죽은 사람이 간다는 말입니다. 자살이라고 하니까 사도행전 16장에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져 죄수가 도망간 줄 알고 간수가 자결하려 했던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은 자기 영혼을 지키지 못하고 자살하는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육신이 영혼을 죽이는, 다시 말해 여러분의 생각이 영혼을 죽이는 것이 자살입니다“(43쪽, 위의 책 160쪽).

윤목사의 영적 자살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야고보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배가 아무리 커도, 또 거센 바람에 밀려도 매우 작은 키로 조종하여 사공이 마음먹은 곳으로 끌고가듯, 이 인간의 혀도 몸의 작은 일부분이지만 온 몸을 끌고다닙니다. 혀를 통하여 생의 수레바퀴가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혀를 잘 제어하여야 합니다. 혀가 나의 원수인 줄 알고 이기는 좋은 군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혀를 이기는 비결은 생각을 이겨야 합니다. 마음을 이겨야 합니다. 혀를 쓰는 나를 이겨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패배하고 맙니다.

사람과 얘기를 하다 보면 ‘이 사람은 과연 혀가 붙들린 사람이구나. 혀를 내 맘대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혀를 육신에게 맡기지 마십시오. 육신에게 맡기면 정욕이 나옵니다. 육신의 소욕이 나옵니다. 그래서 지옥으로 끌고 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혀를 성령께 맡기어 성령으로 결박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174쪽, 위의 책 161쪽).

이제 혀의 문제를 지옥과 연결시킨다. 혀의 문제로 지옥과 천국을 결정한다면 역시 천국에 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지구상에 제일 큰 병은 시험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큰 병으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시험들어서 죽고 망하고 지옥가는 것입니다. 시험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의 방향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의 방향을 향하여, 내가 하나님이 주신 과녁을 향하여 걸어가다가 과녁을 잃어버리고 잘못 가는 것이 바로 시험입니다“(196쪽, 위의 책 161쪽).
아마 윤석전 목사의 주기도문에는 “우리를 시험에 들어 지옥에 가지 않게 하옵시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드리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없어서가 아니라 욕심 때문에 못드리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 속에서 들어야 할 신령한 말씀을 그 십일조를 드림으로 들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면, 그 죄로 인한 영혼의 부도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242쪽, 위의 책 162쪽). “지금 우리 교인들 중에 십일조를 안 내는 교인들이 상당히 많다고 그럽니다. 십일조를 안 내는 사람이 들림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들 예수 왜 믿나 모르겠습니다“(292쪽, 위의 책 162쪽).
도교수가 볼 때에 위의 설교의 대상이 불신자로 보이는가? 이 점은 목사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목사관에서도 더 살펴보겠다. 먼저 96년 2월 19~22일에 흰돌산기도원에서 가졌던 “영적 생활“이란 주제의 구정축복성회에서 한 설교를 살펴보자.

“난 우리 교회에서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성경 말씀 그대로 운영할 때요 시비하는 사람이 없어요. 시비하는 사람이 시비만 해봐, 그 날로 그냥 파직이오 그냥. 네게 직분을 준 것은 시비하라고 준 게 아니라 교회를 운영하는 데 수종들으라고 준 거요. 이 마귀 역사들, 그러니까. 제일 최초에 이 우주가, 지구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의견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한 자가 누구요?

이 놈이 타락한 천사 마귀란 얘기요. 그 놈이 에덴 동산에 와서 또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어서 역시 또 선악과를 먹고 죽게 만들었어요. 그 놈이 또 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목사를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고 지 마음대로 할려고 들어요. 똑같은 양상이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내 마음대로‘ 하는 생각이 났거든 벌써 당신은 악한 마귀에 사로잡힌 줄 알어. 만약에 교회에서 성경대로 운영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운영하는 자가 있다면 당신은 천국갈 가능성도 없어. 만일에 성경대로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의 말에 복종하지 않고 제 의견과 제 사견과 옛날의 전통과 역사와 교리대로 움직이려는 자가 있다면 당신이 천국가면 내 손에 장을 지져. 하늘 나라는 그렇게 가는 게 아녀“(4번 테잎, 본지 97년 12월호 163쪽).

불신자가 교회 운영에 참여할 일이 없을 것이다. 아니면 목사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필자에게 함부로 다른 사람을 이단이라고 정죄한다고 하면서 자신은 사람의 구원 문제를 이렇게 함부로 말하는 것은 괜찮은가?

“목사를 당신이 월급 주었어? 그러면 목사가 당신네 머슴이구만. 그럼 월급 받고 해야 되겠구만. 믿음의 용어 좀 바로 써. 목사에게 당신이 어떻게 월급 줘. 당신네 교회가 어떻게 목사 월급 줘. 오늘날 교회들이 목사의 사례나 생활비를 교인들이 주는 줄 알아요. 이게 벌써 마귀 역사요. 왜? 여러분들이 내는 헌금이 누구거요? (하나님이요). 아이구 입 터져서 말은 잘하네. 여러분들이 내는 헌금이 누구거요? (하나님이요). 누구거요? (하나님이요). 하나님꺼, 맞아요? 그럼 하나님 것은 누가 쓸 권리가 있어? (목사님이요). 하나님의 종이 쓸 권리가 있지? 구약시대 봐! 하나님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전부 제사장의 권리로 썼지. 사도시대 봐!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둔 모든 헌금을 주의 제자들이 썼지. 그런데 어떻게 장로가 줘. 장로가 월급줬다고 하는 녀석 하늘나라 가봐“(4번 테잎, 위의 책 164쪽).

이제 다음은 윤목사가 96년 12월 30일~97년 1월 2일에 흰돌산기도원에서 가졌던 “영혼을 위하여“란 제목의 신년축복성회에서 한 설교 중에서 찾아보자.
“(97년 신앙 결심서 작성중) ‘하나님이 주신 교회 직분을 위해 최대한 충성하겠습니다. 전도 사업에 물심양면으로 힘쓰겠습니다. 각 기관회의는 빠지지 않고 적극 참석하겠습니다. 목회자의 목회방침에 절대 복종하겠습니다.‘ 목회방침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낡아진 인간, 썩은 인간, 물질 문명, 세월 앞에 이미 씹혀버린 인간입니다“(9번 테잎, 본지 97년 12월호 167쪽).

구원받은 자도 목사의 방침에 반대할 수 있다. 같은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과 베드로도 의견이 다른 경우가 있었지 않은가?

“이게 완전히 마귀 역사요. 절받으려고 하는 수작, 목사에게 절받으려고, ‘왜 목사님이 권사들을 안 섬기십니까?‘, ‘장로들을 안 섬기십니까?‘ 요새 마귀 앞잡이가 장로들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교회가 많어. 여기 장로들 왔거든 정신차려! 그 놈이 지배하면 당신 지옥가. ··· 하늘나라 가봐, 이것이 만일 천국가거든, 성경이 없어져야지. 만일에 이런 사람, 이렇게 대접받고, 이렇게 영광을 누리고, 교회에서 장로라는 직분 때문에 그저 재물도 지 마음대로, 교회정책도 지 마음대로, 목회방침도 지 마음대로, 교회행정도 지 마음대로, 이렇게 대접받는 존재가 만약에 천국가거든, 이렇게 아주 지 마음대로 대접받고, 천하영광을 휘내둘러 굴복시킨, 하나님의 주의 종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굴복시키고, 몸된 교회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굴복시킨, 그가 과연 천국가거든 내 성경을 어떻게 믿어, 그런 성경을. 집어, 집어, 내버려야 되지!(성경을 던져서 떨어지는 소리). 이리 가져와라. (웃음)“(15번 테잎, 위의 책 167쪽).

“어떤 사람들은 우리 교회 처음와서 ‘목사님, 왜 목사님 마음대로 하십니까?‘ ‘그럼 니 마음대로 할래? 그럼 니 마음대로 할래?‘ 내 그랬어, ‘그럼 니 마음대로 해봐라 니 마음대로, 꼭 마귀 앞잡이들이!‘ ‘그래도 상의해야 되지 않습니까?‘ ‘상의할 거 없어. 하나님이 말씀하셨어! 아, 여기 말씀이 있는데 무슨 상의를 또 해? 니가 하나님보다 크냐? 어?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으면 하는 것인데 너하고 무슨 상의가 필요해 건방진 놈아, 이놈아! 나도 상의가 필요없이 순종하는데, 나도 하나님과 이의가 없이 순종하는데, 건방진 니가 무슨 상의야 상의는?‘ 당신들이 주의 종이 하는 일을 상의하자고 하지만 주의 종도 하나님과 상의 없이 순종하고 있어. 건방지게 무슨 상의요. 이 건방진 사람들아, 지옥갈 사람들아! 오늘 벗어나기를 원해요“(16번 테잎, 위의 책 168쪽).

어디 구원이 이런 것이라면 무서워서 예수 믿을 수 있고, 교회 봉사할 수 있겠는가?
이제 윤목사가 97년 6월 23~25일에 부여논산 연합성회에서 한 설교 중에서 살펴보자.
“난 우리 교회에서 무슨 일 하다가 불평 불만 가지면 짤러. ‘그만둬!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 ‘너가 그 분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입은 자냐? 그렇다면 그분이 너 모가지를 내놓으라고 해도 불평이 없고,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해도 불평이 없을텐데, 불평이 있다면 너는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모르는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다‘“(1번 테잎, 본지 97년 12월호 168쪽).

성도도 불평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돈으로 산다는 사람들이 돈에 매여요. 그러나 ‘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사람들은 말씀에 매여요. 절대로. 벌써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다는 사람은 목사의 입술에 붙어있어요. 이 입술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아요. 절대적 권위예요. 벌써 그 사람이 목사 말에 순종하느냐 안하느냐 이걸 딱 보면 벌써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느냐 안 사느냐 금방 알아요. 말씀으로 안 살면 그는 필경은 지옥가요. 여기 목사님들 다 계십니다. 목사 입에서 나가는 말씀으로 안 살면 꼭 지옥갑니다. 이 말씀으로 살아야 영생합니다“(2번 테잎, 위의 책 169쪽).
이런 윤목사의 말대로 살면 오히려 지옥에 갈까 염려스럽다.

“목사는 여러분을 데리고 하늘나라 가야 하는 분이기 때문에 목사가 여러분을 붙들고 우지좌지할 수 있고, 두들겨 패고, 밀었다 땡겼다 맘대로 끌고 갈 수 있도록 여러분의 영혼을 목사에게 맡겨버리고, 여러분의 생활을 맡겨버려야 합니다. 어떤 교회 가보세요. 목사가 돈 몇 푼 쓰면 얼마 썼나 하고, 아니 영혼도 맡기는 사람이 그걸 못 맡겨? 아니 제 영혼도 맡기는 자가 교회 재정도 못 맡깁니까? 난 우리 교회 돈을 어느 녀석도 10원짜리 하나도 내 허락 없이는 못 써요. 내 맘대로 써요. 내 맘대로. ‘목사님 어디에다 썼냐‘고 물어보면 ‘너가 하나님이냐? 너가 나에게 가계부를 적어 내라고 하느냐? 너가 하나님이냐?‘ ··· 영혼을 맡기는 자가 그가짓 교회 사업을 못 맡기고, 교회 재정을 못 맡기고, 교회 행정을 못 맡기고. 교회 전체를 딱 맡겨버려야지. 그래 목사 맘대로 끌고 나가야 교회가 운영되지.

어디 성경에 성도가 돈 맡아보라 한 데가 있으며, 어디 성경에 교회를 성도가 지 맘대로 움직여라 하는 데가 있습디까? 다 목사가 하라고 했지. 모르니까 까부는 거여. ··· 박영규 목사가 합동측 유명한 목사여, 대학교수여. ··· 그 분이 하늘나라에 가봤어요. 갔더니 두 가지, 첫째 목사 앞에 말대꾸하고, 대들고, 목사 설교에 은혜 못 받은 것은 싹 다 모가지 때려 지옥갔어. 지옥갔어. 근데 특별히 장로가 제일 많이 있더래. 교회 지 맘대로 움직이려고 해서. 교회는 절대로 성도 맘대로 못 움직이고 목사 맘대로 움직여야 된다고. 우리는 교리와 전통과 역사와 헌법을 따르지 말고 성경을 따라야 해“(2번 테잎, 위의 책 169쪽).

“우리 교회는 설교 시작하는 시간만 있지 끝나는 시간은 없어 내 맘대로지. ··· 어느 놈이 ‘목사님의 설교가 깁니다.‘ ‘뺀찌 가지고 와 혓바닥 빼게 가지고 와.‘ 목사는 길게 하고 싶어서 길게 하나? 그들이 안 들으면, 안 들어서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그것이 죄가 되니, 그 죄가 되면 마귀에게 속하면 마귀가 망할 때 같이 망하니까 건져낼려고 하는 그 몸부림에서 설교하는데, 이것이 기네 짧네 시비네 간섭이네, 이따위 짓 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영생하겠어? 어떻게 영생하겠냐 이 말이여“(4번 테잎, 위의 책 169쪽).

“전 지금까지 목회해 가면서 성도들 눈치를 봐본 사실이 없어. 한 번도. 난 지금까지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결정하고 응답받으면 그대로 했어요. 어느 놈이 앞에서 브레이크 걸면 뺨이 헌집 벽돌(같이) 돌아가요. 진짜 때린다니까 진짜. 진짜 때려요. 여러분은 목사가 어떻게 성도를 때리냐고 하는데 나는 세계에서 성도들 두들겨 패는 목사로 소문난 사람이여. 왜 그러느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일에 반기 드는 놈은 이건 사탄의 역사여.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탄의 역사여. 맞아 뒈져야 돼. 그럴지라도(육신은 맞아죽을지라도 죄를 해결하여: 필자주) 영혼은 구원받아야 돼. 아멘해!“(11번 테잎, 위의 책 170쪽).

“지난 주일날 불만 불평하는 기관장, 불만 불평하는 여전도회원들, 불만 불평하는 어느 놈이든지 내 귀에 들어오면 그 날로 파직한다 그랬어 그 날로. 그랬더니 그 날 저녁에 회의하는데 불만 불평 아무도 안하더래 파직당할까봐서. 파직시킨다면 파직되는 거여. 강단에서 한 번 말한 것은 그대로 되고야 마니까. 감히 누가. 여러분들이 주의 종의, 강단의 말을 이렇게 위엄 있게 들어봤습니까? 강단의 말을, 죽으라는 말도 죽을 각오를 하고 들어야 해. 왜 그러느냐? 이렇게 듣는 사람이, 당신 속에 저주같은 질병이 올지라도 강단에서 주의 종이 나가라면(질병을 일으키는 사탄은 떠나가라고 하면) 움직이는(주의 종이 말한 대로 행하는) 사람만 나가는 거여.

내가 안 움직이고는, 그렇게 안 듣고는 내 병 고치기 힘들어요. 난 그걸 너무 잘 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마만큼 여러분에게 역사하는 악한 마귀 사탄 귀신의 역사가 당신들의 생각을 장악하고, 환경을 장악하고, 당신의 가정을 장악하고, 자식들을 장악하고, 남편을 장악하고, 아내를 장악하고 있는 것들이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떨어질 때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다 하고, 아주 목숨을 딱 내놓고 있을 때 벌써 강단에서 ‘저주받은 질병아! 사탄아! 귀신아! 나가라!‘ 할 때 함께 떠나가는 줄 알라 이 말입니다. 할렐루야! 움직임의 능력, 아멘합시다. 이 엄청난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받지 못하는 자가 누구냐? 언제나 주님 일에 부정적이고, 언제든지 브레이크를 걸고, 언제든지 미온적이고 비협조적이고. 이거는 요, 사탄의 앞잽이여. 뒈지면 지옥이여, 지옥.“(11번 테잎, 위의 책 170쪽).

이런 내용은 어쩌다 한 말이 아니다. 윤목사의 테이프를 들어보면 쏟아져 나오는 소리들이다. 그런데도 테이프로는 이단연구의 자료가 되지 못한다고 하는 말은 순진한 소리인가, 아니면 무지한 소리인가, 아니면 사탄의 소리인가?

결국 도교수의 말에 의하면 윤석전 목사가 이단이란 말이 된다. 도교수는 윤석전 목사의 지옥 운운은 불신자의 불신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로 변증을 했으니, 윤목사의 설교가 구원받은 성도에게 한 것이라면 분명히 그의 구원관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도 유추인가? “나는 정통적인 구원관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때만 그에게 이단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인가? 도교수도, 윤석전 목사의 말처럼, 구원관을 문제 삼으려면 구원관을 설교하는 본문에서 문제점을 찾아야지 회개를 강조하는 것이 목적인 본문에서 구원관의 문제를 찾으면 안 된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목회자는 괜찮다고 동정론을 펴겠는가? 그것도 아니면, 그 정도는 이단논쟁을 일으킬 문제가 못된다고 하겠는가?

도교수에게 이런 모순과 실수가 생긴 것은 그가 적당히 살펴보고 적당히 변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적당히가 아니라 면밀히 살펴보고 다시 변증하기를 기대한다. 필자도 앞으로 더 깊이 연구하여 계속해서 자료를 공급하려고 한다.

3. 설교는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시금석으로 삼을 수 없다는 점에 대하여.

먼저 도교수의 말을 들어 보자.
“설교는 성경에 대한 예언적,  목회적 해석이므로 교리공부나 신학강의와는 달리 그 설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을 집중적으로 말하게 되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균형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설교테이프를 논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시금석으로 삼고 검증도 없이 지상에 널리 알리는 행위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된다“(본지 98년 2월호 157쪽, 국민일보 광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과 같이 변증하겠다.
①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글도 말이라는 점이다. 언어란 글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말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글로된 필어(筆語)와 말로된 구어(口語)로 나뉜다. 그런데 학자의 입에서 설교테이프는 이단연구의 자료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말도 글처럼 그 사람의 생각과 인식과 사고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현이 아닌가? 그런 기준은 신학적 기준인가? 법률적 기준인가? 그보다 도교수가 변호해 주고 있는 윤석전 목사 당사자는, 비록 본문의 주제가 다르다며 변명을 하기는 했지만, ‘설교‘에서 이단성을 찾는 데에 반대하지 않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 도교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② 그리고 필자가 들은 설교테이프들은 필자가 녹음한 것이 아니다. 연세중앙교회가 직접 녹음해서 대대적으로 판매한 테이프들이다. 그리고 많은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그 테이프를 듣고 영향을 받고 있으며 선교의 중요한 한 가지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들이다.

③ 그렇다면 윤석전 목사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은 어떻게 하겠는가? 필자는 분명히 윤목사의 이단성이 있는 내용을 책에서도 인용했고 테이프에서도 인용했다. 그리고 책에서의 내용과 테이프의 내용이 의미상 일치한다. 그런데 책에 대한 말은 하지 않고 마치 필자가 테이프에 의해서만 윤목사의 이단성을 밝힌 것처럼 하는 것은 동정심을 사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책 그리고 말로된 테이프, 이보다 이단연구에 더 ‘필요충분한‘ 자료가 어디에 있겠는가?

④ 말로된 테이프로는 이단성을 연구할 자료가 되지 못하고 글로만 이단성을 밝힐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학문을 우상시하려는 학자의 편견이 아닌가? 그렇다면, 책만 쓰지 않으면 절대로 이단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⑤ 물론 글과 말의 책임이 같을 수 없는 것은, 말은 글보다 실수의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신 글을 통해서 문제점을 은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점에서 보면 오히려 말에서 그의 정직성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그 동안 연구를 해본 결과, 이단논쟁이 일어날 때 글에서는 자기를 숨길 수 있는 은폐성이 높았지만, 그러나 테이프를 통해서는 진짜 의도를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는 것이 상례였다.

⑥ 그것도 필자가 윤석전 목사의 말 중에서 어쩌다 한 번 한 소리를 가지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테이프를 들으면 들을수록 가득한 말들이다. 그런데 도교수는 윤목사의 설교테이프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책임한 말이 아닌가?

⑦ 그리고 도교수가 포함된 기침 사이비이단대책위원회에서 류광수 씨를 이단성이 있다고 하였을 때 내용 있는 규정을 발표하지 않아서 무엇을 자료로 연구한 결과인지 모르겠으나, 다른 교단들의 그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면 그 이단성의 핵심 사상을 테이프에서 찾아냈다. 이 점에 대한 도교수의 입장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리고 기침측에서는 류광수 씨의 설교테이프를 자료로 삼지 않았는지 답해 주기 바란다.

⑧ 윤석전 목사에게 설교가 차지하는 위치로 보아도 설교테이프가 연구의 객관적 자료가 못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오히려 책보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데 더 직접적인 요소가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윤석전 목사 자신의 견해는 말할 수 없이 강경하다. 다른 사람의 말은 차치하더라도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래서 주의 종을 통해서 강단에서 주시는 말씀은 성령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그 목소리가 바로 멸망하지 않도록 만드는 유일한 생명입니다“(본지 97년 12월호, 166쪽).
“목사는 원래 교회 감독자기 때문에 목사가 다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아, 영혼도 죽이고 살릴 권한이 있는데 돈 쯤이야! 어, 여러분의 영혼도 그 입에서 나오는 말로 죽이고 살리는데 돈 쯤이야! “(위의 책, 168쪽).

“말씀으로 안 살면 그는 필경은 지옥가요. 여기 목사님들 다 계십니다. 목사 입에서 나가는 말씀으로 안 살면 꼭 지옥갑니다. 이 말씀으로 살아야 영생합니다“(위의 책, 169쪽).
그리고 윤목사가 자신을 변증하는 글에서도,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설교)으로 성도들의 영혼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고 하였다(본지 98년 2월호 147쪽, 국민일보 97년 12월 29일자 전면광고 등 참조).

설교는 중요하다. 설교에 사람이 죽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설교가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유일한 말씀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주장하는 윤석전 목사에게 그의 설교가 이단성 여부를 가리는 연구의 자료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면 누구보다도 윤목사가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설교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시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⑨ 그리고 위의 말을 뒤집어 보면 우선 설교테이프 상에서 보면 이단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설교테이프든 책이든 이단성이 없다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암균이 있는 사람도 피검사에는 안 나타나고, 초음파에도 안 나타나고, 시티 촬영에도 안 나타나고, 심지어 조직검사에도 안 나타났는데, MRA 촬영에서만 나타날 수는 있다.

그러나 실제로 암균이 없는 사람은 피검사든, 초음파든, 시티 촬영이든, 조직검사든, MRA든 절대로 안 나타나는 것이다. 설교테이프 어쩌고 하는 것은 일단 설교테이프에서는 이단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4. 교주란 총회나 다른 종교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개교회를 일컫는 말이 아니란 점에 대하여.

먼저 도교수의 말을 인용해 보자.
“‘교주‘(敎主)라는 말은 기존의 종교와는 다른 독특한 교리를 가진 종교단체의 주인이나 또는 그런 단체의 신앙의 대상을 일컫는 말이지, 총회나 다른 종교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개교회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본지 98년 2월호, 160쪽).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① 아무래도 도교수의 표현이 잘못된 것 같다. 교주란 말을 정통 교단에 속한 “총회나 다른 종교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목사)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라는 것을 그렇게 잘못 표현한 것 같다. 어쨌든 위의 논리로 하면 문선명이도 교주가 아니게 된다. 통일교도 다른 종교단체이기 때문이다.

② 그리고 도교수의 말에 의하면 정통 교단 내에서는 절대로 교주가 탄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얼마든지 정통교회 안에서부터 교주적 이단들이 생겨났다. 우선 윤석전 목사는 교인들에게 절대순종을 요구한다는 점을 도교수도 인정하였다. 그렇다면 이 말부터가 그의 교주성을 의미하지 않는가? 절대순종이란 하나님 외에는 교주만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5. 윤석전 목사의 설교를 목회적 해석 차원에서 이해하고 목회적 방법이 특이하다고 해서 이단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필자와 같이 이단을 연구하면 이단이 안 될 목회자가 몇이나 될까라고 말하는 점에 대하여.

먼저 도교수의 글을 인용해 보자.
“한 목회자가, 목회방법이 특이하다거나 설교의 내용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이단시비에까지 몰려서야 되겠는가 하는 우려가 앞섰다“(본지 98년 2월호 156쪽, 국민일보 광고).
“설교는 성경에 대한 예언적, 목회적 해석이므로 교리공부나 신학강의와는 달리 그 설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을 집중적으로 말하게 되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균형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위의 책 157쪽, 국민일보 광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든가 조는 것도 마귀의 일이라는 표현은 목회현장에서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말들인데, 이런 말을 가지고 목회자의 마귀론이나 구원론에  이단성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고발하는 글을 쓰고 지상에 발표한다면 이 땅에 이단이 안 될 목회자가 몇이나 될 것인가?“(위의 책 179쪽, 국민일보 광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① 도교수의 말에 의하면 목회자 중에는 이단자가 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단 사상을 가르치다가도 목회적인 차원이라고 변명만 하면 될 것이다.

② 그 동안 학자들에게 이단논쟁이 있었을 때마다 그들은 ‘학문적‘ 차원이라고 변증했다. 그렇다면 도교수와 같은 논리와 기준을 적용한다면, 만일 학자에게 이단논쟁을 일으키면 그것은 학문의 자유에 속하니 시비하지 말라는 말도 똑같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학자로서 이단논쟁에 말렸을 때 그렇게 말했고 많은 사람들은 또 그렇게 동정했다. 그러나 오히려 학자들이 일으키는 이단성은 그 영향이 제한적인 요소가 더 많고, 또한 목회자나 신학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한 번 걸러진다는 점 때문에 영향이 적다. 오히려 목회자의 목회차원이란 말보다 학자의 학문차원이란 말이 이단논쟁을 피하기에 더 좋은 은신처가 아닌가?

③ 그리고 이단 논쟁이 학자보다 목회자에게서 더 많고 대부분 이단자들은 목회자였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도교수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 학자가 이단이 된 경우와 목회자가 이단이 된 경우 중에 어느 편이 많다고 보는가? 학자는 몇이 안 된다. 거의 다 목회자거나 전도자거나 부흥사거나 평신도였다. 이 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에 무서운 이단으로 지목받은 박태선이와 문선명, 그리고 정명석, 변찬린, 박윤식, 김기동, 이초석, 김광신, 김요한, 한만영, 류광수, 이명범, 박명호, 안상홍, 유재열, 이만희, 김계화 등 모두가 평신도 내지는 목회자였다. 목회자에게는 이단논쟁에서 보호받을 어떤 도피성이 성경으로 보장받고 있는가?

④ 그리고 마치 도교수의 이와 같은 말은 모든 목회자들이 이단사상을 가지고 목회를 한다는 듯이 들린다. 한 사람의 목회자로 자존심이 상해서 견디기 힘들다. 이는 이단적으로 가르치면 교회가 부흥되고 자신에게 실속이 있지만, 아무리 아무리 손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진리로만 충실하게 목회하고 있는 건전한 목회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⑤ 무엇보다도 성경 어디에 그런 소리가 있는지 말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그런 기준은 역사적으로 어디에서 있었던 것인가?
⑥ 끝으로 기침에서 김기동을 이단이라고 했고 류광수를 이단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목회적 차원으로 이단인가 학문적 차원으로 이단인가?

6. 필자에게 유추된 논리가 있다고 지적한 점에 대하여.
먼저 도교수의 말을 인용해 보자.
“최목사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윤목사가) 모든 질병과 모든 사고의 원인도 마귀로 보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직접적 언급은 없다. 그러나 유추해 보자면 윤목사는 모든 사고 질병이 마귀에게서 온다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바로 이런 논리에 이단시비의 문제점이 있다. 최삼경 목사 자신이 말한 것처럼 윤목사는 모든 질병과 사고의 원인이 마귀라고 언급한 일도 없는데 최목사가 스스로 유추해서 윤목사에게는 그런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니 이런 고발은 무고(誣告)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본지 98년 2월호 158쪽, 국민일보 97년 12월 30일자 전면광고).

내용에 대한 변증은 윤석전 목사 부분에서 하겠다. 단지 도교수의 모순이 많다는 것이다.
① 학문에도 유추란 반드시 있다. 어쩌면 유추에 의해 학문이 이루어 진다. 그래서 필자는 해당 부분에서 유추임을 밝히면서 말했다. 그 내용은 윤석전 목사에 대한 변증에서 다시 취급하겠다. 그러나 상담을 해 보고, 고발을 접해 보고, 그리고 테이프를 들어보면 실제로 윤목사에게 있어 모든 질병의 원인은 귀신에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② 그런데 문제는 필자의 유추를 문제삼은 도교수에게는 필자보다 더 많은 유추와 비약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필자가 도교수를 향해 분노스러워 하는 요소이다. 그리고 그의 학문성과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논리 전개의 첫 단계에서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은 채 “윤목사는 죄와 마귀를 연결시킨다“고 했는데, 도교수는 이것에 대해 “죄와 마귀를 연결시키는 것이 어째서 잘못이란 말인같(위의 책 157쪽, 국민일보 광고)라고 시비를 걸었다. 먼저 필자가 쓴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윤목사는 죄와 마귀를 연결시킨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나타나셨다는 말은 요한일서 3장 8절의 말씀으로서 귀신파 계열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핵심 성구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가 지탄을 받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에 유의하여야 한다. 마귀가 시켜서 한 일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책임이 없고 마귀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에게 계속되는 말 중에 하나는 회개는 내가 지은 죄를 내가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마귀에게 돌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들어보자“(본지 97년 9월호, 136쪽).

필자는 분명히 죄와 마귀를 관련시키는 것이 나쁘다거나 틀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사상으로 이단이 됐다는 말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모를 만큼 어리지도 않다. 남의 유추를 문제 삼으려면 자신에게는 그런 모순이 없어야 이런 논쟁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닌가?

③ 필자가 “요한일서 3장 8절의 말씀은 귀신파들이 가장 좋아하는 핵심 성구“라고 한 것을 두고(본지 1997년 9월호), 도교수는 “바로 여기에 최삼경 목사 자신에게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 죄와 마귀를 연결시키는 것이 어째서 잘못이란 말인같라고 시비하고는 이어서 “최목사의 주장대로라면, ‘귀신파 사람들‘이 읽는 것이면 성경도 읽지 말아야 하고,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라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라도 부인해야 할 것이다“고 한 술을 더 떴다(본지 98년 2월호 157쪽, 국민일보 광고).

이런 무지한 유추요 비약이요 단정이 또 어디에 있는가? 도교수가 필자의 글을 보고 자신도 필자의 사상에 대한 유추를 했다면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단지 그것을 소개했을 뿐이다. 그것에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단지 윤목사의 생각이 결국 회개를 하면 그 죄가 마귀에게 전가된다는 이단적 사상을 낳았기 때문에 한 소리이다. 도교수가 학자가 아니라면 필자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으나 그가 학자란 면에서 참기 어려운 모순이다.

필자는 분명히 “넓은 의미에서 죄 뒤에는 마귀가 있다고 보아야 하지만“이라고 전제하였다(본지 97년 9월호, 139쪽). 그런데 이 말이 왜 저들 귀에는 안 들리는지 모르겠다.

④ 필자가 “이상하게도 윤석전 목사는 계시관에서 보수적인 계시관을 가지고 있다. 즉 성경 외에는 계시가 없다는 것이다(위의 책, 142쪽)“고 한 것을 두고, 도교수는 “윤목사가 보수적 계시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왜 이상하며 성경 외에 계시가 없다는 말이 왜 잘못 되었다는 말인가?“라고 하였다(본지 98년 2월호, 159~160쪽). 그러면서 도교수는 “그렇다면 최목사는 오늘날까지 성서계시가 계속된다고 믿는다는 말인가?“(위의 책, 160쪽)라고 시비를 걸고는 친절하게도 요한계시록 22:18~19을 읽으라고 지시까지 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말에 대답을 해야 한다는 점이 스스로 한심할 뿐이다. 그야말로 도교수의 독해력의 수준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논리적으로 볼 때 필자가 이상하다고 한 말은 계시의 연속성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대한 말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시의 연속성을 믿느냐 계시의 종결성을 믿느냐 하는 문제는 어느 정도 신학을 한 사람이 가지는 전문지식에 속한다. 그런데 그런 전문적인 계시관은 알면서 영감에 대해서는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계시관의 종결성은 사도적 이적의 종결성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의 계시관에서는 보수주의적이고 이적관에서는 그렇지 못함도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계시가 성경 외에 없다는 사상은 사도시대가 지났다는 사상에서 나온 계시관인데 이적에 대해서는 사도적 시대의 이적이 있다고 하니 마치 갓 쓰고 양복입은 것처럼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필자가  무엇을 이상하다고 했는지 그 글 자체에서도 잘 나타나 있지 않은가. 도교수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시 인용하겠다.

“분명히 윤목사 자신도 영감이란 말에 대하여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다‘라고 말함으로 영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가 계시는 더 이상 없다고 하는 말과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말은 모순될 뿐 아니라 그의 영감이 곧 계시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지금도 사도 시대의 이적이 계속된다는 이적관에서도 나타난다. 계시가 사도시대로 끝났다고 한다면 이적도 역시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점에는 너무나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사도 시대의 이적을 부정하면 예수님의 피의 역사도 끝났다고 말하였다.

살펴보자. 성경에 예수님 당시나 사도들 때에 병고침의 일들이 많이 있었고 물론 구약시대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 때도 병고치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윤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병고침을 받는 이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윤목사는 지금도 사도시대와 같은 병고침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와 보라!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211~212쪽).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을 무시하고 이미 사도행전 시대에 성령이 끝났다고 착각하는데 이 시대에 성령이 끝났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피의 역사도 끝나야 하고, 성부의 역사도 끝나야 합니다‘(위의 책, 278쪽)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섬세한 비판이 있어야 하지만, 계시 시대가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함으로 끝났다는 말과 그러나 사도적 이적이 있다는 말은 서로 모순된다. 그보다 더 모순된 것은 그의 실제적인 행동에는 계시적 요소가 가득 차있다는 점이다“(본지, 97년 9월호, 144쪽).

필자가 보기에는 위의 말을 가지고 ‘필자가 공연한 트집을 잡는다‘고 말한 도교수의 그 말이 윤목사가 한 말보다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 필자는 유추임을 밝히면서 유추라도 했는데 비해, 도교수는 아예 단정적 유추를 함으로써 참으로 이상함의 극치를 이룬다.

7. 끝으로 도교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①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도교수가 글을 다시 써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데 어떠한가? 왜냐하면 앞에 도교수가 쓴 글은 필자의 지난 9월호 글만 보고 12월호의 글은 보지 못하고 썼던 변증이기 때문이다.

② 그리고 국민일보 97년 12월 30일자 전면광고로 나온 도교수의 글은 도교수가 허락해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허락 없이 연세중앙교회측에서 임의로 게재한 것인지 알고 싶다. 왜냐하면 전에 필자와의 통화시 도교수가 말하기를, <교회와신앙>에 보낸 글을 연세중앙교회측에서 허락 없이 사용하여 연세중앙교회측에 항의하였고 그래서 사과하러 온 집사들을 만난 일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③ 도교수도 양동생 집사가 주동한 연세중앙교회측의 집단 시위가 옳다고 보는가 묻고 싶다. 필자가 윤목사의 이단성을 지적하여 발생한 일이니 어떤 형태의 항의를 받아도 좋다고 보는지 묻고 싶다.

④ 그리고 윤석전 목사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침례교의 신학과 일치하는 것인가? 비록 침례교에는 하나의 ‘침례교신학‘이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분명 김기동을 이단으로, 류광수를 이단성 있다고 규정할 만한 신학적 기준은 있는 침례교라는 점에서 그런 말은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이 될 것이다.

⑤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윤석전 목사의 말처럼 십일조를 바치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간음 죄를 짓거나 짓게 하고, 그리고 예배 시간에 조는 등의 자범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사상이 옳다고 보는가? 혹 잘못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개교회의 자유에 속하는 사상인가?

⑥ 도교수의 글 중에는 필자의 글에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주기 바란다.

필자는 도교수에게 신학적인 문제를 변증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이렇게 기본적인 문제도 해결이 안 된 사람의 글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깊은 변증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더구나 당사자도 아닌 제 삼자인데 말이다. 그러나 만일 도교수가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다시 글을 써 온다면 윤석전 목사와 동일한 수준에 두고 논쟁에 응할 것을 약속해 둔다.
(월간<교회와신앙> 199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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